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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헤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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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Tralles Herres
1932년 12월 1일 출생 ~ 2008년 7월 24일 사망

로버트 헤레스는 미합중국 공군군인이자 (비록 실제 우주에 가지는 못했지만) 우주 비행사이다.[1] 초대 통합우주사령관, 초대 합동참모차장을 지냈다.

1932년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태어난 헤레스는 1954년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2] 조종사로서 해군보다 더욱 폭넓은 기회가 열려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공군으로 임관한 그는 유럽 근무도 하고 공군공학대학원에서 전기공학 , 워싱턴 대학교 행정학 석사학위도 따는등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테스트 파일럿이 되었고 소련살류트 프로그램의 탈을 쓴 알마즈(Almaz[Алмаз]) 프로그램을 계획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공군이 이에 대응하고자 NASA와 별개로 계획한[4] Manned Orbital Laboratory(유인궤도실험실) 우주 정거장 프로그램에서 우주 비행사로 선발되었지만 MOL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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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이 1967년 마지막으로 뽑았던 우주 비행사 4인...[6][7]

그런데 NASA는 자신들의 우주 비행사 선발 기준에 있어 확고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이였다. 일전에 NASA가 생기기도 전에 뽑혔던 공군의 Man In Space Soonest 프로그램에서 뽑힌 테스트 파일럿들은 딱 한 명[8] 빼고 전부 35세가 넘었다고 퇴짜를 맞았는데, NASA는 계속해서 우주비행사 선발 최고 연령조건을 35세로 유지했다. 1969년 6월 10일 내려진 MOL 취소 결정 이후 NASA는 이 인재들이 아깝다며 NASA로의 전속을 제안했지만, 여전히 35세 이하 파일럿들만 받아줬다.[9]

그렇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태국 파병을 갔다온 뒤 전략공군사령부펜타곤에서 중용되기 시작한다. 미 공군이 MOL을 포기하긴 했지만 유인 우주 계획만을 포기한 것이지 무인 첩보위성 개발과 발사에는 예산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MOL 시절부터 공군에서 우주개발과 관련하여 일가견이 있던 인물인 그에게 공군에서의 앞길은 어둡지 않았다. 장군에 진급하고 군사위성 및 우주개발 분야에서 중용되며 전략공군사령부의 제8공군 사령관을 거쳐 NORAD/공군우주사령부 사령관에 올랐고, 1985년 신설된 통합전투사령부인 우주사령부(United States Space Command)의 초대 사령관에 올랐다. MOL 시절에 함께 훈련을 받았지만 나이 덕에 NASA로의 편입에 성공했고 우주왕복선 미션도 수행했던 리처드 트룰리가 NASA를 나와 해군우주사령관(중장)으로 있었는데 트룰리의 상관이 되었다. 하지만 NASA는 이 시기에 STS-51-L...[10] 그리고 1987년 2월 합동참모차장직이 신설되자 초대 합참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합참의장은 리처드 크로우 해군대장이었고 콜린 파월의 재임기 초반까지 근무한 뒤 헤레스는 퇴역한다. 육사 출신자들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도 작았던 해사 출신 공군 장교들 중 4성 장군까지 진급한 단 4명으로서 이름을 남겼다.[11]

헤레스는 군복을 벗은 뒤 한국으로 치면 보험회사 버전 군인공제회(...) 격인 USAA(United Services Automobile Association)의 경영진에서 활동[12]하며 회사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회사는 전세계의 미군 장병과 가족들을 타겟으로 한 맞춤형/저가형 보험회사로, 미군 전체의 95%에 달하는 인원이 가입자일 정도로 미군에서도 유명[13]하고 보험업계에서도 유명하다. 이 회사의 성공적인 경영사례에 대해서는 틈새시장(니치마켓)에 대해 연구하는 경영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회자된다.

2002년 USAA 회장직에서 은퇴하였고, 2008년 USAA 본사가 있는 도시인 텍사스샌안토니오에서 별세했다.
[1] 실제 미션을 수행했던 NASA 우주 비행사들 중 4성 장군까지 오르는 사람은 케빈 패트릭 칠튼이 있다. 칠튼 역시 헤레스처럼 우주사령관을 역임.[2] MOL 1기에서 선발된 인원 중 래클런 맥리(Lachlan Macleay)와 동기이다. 이외에도 MOL 1기의 프랜시스 노벡(Francis G. Neubeck)과 존 핀리(John L. Finley)가 1955년과 1957년 졸업생이다. 핀리 빼고는 다 공군 갔다.[Алмаз] 다이아몬드라는 뜻.[4] 그런데 일각에서는 오히려 미군이 생각해낸 것을 소련에서 알아내고 그에 대응하고자 알마즈를 시작했다고도 한다. MOL과 알마즈 모두 일찍 종료되어서 망정이지 계속 진행되었다면 냉전은 좀더 심화됐을 것이다.[5] 결국 공군의 우주계획은 무인 첩보 위성, (준)궤도 우주비행기 등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6] 좌측부터 헤레스, 로버트 헨리 로렌스, 도널드 피터슨, 제임스 앨런 에이브러햄슨. 이들 중 도널드 피터슨은 NASA로 들어가서 STS-6 미션(챌린저호 처녀비행)을 수행했고, 에이브러햄슨은 NASA에서 우주비행사는 되지 못했지만 우주왕복선 개발을 주도하고 공군 중장까지 올라 백악관에서 SDI를 이끌며 로널드 레이건에게 총애받았다.[7] 로버트 헨리 로렌스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흑인 우주비행사가 될 수 있었지만... 선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F-104 교관으로 활동하다 순직했다. 흑인 최초로 우주에 올라가는 기록은 결국 미국인이 아니라 아프리카계 쿠바인 아르날도 타마요(Arnaldo Tamayo Méndez)가 1980년 소유즈 38 미션에서 활동하며 소련 쪽에서 세우게 된다.(라틴 아메리카 출신 최초이기도 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에서는 결국 타마요보다 3년 늦게 기욘 블루퍼드(Guion Bluford)가 첫 기록을 세운다.[8] 그 딱 한 명의 존재로 자칫 잊혀질 수도 있었던 MISS는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 명이 바로 닐 암스트롱이었다.[9] 당시 전속된 인원 중 최초의 우주왕복선 미션인 STS-1 파일럿 로버트 크리펜, NASA 국장까지 지내는 리처드 트룰리가 있다.[10] 결국 트룰리는 NASA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우주사령관에 오를 수 있다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퇴역하고 사고 방지를 위한 연구에 몰두한다. 이후에는 우주비행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NASA 국장에 취임.[11] 로렌스 스칸지(Lawrence A. Skantze - 이 사람도 NASA 우주왕복선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로 예정되었다가 STS-51-L 참사 이후 일정이 취소되었다), 헤레스, 먼로 해치(Monroe W. Hatch Jr.), 제임스 데이비스(James B. Davis). 주류였던 육사 출신자는 무려 60명이나 되고, 비행사관후보생(Flying Cadet) 출신자도 49명이나 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적다.[12] 한국 군인공제회처럼 경영진에 전직 장성들이 많다.[13] 다만 빠가 까를 만든다는 원리로 미군에서도 보험회사에 불만 많은 이들이 전무하지는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