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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권(1884)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시권
金時權
파일:김시권.png
본명 김경재(金景哉)
창씨명 키쿠야마 지켄
菊山時權
출생 1884년 5월 11일
황해도 재령군
(現 황해남도 재령군)
사망 미상
학력 관립일어학교 (졸업)
경력 전라북도지사
강원도지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장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와 관직 입문2.2. 친일 행적2.3. 해방 이후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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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2.1. 초기와 관직 입문

1884년 5월 11일 황해도 재령군(現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경재(金景哉)였으나 1922년 3월 김시권으로 개명했다. 1908년 3월 평양에 세워진 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5월 황해도 해주의 사립 벽성의숙 부교사로 활동했다. 1909년 12월 대한제국 원산재무서 주사로 임명되어 근무를 시작하면서 관직에 들어섰다.

2.2. 친일 행적

1910년 10월부터 1914년 3월까지 함경북도 회령군 서기를 지냈으며, 1912년 8월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군수로 승진하여 1914년 3월 함경북도 경원군수를, 1917년 12월 회령군수를 각각 지내기도 했다. 군수 재임 시기이던 1915년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17년 10월부터 1918년 3월까지 함경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했다. 1918년 7월 함경북도 온성군수에 임명되었으며, 군수 재직 중이던 시기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 확산을 저지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0년 3월 경흥군수에 임명되었고, 1921년 4월 조선총독부가 참여관과 군수들로 구성한 '내지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 제국의 주요 시설을 시찰했다. 1922년 2월 이사관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함경북도 내무부 지방과장에 임명되었으며, 1923년 4월 내무부 사회과장을 겸직했다.

1924년 9월 친일단체 동민회의 회원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12월 함경북도 내무부 지방과장에 다시 임명되어 1927년 3월까지 재직했다. 1925년 2월 일제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27년 3월 평안남도 내무부 산업과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3월 함경북도 재무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고, 같은 시기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0년 4월 함경남도 임시국세조사부 위원을 지냈으며, 동시에 함경북도 내무부장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같은 해 5월 함경북도농회 회장을 거쳐 12월에는 조선농회 통상위원을 지냈다.

1932년 2월 경상북도 참여관 겸 산업부 사무관 자격으로 산업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2월부터 1934년 10월까지 경상북도농회 회장을, 1932년 10월에는 영남명덕회 부회장을, 11월에는 경상북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러한 공로들로 1933년 7월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월까지 유럽 각 국의 산업시설 등을 시찰했고, 1935년 2월부터 1936년까지 다시 경상북도농회 회장을 맡았다. 1935년 5월 경상북도 내무부장의 해외 출장 당시 내무부장직을 대리를 맡기도 했으며, 일제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7월부터 1936년 4월까지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경상북도지부 감리관을 지냈고, 10월에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기념은배 1조를 받았다.

1936년 5월 전라북도지사로 승진했고, 1937년 4월 강원도지사로 전임되어 1939년 5월까지 재직했다. 강원도지사 재직 시기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조선총독부의 시정 방침을 적극적으로 선전 홍보했다. 1937년 8월 강원도회와 강원지역 군수회의 등에 참석하여 조선총독의 훈시를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일제를 찬양하는 발언들을 역설했다. 또한 각종 친일단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도민들에 대한 동원소집 및 징발, 군수품 조달, 국방사상 보급 선전 등의 업무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1937년 10월 강원도 국방의회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1938년 1월 3일 <매일신보>에 「경제력배양 — 산업개발로 생업보국에 매진」이라는 제목의 신년사를 통해 "160만의 도민과 함께 삼가 성수의 만세를 봉축하고 황실의 융창과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한다."라고 발언했으며, 1월 23일 일제가 조선에서의 지원병 제도 실시를 공포할 예정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자 <매일신보>에 "중대 현안이 실현되어 환희와 감격을 금하기 어렵다."라는 내용의 환영 담화를 발표했다.
파일:김시권2.jpg
내선일가의 실을 거양함에 노력하라
- 매일신보 1938년 2월 25일

같은 해 2월 25일 조선교육령 개정이 발표되자 <매일신보>에 「내선일가의 실을 거양함에 노력하라」라는 제목의 환영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1938년 7월 7일 중일전쟁 1주년을 맞이하여 <매일신보>에 「장병의 노고 생각하야 일사봉공을 요망」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고, 같은 날 국민정신총동원 강원도연맹 총재에 취임했으며, 강원도연맹 결성식에서 「전도 협심일체 — 진충보국이 긴요」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1939년 4월 호국신사봉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5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도지사 퇴직 후인 1939년 6월에 군수회사 조선마그네사이트개발주식회사 간사 겸 상임감사역에 취임했으며, 1940년 3월 만주국 지안현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여 「창씨개명 취지」를 주제로 내걸고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강연을 했다. 같은 해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냈고,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그 자리에서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8월 국민총력 경성부연맹 종로방면실천부 부장이 되었고, 같은 달 조직된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 경기도준비위원과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등을 지냈다. 같은 해 9월 7일 임전대책협력회가 위원으로 가두채권유격대 본정대원으로 참여하여 1원짜리 전시채권 세칭 '꼬마채권'을 판매하기도 했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경성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10월 18일과 19일 이틀동안 조선임전보국단의 결성을 앞두고 조선임전보국단준비위원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대구부산에 유세대원으로 파견되어 강연회 등을 개최하면서 조선임전보국단의 설립 취지를 선전했다.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자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달 31일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1941년 11월 7일 경성지원병제도취지보급실행위원회에서 각 경성부에 위치한 학교들에 지원병보급설전대를 파견하여 강연회를 개최할 때 경복중학교를 방문해 "조선의 청소년들로서 광영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원병에 지원을 하기 바란다."라는 내용으로 강연을 했다. 1942년 1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장에 취임하여 같은 해 10월 조선임전보국단이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흡수될 때까지 재임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대동아전쟁으로 남방 각지에서 발생한 미국영국의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 청년 수천 명을 군속으로 채용하여 포로감시원으로 활용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자, 조선인 군속 채용을 '명예의 직책'이라며 일본의 시책에 감격한다는 내용의 환영 담화를 발표했다. 같은 달 25일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부 주최로 열린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석했다.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를 결정하자 <매일신보>에 「(광영의 징병제 실시 앞두고 반도청년의 연성태세 확립) 청년연성의 획시기」라는 제목의 환영 담화를 발표하면서 징병제를 찬양하는 발언들을 역설했다.

1943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지냈고, 같은 해 11월 일제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실시라는 미명 하에 조선 청년들에 대한 학병 모집을 실시하자 이를 지지하며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같은 달 6일 중추원에서 학병제 실시의 취지를 선전하고 학병을 권유하기 위해 각 도에 중추원 참의, 지역유력자들을 파견하여 강연회나 좌담회 등을 개최할 때 중추원 참의 원덕상과 함께 경상북도로 파견되어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3일에는 지원병 권유 등을 목적으로 윤치호, 조병상, 이광수 등이 조직한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서 지원병 대상자들의 가정을 방문해 지원병을 독려할 목적으로 가정방문위원을 선정할 때 종로구 효자정 방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2월 경성부 종로 관내 유지들이 황민화운동 전개를 위한 실행위원회를 조직하자 일반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3월에 경성부 종로 관내 유지들이 종로총궐기위원회를 조직하자 여기에도 참여하여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2.3.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며, 1950년 3월 특별재판부에 의해 공판이 열렸다. 그 역시 반민특위의 와해 과정에서 풀려난 것으로 보이나 이후의 행적을 밝혀져 있지 않다.

3. 사후

그의 악행은 훗날 2003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발표된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