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얀 보디로가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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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000> 데얀 보디로가 Dejan Bodiroga | |
| 출생 | 1973년 3월 2일 ([age(1973-03-02)]세) |
| 국적 | |
| 출생지 | 클레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
| 신장 | 206cm |
| 체중 | 110kg |
| 포지션 | 파워 포워드 / 스몰 포워드 |
| 등번호 | 4, 10, 15 |
| NBA 드래프트 | 1995년 2라운드 51순위, 새크라멘토 킹스 지명 |
| 가족 | 사촌 드라젠 페트로비치 |
| 선수 경력 | 1989년 ~ 2007년 |
| 소속 | 프롤레타리아 (1989~1990) 자다르 (1990~1991) 트리에스테 (1992~1994) 올림피아 밀라노 (1994~1996) 레알 마드리드 (1996~1998) 파나티나이코스 BC (1998~2002) FC 바르셀로나 바스케트 (2002~2005) 비르투스 로마 (2005~2007) |
1. 개요
세르비아 출신의 전 농구 선수로,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였다.현 농구 임원으로, 현재 유로 리그 농구의 회장이다. 1998년과 2002년에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되는 골든 배지 상을 두 차례 수상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올림픽 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되었다. 2007년에는 FIBA 역대 유로스타 팀에 이름을 올렸고, 2018년에는 유럽 농구의 101대 거장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HoopsHype는 2021년에 역대 가장 위대한 국제 선수 75인 중 한 명으로 평가됐다. 2022년에는 그리스 바스켓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탈리아 리그, 그리스 리그, 스페인 리그라는 유럽 3대 국내 리그를 모두 석권한 드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선수 시절 별명은 ‘신(GOD)’, ‘보디 본드’, ‘화이트 매직’, ‘미스터 MVP’ 등 여러 별명으로 불렸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데얀 보디로가는 13세에 체계적인 농구를 시작했으며, 지역 농구 지도자 라데 프르불로프의 지도 아래 즈레냐닌의 마시나츠(세르보 미할리) 농구팀에 등록했다. 15세가 되던 해 키가 205cm까지 자라면서 1960년대 OKK 베오그라드와 SFR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미오드라그 니콜리치 감독의 눈에 띄어 빠르게 1군에 합류했다.국내 선수 생활은 17세 때 열린 마시나츠와 자다르 등이 참가한 친선 유소년 토너먼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경기에서 그는 32점을 기록하며 크레시미르 코시치의 눈에 띄었고, 코시치는 그를 자다르의 농구 캠프에 초대했다. 이후 보디로가의 가족을 설득해 자다르로의 이주를 허락받았다. 다만 그는 이미 보이보디나와 사전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1989년 가을 자다르로 옮겼을 때 바로 1군에 등록할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클럽 유소년 부문에서 요십 그르도비치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했고, 1년 후 슬라브코 트르니니치 감독의 지도 아래 정식으로 1군 선수단에 합류했다.
1군에서 한 시즌을 뛴 뒤, 임박한 전쟁으로 인해 자다르에서의 생활을 조기에 마감했다. 그의 멘토였던 코시치는 그가 새로운 클럽을 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원래 AEK와 올림피아코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두 클럽 모두 그가 그리스 시민권을 취득하는 조건으로만 계약을 제시했다. 그는 이 조건을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향해 보그단 탄예비치가 감독을 맡고 스테파넬 의류 회사의 재정 지원을 받는 신생 팀 스테파넬 트리에스테에 합류했다. 트리에스테에서 그는 처음으로 농구계 전반의 주목을 받았다. 1992년 여름 팀에 합류한 직후 30경기에 출전해 평균 21.3점을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으나,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경험이 풍부한 클리어 칸투에게 빠르게 탈락했다.
1993-94 시즌에도 그는 뛰어난 활약을 이어가며 트리에스테를 플레이오프에서 더 멀리 이끌었다. 그러나 Scavolini Pesaro와의 준결승 3차전에서 칼튼 마이어스의 버저비터로 시리즈를 1-2로 내주며 탈락했다. 같은 시즌 트리에스테는 FIBA 코라치 컵 결승에도 올랐지만, 조란 사비치, 월터 베리, 바네 프렐레비치가 주축이었던 테살로니키 PAOK에게 패했다. 시즌이 끝난 뒤 스테파넬은 후원팀을 올림피아 밀라노로 변경했고, 탄예비치 감독을 비롯해 보디로가, 그리고레 푸츠카, 알레산드로 데 폴, 다비데 칸타렐로, 페르디난도 젠틸레 등 주요 선수들이 함께 롬바르디로 이적했다.
보디로가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성장하며 팀 내 주도적인 역할을 이어갔다. 1994-95 시즌 올림피아는 전년도 트리에스테 시절과 마찬가지로 코라치 컵 결승에 올랐으나, 이후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스베티슬라프 페시치 감독이 이끄는 알바 베를린에게 패했다. 리그 플레이오프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프레드라그 다닐로비치가 이끄는 최종 우승팀 버클러 볼로냐에게 2-3으로 패했다. 이 시리즈는 보디로가와 다닐로비치 두 세르비아 스타의 개인적인 대결로 주목을 받았으며, 결국 경험 많은 다닐로비치가 승리했다.
1995년 여름은 보디로가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수년간의 국제 무대 공백을 끝내고 복귀를 준비하던 FR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대표팀은 알렉산다르 도르제비치, 블라데 디바츠, 자르코 파스팔리, 다닐로비치, 사비치 등 유럽 농구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아비다스 사보니스, 샤루나스 마르치울리오니스, 리마스 쿠르티나이티스, 아르투라스 카르니쇼바스가 버틴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유로바스켓 역사상 가장 화려한 결승전 중 하나를 치르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같은 해 보디로가는 1995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51순위로 새크라멘토 킹스에 지명되었다. 이듬해 킹스는 그의 동료가 될 뻔했던 페자 스토야코비치를 지명했지만, 보디로가는 NBA 진출 제안을 거절하고 유럽 무대에 남는 선택을 했다. 1995-96 시즌 그는 밀라노에서 첫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나, 코라치 컵에서는 에페스 필센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정규 시즌에서는 32경기에서 평균 23.3득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 선두에 올랐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준결승에서 비르투스를 3-1로 꺾은 후 팀시스템 볼로냐까지 제압했다. 같은 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FR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드림팀 III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97 시즌 보디로가는 시즌당 100만 달러의 제안을 받고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하며 국가대표팀에서 인연을 맺었던 젤코 오브라도비치 감독과 재회했다. 팀에는 베테랑 조 아를라우카스, 알베르토 에레로스, 미하일 미하일로프가 함께했으며, 스페인 ACB 리그 결승에서 알렉산다르 도르제비치, 예로드 무스타프, 아르투라스 카르니쇼바스가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와 맞붙었다. 바르셀로나가 3-2로 시리즈를 승리하며 마드리드는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다.
대표팀에서는 1997년 유로바스켓에서 또 한 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조별 리그에서는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처음으로 크로아티아와 맞대결을 펼쳤다. 정치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경기에서 알렉산다르 도르제비치가 극적인 3점슛을 성공시키며 유고슬라비아가 승리했다.
보디로가의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베네톤 트레비소로 떠난 오브라도비치 감독 없이 치러졌으며, 팀은 리그 준결승에서 TDK 만레사에게 패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1997-98 시즌 리그 MVP로 선정되며 개인적으로는 최고 시즌 중 하나를 보냈다. 같은 해 여름, 그는 FR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이는 그의 첫 세계선수권 타이틀이었다. 당시 25세였던 그는 무릎 부상으로 많은 시간을 뛰지 못한 도르제비치와 젤코 레브라차를 대신해 팀의 리더 역할을 수행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1998년 여름, 보디로가는 그리스 명문 클럽 파나티나이코스로 이적했다. 당시 클럽 회장 파블로스 지아나코풀로스는 유럽 제패를 목표로 팀을 재편하고 있었고, 보디로가는 디노 라자, 프라기스코스 알베르티스, 미하엘 코흐, “난도” 젠틸레, 팻 버크, 그리고 감독 슬로보단 수보티치가 포함된 팀 구성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되었다.
그 해 파나티나이코스는 그리스 리그에서 우승했으나 유로리그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거뒀다. 시즌 후 라자와 수보티치가 팀을 떠났고, 수보티치의 후임으로 보디로가와 오랜 인연이 있던 젤코 오브라도비치가 부임했다. 오브라도비치는 베네톤 트레비소에서 젤코 레브라차, 올림피아코스에서 조니 로저스, 마카비 텔아비브에서 오데드 카타쉬를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파나티나이코스는 1999-00 시즌 그리스 리그와 유로리그 트로피를 동시에 차지했으며, 유로리그 결승에서는 마카비 텔아비브를 꺾었다. 2001년에도 그리스 리그 정상에 올랐고, 파리에서 열린 수프로리그 결승에 진출했다. 이듬해 보디로가는 유로리그 파이널 포 MVP로 선정되었고, 팀은 킨더 볼로냐와의 결승에서 마누 지노빌리가 이끄는 상대를 89-83으로 물리치며 또다시 정상에 올랐다.
국제 무대에서도 그는 FR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리더로 활약하며 2001년 터키 유로바스켓과 2002년 인디애나폴리스 FIBA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2002년 대회에서는 8강에서 미국을 꺾고, 결승에서 아르헨티나를 연장 접전 끝에 제압하며 유고슬라비아 농구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증명했다.
2002년 여름 스베티슬라프 페시치 감독이 지휘하고 샤루나스 야시케비치우스, 그레고르 푸치카,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 등이 뛰던 스페인 리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클럽 역사상 첫 유로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두 차례 스페인 리그 정상에도 올랐다.
2005-06 시즌 이탈리아로 복귀해 로토마티카 로마에서 다시 한 번 페시치 감독과 손을 잡았다. 그는 ULEB 컵(현재 유로컵)에 참가했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이탈리아 컵 결승에서는 카르피사 나폴리에게 83-85로 패했다. 이탈리아 리그에서는 22승 12패로 6위를 기록했으며, 정규 시즌 평균 15.7득점을 올렸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우승 후보 몬테파스키 시에나를 상대로 첫 경기 패배 후 내리 세 경기를 잡아내며 시리즈를 3-1로 승리했다. 그러나 2006-07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시에나와 맞붙어 이번에는 반대로 탈락했고, 보디로가는 시즌 종료 후인 2007년 6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보디로가는 SFR 유고슬라비아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1990년 FIBA 유럽 U-18 챔피언십에 출전했고, 이어 FIBA U-19 월드컵에도 참가해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성인 무대에서는 1991년 아테네에서 열린 지중해 게임 1라운드에서 SFR 유고슬라비아 성인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다. 이후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FR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며 3회의 하계 올림픽(1996, 2000, 2004), 2회의 FIBA 월드컵(1998, 2002), 5회의 유로바스켓(1995, 1997, 1999, 2001, 2005)에 꾸준히 출전했다.
그는 국가대표 경력에서 EuroBasket 1995 금메달,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EuroBasket 1997 금메달, 1998 FIBA 세계선수권 금메달, EuroBasket 1999 동메달, EuroBasket 2001 금메달, 2002 FIBA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포함한 화려한 메달 컬렉션을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1997년과 1999년 EuroBasket 올 토너먼트 팀에 선정되었고, 1998년에는 FIBA 월드컵 MVP를 수상하며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러나 EuroBasket 2005에서는 대회 우승 후보로 평가받던 팀이 1차 예선 라운드에서 프랑스에게 홈 코트에서 패해 조기 탈락하는 참사를 겪었고, 이 대회를 끝으로 보디로가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당시 젤코 오브라도비치 감독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선수단 내부 갈등이 심각했다고 폭로하며 팀의 몰락 원인을 지적했다.
3. 임원 경력
2007년 6월 프로 농구 선수 생활을 마친 보디로가는 곧바로 이탈리아 클럽 비르투스 로마의 단장으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이 직책은 2009년 6월까지 이어졌다.2010년 4월에는 동료이자 전 선수였던 젤코 레브라차와 함께 인디애나주 카멜에 본사를 둔 월드와이드 어소시에이츠(Worldwide Associates LLC)를 상대로 투자 사기 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람은 각각 4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회사에 맡겼으나, 해당 회사가 이를 전통적인 증권이 아닌 투기성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는 세르비아 농구 연맹(KSS)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2014년 6월에는 FIBA 유럽 경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015년 2월에는 FIBA 유럽 업무에 전념하기 위해 세르비아 농구 연맹을 떠났다.
2022년 5월에는 조르디 베르토메우의 후임으로 유로리그 회장직을 맡을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고, 같은 해 9월 14일 공식적으로 유로 리그의 새로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올어라운드 포워드로, 포워드임에도 포인트 가드처럼 공을 다루고 경기를 조율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을 갖춘 선수였다. 1번부터 3번 포지션까지 소화할 수 있는 전술적 유연성을 지녔으며, 폭발적인 운동 능력 대신 뛰어난 농구 IQ와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특히 하프코트 세트 플레이에서 상황 판단과 공간 창출, 그리고 침착한 경기 운영으로 팀 공격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공격에서는 포스트업과 미드레인지 플레이가 강점이었다. 2~3번 포지션임에도 포스트업 기술이 뛰어나 작은 수비수를 상대로 득점을 만들어냈고, 세밀한 풋워크와 페이드어웨이 점퍼를 활용한 미드레인지 득점 능력이 탁월했다. 볼 핸들링이 부드럽고 안정적이었으며,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로 동료들을 살리는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뛰어났다. 폭발적인 스피드 대신 리듬과 타이밍으로 수비를 무너뜨리는 슬로우 템포의 공격 스타일은 유럽 농구 특유의 전술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클러치 상황에서도 강한 면모를 보였으며, 큰 경기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결정적인 순간 득점과 플레이를 만들어내 ‘빅 게임 플레이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운동 능력이 압도적인 타입은 아니었고, 빠른 가드를 상대로 한 수비에서 한계가 있었으며, 외곽 슛은 꾸준했지만 전형적인 3점 스페셜리스트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종합적으로 그는 뛰어난 BQ, 포스트업, 미드레인지, 패싱, 경기 운영 능력으로 상대를 압도한 선수였으며, 유럽 농구 역사에서 올어라운드 플레이메이킹 포워드의 표본으로 불린다.
5. 수상 내역
유로리그 우승 3회 ( 2000 , 2002 , 2003 )유로리그 파이널 포 MVP 2회 수상 ( 2002 , 2003 )
3회 올 유로리그 퍼스트 팀 ( 2002 ~ 2004 )
FIBA 역대 유로스타 팀 (2007)
유로리그에 기여한 50인 (2008)
유럽 농구의 101대 거장 (2018)
유로리그 2000-2010 올 디케이드 팀 (2010)
유로리그 2000-2010 10년의 선수 (2010)
유로리그 25주년 기념 팀 (2025)
유로리그 탑 16 MVP ( 2002 )
4× FIBA 유로스타 (1997–1999, 2007)
2× ULEB 올스타 (1993, 1994)
FIBA 사포르타 컵 챔피언(1997)
유고슬라비아 최고 선수 2명 (1998, 2002)
유고슬라비아 올림픽 위원회가 선정한 최우수 스포츠맨 2회 수상 (1998, 2002)
리가 ACB 챔피언 2회 우승 (2003, 2004)
스페인 슈퍼컵 우승 (2004)
스페인 컵 우승 (2003)
리가 ACB MVP (1998)
리가 ACB 파이널 MVP (2004)
올리가 ACB 퍼스트 팀 (2004)
스페인 슈퍼컵 MVP(2004)
스페인 컵 MVP (2003)
리가 ACB 올스타 3회 수상 (1996, 1997, 2003)
레가 세리에 A 챔피언(1996)
이탈리아 컵 우승 (1996)
2회 이탈리아 올스타 (1993, 1994)
그리스 리그 우승 3회 (1999–2001)
그리스 리그 MVP (1999)
그리스 리그 파이널 MVP 2회 수상 (1999, 2000)
그리스 올스타전 MVP(1999)
그리스 리그 어시스트 선두 (2000)
그리스 올스타 3회 (1998, 1999, 2002)
그리스 리그 명예의 전당 (2022)
FIBA 월드 챔피언십 MVP ( 1998 )
FIBA U-19 월드컵 MVP ( 1991 )
6. 여담
- 독실한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다.
- 아버지는 트레비네 인근 보디로게 마을 출신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북쪽으로 이주한 헤르체고비나 이주민의 일원이었다.
- 2003년 7월 13일 그는 오랜 연인인 이바나 메디치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은 2004년에 첫 아이를 품에 안았다.
- 크로아티아 농구 전설 드라젠 페트로비치와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의 사촌으로, 그의 친할머니와 페트로비치 형제의 친할아버지가 남매 사이다.
- 선수 시절 클럽에서 뛴 적은 없지만 파르티잔의 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종종 경기를 관람했다. 또한 그룹 세븐 어린이 재단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기도 하다.
- 두 개의 서로 다른 국가 소속 클럽과 함께 유로리그 챔피언십을 제패한 소수의 선수 중 한 명이다.
- 세르비아에서는 소탈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존경받았으며, 특히 파나티나이코스 소속 시절 올림피아코스와의 라이벌전에서 보여준 강렬한 열정으로 그리스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