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레너드 "릭" 아델먼 Richard Leonard "Rick" Adelman | |
생년월일 | 1946년 6월 16일 ([age(1946-06-16)]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캘리포니아 주 린우드 |
포지션 | 가드 |
출신학교 |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 |
드래프트 | 1968 NBA 드래프트 7라운드 전체 79번 샌디에이고 로키츠 지명 |
선수 경력 | 샌디에이고 로키츠 (1968~1970)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70~1973) 시카고 불스 (1973~1974) 뉴올리언스 재즈 (1974~1975) 캔자스시티-오마하 킹스 (1975) |
지도자 경력 | 케미케타 커뮤니티 칼리지 (1977~1983, 감독)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83~1989, 어시스턴트 코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89~1994, 감독)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95~1997, 감독) 새크라멘토 킹스 (1998~2006) 휴스턴 로키츠 (2007~2011)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011~2014) |
등번호 | 30번 - 샌디에이고 12번 - 포틀랜드 21번 - 시카고 / 뉴올리언스 5번 - 캔자스시티 / 오마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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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NBA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대표적인 콩라인 감독.2. 일생
2.1. 선수 시절
1946년 캘리포니아 주 린우드에서 아버지 L.J. 아델만과 어머니 글래디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는 노스다코타 주에서 교사와 농부로 각각 일해왔다. 젊은 시절 다우니에 있는 피우스 X 고등학교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의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에 진학한 후 농구부에서 존 안트(John Arndt)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비록 포스트시즌을 나가지 못했지만 그는 1968년 웨스트코스트 컨퍼런스(WCC)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았다.
1968년 NBA 드래프트에서 7라운드 79번이라는 낮은 픽으로 샌디에이고 로켓츠에 입단한 후, 1970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창단할 당시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합류한 바 있다. 선수생활 7년 동안 여러 팀을 떠돌면서 별 볼일 없는 저니맨으로 활동하였다.
2.2. 감독 시절
2.2.1. 포틀랜드에서
은퇴 후인 1978년에 오레곤주 살렘에 있는 케미케타 커뮤니티 칼리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1983년에 잭 램지 감독의 부름을 받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들어와 어시스턴트 코치로 일했고, 1988-89시즌 도중에 당시 감독인 마이크 슐러가 물러나자 감독 자리를 승계받았다.
1990년부터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테리 포터를 축으로 하여 2시즌 연속 포틀랜드를 서부 지구 1위로 이끌었고, 1990년과 1992년에는 NBA 파이널에 진출시키기도 했지만,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시카고 불스에게 각각 패했다.
결국 아델만은 1993-94 시즌을 끝으로 경질당하고 만다.
2.2.2. 골든스테이트에서
1995년부터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팀을 왕창 말아먹고 2년만에 경질당했다.
2.2.3. 새크라멘토에서
1998년에 약체팀이던 새크라멘토 킹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후, 에이스였던 미치 리치몬드를 워싱턴 위저즈의 크리스 웨버와 맞바꾸고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던 페자 스토야코비치도 영입하여 포석을 다진 뒤 삼촌뻘인 피트 캐릴 코치로부터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를 터득하여 이를 과감히 뿌리내리게 했다. 부임 첫 해인 1998-99 시즌부터 27승 23패로 3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재진출시키면서 임기 8년 동안 플옵 개근팀이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기가 치솟아 1999년 11월 26일부터 광속 매진을 달성케 했다. 마이크 비비 - 덕 크리스티 - 페자 스토야코비치 - 크리스 웨버 - 블라디 디박, 여기에 바비 잭슨을 위시한 풍부한 벤치 멤버를 축으로 물 흐르는 듯한 공격 전개와 다섯 명 모두가 유기적으로 플레이하는 우아한 팀 플레이를 구사하면서 최고의 인기 팀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들은 마지막 한 고비를 넘지 못했다. 특히 가장 아쉬웠던 것은 2001-02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와 만나 정말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졌다. 특히 4차전 99-97로 앞선 상황에서 골밑에서 탭 아웃한 볼이 하필이면 로버트 오리에게 갔고, 그게 역전 3점포가 되면서 좌절하는 일명 오리 꽥 샷으로 진 장면은 킹스 팬들에게는 정말 통한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만 버텼다면 3승 1패로 앞서나가는 것이었고, 그랬다면 천하의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이 있는 LA 레이커스였다고 해도 뒤집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동부 컨퍼런스의 상대는 정말 만만해 보이는 뉴저지 네츠였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이 시리즈는 조작 논란이 있는 시리즈이다. 그 경기에서 심판을 맡지는 않았지만 도박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팀 도너히[1]가 이전부터 많은 승부조작이 있었다며 예를 든 대표적인 경기가 레이커스 대 킹스의 6차전 경기. 당시 6차전에서 레이커스는 4쿼터에만 자유투 27개를 얻어냈으며 시즌 자유투 성공율이 50% 수준이던 샤킬 오닐은 자유투할 때 선을 넘는 바이얼레이션을 저질렀지만 전혀 심판의 제지를 받지 않으며[2] 자유투 17개 중에 13개를 넣었다.
우아하고 아름답던 밀레니엄 킹스의 시대는 팀의 핵심이었던 크리스 웨버가 부상으로 기량이 쇠퇴하고, PO에서 자꾸 7차전 접전 끝에 탈락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결국 해체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2005-06 시즌을 끝으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2.2.4. 휴스턴에서
2007년에 제프 밴 건디의 후임으로 부임, 2008년 3월 24일에 자신이 감독했던 새크라멘토 킹스를 꺾고 개인 통산 800승에 도달했고, NBA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인 22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야오밍이 부상당하면서 2009~10 시즌을 불참했고, 거기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아델만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면서 악재가 들이치기 시작했고, 결국 2010~11시즌을 말아먹고 해임당한다.
2.2.5. 미네소타로
2011~12 시즌을 앞두고 돈 넬슨, 버니 비커스태프, 샘 미첼, 래리 브라운 등과 함께 감독 후보에 올랐는데, 8월에 아델만은 감독 취임 계획이 없다고 의견을 밝혔으나, 8월 말에 케빈 러브와 리키 루비오가 아델만을 환영한다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면서 감독 영입 가능성이 보였고, 마침내 9월 13일에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2013년 4월 6일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꺾고 개인 통산 1,000승을 달성했으나, 제아무리 자신이 명장이라 해도 팀을 살리기는 무리였고, 결국 2013~14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2.3. 은퇴 이후
현재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고문으로 재직 중이며, 2021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감독 스타일
감독 생활 내내 팀을 중상위권 자리에 유지시키는 재주가 있으나 한 번도 우승컵을 들지 못해 지도력을 의심받기도 했다. 그래도 선수들에게는 무한한 존경을 받는 편이다.NBA역사상 최초로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를 도입한 감독이기도 한데, 이는 새크라멘토 시절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의 창시자인 피트 캐릴에게 전수받은 것이다.[3]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가 무엇인지 설명하자면,
1명의 포스트 플레이어가 인사이드에 자리하고 나머지 4명은 모두 3점 라인 밖으로 빠져 서로간에 스크린을 끊임없이 서 주고 위크사이드에서 컷인을 시도하는 등의 노마크 찬스를 만들어내고 포스트 플레이어가 이를 놓치지 않고 패스를 찔러주는 공격 형태이다. 그런데 여기서 포스트 플레이어의 능력이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1:1 포스트업이 강해야 하고 농구 IQ가 좋아야 한다.
4. 관련 문서
[1] 실제로 06/07 샌안대 피닉스 세미파이널 3차전을 승부조작했다.[2] 자유투 시 바이얼레이션을 저질렀을 경우 그 자유투는 그냥 실패한 것이 된다. 마지막 샷 때 바이얼레이션을 저지르면 공격권은 자동적으로 수비팀에 넘어간다.[3] 비슷한 예가 필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잭슨은 이 전술을 코치인 텍스 윈터에게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