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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미언 더프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1.1. 블랙번 로버스 FC
1996-97 시즌, 그는 레스터 시티 FC전에서 약관의 나이인 18살의 나이로 데뷔했다. 최종라운드에서 MOM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다음해인 1997-98 시즌부터 풀타임 주전 윙어로 입지를 굳히게 되고 리그에서 4골을 기록했다. 다음해에 자신의 소속팀인 블랙번이 강등하자 팀에 남아 2001년, 블랙번이 다시 프리미어 리그에 승격하는데 공헌했다.
2001-02 시즌에는 블랙번이 풋볼 리그 컵에 우승하는데 일조했고, 로버스와 4년 재계약을 맺었다.
2002-03 시즌에는 11골을 기록하며 블랙번에서의 커리어 하이 기록을 세웠고, 팀이 UEFA컵에서 인상적인 성적을 내는데에 공헌했다. 이 공로를 인정 받아 더프는 UEFA에서 선정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2. 첼시 FC
당대 최고의 날개라인이라 불렸던 우 더프, 좌 로번 시절 |
2002-03 시즌의 활약으로 유수의 빅클럽들이 더프를 눈여겨 보았는데, 그 중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인수로 빚을 모조리 청산하고 도리어 엄청난 자금력을 손에 쥐게 된 첼시가 2003-04 시즌 더프를 17m의 이적료로 영입했다. 그리고 2003년 8월,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슬로바키아의 팀인 MSK 질리나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그 경기에서 비록 골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센세이션한 활약과 시원시원한 돌파력으로 언론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는 첼시에서의 데뷔골을 2003년 9월, 울버햄튼과의 리그 경기에서 기록하고, 시즌 23경기에 출장해 5골을 기록하는 상대적으로 이적료에 비해선 저조한 활약을 보냈다. 첼시는 그 시즌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래 최고의 성적인 2위에 올라섰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4강을 기록하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지만 무관에 그치자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을 경질시킨다.
2004-05 시즌, '스페셜 원' 주제 무리뉴가 첼시에 도착하고, 후술하듯 더프와 최고의 호흡을 보여준 네덜란드의 떠오르는 신성 아르옌 로벤이 스쿼드에 합류하자, 모두 아시다시피 첼시는 엄청난 포스를 보이면서 95점의 승점, 단 15점의 실점[1]으로 우승을 거둔다. 무리뉴는 4-3-3 역습 축구를 즐겨 사용했고 전술의 중심엔 타겟맨 디디에 드록바, 라이트 윙 더프와 레프트 윙 아르연 로벤, 그리고 수비라인을 보호하는 클로드 마켈렐레, 중원 유틸 프랭크 램파드, 그리고 원톱에서 2선으로 내려온 아이두르 구드욘센의 3미들, 15실점이라는 수비력을 자랑하던 윌리엄 갈라스-존 테리-히카르두 카르발류-파울루 페헤이라로 이어지는 철의4백라인과 그 뒤로 골대를 지키는 페트르 체흐가 있었다. 그 중 백미는 우 더프 좌 로벤 라인이었는데, 이 둘은 폭발적인 스피드, 환상적인 시너지와 스위칭 플레이로 상대팀의 혼을 빼놓았다.
2005-06 시즌에도 철의 포백[4]의 건재함과 강력한 역습을 뽐내면서 첼시는 구단 창단 100주년에 뜻깊은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시즌 초반까지는 좌 로벤- 우 더프 라인이 건재했지만 시즌 중반을 넘으면서 조 콜이 제대로 포텐을 터트리면서 더프가 주전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조 콜의 존재때문만이 아니라 본인도 후반기 들어서면서 부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첼시에서의 미래가 불확실해보였다.
이적 후 11번이 공번이 되자 디디에 드록바가 물려받았다. 물론 드록바는 2004년부터 첼시 선수였고, 더프가 팀을 떠나기 전까지는 15번을 달고 뛰었다.
여담이지만, 은퇴 후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커리어에서 가장 후회한 일이 첼시를 떠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더프가 떠난 직후 시즌인 2006-07 시즌에는 부상으로 시즌을 거의 반정도 날려버린 조 콜이나 여전히 벤치신세였던 숀 라이트필립스 등 윙어 포지션 선수들이 대부분 부진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나마 크랙역할을 담당해줬던 아르옌 로벤도 새로 영입된 안드리 셰브첸코를 기용하기 위해 주로 후반에 조커로 기용되거나 혹은 부상때문에 자주 출전을 하지 못했다. 시즌 중반 이후부터 무리뉴가 결국 셰브첸코를 간간히 제외시키며 다이아몬드 4-4-2에서 4-3-3 포메이션으로 팀의 전술을 이전처럼 바꿔놨을때도 부상에서 복귀했던 조 콜이 극심한 부진을 보이자 팬들은 좌-로벤 우-더프 날개라인을 굉장히 그리워했다.
1.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상으로 먹튀가 되어버렸고, 강등 확정 자책골까지 넣으며 더프의 최대 흑역사로 남은 시절이다.
2006년 5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로부터 영입되어 9월 웨스트햄 원정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어 2:0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11월 무릎 부상을 당하며 4개월간 아웃되었고, 3월에 부상에서 복귀했으나 4월 포츠머스와의 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하며 시즌을 조기 마감하였다. 2006-07 시즌 기록은 겨우 22경기에 출장하여 1골이라는 초라한 성적. 2007-08 시즌도 부상으로 16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다.
2008-09 시즌은 그야말로 커리어 최악의 시즌. 2008년 10월 7라운드 에버튼 원정에서 2:2 동점골을 넣어 약 2년 만에 골을 신고했다. 12월 토트넘과의 홈경기에서 종료 직전 결승골을 넣었다. 2009년 2월 25라운드 웨스트 브롬 원정에서 경기시작 2분 만에 벼락같은 선제골을 넣으며 팀의 3:2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뉴캐슬은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고, 임시감독 조 키니어는 심장 이상으로 감독직을 비워야 했다. 강등 위기 상황에서 뉴캐슬의 레전드 앨런 시어러가 임시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앨런 시어러 아래에서 더프는 레프트백에서 뛰었다. 뉴캐슬의 강등 여부는 최종전 아스톤 빌라 원정에 달려있게 되었는데, 같은 시간 헐시티는 맨유와의 홈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헐 시티가 맨유에 실점을 했고, 뉴캐슬은 무승부만 거두어도 프리미어 리그에 잔류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가레스 배리의 중거리슛이 더프의 몸에 굴절되며 뉴캐슬의 골망을 흔들었고,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더프의 자책골을 만회하지 못하며 0:1 패배, 결국 뉴캐슬은 16년 만에 2부리그 강등이 확정되었다.
더프는 팀에 남겠다는 의사를 비추었고, 2009-10 시즌 챔피언십 1라운드 웨스트브롬 원정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1:1 무승부를 거두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그 경기가 뉴캐슬에서의 마지막 경기였고, 그 골이 뉴캐슬에서 마지막 골이었다.
1.4. 풀럼 FC
2009-10 시즌, 더프는 강등된 뉴캐슬을 떠나 계약기간 3년, 400만 파운드에 풀럼에 입단했다. 풀럼의 감독은 그의 블랙번 시절 감독이었던 로이 호지슨. 풀럼에 입단한 지 얼마 안되어서 9월 4라운드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 2:1 역전골을 득점하며 팀의 역전승에 크게 일조하였다. 12월 맨유에 3:0에 대승을 거둘 때 팀의 세 번째 골을 득점하였다. 풀럼에서의 첫 시즌은 32경기 6골로 매우 좋은 시즌을 보냈다. 더불어 풀럼은 UEFA 유로파 리그 결승까지 진출하였다.[5]
1.5. 멜버른 시티 FC
2014년 6월, 더프는 호주의 멜버른 시티와 1년 계약을 맺었다. 시드니와의 데뷔전에서 다비드 비야의 A 리그 첫 골을 어시스트했다. 뉴캐슬 제츠에 5:2에 승리를 거둘 때 리그 첫 골을 기록했다. 아일랜드 리그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하기 위해 멜버른 시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1.6. 샴록 로버스 FC
2015년 7월 14일, 더프는 아일랜드 프리미어 디비전의 샴록 로버스와 계약을 하고 자신의 연봉을 기부하기로 했다. 샴록 로버스 소속으로 9경기를 뛴 후 2015년 12월 21일 은퇴를 발표했다.
[1]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소 실점이다.[2] 이 경기에서 호나우지뉴가 자신의 인생골 중 하나를 넣기도 했다. 호나우지뉴 항목 참조[3] 로만의 공격 축구 사랑은 옛날부터 유명하였으며 포르투 시절 공격적인 4-3-3 축구를 구사해오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나, 나폴리에서 사리볼이라는 특유의 점유율 축구를 구사한 마우리치오 사리를 데려왔던 것도 첼시에게 공격 축구를 입히기 위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빌라스보아스는 첼시에서 대실패를 하며 경질되었고 이는 로베르토 디 마테오 임시 감독의 첼램덩크 챔스 우승의 발판이 된다. 또한 사리 역시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일구어 냈지만, 은골로 캉테에게 맞지 않는 롤을 부여하거나 조르지뉴가 PL의 압박에 공략 당하는 등 한계점을 명확히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의 이탈로 후임을 찾던 유벤투스의 오퍼를 수락하며 첼시와 꺼림직한 이별을 하는 등 첼시의 공격 축구는 그 끝이 참담했다.[4] 윌리엄 갈라스, 존 테리, 히카르두 카르발류, 파울루 페레이라[5] 아쉽게도 AT 마드리드에게 패하며 우승을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