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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소재한 강릉제일고등학교[1]와 강릉중앙고등학교[2]의 축구 더비. 매년 강릉단오제 행사 시기에 개최한다.
과거에는 '농상전'/'상농전', '농일전'/'일농전', '중일전'/'일중전'[3] 등 여러 이름이 쓰였지만 현재는 '강릉 정기전'으로 통일했다.
2. 역사
연고전/고연전처럼 처음에는 농상전/상농전으로 불리었었다.1920년대 강릉시 축구가 강릉 단오제에 편승되어 질적·양적인 축구열기 속에서 '관동 단양제 축구대회'가 시작이다. 원래는 강릉을 비롯한 사천, 연곡, 주문진 등 지역대항 시합이었으나, 1925년에는 대관령을 넘어서 춘천시, 평창군, 양양군, 고성, 장전[4], 함흥군, 포항시, 울산광역시에서도 참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1935년에 강릉공립농업학교가, 1941년에는 강릉공립상업고등학교가 축구부를 창단하면서 '관동 단양제 축구대회'에서 두 학교가 늘 맞부딪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라이벌로 자리매김했다. 지금은 폐교된 주문진수산공업고등학교(주문진 수고)[5]도 함께 참여하여 삼파전 양상을 띄곤 했지만, 1976년 강원도축구협회 주최로 첫 정기전을 치르게 됐다. 이후 강릉상고의 이름이 강릉제일고로 바뀌면서 일농전/농일전으로 불리다가 강릉농고가 강릉중앙고로 바뀌자 강릉 정기전으로 불리고 있다.
아래는 이 더비매치의 위엄을 보여주는 사례.
"...두 학교의 숙명적인 축구 전쟁은 194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강릉농공고가 축구부를 만들자 6년 뒤 강릉상고 역시 축구팀을 조직하면서부터다. 전국대회 지역예선이나 강원도 지역대회에 참가해 맞붙곤 했지만 처음부터 두 학교의 축구시합이 투석전을 동반하는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61년 노암 공설운동장이 설립돼 축구가 강릉의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으면서 두 학교 간 대결 양상도 차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경기 후 승부에 불만을 품은 재학생과 동문들의 투석전도 빈번해졌다. 60년대 강릉농공고를 졸업생 말에 의하면 "그땐 수업 빼먹고 돌 주우러 가기 바빴지. 시합 끝나면 정해진 순서처럼 투석전으로 이어졌으니까"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래도 강릉 시민 전체가 두 학교 간 축구 시합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자 강릉시 축구협회가 나서 두 학교 축구 시합을 아예 정기전으로 할 것을 주선했다. 두 학교의 합의로 76년 협회 주관하에 단오제 시기에 맞춰 '강릉 농.상 정기전'이 시작됐고, 78년부터는 봄.가을로 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는 두 학교 간의 앙숙 관계였다.
마침내 82년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당시 6월 25일 춘계대회가 끝난 뒤 패배한 강릉농공고 학생들이 분풀이로 강릉상고로 진입하여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고 교문을 떼어 강릉 남대천에 버리자 이에 질세라 강릉상고 학생들이 강릉농공고로 쳐들어 간 것. 경찰이 사태 진압에 나섰으나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양측 학생들이 벌인 치열한 싸움은 며칠 동안 강릉시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농.상전은 이후 6년간이나 중단되고 말았다.
89년 재개된 상.농전은 2년 만에 경비 과다 부담을 이유로 다시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다 94년 두 학교 동창회 주관으로 부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조61년 노암 공설운동장이 설립돼 축구가 강릉의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으면서 두 학교 간 대결 양상도 차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경기 후 승부에 불만을 품은 재학생과 동문들의 투석전도 빈번해졌다. 60년대 강릉농공고를 졸업생 말에 의하면 "그땐 수업 빼먹고 돌 주우러 가기 바빴지. 시합 끝나면 정해진 순서처럼 투석전으로 이어졌으니까"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래도 강릉 시민 전체가 두 학교 간 축구 시합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자 강릉시 축구협회가 나서 두 학교 축구 시합을 아예 정기전으로 할 것을 주선했다. 두 학교의 합의로 76년 협회 주관하에 단오제 시기에 맞춰 '강릉 농.상 정기전'이 시작됐고, 78년부터는 봄.가을로 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는 두 학교 간의 앙숙 관계였다.
마침내 82년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당시 6월 25일 춘계대회가 끝난 뒤 패배한 강릉농공고 학생들이 분풀이로 강릉상고로 진입하여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고 교문을 떼어 강릉 남대천에 버리자 이에 질세라 강릉상고 학생들이 강릉농공고로 쳐들어 간 것. 경찰이 사태 진압에 나섰으나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양측 학생들이 벌인 치열한 싸움은 며칠 동안 강릉시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농.상전은 이후 6년간이나 중단되고 말았다.
89년 재개된 상.농전은 2년 만에 경비 과다 부담을 이유로 다시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다 94년 두 학교 동창회 주관으로 부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인기
고교 축구 대회에 기업 스폰서가 들어온다. 폭력은 없어졌지만 그 열기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 축구 더비 매치 중 이만한 것도 없다. ## 강릉사람이 강릉 정기전을 모른다면 간첩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인기가 끝내준다. 이런 동네에서 2008년이 되어서야 프로축구팀 강원 FC가 창단한 게 미스터리로 느껴질 정도.강원 FC 창단이후 제일고와 중앙고를 거르고 강릉문성고등학교가 강원 FC의 유스팀으로 지정될뻔 했으나[6] 문성고가 빠지고 결국 강릉제일고가 유스로 지정되었다. 그 후 프로축구단의 관리를 받는 제일고등학교에 비해 강릉중앙고가 밀리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관련글 결국 이때문에 강릉중앙고측에서 형평성 문제와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력차 문제를 제기하며 정기전 참가를 거부해, 2014년에는 정기전이 무산되었다. 클럽 당 유스팀을 하나씩만 두는 축구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
2016년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잘 개최되고 있다.
4. 비판
4.1. 훌리건
강릉 정기전이 재개된 이후에 알아서 자제들 했다지만 그래도 농공고등학교나 상업고등학교나 주먹 좀 쓴다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옛적 농상/상농 시절 경기결과에 따라 재학생끼리의 폭력 사태 혹은 혈기를 주체 못한 졸업생끼리의 폭력 사태는 그냥 부대행사라 할 수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강릉이 태백산맥 너머 영동지역의 중심이다보니 동문들이 강원도 전체에 퍼져있고 이들이 붙는다면 어디든 따라붙는다는 사실. 이 때문에 전국대회 예선전을 중립경기로 치렀는데 거기서도 원정팬들이 싸움질을 했다고 한다.4.2. 똥군기 및 인권 침해
과거 강압적인 응원 문화도 문제 중 하나였다.응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준비물의 구입부터 시작해서 강제적인 참가의 강요와 도주하는 학생들을 감시하고 제재하며, 훈련하는 과정에서 교사들의 묵인, 방조 아래 학생들 자체적으로 상하적 선후배 관계를 바탕으로 극히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 부조리한 문화를 주입해 왔다. 양학교에 만연했던 수직적인 선후배 문화는 양 학교 공히 응원의 주축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학교로 따지면 이진이라 할 수 있는 응원단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교내 폭력, 금품 갈취 등으로 이루어지는 학생들 간의 상하관계는 응원단을 중심으로 성립된다고 봐야 하며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응원단 내부에서는 다른 교내 조직들보다 한층 높은 강도의 폭력이 행해진다.
현재는 강압적 훈련도 사라지고 참여가 전부 선택으로 바뀌었으며, 창체나 체육 시간에 몇 번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면 응원 연습도 없어진 상태이다.
5. 역대 전적
일자 | 회차 | 대회명 | 결과 | 영상 |
1976년 6월 2일 | 제1회 | 농 · 상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
1977년 6월 5일 | 제2회 | 상 · 농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78년 6월 3일 | 제3회 | 춘계 친선 축구대회 | 상고승 | |
1978년 11월 12일 | 제4회 | 추계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79년 5월 30일 | 제5회 | 춘계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79년 11월 17일 | 제4회 | 추계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80년 | - | 1차 중단 | ||
1981년 6월 7일 | 제7회 | 춘계 친선 축구대회 | 상고승 | |
1982년 6월 25일 | 제8회 | 춘계 친선 축구대회 | 상고승 | |
1983년 | - | 2차 중단[7] | ||
1989년 6월 9일 | 제9회 | 춘계 친선 축구대회[8] | 상고승 | |
1990년 5월 28일 | 제10회 | 춘계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91년 | - | 3차 중단[9] | ||
1994년 6월 12일 | 제11회 | 농 · 상 친선 축구대회 | 농고승 | |
1995년 6월 4일 | 제12회 | 상 · 농 친선 축구대회 | 농고승 | |
1996년 6월 23일 | 제13회 | 농 · 상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97년 6월 8일 | 제14회 | 상 · 농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98년 5월 31일 | 제15회 | 농 · 상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1999년 6월 20일 | 제16회 | 상 · 농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2000년 6월 10일 | 제17회 | 농 · 상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2001년 6월 24일 | 제18회 | 상 · 농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2002년 | - | 4차 중단 | ||
2003년 6월 1일 | 제19회 | 농 · 일 친선 축구대회 | 무승부 | |
2004년 6월 26일 | 제20회 | 일 · 농 친선 축구대회 | 농고승 1:1 (4 PK 3)[10] | |
2005년 6월 11일 | 제21회 | 농 · 일 친선 축구대회 | 농고승 | |
2006년 6월 3일 | 제22회 | 일 · 농 친선 축구대회 | 농고승 | |
2007년 | - | 5차 중단 | ||
2008년 6월 8일 | 제23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 | |
2009년 5월 23일 | 제24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 | |
2010년 6월 19일 | 제25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무승부 | |
2011년 6월 5일 | 제26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중앙고승 | |
2012년 6월 23일 | 제27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 | |
2013년 6월 15일 | 제28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 | |
2014년 | - | 6차 중단[11] | ||
2015년 | - | 메르스로 인해 무산 | ||
2016년 6월 11일 | 제29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중앙고승 | |
2017년 6월 3일 | 제30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 | |
2018년 6월 17일 | 제31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중앙고승 | |
2019년 6월 8일 | 제32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12] | |
2020년 | - | 코로나19로 인해 무산 | ||
2021년 | - | |||
2022년 6월 5일 | 제33회[13]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무승부 | # |
2023년 6월 24일 | 제34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 | # |
2024년 6월 9일 | 제35회 | 강릉단오제 축구정기전 | 제일고승 [14] |
[1] 舊 강릉상고[2] 舊 강릉농고[3] 이거 아니다[4] 지금의 북한 강원도 고성군[5] 현재는 학교 부지에 강원도립대학이 위치해 있다.[6] 강릉제일고와 강릉중앙고 두 쪽 중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반대쪽에서 강한 반발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7] 1982년 6월 25일 제8회 대회 직후 재학생들간 폭력사태가 발발해 6년 동안 취소함.[8] 강원도축구협회 주선으로 부활[9] 경비과다 부담으로 양교협의중단[10] 이때는 무승부시 승부차기를 도입했다.[11] 강릉제일고등학교가 강원 FC의 유스팀으로 지정된 이후 중앙고 측에서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개최 중단을 선언했다.[12] 강릉중앙고등학교가 금강대기 전국고등학교축구대회에, 강릉제일고등학교가 대한축구협회장배 전국고등학교축구대회에 참여했다. 일정 상 문제로 인해 양측 학교가 이번 정기전에 1학년 선수들이 뛰는 걸로 합의했다.[13] 코로나19로 인해 정기전이 무산된 2020년에 입학한 신입생들이 3학년이 되어 1, 2, 3학년 모두 처음 겪는 정기전이 되었다.[14] 이때 제일고는 교체로 프로인 양민혁을 내보냈다(...) 이후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며 강릉 정기전 최고 아웃풋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