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러시아의 원자력 잠수함 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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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одводные лодки проекта 685 «Плавник» |
1. 개요
프로젝트 685형 플라브니크 잠수함 (Подводные лодки проекта 685 «Плавник»)은 소련 해군의 기술 시험용 원자력 잠수함이다. NATO 코드명은 마이크급 (Mike-class)이지만, K-278 콤소몰레츠 (Комсомолец)[1]만 건조됐다.2. 제원
<colbgcolor=#fff> 프로젝트 658형 잠수함 플라브니크 Подводные лодки проекта 685 «Плавник» | ||
함명 | K-278 → K-278 콤소몰레츠 | |
건조사 | 세브마쉬 (Севмаш) | |
조선 번호 | 510 | |
기공 | 1978년 4월 22일 | |
진수 | 1983년 6월 3일 | |
취역 | 1983년 12월 28일 | |
퇴역 | 1990년 6월 6일 | |
모항 | 무르만스크 주 자파드나야 리차 (Мурманская область Западная Лица) 잠수함 기지 | |
운명 | 1989년 4월 7일 화재로 침몰 | |
수상배수량 | 4,400 ~ 5,750t | |
수중배수량 | 6,400 ~ 8,000t | |
전장 | 117.5m | |
전폭 | 10.7m | |
흘수 | 8 ~ 9m | |
수상 최고 속력 | 14kn (약 26km/h) | |
수중 최고 속력 | 26 ~ 30kn (약 48 ~ 56km/h) | |
무장 | 21인치 어뢰 발사관 6문 RPK-2 뷰가 대잠 미사일 53-65식 & VA-111 어뢰 | |
추진 장치 | <colbgcolor=#fff> 원자로 | 190Mw급 가압수형 OK-650 1기 |
증기 터빈 | 45,000SHP급 2기 | |
프로펠러 | 1축 | |
잠항 심도 | 일반 | 1,000m |
설계안 | 1,250m | |
한계치 | 1,500m | |
승조원 | 장교 | 30명 |
부사관 | 22명 | |
수병 | 12명 |
3. 상세
1966년 8월 고심도 작전 조건과 여러 최신 기술을 연구하기 위한 시험용 공격원잠의 요구성능서가 발행되면서 개발이 시작됐다. 특이하게도 이전까지는 전략원잠과 순항미사일 원잠을 담당하던 루빈 설계국이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일정이 질질 늘어진 탓에 8년이 지난 1974년이 되어서야 설계가 완성되었다.세베로드빈스크에서의 건조 과정도 순탄치는 않아 1978년 기공된 배가 1983년이 되어서야 진수되었다. 시에라급 잠수함은 물론이고 10년이나 늦게 프로젝트가 시작된 아쿨라급 잠수함의 초도함 진수와도 불과 1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시점이었다.
물론 아무 이유도 없이 일정이 밀리고 또 밀린 것은 아니었다. 마이크급 잠수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 깊은 잠항심도로, 작전심도가 상당 부분 과장됐음이 밝혀진 알파급 잠수함이나 시에라급 잠수함과 달리 실제 시험심도(test depth)가 1,000m에 달하는 놀라운 압력선체 강도를 자랑했다. 선체에 고도로 가공된 티타늄 합금을 대량사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대단한 성능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랐다. 고질적인 일정 지연에서 드러나듯 선체 제작 과정이 아주 까다롭고 건조 비용 또한 매우 고가였던 것이다. 이런 난점 덕분에 루빈 설계국이 지속적으로 후속함 도입을 제안하고 소련 북방함대 지휘부 역시 이 방안에 호의적이었음에도 초도함 K-278 단 한 척 건조로 프로젝트가 끝났다.
개발 자체는 일종의 시험함으로서 시작되었지만, K-278은 시험 임무만 맡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전투함으로서 운용되었다. 소련 잠수함 특유의 복각선체에 시에라급 잠수함과 동등한 동력계통 및 스카트 소나 체계, 6문의 533mm 어뢰발사관과 22발의 무장 탑재능력 등 일선에서 활동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특히 전략원잠의 호위 임무를 주로 맡곤 했다고 한다.
4. 침몰
1989년 2월 28일, 초계 임무를 맡은 K-278은 북대서양을 향해 출항했다. 당시 콤소몰레츠는 4년에 걸쳐 함정 인수와 해상시험을 맡았던 첫 함장 유리 젤렌스키 대령의 승조원들이 아닌 2대 함장 예브게니 바닌 대령 휘하의 새로운 승조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들은 초대 승조원들과 달리 함정 운용 경험이 부족했고, 조직 구조도 엉망이었다. 특히 제대로 된 손상 통제 부서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함정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39일 후인 4월 7일 오전 11시, 바렌츠해를 통해 콜라 반도의 모항으로 복귀중이던 콤소몰레츠의 7번 격실(기계실)에 화재가 발생했다. 손상된 밸러스트 탱크용 고압 공기 배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산소 탓에 격실 내에서 화재를 진압하기 어려워지자 기관장은 함장에게 격실을 폐쇄하고 프레온 소화가스를 주입해 불길을 잡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격실 안에서 화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승조원들의 목숨을 포기한다는 뜻이었고, 의무와 양심 사이에서 망설이던 바닌 대령이 마침내 가스 주입을 지시했을 때는 이미 적기를 놓친 뒤였다. 화재가 6번 격실로 옮겨붙은 것이다.
격실 기온이 섭씨 800도가 넘어가자 비상용 원자로 보호장치가 가동, 원자로의 작동을 중지시켰다. 일시적으로 수직/수평타 유압을 상실한 콤소몰레츠는 수심 385m에서 500m로 급격히 가라앉았으며, 함내 통신장비도 먹통이 됐다. K-278은 즉시 메인 밸러스트 탱크에 공기를 주입해 11시 20분경 수면으로 부상했고, 필수 인력이 아닌 승조원에게는 세일과 함 외 갑판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함 내의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손상된 배관을 타고 화재진압조의 산소마스크로 일산화탄소가 새어들면서 소화 작업은 한층 더 어려워졌다. 갑판 위의 승조원들은 달아오른 선체 위로 녹아 흘러내리는 음향흡수코팅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콤소몰레츠는 북방함대 사령부로 발신한 비상 전문에 아무런 응답이 없자 평문 SOS 신호 전송을 시작했다. 오후 12시 19분의 일이었다. 2시간 반 가까이 지난 2시 40분 신호를 수신한 소련군 탐색구조기가 접근했으나, 당장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상상태마저 빠르게 악화되었다.
K-278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함미 밸러스트 탱크 공기 주입이었다. 거칠어지는 바다에서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이 작업은 오히려 급격한 해수 유입을 초래했고, 곧 부력의 완전한 상실로 이어졌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함장은 오후 4시 42분 전원 퇴함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도 승조원들의 부족한 훈련 상태가 발목을 잡았다. 구명정 두 척 중 한 척의 전개가 지연되는 바람에 승조원 일부가 4월 바렌츠 해의 얼음장 같은 바닷물 속으로 입수해야 했던 것이다.
바닌 대령은 바다로 뛰어드는 승조원들을 뒤로 한 채 침몰하는 콤소몰레츠 안으로 되돌아갔다.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승조원들이 연기와 유독가스로 가득 찬 함 내에 남아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투지휘실에서 다섯 명의 승조원을 찾아낸 함장은 그들과 함께 탈출 포드로 들어갔다. 그러나 배가 80도 각도로 기운 채 빠르게 가라앉고 있는 탓에 탈출 포드는 제대로 분리가 되질 않았다. 챔버는 심도 1,600m가 넘어선 뒤에야 함내 폭발 덕분에 가까스로 분리되어 수면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비극은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 간신히 수면 위로 도달한 챔버에서 해치를 개방하려고 시도하자 안팎의 기압 차로 인해 아예 해치 자체가 날아가 버린 뒤 급격한 침수가 시작된 것이다. 단 두 사람만이 바다로 몸을 던질 수 있었고, 바닌 대령 등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의식을 잃은 세 명을 포함한 나머지는 침몰하는 챔버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콤소몰레츠의 침몰로부터 한 시간 뒤 소련 어선 한 척이 나타나 구명정과 바다 위에서 표류하던 30명의 승조원을 구조했다. 그러나 저체온증과 유독가스 후유증으로 인해 세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이 사고로 승조원 69명 중 42명이 사망했고, 탑재하고 있던 핵어뢰에서 방사능 물질이 대량 유출되어 사고 해역에는 어업 활동 금지령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