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23:59:43

관동별곡(경기체가)

파일:관동별곡(경기체가).png
《근재집》 권2 111면
1. 개요2. 원문
2.1. 제1장2.2. 제2장2.3. 제3장2.4. 제4장2.5. 제5장2.6. 제6장2.7. 제7장2.8. 제8장2.9. 제9장
3. 평가

[clearfix]

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인인 안축(安軸, 1282~1348)의 경기체가 작품으로 《근재집》(謹齋集)에 실려 있다.[1] 안축이 강릉도 존무사에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파직당한 1329년 9월 이후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훨씬 인지도가 높은 조선시대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와 마찬가지로 관동의 경치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정철의 관동별곡이 창작되기 이전인 조선 초기에도 판관 김처(金處)가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즐겨 불렀다는 《용재총화》의 기록이 전해질 만큼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에 비해선 유명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국문학대학에서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이 경기체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나마 문학 교과서에 지나가듯이 실려 있고, EBS 올림포스 고전문학 등에 경기체가가 2편 정도 실려 있어 고등학생 때 접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2. 원문

본문에 종종 '~景 幾何如'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이것이 '경기(景幾)체가'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경기하여(景幾何如)가' 역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각 장은 6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두식 표현이 종종 보인다. 위 이미지에서 보이듯 이두식 표현은 1/2 크기 글자로 표기에 차이를 두고 있다. 본 문서에서는 밑줄로 썼다. 이두식 표현이 비교적 많이 포함된 행의 경우 학계에서 재구한 중세 한국어 독음도 별표(*)와 함께 병기하였다.

번역은 〈경기체가 관동별곡의 국어사적 검토(2007)〉와 〈안축 경기체가의 의미지향과 계승양상(2020)〉 두 논문을 참고하였다.

2.1. 제1장

海千重 山萬疊 關東別境
바다는 천 겹이오, 산은 만 겹인 관동의 절경
碧油幢 紅蓮幕 兵馬營主
푸른 휘장, 붉은 장막, 병마의 영주인 되어
玉帶傾盖 黑槊紅旗 鳴沙路
옥대에 기울인 일산, 검은 창, 붉은 깃발로 명삿길을
巡察景 幾何如
아아! 순찰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朔方民物 慕義趨風
변방 백성과 만물은 의를 사모하여 재빨리 물러나네[2]
王化中興景 幾何如
아아! 임금의 교화로 중흥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2.2. 제2장

鶴城東 元帥臺 穿島國島
학성 동쪽 원수대에서 본 천도와 국도는
轉三山 移十洲 金鼇頂上
삼신산과 십주를 옮겨온 금오의 정상
收紫霧 卷紅嵐 風恬浪靜
자줏빛 안개 개고 붉은 어스름 걷히니 바람 물결 고요하네
登望滄溟景 幾何如
아아! 올라서 푸른 바다 바라보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桂棹蘭舟 紅粉歌吹
계수나무 노와 목란 배[3], 미녀의 노래와 피리 소리
歷訪景 幾何如
아아! 두루 둘러보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2.3. 제3장

叢石亭 金幱窟 奇巖怪石
총석정, 금란굴, 기암괴석
顚倒巖 四仙峯 蒼苔古碣
뒤집어진 바위, 사선봉, 푸른 이끼 낀 옛 비석
我也足 石巖回 殊形異狀
*아야발 돌바회 殊形異狀
아야발 돌바위[4]의 특이한 형상은
四海天下 無豆舍叱多
*위 四海天下 없두샷다
아아! 사해 천하 어디에도 없도다.
玉簪珠履 三千徒客
옥비녀, 구슬 신발로 꾸민 삼천의 나그네[5]
來悉 何奴 日是古
*위 ᄯᅩ 오실 어느 날잇고
아아! 또 오실 것이 어느 날입니까?

2.4. 제4장

三日浦 四仙亭 奇觀異迹
삼일포, 사선정의 기이한 경관과 자취
彌勒堂 安祥渚 三十六峯
미륵당, 안상의 모래톱, 서른여섯 봉우리
夜深深 波瀲瀲 松梢片月
밤은 깊고 물결은 넘실대니 소나무 끝의 조각달
古溫 貌 我 伊西爲乎伊多
*위 고온 즛 난 이슷ᄒᆞ요이다[6]
아아! 고운 모습 나와 비슷하오이다.
述郞徒 六字丹書
술랑 무리의 여섯 자 붉은 글씨[7]
萬古千秋 尙 分明
아아! 만고천추에도 여전히 분명하구나.

2.5. 제5장

仙遊潭 永郞湖 神淸洞裏
선유담, 영랑호, 신청동 안에
綠荷洲 靑瑤嶂 風煙十里
녹빛 연잎 섬, 푸른 옥빛 봉우리, 십 리의 이내 낀 풍광
香冉冉 翠霏霏 琉璃水面
향기 은은하고 청록빛 짙은데, 유리 같은 수면에
泛舟景 幾何如
아아! 배 띄운 모습, 그 어떠합니까?
蓴羹鱸膾 銀絲雪縷
순챗국과 농어회[8], 은빛 눈빛 비단실 같으니
羊酪 豈 勿參爲里古
*위 羊酪 긔 므슴ᄒᆞ리고
아아! 양락(羊酪)[9]은 견주어 그 무엇하리오?

2.6. 제6장

雪嶽東 洛山西 襄陽風景
설악의 동쪽, 낙산의 서쪽, 양양의 풍경
降仙亭 祥雲亭 南北相望
강선정과 상운정이 남북으로 마주보네
騎紫鳳 駕紅鸞 佳麗神仙
자색 봉황 타고 붉은 난새 모는 아름다운 신선
爭弄朱絃景 幾何如
아아! 붉은 현 다투어 연주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高陽酒徒 習家池館
고양지의 술꾼, 습가지의 객관에서[10]
四節 遊伊沙伊多
*위 四節 노니사이다
아아! 사철에 노닐어 봅시다.

2.7. 제7장

三韓禮義 千古風流 臨瀛古邑
삼한의 예의, 천고의 풍류 지닌 임영의 옛 고을
鏡浦臺 寒松亭 明月淸風
경포대, 한송정, 밝은 달과 맑은 바람
海棠路 菡萏池 春秋佳節
해당화 길과 연꽃 핀 못을 봄가을 좋은 시절에
遊賞景 幾何如 爲尼伊古
*위 遊賞景 긔 엇더ᄒᆞ니잇고
아아! 노닐며 구경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燈明樓上 五更鍾後
등명사 누각 위에서 오경 종이 울린 뒤
日出景 幾何如
아아! 해 뜨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2.8. 제8장

五十川 竹西樓 西村八景
오십천, 죽서루, 서촌의 팔경
翠雲樓 越松亭 十里靑松
취운루, 월송정, 십 리의 푸른 소나무
吹玉篴 弄瑤琴 凊歌緩舞
옥피리 불고 요금 뜯으며 청아한 노래에 느릿한 춤 추니
迎送家賓景 幾何如
아아! 좋은 손님 마중하고 배웅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望槎亭上 滄波萬里
망사정 위에서 보는 만리의 푸른 파도
鷗伊鳥 藩甲豆斜羅
*위 ᄀᆞᆯ며기 새 반갑두샤라[11]
아아! 갈매기 새 반갑도다.

2.9. 제9장

江十里 壁千層 屛圍鏡撤
강 십 리, 벼랑 천 층, 병풍처럼 두르고 거울처럼 맑네
倚風巖 臨水穴 飛龍頂上
풍암에 기대어 수혈에 임한 비룡의 정상에서
傾綠蟻 聳氷峯 六月淸風
녹의주 기울이니, 우뚝한 얼음 봉우리에 유월의 맑은 바람 불어
避暑景 幾何如
아아! 피서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朱陳家世 武陵風物
주진[12]의 가세, 무릉[13]의 풍물
傳子傳孫景 幾何如
아아! 아들 손자로 전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3. 평가

국문학계의 전통적인 논의에서는 이 작품을 경기체가의 대표작인 〈한림별곡〉과 비슷한, 즉 신흥사대부 계급의 호방함이나 자긍심이 드러난 작품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근래의 논의 가운데에는, 안축이 충숙왕의 측근으로 활약하다가 충혜왕의 집권 이후 외직인 강릉도존무사(조선시대의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된 것을 중앙정계에서 축출된 것으로 설명하며, 관동의 경치를 묘사하는 와중에 정계의 상황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다고 해석한 논의도 있다.

경기체가 형식에 대해 '고려 시대 문인들은 이렇게 시 쓰면서 놀았대요'라는 문학사적 의미 말고는 작품으로서의 문학적 의미는 희박하다고 보는 입장이 학계 내에 적지 않다. 한편 이황은 경기체가의 대표격인 한림별곡을 언급하며 '한림별곡 부류'를 대차게 비판했는데 이황의 비판 이유와 현대 문학자들의 비판 이유는 좀 다르다.

국문학자들이 경기체가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대략 아래의 2가지 이유 때문이다.
  • 국문(한글/한국어)으로 지었음에도 한자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여 자국어문학/민족문학으로서 가치가 높지 않다.
  • 시가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서정성'이 약하고 지나치게 교훈적, 교술적인 내용이 많다.

물론 이러한 입장이 여전히 학계의 정설로 있지만, 근래에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족문학론이 강한 반론에 맞닥뜨리고 있고, 안축이 이 작품을 지은 시기는 훈민정음 창제보다 백 년 쯤 전으로써 민족 문학같은 개념에 대한 의식이 희박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특정 문학 작품을 교술적, 교훈적이라고 (그래서 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것이 지나치게 현대인의 입장에 매몰된 것 아니냐라는 입장도 제기되는 등, 여러모로 재평가의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작중에 등장하는 이두로 적힌 한국어 표현들은 14세기 중세 한국어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국어학계에서만큼은 그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吾東方歌曲, 大抵多淫哇不足言, 如翰林別曲之類, 出於文人之口, 而矜豪放蕩, 兼以褻慢戱押, 尤非君子所宜尙,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족히 말할 것이 못된다. 한림별곡과 같은 작품은 문인의 입에서 나왔으나, 교만하고 방탕하며, 진지하지 못하고 가볍기까지 하니, 더욱이 군자가 마땅히 숭상할 바가 아니다.
반면 이황이 '한림별곡 부류'라며 경기체가 전반을 비판한 이유는, 유학자답게 겸손하고 절제하며 자기수양에 힘쓰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술 마시고 풍류 즐기며 노는 내용, 서로서로 글솜씨가 뛰어나다고 칭찬하는 내용 등 과시적인 면모가 주를 이루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해당 내용은 이황이 〈도산십이곡〉을 지으면서 남긴 발문 〈도산십이곡발〉에 자세히 나와 있다.

[1] 같은 경기체가인 죽계별곡(竹溪別曲)도 바로 뒤에 이어서 실려있다.[2] '추풍(趨風)'은 사마천의 《사기역이기 열전 등에 나오는 표현으로, 능력이나 지위가 뛰어난 인물의 앞에서 빠른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며 예를 취하는 모습을 가리킨다.[3] 소식이 지은 적벽부의 구절인 '계수나무 노와 목란 삿대(桂棹兮蘭槳)'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4] 이곡(李穀, 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에 따르면, 금란굴 동쪽에 있는 비스듬한 바위는 당시 사람들에게 "아픈 발 바위[痛足巖\]"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관세음보살이 목욕을 하다가 바위가 뾰족한 탓에 발에서 통증을 느끼자 바위가 알아서 몸을 옆으로 기울여줬다는 전승에서 비롯한다.[5] 맹상군의 식객이 삼천 명에 이르렀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총석정을 구경하러 온 수많은 유람객을 의미한다.[6] 고려가요 정과정의 구절 '山 졉도ᇰ새 난 이슷ᄒᆞ요ᅌᅵ다'와 구조가 유사하다.[7] 북한 측 고성 삼일포에는 신라 화랑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술랑도 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글귀가 유명하다. #[8] 관직 생활 도중 고향 땅 오현(吳縣)의 명물인 순챗국과 농어회가 그리워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는 진나라 사람 장한(張翰)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9] 양젖의 지방을 분리해서 굳힌 일종의 버터 같은 음식. 육항의 아들 육기(陸機)가 황제의 사위로 큰 부자였던 왕제(王濟)의 집을 방문했을 때, 왕제가 진귀한 음식인 양락(羊酪) 수십 말을 가리키며 "그대의 고향인 강동에 이와 맞먹는 음식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육기가 "천리호(千里湖)의 순챗국[蓴羹\]이 있으니, 간장을 치지 않고 먹습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어 호화로운 음식의 상징으로 쓰인다.[10] 죽림칠현 산도의 아들 산간이 중국 양양을 진무할 때 형주의 호족 습욱이 소유한 고양지(高陽池)라는 아름다운 연못으로 가서 술에 취하곤 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관동 지역의 양양이 중국 양양에서 이름을 따온 점을 활용함과 동시에 양양의 경치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11] 경기체가 한림별곡에 등장하는 '반갑두셰라'와 형태가 유사하며, 고려가요 처용가에도 '네히로섀라'라는 대목이 있어 비교할 만하다.[12] 정선의 옛 별칭. 원래 주진은 백거이의 시 〈주진촌(朱陳村)〉에 묘사된 중국 서주 지역의 가상의 이상향이다.[13] 역시 정선의 옛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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