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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공산 전투 관련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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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팔공산(八公山)2.2. 왕산(王山)2.3. 일인석(一人石)2.4. 독좌암(獨坐巖)2.5. 파군재(波軍岾)2.6. 해안(解顔)2.7. 반야월(半夜月)과 안심(安心)2.8. 실왕리(失王里)2.9. 미리사(美理寺)2.10. 살내천 전탄(箭灘)2.11. 무태(無怠)2.12. 연경(硏經)2.13. 나발고개2.14. 탑들2.15. 지묘동(智妙洞)2.16. 불로동(不老洞)2.17. 안일사(安逸寺)2.18. 안지랑2.19. 왕굴2.20. 임휴사2.21. 검사동2.22. 입석동2.23. 왕선 고개2.24. 군위

1. 개요

대구광역시의 지명들 중에서는 후백제고려의 최대 격전 중 하나였던 공산 전투에서 기인한 이름들이 많다. 당장 유명한 팔공산부터가 원래 이름이 공산이었던 것을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해 왕건의 여덟 장수가 죽었다고 해서 후일 바꾼 것이다. 아래는 공산 전투에서 유래한 지명 중 현재까지 남은 지명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전부 믿을 수 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만큼 공산 전투가 이 일대 지명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1]
<rowcolor=#fff> 파일:대구광역시 휘장_White.svg 대구광역시 공산 전투 관련 지명
팔공산(八公山) 왕산(王山) 일인석(一人石) 독좌암(獨坐巖) 파군재(波軍재) 해안(解顔) 반야월(半夜月)
안심(安心) 반월당(半月堂) 실왕리(失王里) 미리사(美理寺) 살내천 전탄(箭灘) 무태(無怠) 연경(硏經)
나발고개 탑들 지묘동(智妙洞) 불로동(不老洞) 안일사(安逸寺) 안지랑 왕굴
임휴사 검사동 입석동 왕선(王建, 王先- 後三國 統一- 契機) 고개 군위

대부분 팔공산이 있는 동구 지역이다. 이 외에도 대구광역시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

2. 목록

왕건의 도주로를 복원하여, 지묘동 신숭겸장군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 길(팔공산 올레길과는 다름)이 만들어졌다. 관련 기사1, 관련 기사2

태조 왕건 162회에서 일부인 팔공산, 왕산, 염불암, 일인석, 파군재, 살내, 실왕리, 장군수, 은적암[2]이 나왔다. 대본

2.1. 팔공산(八公山)

동수회전의 배경이 된 공산이 조선시대 때 팔공산이란 이름이 돼 지금도 팔공산으로 불린다. 팔공산이란 이름의 유래에 몇 가지 설이 있는데,
  • 1. 왕건신숭겸, 김락 등 8명의 충성스러운 장수가 순절해 팔공산이라 이름했다.
  • 2. 공산현 주변 8개 읍락 때문에 팔공산이라 이름했다.
  • 3. 모화사상의 조선시대였으므로 중국 5호 16국 시대의 비수 전투의 격전지였던 팔공산의 이름을 차용했다.
이렇게 3가지를 들 수 있다. 1번설은 순절 장수가 신숭겸, 김락으로 2명이 주로 거론될 뿐이므로 신빙성이 낮고, 2번설은 공산동 주변에 8개 읍락이 조선 시대까지 존재한 적 없어 3번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진동진의 대회전이 고려후백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된 바 있다.

2.2. 왕산(王山)

지묘동 신숭겸 장군 사당인 표충사의 뒷산인데 적병에 포위되었던 왕건이 이 산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세 번 만에 피신한 곳이다. 그래서 왕건이 죽을 것을 이 산 때문에 살았다 하여 왕산이라 했다고 한다.

2.3. 일인석(一人石)

태조 왕건왕산을 거쳐 피신한 곳이 동화사 뒤의 염불암이다. 여기 일인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왕건이 거기 숨어 앉으니, 수도하던 도승이 첫눈에 왕건인 줄 알고, 그에게 “이 자리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 내려오라”고 했더니, “내가 바로 왕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승은 절을 하고 벽진군으로 가는 길을 알려줬다. 그 후 염불암 옆의 그 바위를 왕건이 혼자 앉아 있었다 하여 일인석이라 부른다고 한다.

2.4. 독좌암(獨坐巖)

"독지바우"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봉무동 노인회관 북쪽 5m 지점의 개천가에 있다. 이는 태조 왕건이 지묘에서 참패하여, 충신 명장을 잃고 왕산으로 달아나서, 팔공산의 염불암 옆 일인석에 앉아 있다가, 다시 파군재를 넘어 봉무동에 있는 독좌암이란 바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2.5. 파군재(波軍岾)

봉무동에서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고개를 가리키는데, 신숭겸 장군의 군사가 1차로 견훤군에 패해서 흩어진 곳으로 알려진 파계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랫 파군재라 하고, 2차로 패한 동화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윗 파군재라 한다. 파군재삼거리에는 거대한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있으며, 대구외곽순환고속도로파군재IC가 여기서 명칭을 따왔다.

2.6. 해안(解顔)

불로동 마을 앞을 해안이라 하는데, 동촌면이라 하기 이전에 해안면이라 했다. 태조가 패잔병을 이끌고 들판을 지나면서 몹시 걱정했는데, 마침내 무사히 통과하여 수심이 가시고 얼굴을 펼 수 있었다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해안역이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2.7. 반야월(半夜月)과 안심(安心)

왕건이 견훤에 쫓겨 해안 땅을 거쳐 지금의 반야월에 이르니, 밤은 반야(한밤중)이고 달이 떠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 곳에 와서야 겨우 안심했다고 하여 안심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3] 반야월역안심역이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2.7.1. 반월당(半月堂)

왕건의 도주경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의 북부에 있는 파군재 일대에서 전투 후 패배하여 남쪽의 안심과 반야월지역을 거쳐 수성구와 남구 일대에 있는 사찰들을 거쳐 칠곡방면으로 도주했을 것이라 추정 된다.관련논문 따라서 현 대구 중심지에 위치한 반월당으로 도주를 간 게 아니라 오히려 대구 중심을 피한 경로로 간 것이라 추정 된다. 이러한 오해가 생긴것은 실제 왕건이 방문한 반야월의 지명유래와 반월당의 반월이 반달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반월당의 유래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인이 운영한 백화점인 반월당이 유래가 되어 상호가 지명이 된 케이스다.대구광역시 지명유래

2.8. 실왕리(失王里)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왕건이 나무꾼으로부터 주먹밥을 얻어먹고 허기를 면했다는 곳이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 하고 와 보니 이미 그가 떠났고, 주먹밥을 줬던 이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땅을 쳤다고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와서 수치스러운 이름이라 하여 ‘시량’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하며, 변음되어 ‘시랭이’, ‘시랑리’라 불리기도 한다.

2.9. 미리사(美理寺)

이 곳의 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장군이 각각 왕건복지겸으로 변장해 그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고 장렬히 전사했던 곳이다. 그래서 왕건이 이곳에 절을 세워 연등을 하고 두 장수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2.10. 살내천 전탄(箭灘)

고려와 후백제의 군대가 개울 양쪽에서 서로 대치하여 격전을 치를 때 쏘는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2.11. 무태(無怠)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을 지나 연경동 및 지묘 3동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서변동 일대를 지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고 해서, 지금도 이 지방은 무태(無怠)라고 불려지고 있다. 행정동인 무태조야동 역시 옛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2.12. 연경(硏經)

왕건이 연경동 부근에 이르렀을 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와 감탄한 마을이라 하여 연경(硏經)이라 불려 진다고 한다.

2.13. 나발고개

진군을 계속하면서 지금의 지묘 3동에서 지묘 1동으로 가는 고개에서, 적진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고 하여 나발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의 군사가 왕건의 군사를 둘러싸고, 쳐들어가며 나팔을 불었다고 해서 나발고개라고도 하고, 왕건의 군사를 깨뜨린 견훤 군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2.14. 탑들

지금의 지묘 1동 앞들을 탑들이라고 하는데, 옛날 동수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장군의 원찰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있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2.15. 지묘동(智妙洞)

왕건을 위기에서 구한 신숭겸의 지혜가 오묘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곳에는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데 그 쪽 주민들은 신숭겸 이름을 이순신 이름보다도 더 자주 듣고 자란다. 근처 학교 교가에도 언급될 정도. 드라마 태조 왕건이 한창 인기있을 때는 신숭겸 장군의 전사를 재현하는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후삼국시대 갑옷으로 무장한 수 백 명의 인원[4]까지 동원한 대형 축제였다.

2.16. 불로동(不老洞)

왕건이 도망치다가 이 곳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가고, 아이들만 남아 있어 붙여졌다[5]. 또는 노인들은 피난가고 젊은이들만 남아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바리에이션 중 하나로는 왕건이 불로동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받고는 이 곳 사람들 모두 늙지 않고 무병장수하길 기원한다고 덕담을 해서 유래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또는 왕건이 견훤에게 패하여 도망치다 문득 뒤돌아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늙은 병사들은 다 낙오하고 젊은 병사들만 겨우 따라오고 있더라 해서 불로동이란 얘기도 전해진다.

2.17. 안일사(安逸寺)

대구 앞산에 있는 절. 왕건이 반월당을 거쳐 이 곳 절에 이르렀는데, 이곳의 승려가 왕건을 극진히 대접하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 편안하게 모셨다. 왕건을 비로소 이 곳에서 안일을 맛보았다고 하여 후에 이 절을 안일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2.18. 안지랑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이 골짜기에 숨어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갔다고 한다. 안지랑역이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2.19. 왕굴

대구 앞산에 있는 동굴이다. 공산전투에서 패해 견훤에게 쫓긴 왕건이 3일 동안 숨어 지냈던 곳이다.

2.20. 임휴사

달서구 앞산에 있는 이다. 일설에 따르면 정신없이 도망치던 왕건이 이 곳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조금 쉴 수 있었다고 한다.

2.21. 검사동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지금의 동촌동에 이르러 금호강변의 모래(沙)를 보고 비단(錦)처럼 빛깔이 곱고 아름답다하여 이곳을 금사(錦沙)라고 칭했다가 후에 검사가 되었다.[6]

2.22. 입석동

신라 말엽(후삼국시대)에 왕건과 견훤의 전쟁이 치열할 때 왕건의 부하장수들이 말총으로 큰 돌을 굴려서 입석동까지 왔다고 하며, 전쟁 중 부하장수들이 바위를 그대로 두고 떠나버려 그 때 이후부터 선돌 즉 입석(立石)이라 칭하였다 한다. 

해당 지명을 대구입석초등학교입석중학교에서 사용 중이다.

2.23. 왕선 고개

왕선(王建, 王先- 後三國 統一- 契機) 고개.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지명으로, 고려 왕건의 도주 과정에서 남겨진 지명으로 추정된다. 왕건이 쉬어 갔다는 '왕쉰'의 변화, 왕건이 다시 섰다는 '기신(起身)'의 의미 등에서 기원했다는 다른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왕건이 생사를 다투는 도주 과정에서 편히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성주와 접경지라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왕선 고개에서 마련된 왕건의 새 삶과 결의는 930년 안동 고창 전투, 934년 운주 전투를 거쳐 마침내 936년 일리천 전투의 승리를 마지막으로 후삼국 통일의 완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출처 및 자세한 내용

해당 지명을 왕선중학교대구왕선초등학교가 사용 중이다.

1995년, 기존 경상북도 달성군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대구광역시의 지명이 되었다.

2.24. 군위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는 왕건이 이 지역 군사들의 사열을 받았는데, 위세가 좋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한편 이미 삼국시대에 신라의 김유신이 지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군위에는 실제로 김유신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인 효령사가 남아 있다.

대구군위경찰서, 군위역, 대구군위초등학교, 군위중학교, 군위고등학교 등 다양한 공공기관 및 시설에서 해당 지명을 사용 중이다.

2023년 7월 1일부로 기존 경상북도 군위군대구광역시 군위군으로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대구광역시의 지명이 되었다.


[1] 훗날 공산 전투의 패배를 극복하고 삼한을 통일한 왕건은 당시 근방 최대 읍락이었던 공산현을 누르고 대구현을 새 중심으로 삼아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산에서의 굴욕 때문이었다고 전한다.[2] 은적사로 보인다.[3] 실제로 동구 신서동, 용계동, 각산동 등 안심지구 일대를 대부분의 대구 시민들은 '반야월'로 많이 부른다.[4] 간혹 대구 공군기지 등 근처 군부대에서 지원인력이 나오기도 한다.[5] 어떻게 아이를 버리고 가냐고 할 수 있지만, 당시엔 아이를 많이 낳았으니 피난시에 부득이 두고 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생겼고, 적병들도 왠만하면 아이를 죽이진 않으니 차라리 돌아왔을때 살아있을 가능성에 희망을 건 것이다.[6] 지금도 동촌동에서 금사리를 상호로 쓰는 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