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라파엘로의 작품을 정리한 문서다.2. 그림
자화상[1] | 자화상[2] |
성모[3] | 그리스도의 부활[4] |
천사[5] | 천사[6] |
성 제오르지오와 용 | 성 미카엘과 용[7] |
처녀의 결혼[8] |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9] |
세 여신 | 기사의 꿈[10] |
몬드 십자가[11] | 오디 제단화[12] |
안시데이 성모[13] | 성좌에 앉은 성모자와 성인들[14] |
솔리 성모[15] | 책을 든 성모와 아기 예수[16] |
작은 쿠퍼 성모[17] | 큰 쿠퍼 성모[18] |
디오탈레비 성모[19] | 템피 성모[20] |
검은 방울새의 성모[21] | 대공의 성모[22] |
벨베데레 성모[23] | 패랭이 꽃의 성모[24] |
어린 세례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자[25] | 수염이 없는 성 요셉과 있는 성모자[26] |
양과 함께 있는 성모자[27] | 야자 나무와 함께 있는 성가족[28] |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29] | 브리지워터 성모[30] |
에스테라지 성모[31] | 카니자니 성가족[32] |
알도브란디니 성모[33] | 물고기가 있는 성모상[34] |
로레토의 성모[35] | 폴리뇨의 성모[36] |
임판나타의 성모[37] | 푸른 왕관의 성모[38] |
테라누오바 성모[39] | 코네스타빌레 성모[40] |
알바 성모[41] | 의자에 앉은 성모[42] |
남자의 초상[43] | 남자의 초상[44] |
피에트로 벰보의 초상[45] | 유니콘과 함께 있는 여인의 초상[46] |
아뇰로 도니의 초상 | 마달레나 스트로치 도니의 초상[47] |
라 뮤타[48] | 라 그라비다[49] |
사과를 든 젊은 남자의 초상[50] | 에밀리아 피아 다 몬테펠트로의 초상[51] |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의 초상[52] | 엘리사베타 곤차가의 초상[53] |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54] |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55] |
토마소 인기라미의 초상[56] | 비비에나 추기경의 초상[57] |
추기경의 초상[58] |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초상[59] |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초상[60] | 젊은 남자의 초상[61] |
라 벨라타[62] | 빈도 알토비티의 초상[63] |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64][65] | 친구와의 자화상[66] |
어린 소년의 초상[67] | 라 포르나리나[68] |
안드레아 나바게로와 아고스티노 베아차노의 초상[69] | 판화, 파리스의 심판[70] |
발리오니 제단화[71] | 발다키노의 성모[72] |
예언자 이시야[73] | 갈라테아의 승리[74] |
성녀 체칠리아[75] | 골고다로 향하는 중 쓰러진 그리스도[76] |
에제키엘의 환영[77] | 악마를 무찌르는 성 미카엘[78] |
장미의 성모[79] | 어린 세례 요한[80] |
라 페를라[81] | 프랑수아 1세의 성가족[82] |
빌라 파르네시나, 큐피드와 프시케 로지아의 천장, '신들의 회의' | |
빌라 파르네시나, 큐피드와 프시케 로지아의 천장, '큐피드와 프시케의 결혼 만찬' |
시스티나 성모[83] | |
그리스도의 변용[84] |
3. 라파엘로의 방
서명의 방 | |
성체논의[85] | |
아테네 학당[86] | |
파르나소스[87] | |
신학적 덕[88] |
엘리오도로의 방 | |
엘리오도로의 추방[89] | |
볼세나의 미사[90] | |
아틸라를 격퇴하는 레오 1세[91] | |
베드로의 해방[92] |
보르고 화재의 방[93] | |
보르고의 화재[94] | |
샤를마뉴 황제의 대관식[95] | |
오스티아의 전투[96] | |
레오 3세의 맹세[97] |
서명의 방 천장 | 엘리오도로의 방 천장 |
4. 라파엘로 태피스트리와 카툰(밑그림)
라파엘로 태피스트리[98] | |
2020년, 라파엘로 사망 500년을 맞아 시스티나 예배당에 거는 작업 중[99] | |
평소의 태피스트리 전시 모습[100] | |
총독의 개종[101] |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라파엘 코트[102] | |
고기잡이배의 기적[103] | |
열쇠 증정 | |
절름발이 남자를 치료하는 베드로 | |
아나니아의 죽음 | |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성 바울 | |
리스트라에서의 희생 | |
총독의 개종 |
5. 건축
키지 예배당 내부[104] | |
키지 예배당의 돔 | |
키지 예배당 외부 | 돔 확대 사진 |
빌라 파르네시나, 큐피드와 프시케 로지아 | |
빌라 파르네시나, 큐피드와 프시케 로지아의 천장[105] | |
빌라 파르네시나[106] |
빌라 마다마[107] | |
빌라 마다마, 라파엘로 로지아 |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 드로잉 |
바티칸 궁, 라파엘로 로지아 | 라파엘로 로지아의 천장 볼트를 장식한 그림 일부 |
비비에나 추기경의 아파트 |
Palazzo Branconio dell'Aquila 의 파사드 스케치[108] | Palazzo Branconio dell'Aquila 의 안마당과 파사드 |
[1] 1498년 작품. 옥스퍼드, 에슈몰리언 박물관 소장. 흑분필로 그렸다.[2] 1506년 작품. 우피치 미술관 소장. 이 그림에 나오는 그의 헤어스타일과 검은 모자는 화가의 상징이 되어 훗날 'raffaella'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라파엘로가 자신을 돌봐준 숙모 시모네 차를라에게 그려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나 우피치 미술관의 작품 설명에는 그런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최초의 이 그림에 관련된 기록은 1652년에 마지막 우르비노 공작과 그의 배우자 클라우디아 데 메디치의 딸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의 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국 우피치 미술관의 컬렉션에 크게 기여한 추기경 레오폴드 데 메디치의 소장 목록에 포함된다.[3] 1498년으로 추정되는 라파엘로의 첫 작품. 우르비노의 라파엘로 생가(Casa Santi)에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화. 부친 조반니 산티의 그림일 수도 있다.[4] 1499-1502년, 브라질 상파울루 미술관 소장. 57*47cm 의 작은 그림으로 아마 바론치 제단화(Baronci Altarpiece)의 프레델라(제단화의 아랫 부분을 장식하는 그림)로 추정된다. 라파엘로가 에반젤리스타 다 피안 디 멜레토와 함께 페루자의 시타 디 카스텔로의 산타고스티노 교회의 바론치 예배당을 위해 의뢰 받은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의 천사와 함께 제단화의 일부였을 것이다.[5] 1500년. 이탈리아 브레시아, 피나코테카 치비카 토시오 마르티넨고 소장, 위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바론치 제단화의 쪼개진 패널 6개 중 일부이다. 라파엘로의 소묘도 남아있어 그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작품의 구성 요소와 배경으로 미루어 라파엘로는 우르비노 뿐만 아니라 로마, 피렌체, 시에나, 베네치아 등을 다녀왔을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6] 1500년. 루브르 소장[7] 1503-05년 작품. 루브르 소장. 두 그림은 두폭제단화 세트이며 30cm 크기로 작다. 가지고 다니며 예배할 때 사용했을 것이다. 이 그림들은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창작한 작품들에 대해서 라파엘로가 잘 알고 받아들였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8] 1504년 작품.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소장. 스승 페루지노의 영향이 있기는 하나 이미 넘어서고 있다. 같은 주제의 페루지노 그림과 언뜻 유사해보이나 배경의 신전과 그 앞의 사람들을 더 멀리 이동시켰고 전경의 사람들의 배치(요셉과 마리아의 위치도 바뀜)를 바꾸어 조금 느슨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했다. 그림 가운데의 사제가 머리를 기울이고, 그림 가운데에 반지를 위치시켜 시선을 집중시킨다. 구혼에 실패한 다른 사람들이 실망하는 모습도 추가했다. 리스트가 이탈리아 여행 중 이 그림을 감상하고 순례의 해의 두번째 해, 이탈리아에서 Sposalizio(혼례)라는 곡을 남겼다.[9] 1505년 작품. 이탈리아 브레시아, 피나코테카 치비카 토시오 마르티넨고 소장. 페루지노 풍의 특징 외에도 세부 묘사나 빛의 효과에서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도 있다. 우르비노 궁정과 부친 조반니 산티를 포함한 궁정 예술가 모두 플랑드르 문화에 심취해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귀족을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은 라파엘로의 얼굴과 닮아있다.[10] 1504년 작품. 짝으로 제작된 펜던트 패널화이나 현재 각각 다른 곳에 전시되어 있다. 펜던트이다보니 실제 그림의 크기는 가로 세로 17*17cm 로 작다. 고전 문학과 인문주의 소양을 가진 귀족 고객의 의뢰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혹은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둘 중 하나로 보인다고 한다. 세 여신은 샹티의 콩데 박물관에 있고, 기사의 꿈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이다. 세 여신은 비너스의 시녀들이며 불멸의 상징이자 기사가 올바른 선택을 할 경우 받을 수 있는 보상을 상징한다. 기사는 비르투스(왼쪽의 칼과 창을 든 여신. 적극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한다)와 볼룹타스(오른쪽의 꽃이 핀 나뭇가지를 든 여신. 쾌락의 여신인데 라파엘로는 그녀를 음탕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두 여신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11] 1502-03년 작품.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가바리 제단화'라고도 불린다. 상인이자 은행가인 가바리가 자신의 예배당을 위해 주문했다. 독일인 화학자이자 사업가인 루트비히 몬드에 의해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로 왔다. 본디 4개 패널로 이루어진 제단화로 하나는 소실되었다. 나머지 2개는 리스본의 고대 예술 박물관과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예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2] 1502-04년 작품. 바티칸 피나코테카 소장, '그리스도의 변용', '폴리뇨의 성모'와 함께 걸린 세 그림 중 하나이며 '성모의 대관식'으로도 불린다. 페루자의 성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성당의 오디 가문 예배당에 걸릴 그림으로 의뢰 받았다. 나폴레옹에 의해 파리에 갔다가 1815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바티칸으로 갔다. 전문가들은 사도들의 특징에서 라파엘로가 피렌체 카르미네 교회에 있는 마사초의 프레스코를 보고 연구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3] 1505년 작품. 영국 내셔널 갤러리 소장. 페루자의 성 피오렌초 성당의 안시데이 가문 예배당의 제단화로 제작되었다. 좌측의 인물은 세례 요한이며 우측의 인물은 성 니콜라스이다. 요한의 손은 아기 예수를 가리키고 수정 십자가의 끝을 응시하는데 그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림 배경의 회색의 볼트는 밑그림에는 없으며 추후에 예배당에 걸릴 것을 라파엘로가 감안하여 추가한 것이다. 콜론나 제단화와 함께 라파엘로의 초기 성모작 중 최고작으로 여겨진다.[14] 1504-05년 작품. 'Madonna and Child Enthroned with Saints',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1659년에 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던 콜론나 가문의 이름을 따서 콜론나 제단화로도 불린다. 제단화 하단부의 프레델라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등 각각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다. 미국에 있는 유일한 라파엘로 제단화로 페루자의 성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의뢰로 그린 그림이다. 예쁘게 차려입은 아기 예수가 있고 성인들의 육중한 몸들은 당시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와 프라 바르톨로메오를 연구하며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양상을 보여준다. 본디 루브르와 영국 내셔널 갤러리를 거쳐 개인 소장가가 가지고 있었는데 J.P. 모건이 1901년에 당시 그림 최고가인 2백만 프랑에 구입하여 미국으로 왔다. 당시 개인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라파엘로 제단화였다고 한다. 모건 사후 1916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제단화의 다른 패널들은 각각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자연 채광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젝트가 시행되며 그림이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기사도 있다.링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링크[15] 1500-04년 작품. 베를린 미술관 소장. 페루지노의 영향이 보인다. 영국의 금융인이자 소장가였던 에드워드 솔리의 소장품이었기 때문에 솔리 성모로 불린다. 거의 최초의 성모 그림으로 라파엘로도 이런 시절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16] 1503년 작품. 미국 패서디나, 노턴 사이먼 박물관 소장. 패서디나에 있다고 하여 종종 패서디나의 성모로 불리기도 한다. 솔리 성모에 비해 성모의 인상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졌으며 움직임도 자유롭다.[17] 1504-05년 작품.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Small Cowper Madonna', 의뢰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림 우측 뒤의 교회는 우르비노 공작이 묻힌 산베르나디노 교회로 추정된다. 교회에 봉헌할 목적으로 그려졌던가 라파엘로가 자신이 자란 우르비노의 풍경을 담았을 수도 있다. 1780년에 피렌체에서 3대 쿠퍼 백작이 미상의 인물에게 구입해서 소장했다. 언뜻 봐도 '솔리 성모'에 비해 그림 수준이 엄청나게 발전한 것이 보인다.[18] 1508년 작품.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Large Cowper Madonna', 니콜리니-쿠퍼 성모로도 불린다. 라파엘로의 피렌체 시기 마지막의 작품이다. 작은 쿠퍼 성모에 비해 모자는 밀착되어 더 가까워 보인다. 성모 가슴의 옷자락에 1508년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가 그렸다는 글자가 써있다. 니콜리니 가문이 소장하고 있다가 1785년에 쿠퍼 가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쿠퍼 가문이 소장한 최고작이 라파엘로의 그림 2점이며 그림의 크기로 큰/작은 쿠퍼 성모로 불리게 되었다.[19] 1504년 작품. 베를린, 보데 박물관 소장. 리미니의 디오탈레비 후작 소장품이었다. 과거에는 페루지노의 작품으로 여겨졌는데 지금은 이탈리아의 유명 미술사학자 아돌포 벤추리를 제외하면 라파엘로의 것으로 본다. 그림의 구성은 아직 페루지노 스타일이다.[20] 1508년 작품.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피렌체 템피 가문의 의뢰로 그려져 소장되어 있다가 1829년 바이에른 공국의 루트비히 1세가 구입했다. 이 시기의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인 구성과 레오나르도의 정신과 육체적 특징의 조화에 통달하여 조각과도 경쟁할 수 있는 표현력에 도달하였다. 작품의 입체성 강조로 전문가들은 라파엘로가 도나텔로의 조각과 그림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고 추정한다.[21] 1505-06년 작품. 우피치 소장. 2008년에 10년이 소요된 복원 작업이 끝났다. 라파엘로가 친구 로렌초 나시의 결혼 선물로 주었다. 1548년에 나시의 집이 지진으로 무너져 그림이 17조각이 나기도 했다. 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의미하며 아기 예수가 새를 쓰다듬는 것은 자신에게 닥칠 수난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피렌체 시기 라파엘로가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피라미드 구도로 솟아오른 성모는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22] 1504-05년 작품. 피렌체 피티 궁 소장.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받은 스푸마토 기법이 쓰였다. 누가 의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 라파엘로가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으로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투스카니 대공인 페르디난트 3세의 소장품이었기에 대공의 성모로 불린다. 대공은 이 그림을 매우 숭상하여 여행길에도 가지고 다니며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고 한다. 성모와 아기 예수를 비추는 은은한 빛은 둘 간의 깊은 사랑과 조화로운 인간미를 드러낸다. 검은 배경은 본디 아치형 창문과 아래의 벤치 혹은 벽이 있던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고 훗날 작품이 완성된 후에 칠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23] 1505-06년 작품. 빈 예술사 박물관 소장. 1773년 벨베데레 궁전의 빈 미술 컬렉션에 포함되어 '벨베데레 성모'라고 한다. 피렌체의 로렌초 나시가 산드라 디 마테오 디 조반니 카니자니와 결혼할 때 기념하는 그림을 라파엘로에게 의뢰하였다.[24] 1506-07년 작품.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레오나르도의 '브누아의 성모'의 영향을 받았다. 모자 사이를 떨어뜨리고 공간을 재구성하여 변화를 주었다.[25] 1507-08년 작품. 루브르 소장. 초기 의뢰는 여러 설이 있으며 누군가 프랑수아 1세를 위해 시에나에서 구입한 이후 루브르에 소장되어 왔다. 피렌체에서 그린 최고작 중 하나로 여겨진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외에도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영향도 있다고 한다.[26] 1506년 작품.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라파엘로 사망 500년 전시회로 2020년까지 대여했다가 코로나 창궐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아직 반환이 연기되고 있다.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공작의 요청으로 그려졌으며 푸시킨이 이 그림을 보고 그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살리에리의 대사에서 언급한다.[27] 1507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가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연구하며 구도가 복잡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에 올라탄 예수의 위로 마리아와 요셉을 배치하여 사선 구도를 만들어 이목을 끈다. 배경의 건물은 당시 이탈리아 건축과 관계가 없으며 뒤러의 동판화를 비롯한 판화와 한스 멤링의 그림에서 영향 받았을 것을 추정케 한다.[28] 1506년 작품.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 소장. 피렌체 시기 라파엘로의 성가족 테마의 여러 작품 중 하나다.[29] 1507-09년 작품.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아름다운 곡선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유명한 그림이며 피렌체 시기 막바지의 화풍 변화가 보인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주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누군가 성 카타리나를 흠모하는 개인이 요청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이 그림을 프랑스 왕비 캐서린 드 메디치에게 선물로 줄 것을 생각중이라는 내용은 전한다. 어떻게 그가 이 그림을 1550년에 소유하고 있었는지 미상. 스매싱 펌킨스의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음반 표지의 일부로 사용되었다.[30] 1507-08년 작품. 에든버러, 스카티시 내셔널 갤러리 전시. 피렌체 시기 막바지의 그림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작의 소유였으나 1792년 브리지워터 공작이 구입하여 1945년까지 가문에서 소장하였다. 브리지워터 가문의 후손인 서덜랜드 공작의 컬렉션으로부터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가 대여하여 전시하고 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 영향받은 키아로스쿠로 효과가 강조되고 있다.[31] 1508년 작품.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 로마에 도착한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이나 미완성이다. 성모의 얼굴과 아이의 형태가 완성되지 않았다. 드문 라파엘로의 미완성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창작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림을 준비하던 스케치가 우피치에 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 마리아 테레지아 등의 소유를 거쳐 에스테라지 왕자의 컬렉션이 되어 현재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2] 1507년 작품.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성모의 목의 옷 자락에 우르비노의 라파엘이라고 써있다. 레오나르도로부터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를 따왔고, 미켈란젤로에게는 성 요셉의 표현법을 흡수했다.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인 카니자니 가문이 집의 제단화로 주문한 그림이다. 훗날 메디치 가의 컬렉션이 되었다가 안나 마리아 로도비카 데메디치가 독일로 시집가며 결혼 선물로 들고 갔다.[33] 1509-10년 작품.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라파엘로가 로마에 도착하여 라파엘로의 방 작업 중에 병행한 그림 중 하나이다. 교황청의 누군가 주문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그림으로 개인 예배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바(Garvagh) 가문, 알도브란디니(Aldobrandini) 가문을 거쳐 내셔널 갤러리로 왔다. '가바 성모', '성모자와 세례 요한'으로도 불린다. 영국과 우리나라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대여하여 2023년 6월 2일부터 10월 9일까지 전시한 바 있다.[34] 1513-14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 나폴리의 귀족이 의뢰한 제단화이다. 외경의 토비트 이야기에서 따왔다. 대천사 라파엘의 도움을 받아 토비트는 물고기를 잡아 앞을 못보는 아버지를 고친다. 비대칭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형식을 놓치지 않는 라파엘로의 숙련된 솜씨가 있다.[35] 1511년 작품. 프랑스 샹티이, 콩데 미술관 소장. 본디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에 '율리오 2세의 초상'과 함께 걸려 있었다. 성모의 베일은 수의를 상징하며 예수의 고난을 암시하며, 아기 예수를 깨우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상징한다. 작품의 모사본이 로레토(Loreto)의 바실리카 델라 산타 카사에 걸려 있었는데 수 세기 동안 그것이 진품인 것으로 알려져 왔기에 로레토의 성모로 불리게 되었다.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예 중 하나이다.[36] 1511-12년 작품. 바티칸 소장. 폴리뇨 수도회의 소장품이었다. 율리오 2세의 비서이자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책임자이던 시지스몬도 데 콘티의 의뢰로 그렸다. '그리스도의 변용', '오디 제단화'와 함께 바티칸에 있는 그림 중 하나이다. 이 시기 모든 그림 중 가장 놀라운 대기의 풍경이다. 우측에 무릎 꿇은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시지스몬도이다.[37] 1513-14년 작품. 피렌체 피티궁 소장. 'Madonna dell'Impannata', 빈도 알토비티가 주문한 그림이다. 임판나타는 그림 뒤에 보이는 창문을 덮은 옷감인 린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변용'과 함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점령 후 가져갔던 그림 중 하나다. 라파엘로가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시기의 그림으로 대부분 제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그래서 덜 유명하다.-[38] 1510-18년 작품. 루브르 소장. 프랑스 왕가가 소장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중 가장 마지막에 추가된 것이다. 라파엘로의 기본 그림을 바탕으로 제자인 조반 프란체스코 페니가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된다.[39] 1505년 작품. 베를린 주립 미술관 소장. 테라누오바 공작의 소장품 중 하나였다. 레오나르도가 그렸던 현재는 소실된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의 밑그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그렸다. 성모의 왼 손 모양은 레오나르도의 '암굴의 성모'를 연상시킨다. 라파엘로는 기존 그림에 대한 공부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인물의 자세에 자연스러운 변형을 가한다.[40] 1502-04년 작품.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라파엘로가 우르비노에서 피렌체로 떠나기 전 마지막 시기의 미완성 그림이다. 페루자의 코나스타빌레 델라 스타파(Conestabile della Staffa) 가문이 소장해왔기에 코네스타빌레 성모로 불린다. 1872년에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구입하며 러시아로 왔다. 1881년에 그림을 캔버스로 옮기면서 라파엘로가 처음에 그렸던 원본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성모가 오른손에 든 것이 책이 아니라 석류였다고 한다. 배경에 있는 눈에 덮힌 산을 묘사한 것이 매우 뛰어나다.[41] 1510년 작품.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스페인의 알바 공작의 소장품이었다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를 거쳐 현재는 미국에 있다. 톤도 형식에 대한 라파엘로의 탐구가 완결된 걸작이다. 색채의 균형 감각과 빛의 재현이 세련되었다. 인물 각각의 부피감을 강조하면서도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화로운 구도가 나왔다. 성모의 샌들은 고대 예술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42] 1513-14년 작품. 피렌체 피티 궁 소장.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서명의 방 작업 중에 함께 그렸고 후대의 미술가, 시인, 판화가에게 많은 존중을 받아 알려진 카피만 해도 1880개가 있다고 한다. 너새니얼 호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the most beautiful picture in the world")이라고 칭송했다. 성모의 얼굴이 연인인 마르게리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의자가 로마 법왕청 의식에 사용되던 옥좌와 비슷하여 피티 궁의 대공의 거처에 걸려 있던 그림으로 알려졌다. 따스한 색감과 디테일이 포인트이다.[43] 1500-02년 작품. 빈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소장. 페루지노의 작품으로 여겨져 왔으나 비슷한 시기에 라파엘로가 그린 아뇰로 도니의 초상에서 보이는 스타일이 확인되어 최근에는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누구를 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44] 1503-04년 작품.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페루지노나 한스 홀바인의 그림으로 여겨져 왔으나 현재는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본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페루지노 혹은 핀투리키오일 것으로 추정되나, 시인인 세라피노 아퀼라노도 후보로 여겨진다.[45] 1504년 작품.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의 어릴때부터의 친구인 피에트로 벰보이다(Pietro Bembo, 1470 - 1547). 1506년에도 벰보를 흑분필로 그린 드로잉이 벰보의 집에 남아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졌다. 벰보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 시인, 문학 이론가이며 훗날 추기경이 되었다. 현대 이탈리아어가 된 투스카니 지방의 문학적 언어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티치아노도 훗날 추기경 벰보의 모습을 그렸다. 벰보는 라파엘로 사후에 극찬하는 묘비명을 지어주었다.[46] 1505-06년 작품.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1934년에 패널화를 캔버스로 옮기며 복원 작업을 했는데 17세기 중반에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바퀴, 시계를 덧그려둔 것이 확인되어 지우니 유니콘이 나왔다. 모나리자의 영향을 받은 구도이며 피렌체의 부유한 중산 계층의 소녀가 약혼한 직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유니콘이 순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47] 1506년 작품. 우피치 소장. 마달레나는 아뇰로 도니의 아내이다. 본디 이 그림들은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 근처의 도니 부부 집에 있었다.[48] 1507-08년 작품. 우르비노 두칼레 궁 소장. 미상의 귀족 여인의 초상이며 어두운 배경과 흰 피부의 대조가 돋보인다. '젊은 여인의 초상'이라고도 불린다. 라 뮤타는 벙어리 여인이라는 뜻인데, 사실 이 여인은 자의적으로 입을 다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림의 힘을 약화시키는 이명이기도 하다. 잉그리드 롤란드 교수는 카라바조가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왼손 검지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손의 떨림이 느껴진다는 사람들도 있다. 미묘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침착함으로 모나리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49] 1506-07년 작품. 피티 궁 소장. 르네상스 시기에 임신한 여인을 그린 초상화는 매우 드물다. 고급스러운 옷감과 금색 목걸이, 금실로 수놓은 보닛, 손가락의 반지는 이 여성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추정하게 한다. 당시 유행하던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다. 풍성한 소매가 포인트로 윤기 흐르는 실크가 라파엘로의 뛰어난 묘사로 훌륭하게 표현되었다. 부푼 배에는 왼손을 올렸고 오른손에는 손수건과 기도서가 들려 있다. 참고: '피렌체: 피렌체 회화와 프레스코화', 로스 킹, 안야 그리브 저, 시그마북스[50] 1504년 작품. 우피치 소장. 그림의 주인공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로 추정된다. 프란체스코는 삼촌인 구이도발도의 공작 작위를 승계하였고, 그의 아들 또한 공작이 되어 구이도발도 2세 델라 로베레가 된다. 이 구이도발도 2세가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티치아노에게서 직접 구입하여 소장하여 그림이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51] 1504-05년 작품. 볼티모어 미술관 소장. 초상의 주인공인 에밀리아 피아 다 몬테펠트로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인 안토니오 다 몬테필트로의 부인이자 엘리사베타 곤차가의 친구이다.[52] 1507년 작품. 우피치 소장. 구이도발도는 우르비노 공국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아들이다. 페데리코 공작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옆 얼굴로 유명하며, 용병대장 출신으로 우르비노의 군주에 오른 당시의 탁월한 예술 후원자 중 한명이다. 구이도발도는 부친의 공작 작위를 승계하였으며, 그의 동생, 조카인 조반나 펠트리아와 그녀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도 라파엘로를 지속적으로 후원하여 피렌체와 로마에서의 활동에 도움을 준다.[53] 1502년 작품. 우피치 소장. 구이도발도의 아내인 우르비노 공작 부인이다. 미술 애호가이기도 하며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책에서 그녀의 우아함과 매너는 궁정의 완벽한 여인의 예시로 들어지며 극찬 받았다.[54] 1511년 작품. 원작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으며 라파엘로 공방에서 제작한 복제품이 우피치에 있다. 티치아노가 그린 복제품은 피렌체의 피티 궁에 있다. 라파엘로의 이 작품과 레오 10세의 초상은 16세기 초상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통치자 초상화의 교과서처럼 여겨진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초상화는 심리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는데 그림에 보이는 교황의 우울하고 심각한 표정은 당시 교회의 정치적 위기를 잘 보여준다. 또한 의자 손잡이에 반사되는 방의 모습, 종의 묘사 등 탁월한 세부 묘사가 빛난다. 초상화가로 명성을 날린 티치아노도 이 초상화를 복제, 응용했을 정도.[55] 1518년 작품. 우피치 소장. 율리오 2세의 초상과 함께 후대 통치자 초상화의 교과서가 되었다. 레오 10세 좌측에 위치한 추기경은 레오 10세와 같은 메디치 가문의 사촌이며 훗날 교황이 되는 클레멘스 7세이다. 추기경들은 훗날 제자 줄리오 로마노가 덧칠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56] 1510년 작품. 피티 궁 소장. 비만과 사시가 있는 외양을 그대로 묘사하였는데, 사시를 오히려 생각을 정리해 적기 전에 머릿 속으로 정리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내며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학자를 표현해내는데 성공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가 인기라미 집안에서 구입한 초상의 다른 판본이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도 있는데 어느 것이 원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피티 궁의 초상화 아래에 라파엘로 초상화와 유사한 기법과 특징있는 소묘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원본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57] 1516년 작품. 피티 궁 소장. 비비에나 추기경은 레오 10세의 개인 비서이자 희극 작가였으며 라파엘로와 친한 후원자였다.[58] 1510-11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 Francesco Alidosi 추기경일 가능성이 높으나 Bendinello Sauli 추기경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림을 조각처럼 3차원으로 묘사하기 위한 라파엘로의 관심이 짙게 반영된 작품이다.[59] 1509-11년 작품. 나폴리 국립 박물관 소장.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은 훗날 교황 바오로 3세가 된다. 그림은 파르네세 가문이 소장하고 있다가 18세기에 나폴리에 도착했다. 일부 제자들의 도움이 있지만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여겨진다.[60] 1518년 작품. 개인 소장. 2007년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1850만 파운드(우리 돈으로 300억원)에 낙찰되었다. 이후 202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적이 있다.[61] 1513-14년 작품. 과거 폴란드 크라쿠프의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소장. 1945년 나치의 약탈 이후 그림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실된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그림으로 본다. 라파엘로 본인의 자화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62] 1515-16년 작품. 피렌체 피티 궁 소장. 베일을 쓴 여인이라는 뜻이다. 모델은 라파엘로의 연인 마르게리타 루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베일은 기혼 여성과 어머니의 상징이었고 옷과 섬세한 장신구는 모델이 고위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루티를 모델로 실제 인물을 미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화스러운 드레스와 섬세하게 늘어진 슈미즈는 라파엘로의 위대한 표현 기법을 보여준다.[63] 1515년 작품.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빈도 알토비티(Bindo Altoviti, 1491-1557)는 르네상스의 은행가이자 예술 후원가이다. 후대의 초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 그림 하나로 책도 나와 있으며 초상화가 남아 있는 사람 중 가장 잘생긴 것으로 유명하다. 알토비티는 아고스티노 키지의 라이벌이었으며 훗날 나이가 들었을 때의 초상화도 전하고 있다.[64] 1514-15년 작품. 루브르 소장. 르네상스 시대 신사의 상징이 된 그림. 만토바의 카스틸리오네의 저택에 소장되어 있다가 1630년 네덜란드의 루카 반 우펠렌의 소유가 되었다. 9년 후 스페인 사람 알폰소 로페스가 그림을 구입하고 마차리노 추기경의 소장품을 거쳐 1661년 루이 14세의 소장품이 되어 프랑스 왕가의 소유가 된다. 모델의 손이 일부만 보인 당시로서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아랫 부분이 잘려나간 것이 아니냐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림의 시점이 카스틸리오네의 눈에 고정되어 관람자가 자신도 앉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며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게 한다. 실제로도 라파엘로와 좋은 친구였던 5세 연상의 카스틸리오네는 카사티코 백작이자 궁정의 관리, 외교관이었으며 16세기 유럽 궁정에 많은 영향을 준 궁정 예절 안내서 '궁정인(The Book of the Courtier)'의 저자이다. 우르비노 궁에서 라파엘로와 만나 우정을 쌓았고 훗날 그가 우르비노의 대사로 로마에 파견되었을 때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때 라파엘로가 선물로 그려준 그림이다. 라파엘로 사후에도 그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와도 친분을 유지하였고 로마노가 그린 카스틸리오네의 훗날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도 있다. 로마노가 그린 초상화는 '라 포르나리나'가 있는 로마 국립 고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링크 라파엘로가 그에게 쓴 편지의 구절이 유명한데,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 때... 이데아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내용으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이데아 또는 내적 형상을 시각적 형태로 풀어내는 디세뇨(desegno; 쉽게 말해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술의 조형 원리. 디자인의 어원이 되었다.) 예술의 모범 사례로 여겨졌다. 이 그림에 대해 언급한 카스틸레오네의 시도 전한다. 카스틸레오네는 또한 라파엘로의 죽음을 소네트로 남겼으며 일부는 다음과 같다. '라파엘로여, 그대도 기묘한 재능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 토막난 로마를 바로잡고 전쟁과 화재와 오랜 시대로 찢어진 / 시체와도 같은 이 도시를 소생시켜 옛 영광을 되찾게 해주다가 / 하늘의 질투를 일으키고 죽음의 노여움을 사서 / 이미 주어진 자들 속에 끼어들 수 있게 되었고 / 또 긴 시간이란 발걸음이 있는데도 / 그대는 죽음의 법칙을 무시했으니 / 이다지도 비탄스러운가 / 그대가 젊음을 다 피어보지 못한 채 죽어갔으니 / 우리 청춘과 우리 자신도 죽어갈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주는구나.'[65] 이 초상화는 루벤스의 모사본도 있으며 렘브란트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드로잉이 남아 있으다. 렘브란트는 또한 비슷한 구도로 가슴에 한 손을 댄 에칭 자화상(1639), 1640년, 1659년의 자화상도 남긴다. 티치아노도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1520년에 '빈센조 모스티의 초상'(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 소장)을 그렸고, 앵그르도 1832년에 영향을 받은 'Monsieur Bertin 의 초상'(루브르 소장)을 그린다.[66] 1518-1519년 작품. 좌측의 인물은 라파엘 본인이다. 친구가 누구인지는 많은 설이 전하는데 가장 유력한 것은 제자 줄리오 로마노이다. 루브르 소장.[67] 1518-19년 작품.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소장. 모델은 라파엘로 공방의 학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줄리오 로마노의 작품으로 여겨져왔으나 최근 세부 분석에서 말년의 라파엘로의 붓칠이 있으며 조수의 도움으로 마무리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68] 'La Fornarina', 1520년 작품. 로마 국립 고대 미술관 소장. '젊은 여인의 초상'으로도 불린다. 팔찌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고 적혀있으나 라파엘로의 작품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줄리오 로마노가 라파엘로를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신화가 된 라파엘로의 연인이 빵집 딸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전설이 되어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것이라고 전해왔을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라파엘로의 연인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이야기도 있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그리는 벨라 돈나 테마의 일종이라는 설, 마녀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포르나리나라는 말은 1772년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오븐과 그의 파생어인 굽다, 빵 굽는 사람은 음행을 뜻한다. 빵집 딸이라는 이름은 사실 화가의 연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69] 1516년 작품.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소장. 이들은 라파엘로의 친구들이며 라파엘로가 선물로 주었다. 나바게로는 시인이자 역사가로 라파엘로와 동갑이다. 벰보 추기경이 비비에나 추기경에게 쓴 편지에서 라파엘로와 카스틸리오네, 그리고 이 두 명이 함께 여행하려 한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70] 시카고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가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를 위해 도안 해주었다. 르네상스 시기 판화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그림 오른쪽에 앉아있는 3명의 신은 수백년 후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에서 변형되어 나타나 논란거리가 된다. 라이몬디가 라파엘로의 모습을 묘사한 판화도 남아있다. 라이몬디는 이 작품 외에도 라파엘로의 많은 디자인을 판화로 옮겼다.[71] 1507년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으로도 불린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그림 준비를 위한 수많은 스케치가 남아있다. 그림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극적인 연출을 통해 부각하고 있다.[72] 1507-08년 작품. 피티 궁 소장.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그림이며 아직은 라파엘로가 최고 경지에는 오르지 못한 모습이다. 활력이 조금 부족하며 주제가 뚜렷하지는 않다. 다만 미완성 그림이라는 고려가 필요한데 당시 라파엘로의 능력은 최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아래 우측의 성 어거스틴의 팔을 뻗어 캐릭터를 연결하도록 유도하는 자세는 이후 로마의 라파엘로의 방 작업에서 발견되기도 한다.[73] 1511-12년 작품. 로마, 산 아고스티노 교회 기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영향을 받은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주문자인 요하네스 고리츠가 미켈란젤로에게 이 그림의 값을 너무 비싸게 쳐준 것 같다고 투덜대자 미켈란젤로는 그 값이면 그림의 무릎 가격 밖에 안되겠다고 대꾸하였다.[74] 1511-13년 작품. 로마의 '빌라 파르네시나'에 있는 가로 * 세로 225 * 295cm 의 프레스코화이다. 여기에는 이 그림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라파엘의 그림이 넘쳐난다. 바다의 님프인 갈라테아가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미술사가 곰브리치가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라파엘로는 그림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 그의 숙련된 솜씨로 인해 후대의 미술가들이 라파엘로를 그처럼 찬양했던 것이다.'[75] 1514-15년 작품. 볼로냐, 국립 미술관 소장. 훗날 '그리스도의 변모'의 윗부분의 하늘 채색을 예견케 한다. 색감이 풍부하며 우측 여성의 옷차림에서 라파엘로의 기교를 볼 수 있다. 바사리는 이 그림이 유명해지며 라틴어로 된 시가 많이 만들어졌다고 하며 두 줄만 인용하겠다고 했다. '라파엘로는 성녀 체칠리아의 얼굴을 그리고 넋을 불어넣었지만 다른 화가들은 다만 얼굴에 색칠을 했을 뿐이라네.' 괴테도 이탈리아 여행 중 이 그림을 보고 글을 남겼다. '나란히 선 다섯 성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그 태도가 너무나 완벽해 우리가 멀리 떠난다 해도 그림은 영원하기를 바라게 된다.'[76] 1515-16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 스타일이 확립되어 절정으로 가는 과정의 작품이다. 팔레르모, 산타마리아 델로 스파시모 수도원의 의뢰로 그려졌다. 로마에서 완성되어 운반되어 가던 중 배가 난파되어 선원과 모든 화물이 사라졌는데 이 그림만 손상 없이 제노바의 항구에서 회수되어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로 거대한 명성을 얻던 그림인데 1622년 스페인 총독이 펠리페 4세를 위해 구입하여 1633년 마드리드의 궁에 걸렸다가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져간다. 그리고 1822년 다시 스페인 왕가로 돌아왔다.[77] 1518년 작품. 피렌체, 피티 궁 소장. 40x29cm 의 작은 그림이다. 볼로냐 백작 에스콜라니의 저택에 있었다. 좌측 아래에 예언자 에제키엘이 작게 보인다. 복음사가들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천사에 둘러싸인 하느님의 모습인데 하느님은 영락 없는 제우스의 모습이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경험한 그리스, 로마인들의 석관에서 제우스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보인다. 몸 또한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있다.[78] 1518년 작품. 루브르 소장. 프랑수아 1세가 성 미카엘 기사단장이었기 때문에 미카엘을 묘사하였다. 우아한 성 미카엘의 모습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양측에서 모두 인기가 좋았다.[79] Madonna of the Rose. 1517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 그림의 최초 주문은 알려지지 않았다. 1667년에 마드리드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있던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림의 이름은 아래에 있는 장미에서 유래했지만 장미는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사화가 많이 남아있는데 장미와 탁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 좌측의 성 요셉은 이전부터 라파엘로가 그린 것 같지 않다는(아마도 제자인 파토레, 혹은 줄리오 로마노의 작업) 의견이 많았는데 최근 AI 분석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성모와 아기 예수, 세례 요한은 라파엘로의 작업이다.[80] 1518-19년 작품. 우피치 소장. 바사리에 따르면 야코포 베렝가리오 다 카프리 추기경의 요청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다른 문헌에 따르면 레오 10세에 의해 추기경에 선임된 폼페오 콜론나가 주문한 것이다. 후자가 사실이라면 성 요한은 레오 10세의 고향인 피렌체를 수호하는 오마쥬가 된다. 그림은 1589년에 처음으로 우피치의 문헌에 등장하며 라파엘로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81] 1518-20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 영국의 찰스 1세 등 여러 소장자를 거쳐 스페인의 펠리페 4세가 소장하게 되며 자신의 컬렉션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하여 진주라고 부르며 현재 이름이 되었다.[82] 1518년 작품. 루브르 소장. 레오 10세가 프랑수아 1세의 부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요청한 그림이다. 라파엘로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림 준비를 위한 드로잉도 남아 있지만, 대부분은 제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83] 1512-13년 작품.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 소장. 시스티나가 '식스투스'의 영어식 표현으로 '식스투스의 성모'라고도 하며 그림 좌측의 인물이 교황 식스토 2세이다. 성모의 얼굴은 연인 마르게리타로 추정된다. 식스토 2세는 율리오 2세와 같은 가문의 선조로 가문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졌다. 피아첸차의 산 시스토 성당이 이 성인을 모시고 있었는데 피아첸차가 율리오 2세를 지지하자 성당에 이 그림을 선물하였다. 1754년에 성당이 그림을 폴란드 왕에게 팔아 드레스덴으로 옮겨진다. 이후 독일과 러시아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엔제리너스 커피에서 많이 보았던 2명의 아기 천사가 그림 아래에 보인다. 엔젤리너스 커피 로고 디자이너가 이우일인데, 그답게 코믹한 리터칭을 가한 듯.[84] 'Transfiguration', 1520년 작품. 우리 말로는 '그리스도의 변모'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훗날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의 주문으로 프랑스 나르본 대성당의 제대화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바티칸 미술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 그림 중 하나로 '아테네 학당'과 함께 라파엘의 대표작이다. 천상과 지상을 분할하여 그렸으며 광선, 채색, 입체감 모두 완벽하고 신의 계시와 인간의 반응, 평온과 당혹이 서로를 부각한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의 키아로스쿠로를 연구하여 자신의 그림의 특징을 완성하게 된다. 라파엘로 사후 3년 동안 판테온의 그의 무덤에 걸려 있었으며, 이후에도 추기경이 그림을 너무 마음에 들어하여 나르본 대성당으로 보내지 않았고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으로 갔다가 나폴레옹이 1799년 이탈리아 침공 후 전리품으로 루브르에 가져간다. 라파엘로의 다른 20여 그림들과 함께 루브르의 대 갤러리의 가운데에 걸려있었으며 1810년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의 결혼을 기록한 벤자민 직스의 드로잉에도 보인다. 루브르에 전시된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을 보았고 그 중에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도 있다. 터너는 그림 구성의 강의 자료로 이 그림을 활용하기도 했다. 1815년 나폴레옹 패전 후 다시 이탈리아에 돌아왔는데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바티칸으로 왔다. 이 그림은 모자이크로도 만들어져 성 베드로 대성당 왼쪽 끝에 있다.[85] 'Disputa', 1509-1510년. 서명의 방에서 처음 그린 그림. 서명의 방은 인간 지식의 4면(철학, 종교, 시, 법)을 드러낸다. 이 그림은 종교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천국과 지상의 두 장면으로 구성된다. 하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후광에 둘러싸여 좌우에 성모와 세례 요한과 함께 가운데에 앉아있다. 가장 왼쪽부터 열쇠를 들고 있는 파란 옷을 입은 베드로, 그 옆의 아담, 펜으로 쓰고 있는 복음사가 요한, 리라를 든 다윗 왕, 보라색 옷의 성 로렌스가 있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금빛 갑옷을 입은 유다 마카베오, 녹색 옷의 스테판, 십계명을 든 모세, 흰 옷의 야고보, 칼을 든 아브라함, 그리고 책과 칼을 든 바울이 가장 우측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위에는 신이 천사들의 경외를 받고 있다. 지상은 제단이 가운데에 있고 의뢰인인 율리오 2세를 포함한 그레고리 1세, 식스투스 4세 등 교황들과 사보나롤라,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가 있다. 좌측 난간에 기대에 책을 들고 있는 머리가 벗겨진 사람은 브라만테고, 우측 난간 옆의 오렌지색 옷과 푸른 로브를 걸친 수염이 난 남자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 왼쪽의 월계관을 쓴 옆 모습의 사람은 단테. 그림이 최종 형태로 나아가는 드로잉 40여 점이 남아있다.[86] 1509-1511년. 서명의 방, '철학' 그림[87] 1509-1511년. 서명의 방에서 두번째로 완성된 '시' 그림이다. 이 방향의 벽에는 아폴론에게 헌정된 벨베데레 궁이 보이는 창이 있었다. 이 그림 중앙의 리라를 연주하는 것이 아폴론이다.[88] 1511년. '법' 그림이다. 원래 다른 그림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율리오 2세가 1510년 프랑스의 루이 13세 세력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려고 하였으나 전쟁에 패해 돌아오자, 교회법과 시민법의 제정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렸다.[89] 1511-1512년. 엘리오도로의 방. 구약에서 유래한 내용이며 우측에 성전의 보물을 탈취하기 위해 침입한 엘리오도로와 무리들이 쓰러져 있고, 화면 가운데에서 기도하여 엘리오도로를 쫓아내는 사제는 율리오 2세의 모습이다. 주인공이 배경에 작게 보이고 인물 또한 좌측의 정적인 인물들, 우측의 동적인 인물들을 밀집시켜 배치하여 아테네 학당에서 보여준 조화, 균형, 질서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고 있다. 좌측 앞의 교황의 가마를 든 사람 중 관객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데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이다.[90] 1512년. 엘리오도로의 방. 그림 중앙의 좌측에 앉아있는 보헤미아의 사제가 성체가 진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에 의뭄을 품자 그 순간 손에 든 성찬용 빵에서 주님의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도한 사건을 보여준다. 사제 맞은 편에는 율리오 2세와 그의 추기경, 스위스 용병이 그려져 있고 1512년부터 프랑스보다 교회에게 유리해지는 일련의 상황에 감사하다는 뜻을 담았다. 역시 교황의 요구에 들어맞는 그림을 맞추어줄 수 있는 라파엘로의 도상학적 능력을 보여준다. 굴뚝의 위치로 치우친 창문으로 인해 좌우비대칭인 환경을 능숙히 처리했다.[91] 1513-1514년. 엘리오도로의 방. 좌측은 대부분 라파엘로가 손수 작업하였고, 우측은 감독하에 제자들이 채색에 도움을 주었다. 이마에 흰 점이 있는 검은 말을 탄 것이 아틸라이다. 본디 레오 1세의 얼굴은 율리오 2세의 모습이었으나 레오 10세의 모습으로 라파엘로가 수정하였다.[92] 1514년. 엘리오도로의 방. 이탈리아 화가가 어두운 밤 빛의 효과를 묘사한 최초의 그림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세 장면을 보여준다. 신이 개입하여 베드로가 구출되는 모습은 사도행전과 교회를 빛의 전달자로 상징하여 교회의 승리를 뜻한다. 중앙에는 잠들어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난 천사, 우측에는 빠져나가는 베드로, 좌측에는 베드로가 사라짐을 발견한 간수들이 있다. 세 종류의 빛(달빛, 횃불, 천사의 빛)을 구별하여 그렸고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이 그림의 야경은 티치아노에게 영향을 미친다. 베드로는 율리오 2세의 모습을 하고 있다.[93] 이 방에서 라파엘로의 단독 작업은 '보르고의 화재' 하나이며 나머지 그림은 라파엘로의 밑그림과 총감독 아래에서 제자와 조수들에 의해 진행된다.[94] 1514-1517년. 보르고 화재의 방의 그림 중 하나. 847년 롱고바르도 족이 로마를 침략해 시가지를 불태울 때 레오 4세가 십자가로 불을 끈 기적을 묘사한다. 레오 10세가 교황 직에 있는 동안 실현하고자 한 그리스도교를 황폐화하는 전쟁의 불길을 끄는 것을 의미한다. 레오 4세의 얼굴을 레오 10세의 얼굴로 묘사하였다. 라파엘로의 후기 화풍의 출발을 알리는 그림으로 연극적인 투시법으로 여러 개의 시점을 활용해 그림을 연출한다. 주제와 동떨어진 인물도 보이며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보이는 근육질 사람들과 고대 조각상에서 따온 자세도 활용한다. 주제에서 벗어난 형태 자체의 표현을 중시하고 인위적이고 양식화된 장식성을 보이는데, 라파엘로가 르네상스를 완성시킴과 동시에 매너리즘의 탄생에도 기여하는 모습이다.[95] 1516-1517년. 보르고 화재의 방. 샤를마뉴가 레오 3세를 도와 다시 교황으로 복위시킨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추대되는 모습이다. 1515년에 프랑수아 1세와 레오 10세의 볼로냐 협약이 맺어져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내의 성직자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모습은 프랑수아 1세이며, 레오 3세의 모습은 레오 10세이다. 교황은 왕권은 결국 자신의 승인 아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내용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96] 1514-1515년. 보르고 화재의 방. 849년에 있던 사라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해전을 그렸다. 폭풍우로 인해 사라센의 배가 난파된 것이 레오 4세의 기도 덕분이라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97] 1516-1517년. 보르고 화재의 방.[98] 1515년 레오 10세의 주문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아랫벽에 걸리는 거대한 태피스트리 10개의 밑그림을 그렸다. 브뤼헤 공방 제작.[99] 전체가 걸린 것은 1500년대 후반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100] 그리스도의 변용, 폴리뇨의 성모, 오디 제단화와 함께 있다. 순환 전시하기 때문에 한번에 전체를 볼 수 없다. 10개가 모두 남아있으나 상태가 좋은 7개만 돌아가며 전시한다.[101] 밑그림(cartoon)과 좌우가 뒤바뀌어 있다.[102] 현재 남아있는 태피스트리 밑그림 7점이 전시되어 있다.[103] 라파엘로 태피스트리 밑그림 (Raphael Cartoons) 중 하나.[104] 내부 조각상의 디자인도 라파엘로가 한 것이다. 전면의 그림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것이다.[105] 천장 그림 2개는 각각 '큐피드와 프시케의 결혼 만찬', '신들의 회의'가 주제다.[106] 건물의 설계는 발다사레 페루치가 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큐피드와 프시케 로지아가 있으며, 좌측의 방에 갈라테아의 승리가 있다.[107] 라파엘로 로지아도 함께 보인다.[108] 1560년 Giovanni Battista Naldini 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