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3 19:37:49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Martin-Luther-Universität Halle-Wittenberg
파일: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png
<colbgcolor=#003366><colcolor=white> 표어 Zukunft mit Tradition
(전통과 함께 미래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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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공립대학
설립 비텐베르크 대학교 1502년 10월 18일 ([age(1502-10-18)]주년)
할레 대학교 1694년 7월 1일 ([age(1694-07-01)]주년)
소재지
독일 할레 Universitätsplatz 11, 06108 Halle
총장 Claudia Becker
학생 수 19,000명[1]
교직원 수 4,325명[2]
약칭 MLU
링크 파일: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png 공식 홈페이지

1. 개요2. 역사
2.1. 비텐베르크 대학교(레우코레아)2.2. 할레 대학교(프리드리히 대학교)2.3.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2.3.1. 1817년 이후(왕립 할레-비텐베르크 연합 프리드리히 대학교)2.3.2. 1930년 이후(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2.3.3. 1933년 이후(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1. 개요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독일어: Martin-Luther-Universität Halle-Wittenberg )는 독일 작센안할트주의 할레비텐베르크 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교이다. 작센안할트주 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대학교이다. 약칭은 MLU를 사용한다.

이 대학은 1502년에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교와 1694년에 설립된 할레 대학교가 1817년 합병되며 현재와 같은 대학이 되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종교 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 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현재 대학 캠퍼스는 할레에 있으며, 비텐베르크에 있던 캠퍼스는 대학의 컨벤션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2. 역사

2.1. 비텐베르크 대학교(레우코레아)

1502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국가 행정부를 위한 변호사, 신학자, 의사를 양성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설립 이후 교황의 인증은 1503년 이루어졌다.

이 대학의 초기 규정은 튀빙겐 대학교의 규정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대학의 규정과 구조는 독일 지역 내의 기존 대학들과 유사했다. 이 구조는 철학부, 법학부, 의학부, 신학부가 설립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 대학의 학문은 인본주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며 대학의 평판이 높아졌으며 독일의 저명한 학자들이 교수를 맡았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인문학자들에 의해 헬레니즘화 된 이름인 레우코레아(Leucorea)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비텐베르크를 고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1508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가 된 마르틴 루터는 이 대학을 중심으로 종교 개혁을 이끌었고 이 대학의 다른 교수들도 종교 개혁을 함께하였다.

2.2. 할레 대학교(프리드리히 대학교)

초대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1세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였던 시절 마그데부르크 남부에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드레스덴에서 대학 설립 계획을 오랫동안 좌절시켰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대학 설립이 허가되었다.

대학을 설립할 수 있게된 프리드리히 3세는 할레에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1694년 7월 1일 본인의 생일에 대학을 개교하며 자신의 이름에서 따와 대학의 이름을 프리드리히 대학교로 명명하였다.

1717년 의사이자 화학자였던 요한 융커는 이 대학에 독일 최초의 대학 병원을 설립하였다.

1806년 10월 17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가 할레를 함락하였고 10월 19일 나폴레옹은 직접 이 도시에 들어왔다. 대학 대표단은 즉시 나폴레옹에게 가서 대학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나폴레옹은 대표단에게 호의를 표했지만, 다음날 총장을 소환하여 프리드리히 대학이 그 날로 폐지되었음을 알렸다. 할레에서 태어난 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24시간 이내에 대학을 떠나야만 했다. 점령군은 대학의 본관을 야전병원으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역사적인 실내 가구들이 파괴되었다.

1807년 12월 23일 할레가 이제 베스트팔렌 왕국에 속하게 되며 국왕 히에로니무스 1세는 대학의 재개교를 약속하였다. 1808년 5월 16일 재개교는 완료되었다. 헬름슈테트 대학교와 린텔른 대학교가 해산되면서 새로운 교수진들이 유입되었다.

1813년 7월 15일, 나폴레옹은 학생들이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전임 통치자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합류하기 위해 대거 몰려간 것을 이유로 프리드리히 대학교를 두번째로 해산하였다.

프로이센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한 후 1813년 11월 15일 국왕은 "할레 대학교는 즉시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대학의 운영이 정상화되었다.

1817년 4월 12일, 이전에는 작센 선제후령에 속했지만 작센 분할 이후 프로이센의 일부가 된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할레 대학교에 합병되었다.

2.3.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2.3.1. 1817년 이후(왕립 할레-비텐베르크 연합 프리드리히 대학교)

이때부터는 합병된 두 대학의 로고를 붙여놓은 현재와 같은 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장에 새겨진 두 창립자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기리기 위해 왕립 할레-비텐베르크 연합 프리드리히 대학교(Königliche Vereinigte Friedrichs-Universität Halle-Wittenberg)로 불리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외세 지배에 굴복한 교수들은 강등되거나 해임되기도 했다. 이러한 숙청은 독일 제국 건국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2.3.2. 1930년 이후(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던 1930년 7월 5일부터 왕립 할레-비텐베르크 연합 프리드리히 대학교는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로 개칭되었고, 더 민주적인 헌법이 부여되었다.

2.3.3. 1933년 이후(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 위기가 심화되자 프로이센 교육부는 1931년 비용 절감과 정치적 이유로 할레 대학교를 폐지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그 결과,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대학교 폐지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루터의 대학교를 구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캠페인이 진행되며 대학교의 이름에 루터의 이름을 붙이자는 의견이 생겨났다. 이러한 의견에 대한 첫번째 공식 제안은 1932년 7월 4일 상원 회의에서 의사이자 정치인이었던 테오도르 브뤼시애 의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다수결로 부결되었다. 이후 다시 상원 회의에서 투표를 통해 마르틴 루터 라는 추가 명칭을 부여받았고 1933년 11월 10일, 루터 탄생 450주년을 맞아 대학 명칭을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로 공식화하였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숙청이 지속되었다. 1932/33년 겨울 학기에만 교수진 245명 중 45명(18.4%)이 제명되었다. 해고 사유는 유대인 혈통, 유대인 아내, 동성애, 정치적 반대 등 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중에는 몇몇 교수들이 나치의 전쟁 범죄에 가담하였고 나치의 패망 이후에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1944년 여러 교수들이 나치에 저항하는 단체를 설립하였고, 그 결과 1945년 할레 지역이 거의 평화롭게 미군에게 넘겨졌다.

1945년 이후 미국 점령군의 감독 하에 대학은 민주적인 재건을 이루었다. 하지만 동독 지역을 소련이 관할하게 되면서 민주적 운영이 불가능 해졌다. 대학에서는 스탈린의 숙청이 이루어졌다. 여러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실종되었고,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서독 지역을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탈출한 학생 중에는 경제학과 학생이었던 한스디트리히 겐셔 독일 제7,9대 연방부총리도 있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소련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1961년까지 최소 30명의 교수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서독으로 도피했다.

모든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 세뇌가 1951년 사회과학연구소를 통해 시작되었으며, 1960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로, 1969년에는 마르크스-레닌 분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연구소는 1990년 독일 재통일까지 존재했다.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진 후 대학은 과학 연구소와 의료 시설, 학생 친화적인 인프라에 대한 상당한 투자를 하였다. 그 결과 독일 동부 지역에서 베를린라이프치히에 이어 중요한 대학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1993년 3월 31일 로이나-메르제부르크 응용과학대학교 (Technische Hochschule Leuna-Merseburg)가 해체되면서 화학, 공정과학, 재료 및 가공기술학과 등이 마르틴 루터 대학교로 편입되었다. 이는 작센안할트주에서 재정된 첫번째 고등교육 구조법에 의해 규정되었다.

오랜 역사 덕분에 대학교는 할레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꾸준히 성장해 온 이 대학교는 시내 중심가와 그 주위 곳곳에 건물이 위치해 있다. 많은 연구 기관들이 오래되고 역사적인 건물들에 자리 잡고 있다. 신축되거나 대대적으로 개보수된 건물들도 존재한다.
[1] 2023/24 겨울학기 기준[2] 2021년 12월 31일 기준;의학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