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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화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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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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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화칭
刘华清/劉華清
Liu Huaqing
파일:external/cimsec.org/liu2-196x300.jpg
성명 류화칭(刘华清, 류화청)
출생 1916년 10월 1일
중화민국 후베이성 훙안현
(現 후베이성 샤오간시 다우현 리왕진 류엔마을)
사망 2011년 1월 14일(향년 94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둥청구 베이징병원
묘역 류엔마을
국적 파일:중국 국기.svg중국
사인 병사
정당 중국공산당(1935년가입)
학력 소비에트 연방 쿠즈네초프 해군 아카데미
직업 군인, 정치인
가족 아버지: 류쑨산(刘顺山, 류순산)
부인: 쑤홍샤(徐虹霞, 서홍하)
복무지 파일:중국 인민해방군 해군기.svg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복무기간 1930년 ~ 1998년
참전 중일전쟁
└백단대전
└치겐마을전투
└장생구전투
└신타오링전투
└샨타푸전투
└진동난전투
국공내전
계급 해군소장(1955년진급)
해군상장(1988년진급, 최종)
경력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사령원
1982년-1988년
1. 개요2. 초기 일생3. 해군사령원 시절4. 퇴임 이후5. 가계

[clearfix]

1. 개요

1916-2011. 중국군인. 한국의 해군참모총장에 상당하는 4대 해군사령원을 지냈으며, 재직중에는 물론 이후에도 중국 해군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오늘날 전 세계의 주목, 혹은 경계를 받고 있는 중국 해군의 대양세력화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주인공. 이 점에서 냉전 시절 소련 해군을 세계 정상급의 규모로 성장시킨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과도 자주 비교된다.

2. 초기 일생

1916년 후베이성에서 태어났고 1929년에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1]에 가입했다. 이듬해인 1930년에는 홍군에 입대했다. 국공내전 당시에 제2야전군 소속이었다. 제2야전군의 정치장교덩샤오핑이었다.[2]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그는 인민해방군 해군에 배치되었다. 1954년에 소련 레닌그라드의 보로실로프 해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갔고,[3] 1955년에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3. 해군사령원 시절

파일:external/cimsec.org/liu-672x37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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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해군사령원 재직 시절

1982년에 예페이에 이어 해군사령원이 된 그는 중국 해군의 현대화를 주장했고, 오랫동안 연안 경비에 치중했던 중국 해군의 대양세력화에 박차를 가했다. 항공모함 도입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것도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을 정도. 특히 그는 '근해(近海) 방어'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중국 해안으로부터 200해리 이내의 제1도련(island chain), 600해리 이내의 제2도련을 중국 해군의 작전범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장기 발전구상을 제시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중국 해양전략의 기초로 남아있으며, 근래에는 아예 제1/제2도련에 대한 미국 등의 해군력 개입을 저지하기 위한 '반접근-지역거부'(A2·AD: Anti-Access/Area Denial) 전략으로 발전하는 추세.

파일:external/cimsec.org/chain-245x300.jpg
제1/제2도련의 개념도


파일:external/photocdn.sohu.com/Img278880307.jpg
1980년 5월 미 해군 항공모함을 방문한 류화칭. 이 시절 미국과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제휴 관계에 있었고, 때문에 중국 해군 사령관이 미 항공모함을 우호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는 중앙고문위원회[4] 위원으로 물러나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겪은 덩샤오핑은 정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야심이 없는 그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했다.[5] 덕분에 그는 항공모함 추진 업무를 계속 할 수 있었다. 해군 출신으로는 처음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된 것이었는데, 이는 인민해방군 내에서 해군의 발언권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해군사령원 후임자는 잠수함 출신인 장롄중이었다. 1992년 4월,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약진하기까지 하였다.[6]

다만 장쩌민과 사이가 좋질 않아 장쩌민 시절엔 항모 반대파들에게 공격당하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게 장쩌민보다 8살이나 많았던데다 신중국 수립 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지만 당시 학생이었던 장과는 달리 류화칭은 1930년에 홍군에 입대해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혁명원로라 장쩌민이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7] 그러다 후진타오가 부상하면서 항모 보유로 중국 정부의 방향이 바뀌었다. 여러 면으로 하이먼 리코버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물론 엔지니어로 직접 연구를 수행한 리코버와 관료에 가까운 그의 행적은 차이가 있긴 하다.

4. 퇴임 이후

파일:external/img6.douban.com/s8826062.jpg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직에서 떠나면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2004년에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제1/제2도련 개념에 입각한 해양전략 발전과 항공모함 도입 추진 등 그의 해군사령원 재임 시절 활동에 관한 내용을 다수 포함하여 중국 해군력의 발전을 살펴보는 데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파일:external/www.meiwen999.com/7-150122112614.jpg
1999년 중국 공산정권 수립 50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에 참석한 모습.

2011년에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94세로 대단히 장수했지만, 끝내 숙원인 항공모함의 완성은 보지 못했다. 항공모함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유언이 수많은 후배 제독들의 눈시울을 적셨다고. 이후 랴오닝급이 도입되며 그의 노력은 사후에나마 결실을 보게 되었다.

5. 가계

  • 아버지: 류쑨산(刘顺山, 류순산)
  • 어머니: 황씨(黄氏)
  • 누나: 류룽칭(刘润清, 류운청)
  • 큰형: 류윤첸(刘云臣, 류운신)
  • 남동생: 류메이칭(刘梅清, 류매청)
  • 부인: 쑤홍샤(徐虹霞, 서홍하)
  • 장녀: 류차오잉(刘超英, 류초영)
  • 장남: 류주오밍(刘卓明, 류탁명)
  • 차남: 류웨이밍(刘维明, 류유명)
  • 차녀: 류샤올리(刘晓莉, 류효리)
  • 조카: 류창인(刘长银, 류장은)

[1] 21세기에도 중국 공산당의 3대 세력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다.[2] 중국의 지도자들은 북한군김일성 등과는 달리 정치장교 이상의 보직을 지내지는 않았다. 즉 야전지휘관들의 작전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이 드물었고 마오쩌둥 조차도 일단은 정치장교였다. 대신 정치장교가 총참모장을 지내는 게 가능하긴 했다.[3] 유학 시절 그를 지도했던 인물이 바로 고르시코프 제독이었다. 한마디로 그 스승에 그 제자.[4]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덩샤오핑, 천윈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 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국가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도 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 실무 책임인 위원회의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5]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인민해방군의 군 통수권을 보유하며, 때문에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역대 실권자들은 공통적으로 군사위원회 주석의 지위를 차지했다. 1980년대 덩샤오핑도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이 아닌 군사위 주석 자격으로 중국을 통치했을 정도. 다만 장쩌민부터는 국가주석이 겸임하도록 제도화되었다.[6] 군 출신 정치국 상무위원은 류화칭이 마지막이었다. 혁명원로로서 본인들의 권위로 군을 통제할 수 있던 덩샤오핑, 양상쿤과는 달리 군과 연이 없던 엔지니어 출신 장쩌민의 군 장악력 보완을 위한 과도기적 선택이었던 것. 이후 군 출신 인사들의 승진상한은 정치국 위원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고정된다.[7] 장쩌민에 비해 연배와 당내 경력이 앞섰던 후야오방조차도 혁명원로들이 즐비했던 군을 부담스러워했고, 자기가 이야기하면 군이 말을 안 듣지만 덩샤오핑의 지시는 따른다는 투덜거림언급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