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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플로라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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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플로라 벨
Mary Flora Bell
파일:attachment/메리 플로라 벨/001.jpg
살인을 저지른 10세 당시의 모습(1967년)
출생 1957년 5월 26일 ([age(1957-05-26)]세)
영국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주 코르브릿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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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 1980년 5월
가족 어머니 엘리자베스 베티 벨, 딸, 손주

1. 개요2. 최연소 살인3. 메리의 성장 환경4. 수감5. 석방 이후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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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urder isn't that bad, We all die sometime anyway."
"살인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텐데요."
- 유죄 판결 후 인터뷰 中

1957년 5월 26일생이며 영국의 최연소 연쇄살인범. 사실 살인이 아닌 자발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받은 데다가 살인 건수가 부족한 탓에 연쇄살인범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살인 3건 이상을 저지르는 경우를 연쇄살인이라고 칭한다. 단 한국, 싱가포르처럼 검거율이 높고 사회 감시망이 촘촘하게 깔린 나라에서는 미처 세 명까지 죽이기 전에 잡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정한 동기나 심리상태 등을 분석해 연쇄살인의 그것과 유사할 경우 2건만 저질러도 연쇄살인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10살에 살인 2건을 저질렀다.

세간에서 별명으로 타인사이드 교살자(The Tyneside Strangler)라고 불렸다.

2. 최연소 살인

메리 벨의 사이코패스 성향은 첫 살인 이전부터 종종 드러났다. 메리가 10세였던 1968년 5월 11일 뉴캐슬 공습 대피소 위에서 메리는 자신과 함께 놀던 3세 소년을 밀어 넘어트려 심한 부상을 입혔고 다음날인 5월 12일 소년의 어머니는 메리가 예전부터 아이들을 공격했다고 경찰에게 알렸지만 메리가 너무 어려서 범죄 혐의는 받지 않고 종결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25일 첫 살인이 일어났다. 메리는 오래된 폐가에서 4세의 마틴 브라운(Martin Brown)을 질식사시켜 살해했다. 경찰은 타살 증거를 찾지 못하고 마틴이 사망한 현장 근처에서 버려진 채 발견된 병에 들어 있었던 약을 삼켜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하며 일단락시켰다.

5월 26일 메리는 친구 노마 조이스 벨(Norma Joyce Bell)[1]을 불러내 함께 동네 탁아소에 침입한 뒤 '우리가 마틴 브라운을 죽였어, 엿먹어 개자식들아'라는 메모를 남기고 달아났는데 경찰은 필체를 보고 아이들의 장난으로 치부했다.

5월 31일 동네 탁아소에 새로 설치된 도난 경보기가 울려 순찰대원이 현장으로 출동했을 때 메리와 노마가 달아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메리는 아동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장난이 심하고 짓궂은 아이'로 간주되었고 모든 혐의를 피해갔다.

2개월 후인 1968년 7월 31일 메리는 같은 지역에서 3세의 브라이언 호우(Brian Howe)를 목 졸라 살해했다. 이때 수법은 더욱 잔인해져서 가위로 브라이언의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리의 피부를 긁어내고 그의 음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배에 칼로 M자를 새겼는데[2] 이런 행위는 연쇄살인마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자신을 과시하는 목적의 ‘표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체 검시관은 일반적인 살인 사건과 달리 피해자에게 가해진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살인범이 어린이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형사들은 지역 어린이들에게 설문지를 배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전부터 의혹을 받아 오던 메리와 노마에게 브라이언의 사망 당시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메리와 노마의 답변은 일치하지 않았다. 메리는 '어떤 청년이 브라이언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으나 그에 반해 평범한 아이였던 노마는 경찰들의 추궁에 겁을 먹고 '메리가 브라이언을 죽이는 것을 지켜 보라고 했다'며 자백했다.

1968년 12월 재판에서 노마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메리는 두 차례의 자발적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메리는 정신과 진단에서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았으며 법정에서도 죄의식 없이 교활하고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어 모든 청중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3. 메리의 성장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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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때 촬영된 수감 당시의 모습 16세 때 탈옥했다가 체포된 직후의 모습

그 나이 또래답지 않은 수준으로 똑똑했으며 2세부터 정서적으로 불안정했고 폭력적인 경향을 내보였다. 4세부터는 만성적으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래 친구들과도 자주 싸웠으며 한 번은 모래로 어린 소녀의 기도를 막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메리와 놀기를 꺼렸다. 또 어릴 때 친한 친구가 사고로 죽은 후 메리는 또래 친구들의 목을 조르면서 '왜? 이러면 얘가 죽어?' 라고 묻는 등 죽음이란 것에 골몰했다고 한다. 분명한 건 메리가 살인이란 행위의 의미, 즉 도덕적인 측면에서 제대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메리의 가정환경에는 문제가 많았다. 생모 베티 벨(Elizabeth Betty Bell)은 매춘부였고, 17세의 나이에 메리 벨을 원치 않은 상황에서 낳았다. 베티는 2년 동안 메리 벨과 단둘이 있을 적마다 그녀를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3] 그렇다고 나중에라도 잘 키웠는가? 그렇지 않다. 그녀의 엄마는 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이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은 물론 다른 사람이 무려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과 성관계를 하는 것을 허락하여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도 했다. 메리가 태어났을 때 "저것 좀 빨리 내 눈 앞에서 치워!"라고 말하기도 했고 딸의 재판에 나타났을 때도 화려하게 치장하고 재판에도 집중하지 않는 등 모친다운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메리 벨은 유아기에 어머니가 상시 복용하던 마약을 주워 먹고 생사를 헤맨 적도 있었다. 어머니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물려받은 듯.

결론적으로 메리의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타고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 기질이 어린 나이에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은 메리가 어린시절부터 성적 학대를 받으면서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가정환경에 노출되었던 것의 영향이 크다고 보는 게 맞다.[4]

물론 메리는 피해자들에게 인터뷰나 자서전을 통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도 단 한번의 사과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과 별개로 동정의 여지는 없다.

4. 수감

10년 복역후 가석방 신청이 가능한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9년 2월부터 1973년 11월까지 레드 뱅크 소년원[5]에 수감되었다.[6]

그 와중에 메리의 어머니인 베티는 딸의 사악한 유명세를 이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타블로이드 신문에 팔아 돈을 벌었으며 언론에 쉽게 유포할 수 있도록 편지나 시를 자주 쓰라고 딸에게 독려했다. 베티는 소년원에 있었던 딸을 자주 보러 왔고 소년원 운영진은 메리가 엄마의 방문 후 늘 정서적 불안과 공격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말했다. 한 의사는 베티의 방문을 금지하고 싶어했지만 엄마가 딸을 보지 못하게 막자고 주장하는 건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드 뱅크 소년원 운영진은 가식적이고 교활한 베티를 무척 싫어했다. "그 여자는 어머니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1973년 11월 16세의 나이로 그녀는 체셔에 있는 HM Prison Styal이라는 여성 전용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1976년 6월 그녀는 무어 개방형 교도소로 또다시 이송되었다. 15개월 후인 1977년 9월 메리가 같은 수감자인 아네트 프리스트(Annette Priest)와 잠시 탈옥했을 때 다시 전국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두 탈주범은 블랙풀에 있는 두 젊은이와 함께 며칠을 보냈고 오락실을 방문했으며 여러 지역의 호텔에서 잠을 잤다. 벨은 아네트와 헤어지기 전까지 메리 로빈슨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벨은 9월 13일 만났던 남자 중 하나인 클라이브 셔트클리프(Clive Shirtcliffe)의 자택에서 체포됐으며 이때까지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날 저녁 다시 구류되었고 프리스트는 며칠 후 리즈에서 체포되었다. 메리는 감옥에서 탈출한 대가로 28일 동안 감옥 특권을 상실했다.

1979년 6월 메리 벨은 HM Prison Askham Grange라는 여성 개방형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5. 석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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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 후 23세의 모습 어머니 베티 벨과 임신한 메리 벨

1980년 5월, 23세의 나이로 겨우 12년 만에[7] 가석방되었고 사회로 나와 웨이트리스 일을 하면서 돈을 벌다가 한 청년을 만나 임신했다. 1984년에 아이를 출산했는데 주위에서 두 아동을 살해한 여자가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많은 우려가 있었으나 벨 본인이 자기 자식을 지킬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고 한다.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평범한 삶을 사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메리의 신상정보와 주소 등의 여러 정보들이 퍼지면서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는 악마 취급당했고 또 다른 곳으로 이사 가도 마찬가지로 신상정보 공개크리가 터졌다.

그 때문에 메리 벨은 열심히 이사를 다닌다고 한다. 다만 사회적 감시와 신상털이가 워낙 철저해서 자기가 감시받는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어릴 적 두 아동을 살해한 사건 이후로 성인이 되고 가석방된 후에는 더 이상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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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때 모습

1998년 저명한 전기 작가 지타 세레니[8]를 통해 자신의 살인 기록을 담은 책 <들리지 않는 외침>을 출간해 5만 파운드를 받아 많은 비난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도 공개적으로 비난했을 만큼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다만 이 전기가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위에 서술된 메리 벨의 막장 유년기를 최초로 묘사한 것이 이 '들리지 않는 외침'이었다. 즉, 이 전기를 통해 메리 벨의 유년기가 얼마나 막장이고 처참했는지 처음 알려진 것이다.

동네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험한 말을 하며 집까지 찾아와 시위하자 자신의 딸을 감싸안으며 자식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사이코패스로 판정받아도 유영철이나 가오청융처럼 자기 자식을 아끼거나 책임감 있게 길러 놓은 범죄자들도 엄연히 있으니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성애와 부성애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편견이며 혈육까지 해친 엄 여인 보험 살인사건 같은 경우는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드문 편이다. 2009년 메리 벨의 딸이 아기를 출산해서 할머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게 메리 벨에 관련된 근황의 전부다. 15년이 지난 현재, 그녀에 행방에 대한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6. 여담

  • 메리 벨이 악명이 높을뿐, 전세계적으로 어린이 살인범은 많다. 청소년 정도의 나이만 되어도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만 어린이일 경우 한국,일본 등 많은 국가에서는 아예 처벌이 불가하기 때문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초등학교 학생이 아이를 살해한 사건이 종종 일어났으며 1990년 초등학교 1학년 살인사건이나 대전 초등학생 4세 남아 살해사건등 매체에서 보도된 적도 여러 차례 있다. 일본에도 2004년 급우를 계획적으로 살해한 11세 소녀가 있다. 사세보 소학교 동급생 살인사건 문서 참조. 2015년 중국에서는 초등학생 어린이 3명이 여교사를 살해하고 금품을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뉴스 링크 이들보다 훨씬 더 오래전인 1874년 미국에서는 제시 포메로이(당시 14살)라는 소년이 어린이 두명을 납치하여 토막살인을 저질러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영미권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은 워낙 사례가 많으므로 따로 링크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창문에서 떨어져서 뇌진탕을 당한 적이 있다. 이게 메리 플로라 벨의 성격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 만화 성 로잘린드의 주인공 로잘린드가 어린이의 몸으로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한다는 점 때문에 메리 벨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 메리 벨과 유사한 어린이 살인범이 등장하는 영화가 꽤 있다. 맥컬리 컬킨일라이저 우드가 주연한 '좋은 아들(1993)', '오펀 천사의 비밀(2009)' 등. 메리 벨 사건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1956년에 제작된 어린이 사이코패스를 다룬 배드 시드도 있다. 윌리엄 마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이전에 연극도 만들어진 이 영화는 오늘날 심리학자들이 자료로 활용할 만큼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 소재가 소재다 보니 관객들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엔딩에서 꼼수를 부리긴 했다.[9][10]


    해당 영상은 한국 저작권법에 명시된 50년을 적용하여 2006년에 저작재산권이 소멸되었으므로 한국에서 영화의 저작권은 소멸되었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합법적으로 볼 수 있다.


[1] 우연히 같은 성일 뿐 혈연관계가 아니다. 그녀는 메리의 살인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유일한 목격자였다.[2] 자신의 이름 첫 글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3] 가족들에 따르면 어린 아이였던 메리는 어머니와 혼자 있는 동안 가정 사고로 지나치게 자주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1960년경에 베티는 딸을 1층 창문에서 떨어뜨린 적도 있었다.[4] 사이코패스를 연구하는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로 잘 알려진 제임스 팰런도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타고났더라도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난다면 충분히 일반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영국에서 어린 소녀를 살인죄로 투옥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메리를 어디에 수감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교도소는 11살짜리에게 맞지 않아 제외되었고 정신병원에는 메리를 수용할 만한 시설이 없었다. 문제아 수용시설에 두자니 그곳 아이들에게 메리가 너무 위험했다. 결국 조숙한 살인범 메리는 소년 전용 수용시설에 갇혔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사춘기가 닥칠 때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6] 24명의 수감자 중 유일한 여성이였다고 한다. 메리는 나중에 그녀가 이 시설에 수감되었을 때 직원과 몇몇 수감자들에 의해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7] 도중에 몇몇 죄수와 함께 탈옥했는데 이때 죄수들을 도와준 청년을 상대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인의 의지로) 성관계를 했다고 알려졌다. 나중에 그 청년은 그 이야기를 타블로이드 신문에 팔면서 메리가 임신을 하기 위해 탈옥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메리는 임신을 했지만 도덕적 위기감을 느껴 낙태했다고 한다.[8] 오스트리아 출신인 지타는 이미 1972년에도 메리 플로라 벨을 다룬 전기 <메리 벨 사건>을 저술했다. 이때는 벨의 어머니와 인터뷰한 자료를 기반으로 출판했다. 2년 후에는 나치 독일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의 전기를 저술하는 등 전기를 다수 저술했다. 참고로 슈탕글 전기를 쓰기 위해 인터뷰했을 때는 그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서 그가 사망하기 19시간 전에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일화를 남겼던 지타는 1995년에 나치 독일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전기를 저술해 영국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고 2004년에는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받은 저명한 전기작가였다. 지타는 자신이 쓴 전기들을 통해 악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말 잘 묘사한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반대로 악마를 인간화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9] 한국 영화 중에도 이런 케이스가 있다. 김기영 감독의 1960년판 '하녀'.[10] 이후 나쁜 종자를 2018년에 리메이크하면서 원작인 나쁜 종자에서 여자아이 역을 맡은 배우를 정신과 의사 역으로 재등장시켰다. 여기서 의사가 사이코패스 여자아이에게 "나도 어렸을 때는 너랑 똑같았다."는 말을 하면서 정상 판정을 하는데 일종의 배우 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