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일랜드의 前 축구 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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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 마크 로렌슨 Mark Lawrenson | |
| 본명 | 마크 토마스 로렌슨 Mark Thomas Lawrenson | |
| 출생 | 1957년 6월 2일 ([age(1957-06-02)]세) | |
| 영국 미들즈브러 | ||
| 국적 | () | |
| 신체 | 키 183cm|체중 미상 | |
| 직업 | 축구 선수 (수비수, 미드필더 / 은퇴) | |
| 소속 | <colbgcolor=#eee> 선수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74~77)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77~1981) 리버풀 FC (19~1975) 바넷 FC (1988~1989) 탬파베이 라우디스 (1989) 코비 타운 FC (1990~1991) 체셤 유나이티드 FC (1992) |
| 감독 | 옥스포드 유나이티드 FC (1988) 피터보로 유나이티드 FC (1989~1990) | |
| 국가대표 | 39경기 5골 (아일랜드 / 1977~1987) | |
1. 개요
아일랜드의 前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이자 방송인.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리버풀 FC의 최전성기 붉은 제국의 주축 선수 중 하나로 활약했다.
2. 선수 경력
2.1.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프레스턴 노스 엔드 소속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 톰 로렌슨을 따라 축구를 시작하여, 1974년 17세의 나이로 프레스톤 노스 엔드에 입단했다.당시 프레스턴의 감독은 바비 찰튼이었으며, 데뷔 이후 곧장 우수한 실력을 뽐내며 1976-77 시즌 프레스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프레스턴에서 총 73경기를 뛰며 2골을 넣었다.
2.2.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77년 여름, 1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브라이튼으로 이적했다.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이던 리버풀도 로렌슨에게 러브콜을 보냈으나 19세의 로렌슨은 2부 리그에 있던 브라이튼을 선택했다.로렌슨은 1977년 8월 20일, 사우스햄튼 FC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1977-78 시즌 총 40경기에 출전하며 활약했다. 이후 1980-81 시즌까지 그는 브라이튼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152경기를 뛰었다.
그러나 이후 브라이튼은 재정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구단의 자금 마련을 위해 로렌슨은 이적을 물색하게 되었다.
2.3. 리버풀 FC
밥 페이즐리가 이끌던 리버풀은 4년 전부터 노려왔던 로렌슨을 2번이나 놓칠 수 없었고, 90만 파운드의 클럽 레코드 이적료를 제시하며 1981년 여름 로렌슨을 안필드로 데려왔다.1981년 8월 29일,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원정에서 레프트백으로 첫 선발 출전한 그는, 9월 30일 안필드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1라운드 2차전에서 데뷔골을 넣었다. 데뷔 당시 필 톰슨이 부상을 당한 상태였기에 로렌슨은 앨런 한센과 함께 중앙 센터백 듀오로 즉각 기용되었고, 이후 왼쪽 수비수로도 자주 기용되며 여러 포지션에서 활약을 펼쳤다.
로렌슨은 첫 풀시즌은 1981-82 시즌에 리그와 리그컵 우승에 기여했고, 그 이후 리버풀의 역사적인 리그 3연패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또한 1983-84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네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에 기여하며 빅 이어를 안필드로 가져왔다. 그러나 1984-85 시즌에는 막판에 어깨 탈구 부상을 당해, 1985 유러피언컵 결승전에는 출장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1] 하지만 이어진 1985-86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세 번째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1986-87 시즌부터는 젊은 수비수 게리 길레스피의 성장에 의해 주전 자리를 다소 위협받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한센과 공고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1987-88 시즌까지 팀의 주축으로 남았다. 그러나 1988년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어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위기에 처했고, 해당 시즌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리그 우승을 끝으로 리버풀 커리어를 끝냈다. 리버풀에서 총 332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다.
리버풀을 떠난 뒤에는 1988년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바넷과 미국의 템파베이에서 다시 선수로 뛰며 선수 커리어로 복귀했다. 이후 1989년에 다시 감독직에 도전했다가 논리그 클럽인 코비 타운을 거쳐 체샴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3. 지도자 경력
1988년 옥스포드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좋지 못한 성적을 보였고 결국 그해 겨울 사임했다. 이후 선수로 복귀했다가, 1989년 9월 6일 피터보로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맡았다. 그러나 결국 1990년 11월 9일에 감독직을 내려놓았다.4. 방송 경력
선수와 감독으로서 축구 커리어를 모두 끝마친 이후에는, 축구 전문가로 방송계에서 다양하게 활약했다.1990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아이리시 타임즈에 칼럼을 기고했던 그는, 자신의 전 리버풀 파트너였던 앨런 한센과 함께 BBC의 축구 펀딧으로 활동했으며 TV와 라디오를 오가며 여러 방송에 출연하였다.
이후에는 아예 BBC에서 국내외 축구 경기의 TV 및 라디오 해설자로 활동했고, BBC 전통의 축구 하이라이트 방송인 매치 오브 더 데이에 고정 출연하였다. BBC에서 30년동안 총 6번의 월드컵을 해설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는 아일랜드 TV3에서 전 리버풀 공격수 존 토샥과 함께 주간 챔피언스 리그 해설자로도 일했으며, 이후에는 아일랜드 라디오 채널에서 축구 관련 방송에 고정 출연했다. 그리고 BBC 공식 홈페이지의 칼럼니스트로도 오래 활동했다.
센트럴 랭커셔 대학교 학생 신문에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 관한 정기 칼럼을 기고했으며, 리버풀의 데일리 포스트에도 칼럼을 기고했다. 또한 코나미의 프로 에볼루션 사커 시리즈에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해설 샘플을 녹음하기도 했다.
2021-22 시즌이 끝난 뒤에는 BBC와 계약을 갱신하지 못했다.
5. 국가대표 경력
잉글랜드 출생이지만, 할아버지가 아일랜드 워터퍼드 출신이었기에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선택했다. 커리어 초창기에 프레스턴 감독이자 전 아일랜드 대표팀 골키퍼였던 앨런 켈리가 당시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조니 자일스에게 로렌슨의 재능을 소개하여 아일랜드의 소집을 받았다.1977년 4월 24일, 19세의 나이로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하며 A매치에 데뷔했고, 이후 총 39경기를 뛰었다. 아일랜드 대표팀에서는 다재다능함을 뽐내며 풀백, 미드필더, 센터백으로 모두 기용되었다.
이후 1987년 11월 10일 마지막 대표팀 경기를 치르기 전까지, 월드컵 예선과 유로 예선에서 기념비적인 활약들을 펼쳤다. 특히 1984년 유로 예선에서 몰타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8-0으로 승리하며 아일랜드 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차 경기에 기여하였고, 1988년 유로 예선에서는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인상적인 득점을 올리며 원정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6. 여담
- 2002년 한 언론에 2001-02 시즌에 볼턴 원더러스 FC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될 것이라는 내기를 걸었으나,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이끄는 볼턴은 잔류에 성공했고, 결국 콧수염을 깎는 벌칙을 수행했다.
- 2014 FIFA 월드컵 당시 스위스 공격수 요시프 드르미치에게 "치마나 입어라"라는 비판을 가했다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사건이 있었다.
7. 기록
7.1.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81~1988)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 FA컵: 1985-86
- EFL컵: 1981-82, 1982-83, 1983-84
- FA 채리티 실드: 1982, 1986
- 유러피언컵: 1983-84
7.2. 개인 기록
- PFA 올해의 팀: 1982-83, 1983-84, 1984-85, 198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