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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브루클린 네츠 No. 3 | |
<colcolor=#fff> 드라젠 페트로비치 Dražen Petrović | |
출생 | 1964년 10월 22일 |
유고슬라비아 SFR 크로아티아 SR 시베니크 | |
사망 | 1993년 6월 7일 (향년 28세) |
독일 덴켄도르프 | |
국적 |
(1964~1992) |
(1992~1993 / 사망) | |
신장 | 196cm (6' 5") |
체중 | 88kg (195 lbs) |
포지션 | 슈팅 가드 |
드래프트 | 1986 NBA 드래프트 3라운드 60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지명 |
가족 | 사촌 데얀 보디로가 |
소속 구단 | KK 시베니크 (1979~1983) KK 시보나 (1984~1988) 레알 마드리드 (1988~1989)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89~1991) 뉴저지 네츠 (1991~1993) |
1. 개요
NBA에서 활약했던 크로아티아 국적의 전 농구 선수. 포지션은 슈팅 가드. 유로 리그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으며 NBA에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으나 교통사고로 요절해 아쉬움을 남겼던, 동유럽 출신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하나였다.별명은 농구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The Mozart Of Basketball).
2. 선수 시절
2.1. 클럽
유고슬라비아(현재 크로아티아) 시베니크에서 태어난 그는 경찰관 요반 "욜레" 페트로비치와 사서 비세르카(옛 성은 미쿨란드라)의 둘째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트레비네 근처 자고라의 세르비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시베니크 근처 빌리체 출신 도서관 사서로 전통적인 보수적 크로아티아 가정에서 자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부부의 장남 알렉산다르는 농구를 처음 시작한 인물로, 이후 구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페트로비치 형제는 세르비아 농구 선수 데얀 보디로가의 육촌이다.13세에 페트로비치는 지역 클럽 시벤카의 청소년 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5세가 되자 그는 이미 클럽의 1군에 합류했고, 시벤카는 유고슬라비아 국가 1부 리그에서 자리를 잡았다. 젊은 페트로비치가 팀의 스타가 되면서 시벤카는 3단계 팬유럽 클럽 대회인 FIBA 코라치 컵 결승에 두 차례(1981-82, 1982-83) 올랐으나, 두 번 모두 프랑스 리그 클럽 리모주 CSP에 패했다. 1983년 18세의 페트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리그 1982-83 시즌 클럽 챔피언십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보스나 사라예보를 상대로 시벤카의 승리를 확정짓는 자유투 두 개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다음 날 유고슬라비아 농구 연맹은 심판의 판정 문제를 이유로 시벤카의 타이틀을 박탈했다. 이후 시벤카가 재경기를 거부하자 리그 챔피언십은 보스나에게 돌아갔다.
페트로비치는 시벤카에서 뛰는 동안 매 시즌 득점을 꾸준히 늘렸다. 1979-80 유고슬라비아 FFL 시즌에는 16경기에서 총 13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0.8점을 올렸다. 1980-81 시즌에는 20경기에서 39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2.0점을 기록했다. 1981-82 시즌에는 24경기에서 392점을 넣어 경기당 평균 16.3점을 올렸다. 1982-83 시즌에는 31경기에서 758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24.5점을 기록했다. 그는 시벤카 소속으로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서 총 91경기에 출전해 1,202점을 득점하며 경기당 평균 13.2점을 기록했다.
유고슬라비아 군에서 1년간 의무 복무를 마친 페트로비치는 형 아코와 함께 시보나 자그레브로 이적해 당시 유럽 최고의 백코트 듀오를 구성했다. 시보나에서의 첫 시즌에 그는 유고슬라비아 국내 리그 챔피언십과 유고슬라비아 내셔널 컵 타이틀을 모두 차지했다. 1984-85 유고슬라비아 FFL 시즌에서 페트로비치는 경기당 평균 32.5점을 기록했다.
1984년 12월 6일, 유럽 최고 클럽 대회인 FIBA 유럽 챔피언스컵(유로리그) 1984-85 시즌에서 그는 스페인 리그 클럽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44점을 기록했다. 특히 경기 후반에만 29점을 몰아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1985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리그 결승전에서도 36점을 올리며 시보나의 87-78 승리에 기여했고, 이 승리로 클럽은 첫 유럽 챔피언스컵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시즌 그는 15경기에서 총 463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30.9점을 올렸다.
1985년 10월 5일, 유고슬라비아 1부 연방 리그에서 열린 유니온 올림피야 류블랴나와의 경기에서 페트로비치는 시보나의 158-77 대승 속에 무려 112점을 기록했다. 그는 전반전에만 67점을 넣었으며, 경기 전체에서 필드골 40/60, 3점슛 10/20, 자유투 22/22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 112점은 유고슬라비아 1부 연방 리그 역사상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1962년 라디보이 코라치가 세운 74점의 이전 기록을 경신했다.
이 기록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었다. 올림피야 류블랴나는 선수 등록 관리 의무를 제때 이행하지 못해 성인 선수들이 출전할 수 없었고, 대신 청소년 선수들을 기용해야 했다. 클럽은 18세 이하 팀조차 보유하지 않았기에 16~17세 선수들로 급히 로스터를 구성해 경기에 나섰다. 시보나는 청소년 선수들과 함께 21세의 드라젠 페트로비치를 포함한 혼합 로스터로 경기에 나섰고, 페트로비치는 이 경기에서 코라치의 74점 기록을 깨며 112점을 올렸다. 그는 경기 전 “74점을 넘어서면 경기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5년 11월부터 페트로비치는 또 다른 고득점 선수이자 새로 영입된 슈팅 가드 단코 츠비예티차닌과 백코트를 이루기 시작했다. 츠비예티차닌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의무 복무로 원정에 나선 아코 페트로비치를 대신해 합류한 선수였다.
1985-86 유고슬라비아 리그 정규 시즌과 플레이오프에서 페트로비치는 30경기에 출전해 총 1,241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41.4점을 올렸다. 같은 시즌 그는 시보나와 함께 또 다른 유고슬라비아 내셔널 컵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6년 2월 7일 유고슬라비아 컵 경기에서 유니온 올림피야 류블랴나를 상대로 55점을 넣었고, 보스나 사라예보와의 결승전에서는 46점을 기록했다.
1985년 12월 4일, 이스라엘 슈퍼 리그 클럽 마카비 텔아비브와의 FIBA 유럽 챔피언스컵 경기에서 44점을 넣은 그는 같은 해 12월 11일 이탈리아 리그 챔피언 시막 밀라노를 상대로 47점과 25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어 1986년 1월 16일 스페인 리그 클럽 레알 마드리드전에서는 49점과 20어시스트를 올렸으며, 1월 22일 프랑스 리그 리모제와의 경기에서는 전반에만 연속 7개의 3점슛을 포함해 총 10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51점과 1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51점은 유로리그에서 기록한 그의 개인 단일 경기 최다 득점이었다.
페트로비치는 시보나와 함께 FIBA 유럽 챔피언스컵 2연패를 달성했다. 1986년 결승전에서 그는 22점을 올리며 아르비다스 사보니스가 이끌던 소련 프리미어 리그의 잘기리스 카우나스를 꺾는 데 기여했다. 1985-86 시즌 동안 그는 유럽 챔피언스컵 15경기에서 총 555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37.0점을 올렸다.
시즌은 시보나가 유고슬라비아 리그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KK 자다르에 패하며 끝났다. 개막전 승리 후 페트로비치는 원정 2차전에 출전하지 않았는데, 표면적으로는 경기 전 워밍업 중 부상 때문이었으나 홈 팬들 앞에서 우승을 차지하려는 의도였다는 비난도 받았다. 시보나는 2차전에서 패하며 돔 스포르토바에서 열린 3차전으로 승부를 넘겼지만, 유고슬라비아 리그 역사상 가장 큰 이변 중 하나로 기록된 이 경기에서 후반 두 자릿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더블 연장 끝에 패했다. 이 경기에서 페트로비치는 39점을 기록했으나 1차 연장에서 파울아웃되었다.
1986-87 유고슬라비아 FFL 시즌에서 페트로비치는 25경기에서 총 932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37.3점을 올렸다. 같은 시즌 시보나는 유럽 2부 대회인 FIBA 유럽 컵위너스컵에 참가했고, 그는 결승전에서 이탈리아 리그 스카볼리니 페사로를 상대로 28점을 넣으며 시보나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로써 페트로비치와 시보나는 3년 연속 유럽 클럽 챔피언십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6-87 FIBA 유럽 컵위너스컵에서 그는 8경기에서 총 270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33.8점을 올렸다.
Cibona와 함께 페트로비치는 1988년에 다시 유고슬라비아 내셔널 컵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7-88 유고슬라비아 FFL 시즌에서 그는 24경기에 출전해 총 860점을 넣으며 경기당 평균 35.8점을 기록했다. 같은 시즌 시보나는 유럽 3부 대회인 FIBA 코라치 컵에 참가했고, 그는 1987년 10월 14일 핀란드 리그 KTP 코트카와의 경기에서 62점을 기록했다. 시보나는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스페인 리그의 레알 마드리드에 패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12경기에서 총 401점을 넣으며 경기당 평균 33.4점을 기록했다.
시보나에서 4시즌 동안 그는 유고슬라비아 1부 연방 리그 106경기에서 총 3,911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36.9점을 올렸다. 유고슬라비아 컵 대회에서는 20경기에서 559점을 넣으며 경기당 평균 28.0점을 기록했다. 또한 3개의 팬유럽 클럽 대회에서는 50경기에서 총 1,689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33.8점을 올렸다.
시벤카와 시보나 시절을 합쳐 그는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페더럴 리그 197경기에서 5,113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26.0점을 올렸다. FIBA 유러피언 챔피언스컵(유로리그)에서는 30경기에서 1,018점을 넣어 경기당 평균 33.9점을 기록했다.
시보나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후, 그는 더 이상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페더럴 리그에서 새로운 도전을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NBA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이미 1986년 NBA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에서 지명했지만 미국행을 미루고 1988년 스페인 리그의 레알 마드리드와 약 4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스포츠법은 만 28세 이전에 해외 프로로 뛰는 것을 금지했으나, 그는 23세의 나이에 이적을 성사시켰다. 2014년, 당시 이적을 성사시킨 에이전트 호세 안토니오 아리사가는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문제는 적정 금액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고, 드라젠이 떠나면 28세 미만의 다른 선수들도 빠져나가 혼란이 올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그 법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곳에 뇌물을 줬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1989년 스페인 킹스컵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스페인 ACB 리그 결승 시리즈에서는 5차전 끝에 바르셀로나에 패했다. 1988-89 ACB 시즌 정규리그 최다 득점자로, 플레이오프를 포함해 47경기에서 총 1,327점을 넣으며 경기당 평균 28.2점을 기록했다. 이 시즌 그는 ACB 결승 단일 경기 최다 득점(42점)과 3점슛 8개 성공 기록을 세웠다.
레알 마드리드는 유럽 2부 대회인 FIBA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참가했다. 1989년 3월 14일, 이탈리아 리그 스나이데로 카세르타와의 결승전에서 페트로비치는 62점을 기록하며 유럽 클럽 대항전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그는 1986년 전체 60순위로 자신을 지명했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압박을 받으며 NBA 진출을 결심했다.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그를 자극했고, 시즌 종료 무렵 스페인을 떠나기로 했다. 블레이저스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계약을 최대 150만 달러에 매수하며 그의 합류를 성사시켰다. 페트로비치는 결국 1989-90 시즌을 위해 블레이저스에 합류했다.
블레이저스는 페트로비치를 뛰어난 슈터로 평가했지만, 가드로서의 민첩성과 수비에서 요구되는 발의 스피드가 부족할까 우려했다. 그들은 그를 주로 3점슛을 던질 수 있는 외곽 공격 자원으로 영입했다. 팀의 전술 속에서 그는 라인 뒤에서 패스를 받아 슛을 던지는 역할에 국한됐다. 하지만 그는 공격적으로 공을 운반하며 동료를 위해 찬스를 만드는 스타일이었기에 고정된 슈터 역할은 생소했다.
설상가상으로 포틀랜드는 이미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테리 포터를 주전 백코트로, 대니 영을 백업으로 보유하고 있어 그의 출전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유럽에서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선정 올해의 유럽 선수상을 수상하고 합류했지만, 주어진 역할 속에서 생산적인 플레이를 펼치기는 쉽지 않았다. 신인 시즌인 1989-90 시즌 그는 경기당 12분 출전에 그치며 평균 7.4점을 기록했다.
다음 시즌에는 베테랑 가드 대니 에인지가 합류하면서 그의 출전 시간은 경기당 7분으로 더 줄었다. 포틀랜드 이적 전 그는 “NBA에서 성공하는 데 유일한 장애물은 출전 시간 부족”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즌에서 그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이제 아델만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18개월은 너무 길었다. 내 가치를 증명하려면 떠나야 한다. 내 인생에서 벤치에 앉은 적은 없었고 포틀랜드에서도 그럴 생각은 없다”고 토로했다.
결국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시즌 중 덴버 너기츠와의 3자 트레이드를 통해 뉴저지 네츠로 이적했다. 이 트레이드에서 블레이저스는 다음 해 드래프트 1라운드 픽과 덴버에서 포틀랜드로 이적한 월터 데이비스를 받았고, 페트로비치는 네츠 유니폼을 입게 됐다.
1991년 1월 23일, 페트로비치는 뉴저지 네츠에 합류했다. 그는 1986년 이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팀에 입단했지만, 당시 팀에는 1990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신인 데릭 콜먼이 있었다. 그는 즉시 경기당 평균 20.5분의 출전 시간을 부여받았고, 남은 43경기에서 평균 12.6점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 수준의 분당 득점 비율을 보여주었다.
이듬해 케니 앤더슨이 합류하면서, 페트로비치-콜먼-앤더슨 조합은 팀의 미래를 이끌 “빅 3”로 주목받았다. 네츠에서 첫 풀 시즌을 보낸 1991-92 시즌, 페트로비치는 선발로 출전하며 단 한 경기도 빠지지 않았다. 미국 팬들 사이에서 “페트로”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는 1992년 3월 13일 보스턴 셀틱스전에서 필드골 성공률 65%, 3점슛 3개 전부 성공으로 39점을 올리며 팀의 110-108 승리를 이끌었다.
그의 투지와 노력, 공격적인 플레이는 그를 팀의 리더로 만들었다. 그는 평균 36.9분 동안 20.6점을 기록했고, 필드골 성공률 51%로 NBA 가드 중 최상위권에 올랐다. 그의 활약은 팀 성과로 이어져, 네츠는 전년 대비 14승을 더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992년 4월 23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1라운드 1차전에서 그는 플레이오프 커리어 하이인 40점을 기록했다. 넷츠는 시리즈에서 1승 3패로 탈락했지만, 그의 존재감은 확실히 각인됐다.
다음 시즌 그는 평균 22.3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 순위 11위에 올랐다. 1992년 12월 6일 주간 MVP에 선정되었고, 1993년 2월 4일 시애틀 슈퍼소닉스전에서는 연장 접전 끝에 커리어 최다인 53분을 뛰며 35점을 넣었다. 2년 연속 3점슛 성공률 45%를 기록했으며, 필드골 성공률 52%는 다시 한 번 NBA 가드 중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올-NBA 서드팀에 선정됐으나, 아쉽게도 1993년 올스타전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2.2. 국가대표
페트로비치는 15세에 터키에서 열린 18세 이하 발칸 챔피언십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유고슬라비아 주니어 대표팀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발칸 챔피언십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주니어 대표팀에서는 금메달, 성인 대표팀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했다. 1982년 불가리아에서 열린 FIBA 유럽 18세 이하 챔피언십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1984년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은 페트로비치가 유고슬라비아 성인 국가대표팀과 함께 참가한 첫 대규모 대회였으며, 그해 여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6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3위를 차지했으며, 소련과의 준결승전은 극적인 경기로 기억된다. 그는 이 대회에서 MVP로 선정되었다. 1987년 유로바스켓에서는 다시 동메달을 획득했으나, 유고슬라비아는 개최국이자 금메달을 차지한 그리스에 패했다. 같은 해 자그레브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그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과 함께 금메달을 차지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결승에서 다시 소련에 패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어난 시즌을 보낸 1989년, 그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과 함께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자그레브에서 열린 유로바스켓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그리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페트로비치는 득점 2위이자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다음 해,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출전 시간을 두고 고전하던 그는 1990년 FIBA 월드 챔피언십에서 다시 국가대표팀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을 꺾고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페트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155경기에 출전해 총 3,258점을 득점하며 경기당 평균 21.0점을 기록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독립한 크로아티아가 처음으로 참가한 하계 올림픽이었다. 페트로비치는 크로아티아 농구 국가대표팀의 리더로서 팀을 이끌었다. 조별 리그에서는 미국 드림팀에만 패했고, 준결승에서는 소련 해체 후 새롭게 구성된 팀을 상대로 클러치 자유투를 성공시키며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결승 초반 크로아티아는 기세를 올리며 한때 25-23으로 앞섰지만, NBA 스타들로 구성된 전설적인 미국 드림팀은 너무 강했다. 미국은 117-85로 승리했고, 경기 최다 득점자였던 페트로비치는 24점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크로아티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1992~1993년 동안 그는 40경기에 출전해 총 1,002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25.1점을 올렸다. 단일 경기 최고 득점은 1993년 5월 31일 에스토니아전에서 기록한 48점이었다.
유고슬라비아와 크로아티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의 기록을 합산하면, 그는 총 195경기에 출전해 4,260점을 득점하며 경기당 평균 21.8점을 기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득점력과 외곽 슈팅, 빠른 돌파력을 갖춘 역동적인 슈팅 가드로, 드리블 후 슛과 캐치 앤 슛 모두 능숙하게 소화하며 경기당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할 만큼 탁월한 공격력을 보여준 선수였다. 넓은 슈팅 범위와 빠른 릴리스, 강렬한 승부욕과 헌신적인 워크에식으로 잘 알려졌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 BQ가 뛰어나 패싱 능력으로 코트 전체를 리드하고 지휘하는데 강점이 있었다.
수비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수비력을 갖추고 있었고, 압도적인 공격적 기여도로 상대의 존경을 받았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All-NBA 서드 팀 1회 (1993) 유로리그 우승 2회 (1985, 1986) 유로리그 파이널 MVP 1회 (1985) 유로바스켓 우승 1회 (1989)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 1회 (1985) 유고슬라브 컵 우승 3회 (1985, 1986, 1988) 스페인 컵 우승 1회 (1992)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 2회 (1985, 1986) FIBA 세계 남자 농구선수권 MVP (1986)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 2회 (1986, 1993) 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 4회 (1986, 1989, 1992, 1993) FIBA 유로바스켓 MVP (1989) FIBA 선정 50인의 위대한 선수 (1991) |
5. 사망
1993년 여름, NBA 최고의 시즌을 보낸 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1라운드에서 탈락한 네츠를 떠나 페트로비치는 크로아티아 대표팀이 1993년 유로바스켓 예선을 치르던 폴란드 브로츠와프로 향했다. 당시 그는 네츠가 계약 연장을 제안하지 않은 것에 실망하며 팀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NBA 내에서의 낮은 인지도 때문에 리그를 떠나 그리스 클럽으로 이적하는 가능성도 언급했다. 실제로 그리스의 두 클럽은 그에게 3년 순수익 75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준비 중이었다.페트로비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환승편을 포기하고 당시 연인이었던 여성과 함께 차를 몰고 귀국하기로 했다. 이 여성은 몇 주 전 메도우랜즈 아레나에서 열린 경기 이후 그가 만나 교제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1993년 6월 7일 오후 5시 20분경, 독일 바이에른 주 잉골슈타트 근처 아우토반 9번 도로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비극이 일어났다. 그가 탑승한 폭스바겐 골프 차량은 세미트럭에 의해 가로막힌 도로에서 충돌 사고를 당했고, 조수석에 있던 페트로비치는 충격으로 차량 밖으로 튕겨져 심각한 두부 외상으로 사망했다. 당시 운전자는 헝가리 모델이자 농구 선수 클라라 잘란치(Klara Szalantzy)였으며, 또 다른 동승자인 터키 농구 선수 힐랄 에데발(Hilal Edebal)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두 사람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1993년 6월 12일, 자그레브에서 가톨릭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그의 무덤은 곧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성소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시보나 경기장은 ‘드라젠 페트로비치 농구장’으로 명명되었고, 자그레브·시베니크·부코바르 등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가 생겼다. NBA는 1993년 파이널 1차전에서 그를 위한 묵념을 올렸고, 네츠는 같은 해 11월 11일 그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페트로비치의 유산은 이어졌다. 1994년 디에고 마라도나는 자그레브의 그의 무덤에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헌정했고, 맥도날드 챔피언십 MVP 트로피는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2002년 그는 농구 명예의 전당에, 2007년에는 FI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6년 자그레브에는 드라젠 페트로비치 기념 센터가 개관해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2010년 ESPN 다큐멘터리 Once Brothers는 블라데 디바치와의 우정과 유고슬라비아 분열의 이야기를 담았다.
페트로비치는 여전히 크로아티아와 전 세계 농구 팬들에게 ‘농구의 모차르트’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 그는 자그레브시의 미그로비 묘지에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수많은 인물들[1]과 함께 묻혀 있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그의 묘지를 방문했으며, 그 중에는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 시절 그의 친한 동료였던 블라디 디박이 조문을 온 장면이 다큐멘터리 Once Brother에서 방영되었다.[2][3]
6. 반응
드라젠과 경기하는 건 정말 짜릿했습니다. 매번 경기할 때마다 그는 공격적인 자세로 임했습니다. 긴장하는 기색 없이, 제가 그에게 달려드는 만큼 그도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과거에도 멋진 경기가 몇 번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경기들은 짧은 경기였습니다.— 마이클 조던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훌륭한 선수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4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인데, 그가 없다면 농구는 세 걸음 뒤로 물러날 겁니다."
— 알렉산다르 "Aco" 페트로비치
"JFK, 존 F. 케네디 에 대한 속담이 있죠 . '있잖아, 조니, 우리는 널 제대로 알지 못했어.' 저는 드라젠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해요. 그와 함께 보낸 1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고, 제가 원했던 만큼 그를 제대로 알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척 데일리
"드라젠과 저는 아주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포틀랜드로 왔을 때 저는 그를 환영해 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그의 가족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그는 친구들과 농구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가 정말, 정말 열심히 훈련했기에 그를 정말 존경합니다. 매일 훈련할 때마다 그는 가장 먼저 체육관에 와서 가장 늦게까지 훈련장을 나섰습니다. 그런 헌신적인 선수라면 누구든 그를 존경해야 합니다."
— 클라이드 드렉슬러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비범한 젊은이였으며, 세계 농구 스포츠의 진정한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운동 유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국제 선수들이 NBA에서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구 스포츠에 대한 그의 공헌은 엄청났습니다. 우리 모두 그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 데이비드 스턴
7. 대표
아비다스 사보니스, 블라디 디박, 토니 쿠코치와 함께 동유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며 유럽에서 뛰던 시절 유럽의 마이클 조던이라 불리며 맹활약했고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대표팀으로 1986년 세계선수권 3위[4], 1990년 세계선수권 우승[5] 1988 서울 올림픽 은메달[6],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은메달[7]이라는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8. 여담
- 동시대의 슈팅가드였던 레지 밀러가 특히 높이 평가하던 선수였는데, Open Court란 토크쇼에서 자신이 상대했던 선수들 중 최고의 슈터라고 한 바 있다. 그런데 기묘한 평도 남겼는데 냄새가 너무 심해서 막기 힘들었다고도 평했다. 사실 치즈를 많이 먹는 백인들은 땀이 뻘뻘 나면 암내가 심하게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페트로비치는 음식도 미국식과 다른 동유럽이라 더욱 냄새가 심했을 것이다.[8]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드라젠 페트로비치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 ||
1984 | 1988 |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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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1990 |
| |
1987 | 1989 |
베스트팀 | |||
| 3rd : 1992-93 |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 |
드라젠 페트로비치 | |
헌액 연도 | 2002년 |
드라젠 페트로비치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등번호 44번 | ||||||||||||||||||||||
케빈 커너트 (1979~1982) | → | 드라젠 페트로비치 (1989~1991) | → | 하비 그랜트 (1993~1996) |
[1] 그중에서 한 명을 뽑는다면 초대 대통령인 프라뇨 투지만이 있다.[2] 이 다큐멘터리는 과거 형제처럼 지냈던 구 유고 선수들이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국가 분열을 거치며 어떻게 갈라서게 되었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디박과 페트로비치는 절친한 친구였으나 내전을 계기로 원수가 되었고, 페트로비치가 요절하며 관계 회복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2020년대의 NBA에도 많은 구유고 연방 출신 선수들이 뛰고 있으나 다행히 이들은 서로 자주 만나며 잘 지내는 듯.[3] 블라디 디박과 페자 스토야코비치는 세르비아, 토니 쿠코치와 디노 라쟈는 크로아티아 국적이다.[4] 팀은 3위였지만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5] 이때는 대표팀 동료 토니 쿠코치가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6] 아비다스 사보니스가 뛰는 소련 대표팀이 금메달을 차지했다.[7] 상대가 드림팀 1기였으니 도저히 답이 없었다. 크로아티아 대표팀의 에이스였지만 팀이 처절하게 발려버렸으니.[8] 식습관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체취가 심하다고 느낄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인들 중 별로 체취가 심하지 않은 사람도 미국인들이 느끼기엔 마늘 냄새가 다소 나는 경우가 있으며, 반대로 미국인들에겐 치즈 냄새가 많이 난다. 다른 문화권 사람을 만났을 경우, 그 문화권에서 많이 먹는 음식을 본인 문화권에서 별로 먹지 않는 경우 그 사람에게 고약한 체취가 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같은 아시아라도 (한국인 기준으로) 식습관 차이가 크지 않은 일본에 가면 냄새를 별로 느끼지 못하다가 동남아시아에 가면 식당 같은 데서 냄새가 많이 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