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7:27:00

고려-남송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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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북송의 몰락3. 남송 시대 - 외교 단절4. 새로운 동맹 - 남송의 몰락

1. 개요

고려남송의 관계. 본래 고려와 송은 다원론적 천하 질서[1] 아래에 서로를 존중하며 깊은 우호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보이나 그 내면은 상당히 복잡했다. 정강의 변 직후 마음이 급해진 남송 측에서 무리하게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가 결국 양국의 외교 관계는 파탄이 나고 말았다.

2. 북송의 몰락

정강의 변 직후, 어찌된 일인지 송고종은 끌려간 휘종흠종을 돌려받겠다며 고려에 사신을 보낸다(?!). 명목상으로 내세운 것은 고려를 경유하여 여진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는 알쏭달쏭한 이유. 뭐, 난리법석이 된 북방의 육로를 거쳐 사신을 보내는 것보다 해상을 통해 안전한 고려를 경유하여 사신을 보내는 것이 더 빠르긴 했지만, 실제로는 고려가 남송에 줄을 설 것인지 금에 줄을 설 것인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만약에 1000만 분의 1이라도…고려 너님들이 금나라 좀 때려줄 생각 없나요?' 라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 뭐 그 정도까진 못해도 송을 위해 여진에 대한 최소한의 중개 역할을 해달라는 의도였다고도 불 수 있다. 어쨌거나 말하면, 이미 전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고려에게 태도를 정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한 것인데…….

이같은 행동은 결론적으로 무리수였다. 왜냐하면 금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여태까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에게 조서를 내려 태도를 분명히 정하도록 압박을 가할 것인데, 이럴 경우 고려가 실리적으로 금을 선택할 것이 너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송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若高麗辭以金人亦請問津以窺吳·越, 其將何辭以對?
만약 고려가 '금나라 사람도 오·월을 엿보기 위하여 나루터를 물어 왔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말로써 그에 대답하겠습니까?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 10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먼저 무리하게 도와달라고 했다가) 금나라도 고려한테 똑같은 소리를 하면 그거 뒷감당 될까요?"

예상대로 고려도 송나라의 무리한 요청에 크게 당황해 고려 인종은 난처해하면서 아예 송고종의 조서를 거부했다.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에는 대놓고 "楷有難色(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

고려 입장에선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김부식이 송의 사신을 접대하게 하는데, 이는 고려로선 최선의 인선이었다. 김부식이 실제로 친송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소식의 이름자를 따라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송나라를 잘 알고 송나라 문화를 좋아하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 그런데 그런 김부식조차도 송의 사신에게 여진에서도 우리 보고 군사를 요청하면 어쩔거냐? 우리도 신하로 삼던 여진이랑 친선하고 있으니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너네는 왜 진작에 군사를 조직해서 여진을 칠 생각은 않고 여기 와서 이러는 거냐? 며 송의 사신을 돌려 까버렸을 정도였다.[2]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고종은 나라 절단난 것도 서러운데 고려가 은혜를 저버렸다며 크게 화를 내었다. 자신들이 협력할 만한 유일한 나라라고 굳게 믿었던 고려가 도리어 실낱같이 남아있던 자존심에 핵펀치를 날려버렸으니…심지어 어떤 정신 나간 신하는 고려를 공격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右僕射 黃潛善曰, "以巨艦載精兵數萬, 徑擣其國, 彼寧不懼."
우복야 황잠선이 말하기를, 큰 전함에 정예병 수만 명을 싣고 가 곧바로 그 나라를 공격하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송사》 외국 열전 고려조 건염 2년 10월.
당연한 얘기지만, 개봉에서 시원하게 털리고 거지꼴로 강남(중국)으로 도망쳐 온 상황에서 고려를 정벌할 군사력 따위 있을 턱이 없었다. 정말 고려를 공격했다면 못 볼 꼴만 또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자겸의 난 등으로 국내 정세가 어지럽긴 했어도, 고려 군사들은 건국 이래로 끊임없이 거란·여진 등과 싸워온 베테랑 중 베테랑들이었다. 반면 당시 남송의 군사력은 고려에게 한때 사대를 하던 여진만도 못했으니 이들이 고려 정벌을 하려고 그 영토에 들어가는 순간 고려의 정규군에게 귀주대첩 이상의 대패를 당했을 것이다. 그 전에 그럴 병사가 있다면 금나라에게 털리지를 않았겠지만(...)

당연히 이는 조정에서도 홧김에 내뱉은 소리 취급을 받았고, 고려에서도 이내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겉으로는 무마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말뿐이었고 동맹을 맺거나 이후로도 군사 원조를 했다는 건 전혀 없었다. 그 이후로 결국 고려와 남송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반면 고려는 물론 금나라도 서로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행위를 전혀 벌이지 않았다. 예시로 무신정변 시절엔 조위총정중부이의방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금나라의 힘을 빌리고자 매국노 짓이나 다름없이 서경 일대 40여 성을 들어 귀순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금나라가 조위총의 귀순을 거부하면서 우호 관계를 굳건히 했다. 아마도 고려의 여진 정벌동북 9성으로 대표되는 고려의 무서움이 금나라가 수립된 뒤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고려는 고려대로 상태가 안 좋았는데, 당장 정강의 변이 일어난 1126년에 이자겸의 난이 발생해서 개경의 왕궁이 불타고 인종이 이자겸의 저택에 머무르다가 죽임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이런 난리를 채 수습하기도 전에 그 뒤인 1135년에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발생해서 이를 진압하느라 또 혼란에 빠졌다. 그러니 고려는 남송과 협력해서 금나라와 군사적으로 대립할 여유가 없었고, 당연히 금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으며 외부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래서 남송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북송 멸망으로 송에게 남은 최후의 수단은 고려와의 연합 뿐이었는데, 군사적인 연합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가능한 것은 외교적인 연합 내지 친선 관계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런데 송고종이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고려에게 무리하고 성급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가 양국 관계가 쫑 나버렸다는 슬픈 이야기.[3]

3. 남송 시대 - 외교 단절

송고종 이후 다시는 송 - 고려 관계가 복원되지 않았다. 심지어 남송은 내내 고려가 금의 첩자 노릇을 할 거라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고려가 위의 사건 직후 송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로도 몇 차례 조공을 보내보았지만 남송은 끝끝내 이를 거부한다.

양국간 관계가 소원해진 상황에서 고려에서 남송에 나라를 넘기려고 한 사건이 있었다. 1148년 이심이라는 사람이 고려, 남송 사람과 모의해 남송의 진회에게 남송이 고려에 병력을 보내 점령하면 내응하겠다는 서신과 함께 고려의 지도를 부친다. 그러나 남송 상인의 신고로 발각되고 관련자 세 명(…)이 처벌된다. 친송 세력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고려-남송 관계의 큰 줄기에서 보면 세력이라고 부르기 뭣할 정도로 규모도 작고 별 영향도 없어 주목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1195년 ~ 1200년 무렵에는 아예 상인들이 고려에 동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해버린다. 뭐 민간에 대한 이러한 명령이 잘 이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것으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정식 관계는 단절되어버린 셈. 실제로 남송의 기록을 보면 이후로 더이상 고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남송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긴 있었는데, 일단 겉으로 드러난 원인은 믿었던 고려에게 공식적으로 구원 요청을 거부당한 탓에 강남(중국)으로 도주한 굴욕을 당해 황제국으로서 권위에 큰 손상을 입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권위를 잃자 의심을 품게 돼버렸고, 고려를 특별 취급할 이유를 잃게 된 것.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원인은, 고려와의 관계가 더 이상 실익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통신 보급 상황으로는 대륙을 거쳐 말 몇마디로 타국끼리 실제적인 군사 협력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심지어 나당연합군처럼 왕국을 하나씩 격파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는 제국으로 거듭나며 성장하는 기마민족이다. 한마디로, 카이펑이 함락되어 송나라가 강남(중국)까지 밀려나고 고려와 지리적으로 격리된 순간부터, 송-고려 연합이 금에게 실제적인 압박을 가한다는 계획은 완벽하게 소멸된 것. 그러니깐 국경선이 가까울 때 쳤으면 좋았잖아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사실 당나라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잘만 쳤다는 걸 생각해보면 결국 송나라의 역량 문제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지 않으면 자기네들이 망하게 생겼으니 그만큼 적극적이었지만 고려는 딱히 송과의 연합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으니 송이 먼저 나서서 능동적으로 뭘 해야 했는데 그런 건 전혀 없이 고려를 되도않는 실력으로압박하려 들었으니 잘 될 리가 없었다.

사실 고려 입장에선 중립 외교가 현실적으로 실익을 보긴 했지만, 애초부터 고려는 송의 국방 정책과 외교적 해결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에도 일단 기회가 나는 대로 송에게 북방 정벌을 권유해 왔고, 이것이 계속해서 무시 내지 거부당했던 것. 그렇지만 북방 정벌을 권유라도 할 수 있는 송이 존재하긴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겐 힘이 되니까 송과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입장.

그런데 이렇게 취약한 이론상의 명분과 실익이 북송 멸망이라는 현실 앞에서 더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관성적으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이어가려 하긴 하였으나 사실 무의미한 일이었고, 먼저 송이 무시하자 고려 역시 억지로 양국 관계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려 - 송 관계는 종료된다.

4. 새로운 동맹 - 남송의 몰락

한편 남송은 이후 고려 대신 새로운 군사적, 외교적 협력 상대를 찾아내긴 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하필 몽골 제국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남송은 '송나라 주도-고려 참가'를 주장했던 고려와는 달리 북송 시절부터 한족들이 가장 원하는 전쟁 시나리오였던 '몽골이 주도-송나라 참가'라는 전략 동맹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금나라랑 좀 찝찝한 사이 정도였던 고려랑 달리 몽골은 금에 대한 원한이 송 못지않게 엄청났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의 증조부를 죽인 것이 금나라다. 몽골이 금나라를 개박살 내는 동안 남송은 뒤치기를 날려서 원수였던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송나라는 실익을 거의 얻지 못했고 반면에 몽골은 남송의 도움으로 금나라를 간단히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금나라를 무너뜨린 주력이 몽골이니 실익도 몽골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이후의 남송은 몽골을 몇번 격퇴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더 지독한 몽골에게 완전히 멸망당하며 이후에는 원나라의 중국 지배가 시작된다. 물론 고려도 멸망은 면했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30년이 넘는 항전끝에 나라의 독립권은 지켜냈으나 원제국의 부마국이 되어 1세기에 가까운 원 간섭기를 보내게 됐다.

고려와 남송의 차이는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 컸다. 몽골이 모든 국가를 닥치고 멸망시킨 것은 아니고 정복 대비 실익이 별로 없는데 비용은 많이 든다 싶은 곳들은 저항이 처절하다 싶으면 항복을 권했는데 끝까지 버티고 다른 지역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면 멸망시키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단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 몽골도 힘만으로 고려를 제압하는것은 무척이나 어려웠고 멸망시켜도 실익이 사실상 없어서 나중에는 화친을 제의한 것이다.


[1] 10~13세기 동아시아 세계를 관통했던 기준이 되는 천하관. 중국이 유일한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 군주가 천명을 받은 천자국이듯이 고유의 토풍을 지닌 여러 나라들도 각 천하의 중심이 되어 병존한다는 사상이다. 고려는 이 같은 천하 다원론을 독자적인 해동천하관으로 구현하여 각국의 군주를 '해동천자(海東天子)', '송조천자(宋朝天子)', '거란주(契丹主)', '금주(金主)' 등으로 지역명을 덧붙여 지칭함으로써 그 세계를 명확히 구별하였으며, 고려의 제후국이었던 여진 또한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두고 "이적과 화하는 바뀔 수 있다"는 '이하가변(夷夏可變)'의 논리를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그 결과 여진은 종래의 수많은 침투·정복 왕조들이 종족적 개념의 정통관을 극복하지 못한 것과 달리, 자신들의 뿌리가 고려에서 나왔음을 당당히 밝힌 채 중원의 유일한 정통 왕조임을 천명하여 한족 중심의 종족 주의를 타파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으니 이는 매우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 하겠다. ☞ "1142년 4월 "남송이 (여진의) 신하로 칭하게 된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였다"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성덕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1141년 『조종실록』이 완성되고, 같은 해 소흥화의를 맺어 남송과 신속 관계를 맺은 다음 해다. 성덕비에는 『조종실록』의 조상들의 세계와 소흥화의 이후 남송이 신속국임을 밝히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한족들의 주거지인 연경에 신공성덕비를 세워 자신의 근원이 고려에 있음을 밝혔다는 것은 금 통치자가 종족주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정통 왕조가 되겠다는 의지를 천하에 공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거란과 금나라는 송나라의 정통성에 대한 태도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거란은 자신을 정통 왕조라 하였으나 북송도 정통 왕조인 것을 굳이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나라는 달랐다. 금 통치자들은 남송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유일한 정통 왕조가 되고자 하였다. 원나라 사가들은 송-요-금 3사 중 "누가 정통인가"에 관한 대토론을 거쳐 "세 나라 모두 정통(三國各與正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금나라는 종족적 한계를 뛰어넘어 객관적으로 정통 왕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전사들의 황금 제국 금나라-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中〉[2] 애초에 김부식 입장에서도 어이 털리는 것이 이미 송나라는 송휘종 시절에 금나라가 흥기할 적에 고려에서 먼저 금나라를 믿지 말라고 충고까지 해줬는데 그저 요나라 무너뜨리겠다고 금나라와 손잡고 요나라를 박살내고 그 다음에는 금나라를 배신했다가 역으로 얻어맞고 남쪽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충고를 해줄 때는 안 듣다가 거지꼴 다 되고 난 뒤 헬프를 치니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3] 당초에 확실하게 줄을 서라는 것도 힘이 있어야 요구할 수 있지 남송의 상황에서 그런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어설프게 갑질하려다 슈퍼 을에게 당해버린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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