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color=#000> 엘리펀트 카시마시 エレファントカシマシ | ELEPHANT KASHIMASH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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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타카미도리 세이지, 미야모토 히로지, 토미나가 요시유키, 이시모리 토시유키 | |
| <colbgcolor=#000><colcolor=#FFF> 멤버 | 미야모토 히로지(보컬, 기타, 리더) 이시모리 토시유키(기타) 타카미도리 세이지(베이스) 토미나가 요시유키(드럼) |
| 결성 | 1981년 키타구 아카바네 |
| 데뷔 | 1988년 3월 21일 1집 <THE ELEPHANT KASHIMASHI> |
| 장르 | 록 |
| 레이블 | 유니버설 뮤직 재팬 |
| 사이트 | |
1. 개요
일본의 록밴드. 1981년에 결성해 1986년 소니 뮤직 산하의 CBS 오디션에 합격해 1988년 1집 <THE ELEPHANT KASHIMASHI>로 데뷔했다. 일본의 음울한 문화를 정면으로 비틀어버리는 저항 정신과 서정적인 멜로디로 1980년대 후반~2000년대 초 일본 모던 록, 펑크 록, 얼터너티브 록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록이 가진 강렬함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사소한 감정들을 짙게 녹여낸 밴드로 평가 받는다. 30년 이상의 경력 동안 언더와 오버를 오가며 활동하면서도 비주류적이고 주체적인 음악적 태도를 강하게 지켜오고 있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 밴드이기도 하다. 일본 록 역사에서 보자면 R.E.M.[1]이나 RHCP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밴드. 보통 부를 때 밴드 명을 줄인 '에레카시'로 부른다.2. 음악적 기조
초창기인 EPIC 레코드 시절엔 야성적인 바이브와 강렬한 사운드,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가사가 주를 이루고 포니캐년 시절엔 비교적 부드러운, 혹은 대중적인 스타일이 더해지고 삶에 대한 의지가 한층 뚜렷해진 작품들이, 도시바EMI 시절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성찰 및 탐구적인 테마가 주를 이룬다. 유니버설 시절부터는 부드러워진 바이브와 희망적이고 따뜻한 메시지가 많다. '냉소적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지만 희망에 몸부림치는' 염세주의적인 초창기에서, '의지를 다잡고 자아와 마음에 대해 성찰하고 탐구하는' 중반기를 넘어, 후반기인 현재로 와서는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 '함께라면 괜찮다'는 식의 낙천적[2] 테마가 짙어져 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음악적 스타일 변화라기보단 작사 및 작곡자이자 밴드의 리더인 미야모토 히로지의 일생에 걸친 심리적 변화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3. 소속사
1988년 데뷔 당시부터 1994년 7집을 낼 때 까지의 레이블은 EPIC Record JAPAN[3]이었고, 1996년 8집부터의 레이블은 포니캐년, 2000년 11집부터의 레이블은 도시바 EMI, 2007년 18집부터 현재까지 레이블은 유니버설 뮤직 재팬이다. EPIC 레코드 시절만해도 인기 있기 보다는 전형적인 컬트 팬덤과 비평적인 지지를 얻던 밴드였는데 포니캐년으로 이적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해 장수 밴드가 되었다.매니지먼트는 포니캐년 계약 당시부터 2019년 23집까지 페이스 뮤직 엔터테인먼트, 2019년 2월 1일부로 아뮤즈로 이적했다. 그리고 2024년 3월 31일 아뮤즈와의 계약 종료와 동시에 '엘리펀츠(Elephants)'라는 독립 매니지먼트 회사를 자체적으로 설립했다. 이에 따라 미야모토 히로지의 솔로 활동 매니지먼트도 이 곳에서 맡는다. 그리고 등기이사가 미야모토 히로지 본인이다.
4. 이력
4.1. 데뷔 이전
1981년 키타구립 아카바네다이 중학교 1학년 6반이었던 토미나가 요시유키와 이시모리 토시유키의 만남이 밴드 결성의 첫 단추였다. 미야모토 히로지도 이들과 같은 반이었지만 밴드에 합류한건 중학교 3학년 때. 타카미도리 세이지는 고등학교 시절 토미나가와 같은 반 동급생으로 만난게 인연이 되어 1986년에 합류하게 됐다. 밴드 결성을 주도하고 이시모리와 미야모토에게 록 음악을 들려준 건 현재 드러머인 토미나가였다. 미야모토 합류 당시에는 이 셋 외에도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가 따로 있었고, 오르간과 매니저를 동시에 담당한 여학생까지 6인조였다. 4인조 체제가 된 시기는 타카미도리 합류 이전으로 보인다.처음에는 레인보우, RC 석세션, 딥 퍼플의 카피 밴드로 시작했다.[4] 그리고 다음 해인 1982년 EastWest라는 야마하사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밴드 경연 대회에 출전, 이 대회의 지역 예선에서 훗날 1집의 수록곡이 될 <デーデ>와 <やさしさ>를 부른 게 밴드로서 공식적인 첫 무대였다. 그리고 1986년 타카미도리 세이지가 합류하여 현재의 멤버와 포지션을 정립, 소니 뮤직 오디션에 입상하고 소니 소속 EPIC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한다.오디션 영상[5]
4.2. EPIC 레코드 시절(1988년~1994년)
EPIC레코드 시절은 에레카시의 음악 세계가 농축된 시기로 평가받는다. 데뷔부터 꾸밈이나 기교가 전혀 없는 날것 그대로의 야성을 드러내보인 에레카시는 Rockin' On 잡지로부터 사잔 올 스타즈 이후 가장 충격적인 데뷔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려하지 않은 사운드가 오히려 미야모토의 보컬 스타일과 굉장히 잘 어울렸고, 덕분에 키치한 사운드와 일상의 우울감을 표현한 가사가 잘 조화되어 거칠면서도 호소력있는 음악적 색깔을 띄었다.EPIC레코드 시절의 작품들은 작사 면에서 사회 문제와 문학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 일본 문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앨범이 4집 生活다. 또한 2집 The Elephant Kashimashi II는 체념과 절망이 뒤섞인 일상에 대한 은유적 묘사가 많은데, 그런 상황을 강요한 주체는 사회 구조, 그리고 그 가사 속의 주인공은 다른 이가 아닌 화자 자신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외부적 원인은 사회로부터 왔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스스로라는 점을 이야기하며 은유적인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 이렇듯 미야모토의 문학적인 작사 능력이 빛을 발한 2집은 현재까지도 에레카시 커리어 사상 최고의 앨범이자 일본 록 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앨범이 일본 록 씬에서 얼터너티브 록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한 몫한다. 현재도 일본 록 잡지에서 일본 록 명반선을 꼽을때 에레카시의 초기작들은 빠지지 않는다. 주로 상술한 <THE ELEPHANT KASHIMASHI Ⅱ>, <浮世の夢>, <生活>가 자주 꼽히는 편. 롤링스톤 재팬은 일본 록 명반 100선에서 <THE ELEPHANT KASHIMASHI Ⅱ>를 50위에 선정했다.#
이 외에도 1994년에 발매한 7집 <東京の空>는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녹음과정에 있어 최초로 오버더빙을 실행했고, 몇몇 곡의 말미에 스킷을 구성하는 등 사운드에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앨범과 동명의 수록곡 <東京の空>은 12분 45초라는 장대한 러닝타임과 트럼펫 연주자 ‘콘도 토시노리‘가 참여하는 등 앨범의 음악적 스케일과 완성도가 상당하여 비평적 성과는 준수했으나, 상업적 성과가 저조해 1995년에 EPIC레코드로부터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당하게 됐다.[6] EPIC 시절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팬들에게 여운을 남긴 앨범.
그러나 평단과 컬트팬의 지지가 이어졌지만 반대로 ‘잘 팔리지 않았다’는 점은, EPIC 시기가 밴드의 커리어 중에서 대중성이 가장 떨어지는 시기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밴드의 대표곡인 ’今宵の月野ように’나 ’俺たちの明日’로 밴드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EPIC 시절의 야성적이고 거친 사운드를 받고 충격을 받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믹싱은 거칠고, 연주는 미성숙했으며, 가사도 대중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며, 미야모토가 말그대로 생목으로 노래를 부르던 시기라 듣기에도 거북했다. TV에도 출연을 잘 안해서 공연을 보러 가도, 무대 매너가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불친절했다. 관객에게 대놓고 “시끄러 바보자식아(うるせな、ばかやろう)“라고 욕한다던가#, 기껏 나온 TV방송에서는 카메라맨 앞에서 발길질을 한다던가#, 1991년 신년연휴가 끝나고 일본 무도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인원을 3천명만 준비하고 무대효과라곤 빨간 조명만 있다던가#[7], 말 그대로 대중은 신경도 안쓰고 철저히 자신들의 패기에 기댔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음반사에서 쫒겨난 1년이라는 시간동안 음악 활동에 문제가 생기자 미야모토는 리더로서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자신들을 받아줄 소속사들을 직접 찾아다녔고, 나머지 세 멤버 타카미도리, 이시모리, 토미나가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밴드 경력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맞게된다. 작곡이나 공연 등은 간간히 이루어졌지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에는 제약이 큰 상태였다.
4.3. 포니캐년 시절(1996년~1998년)
다행히도 1996년 포니캐년과 계약을 체결, 1996년에 8집 <ココロに花を>를 발매한다. 포니캐년의 요구에 맞춰 8집부터 10집까지 포니캐년에서 낸 3장의 음반 전부 이전의 음악 스타일에 비해 조금 더 부드럽고 대중적인 사운드를 담게 됐다. 또한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이미지가 강했던 엘리펀트 카시마시에게 포니캐년이 방송 출연 스케줄을 늘려준다. 이 시기에 음악 프로그램 외에도 예능 프로그램 출연 비중이 상당히 많았고, 미야모토는 시트콤 출연까지 했다. 그리고 이것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며 평단과 팬덤의 지지는 크나 대중적 인기는 적었던 엘리펀트 카시마시에게 인기와 유명세를 더해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이러한 소속사의 요구에 맞추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엘리펀트 카시마시는 포니캐년에서 고작 3년 간 3장의 앨범을 연달아 내고 곧장 도시바EMI로 이적한다. 1996년 포니캐년 이적 후 첫 앨범인 8집 <ココロに花を>가 나온 당시, 미야모토는 워크맨으로 수록곡 <かけだす男>를 들으며 시부야 거리를 걷다가 너무나 부드럽고 말끔한 믹싱처리에 회의감을 느껴 그 자리에서 워크맨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또한 방송에서 진행된 무대에서는 밴드 연주를 라이브가 아닌 MR로 진행한 경우가 많았고, 미야모토는 이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공연 중에 본인이 핸드싱크를 하다가 손을 완전히 놔버리거나, 핸드싱크 중인 이시모리의 기타를 뺏어 버리는 등의 행동을 자주 했다. 이토록 포니캐년 소속 시절의 활동이 본인들의 가치관과 잘 맞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도시바EMI 소속 시절의 음반은 전부 진중한 바이브와 하드한 사운드로 채워져 있으며, 예능을 비롯한 TV 방송 출연을 최소화하게 된다.[8]
미야모토는 포니캐년 소속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998년, Bridge지에서 스핏츠의 쿠사노 마사무네와 함께 한 인터뷰에서 TV 방송에 나와 공연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편하고 좋다"고 답변한 적이 있지만 맥락상 긍정적인 의미의 대답은 아니었다. 쿠사노는 같은 질문에 "놀림거리가 된 기분이라서 싫다"고 답변했다. 해당 내용 외에도 다른 질문 및 답변 몇 가지를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TV출연 관련 질문)
시부야 요이치[9]: 'TV에 나와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편하고 좋다'고 적었는데.
미야모토 히로지: 100번의 공연보다 1번의 TV출연이 더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뭔가 그렇게 한심하게 생각해버릴 때도 있다. 나는 TV 드라마에 사용된 곡(오늘 밤의 달처럼)이 지금까지 낸 것 중에 가장 많이 팔렸다. 뭐하러 지금껏 앨범을 9장이나 낸건지, 그렇지 않은가? 뭐, 그런 의미에서 편하고 좋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음악적 변화 관련 질문)
시부야 요이치: <도쿄의 하늘> 이전의 에레카시와, 그 이후의 에레카시는 전혀 다른 것 같다. 미야모토는 별로 다른 걸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미야모토 히로지: 음악적으로는 그런 것 같다.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태프나 프로듀서, 소속사 등 밴드 외 인물 관련)
시부야 요이치: 에레카시는 이젠 말 그대로 밴드 멤버 이외를 전부 교체하고 돌연 성공한 것 같다.
미야모토 히로지: 그에 관해선 벌써 피곤해졌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싶다'라고 하는 이미지가 있다고 한들, 모두들 우리가 18살이던 때(초창기)의 이미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굉장히 갑갑했다. '좋고 나쁘고를 따져봤을 때, 어쩌면 그렇게 안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들 스스로 '우리 앨범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라는 목표를 삼던 차에 '이런 스태프가 있으면 어떨까'라고,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쪽(시부야 요이치)도 생각했던 거였구나. 그래서 짤렸지만[10].(웃음) 그렇게 돼서 또 곤란했고 말이다. 돈도 없었고.
시부야 요이치[9]: 'TV에 나와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편하고 좋다'고 적었는데.
미야모토 히로지: 100번의 공연보다 1번의 TV출연이 더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뭔가 그렇게 한심하게 생각해버릴 때도 있다. 나는 TV 드라마에 사용된 곡(오늘 밤의 달처럼)이 지금까지 낸 것 중에 가장 많이 팔렸다. 뭐하러 지금껏 앨범을 9장이나 낸건지, 그렇지 않은가? 뭐, 그런 의미에서 편하고 좋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음악적 변화 관련 질문)
시부야 요이치: <도쿄의 하늘> 이전의 에레카시와, 그 이후의 에레카시는 전혀 다른 것 같다. 미야모토는 별로 다른 걸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미야모토 히로지: 음악적으로는 그런 것 같다.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태프나 프로듀서, 소속사 등 밴드 외 인물 관련)
시부야 요이치: 에레카시는 이젠 말 그대로 밴드 멤버 이외를 전부 교체하고 돌연 성공한 것 같다.
미야모토 히로지: 그에 관해선 벌써 피곤해졌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싶다'라고 하는 이미지가 있다고 한들, 모두들 우리가 18살이던 때(초창기)의 이미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굉장히 갑갑했다. '좋고 나쁘고를 따져봤을 때, 어쩌면 그렇게 안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들 스스로 '우리 앨범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라는 목표를 삼던 차에 '이런 스태프가 있으면 어떨까'라고,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쪽(시부야 요이치)도 생각했던 거였구나. 그래서 짤렸지만[10].(웃음) 그렇게 돼서 또 곤란했고 말이다. 돈도 없었고.
유니버설 뮤직 이후의 음악들도 포니캐년 시절처럼 대중적인 곡들과 방송 출연도 다시 늘었지만, 이는 소속사로부터 요구된 면보다는 미야모토를 주축으로 밴드에 전체적인 연륜과 안정감이 더해지며 묻어나오는 밴드 스스로의 진실한 메시지에 가깝다. EPIC레코드 시절과 포니캐년 시절에는 방송에서 편하게 웃지도 않고, 방송으로 진행 되는 무대, 심지어 자신들의 뮤직비디오에서는 기타를 던지거나 물건을 뒤엎는다거나[11] 단순히 길거리에서 서있는 영상으로 비디오의 거의 대부분를 채우고[12], 도시바로 이적한 후엔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인식되는 것이 싫어 방송 출연 자체를 스스로 지양하던 미야모토가 2018년부터는 적극적으로 방송 출연과 솔로 활동까지 시작하게 된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나며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토록 포니캐년을 통해 성공과 좌절을 동시에 맛본 에레카시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에 와서 포니캐년 시절은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고루 극찬받는데 성공한 에레카시 커리어 최고의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EPIC 레코드 시절과 도시바EMI 시절의 음반들이 고평가받지만, 초창기의 주제의식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메시지를 다양한 음악적 색깔로 부담없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는데 성공하고, 평단으로부터는 지속적인 지지를 굳혔다는 점에서 포니캐년 시절이 종합적으로 커리어의 황금기로 평가받는 것이다. 또한 밴드 커리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인 9집 <明日に向かって走れ-月夜の歌->도 포니캐년 시절에 해당한다. 밴드 최고 인기곡인 <今宵の月のように>도 이 앨범의 수록곡. 또다른 인기곡으로 꼽히는 <悲しみの果て>도 8집 수록곡이기에 포니캐년 시절에 해당된다.
4.4. 도시바 EMI 시절(1999년~2007년)
4.5. 유니버설 뮤직 시절(2008년~2019년)
4.6. 아뮤즈 시절(2019년~2024년)
4.7. 엘리펀츠 시절(2024년~현재)
5. 공연 및 활동
매년마다 히비야공원 야외 음악당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한다. 매년은 아니지만 일본 무도관에서 새해 맞이 공연도 자주 진행된다. 때문에 무도관 공연과 히비야공원 공연만으로도 라이브 DVD가 많이 발매됐다. 미야모토가 말하기를 '가장 엘리펀트 카시마시 다운 무대'가 히비야공원이라고 한다. 이는 대다수의 팬들 또한 동의한다.2017년 30주년 기념 전국 투어가 3월 20일에 시작해 12월 9일 공연을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정확히는 2018년이 30주년이지만 2017년 전국 투어를 마무리한 뒤, 정확히 데뷔 30주년이 되는 2018년 3월에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의 공연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3월 17일에 공연을 펼쳤는데, 4일 뒤인 3월 21일은 엘리펀트 카시마시의 첫 데뷔 싱글 <デーデ>와 데뷔 앨범 <THE ELEPHANT KASHIMASHI>가 나온 날이다.자세한 정보
2017년 제68회 NHK 홍백가합전에 커리어 최초로 출연하였다. 9집 <明日に向かって走れ-月夜の歌->의 수록곡이자 후지TV 드라마 <月の輝く夜だから>의 주제가로 쓰인 '今宵の月のように'를 불렀다. 밴드의 최고 인기곡이다.
2018년 3월 17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데뷔 30주년 공연을 펼쳤다. 원래는 단독 콘서트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꿈의 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게스트로 Spitz와 Mr.Children이 출연하게 됐다. 17일에는 에레카시 단독 라이브,[13] 18일에 세 밴드의 합동 공연이 이루어졌다. 무대 순서는 Spitz, Mr.Children, 엘리펀트 카시마시, 마지막 앙코르는 세 밴드의 합동 공연으로 진행됐다.
2018년 소규모 공연장이나 라이브 하우스(Zepp)를 중심으로 한 23집 'Wake Up' 전국 투어가 6월 25일에 시작해 9월 11일 공연을 끝으로 마무리 됐다. 자세한 정보
2020년 10월 4일 히비야공원 정기 공연이 열리는데, 이번 라이브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유례없는 인터넷 스트리밍도 지원한다.
2023년 3월 11일부터 4월 23일까지 데뷔 35주년 일본 전국 투어 공연을 펼친다. 관련 정보
6. 디스코그래피
| 정규 앨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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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LEPHANT KASHIMASHI 디 엘리펀트 카시마시 1988.3.21 | THE ELEPHANT KASHIMASHI II 디 엘리펀트 카시마시 2 1988.11.21 | 浮世の夢 부세의 꿈[14] 1989.8.21 | 生活 생활 199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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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エレファントカシマシ5 엘리펀트 카시마시 5 1992.4.8 | 奴隷天国 노예 천국 1993.5.21 | 東京の空 도쿄의 하늘 1994.5.21 | ココロに花を 마음에 꽃을 1996.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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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日に向かって走れ-月夜の歌- 내일을 향해 달려라-달밤의 노래- 1997.9.10 | 愛と夢 사랑과 꿈 1998.12.9 | good morning 굿 모닝 2000.4.26 | ライフ 라이프 200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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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AD OR ALIVE」(ミニ・アルバム) 데드 오어 얼라이브(미니 앨범) 2002.12.26 | 俺の道 나의 길 2003.7.16 | 扉 문 2004.3.31 | 風 바람 2004.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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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町を見下ろす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2006.3.39 | STARTING OVER 스타팅 오버 2008.1.30 | 昇れる太陽 떠오르는 태양 2009.4.29 | 悪魔のささやき~そして、心に火を灯す旅~ 악마의 속삭임~그리고, 마음에 불을 지피는 여행~ 2010.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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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STERPIECE 마스터피스 2012.5.30 | RAINBOW 레인보우 2015.11.18 | Wake Up 웨이크 업 2018.6.6 | |
7. 멤버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이시모리, 토미나가에 의해 밴드가 결성됐다. 1학년 때 이들과 같은 반 친구였던 미야모토는 중학교 3학년때 합류. 타카미도리는 미야모토, 토미나가와 고등학교 동급생이었고 이 인연으로 인해 토미나가의 권유로 1986년 합류해 지금의 4인 체제가 되었다. 결성 당시 다들 기타 연주만을 할 줄 알았지만, 미야모토가 어린 시절 합창단 출신이기 때문에 보컬을 맡았으며, 토미나가는 본인의 형이 기타와 베이스를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머의 길을 택했고, 타카미도리는 밴드 합류 때문에 베이스로 전향했다. 미야모토가 앨범 작업에 있어 본격적으로 기타를 사용한 시기는 1990년에 발매한 4집 <生活>이다. 때문에 4집 이전 곡들을 공연할 때 기타를 잡지 않고 마이크만 잡는다. 또한 투 기타로 연주되는 곡에서는 대체로 미야모토가 리듬기타를, 이시모리가 리드기타를 맡는 경향이 있다.
7.1. 미야모토 히로지
미야모토 히로지([ruby(宮本浩次, ruby=みやもとひろじ)]), 애칭 미야지, 1966년 6월 12일 생, 도쿄도 키타구 아카바네 출신. 키 170cm, 혈액형 O형. 작사, 작곡, 보컬,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담당.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미야모토 히로지#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미야모토 히로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2. 이시모리 토시유키
이시모리 토시유키([ruby(石森敏行, ruby=いしもりとしゆき)]) 애칭 이시 군, 1967년 3월 18일 생, 도쿄도 키타구 아카바네 출신. 키 174cm, 혈액형 O형.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담당. 가끔씩 공연에서 백보컬도 맡는다. 평소에 미야모토에게 짓궂은 장난을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이지만 미야모토의 가장 오래되고 친한 친구다. 중학교 입학식 때 하루만에 친해져서 그 날 하교길도 같이 갔다고 한다. 공연 세트리스트 결정도 미야모토와 이시모리 둘이서 한다.
7.3. 타카미도리 세이지
타카미도리 세이지([ruby(高緑成治, ruby=たかみどりせいじ)]) 애칭 세이 쨩, 1966년 4월 15일 생, 도쿄도 주오구 츠키시마 출신. 키 178cm, 혈액형 B형.
일렉트릭 베이스 담당. 1986년 고등학생 때 밴드에 합류해 4명의 멤버 중 가장 늦게 밴드에 합류한 멤버다. 합류 당시 미야모토가 "(밴드 합류)할거야?"라고 묻자 즉시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밴드는 소니 CBS 오디션에 합격한다. 미야모토가 작곡하지 않은 유이한 곡 중 하나의 주인으로, 1989년 출시한 앨범인 <浮世の夢>에 수록된 <GT>를 작곡했다. 염색을 하지 않아 현재 머리가 백발이다.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든 이 후 중절모나 빵모자를 즐겨 쓰고 있다. 과묵해보이는 이미지와 어울리게 단단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 이미지와 달리 미야모토의 말로는 순수한 내면을 갖고 있다고.
7.4. 토미나가 요시유키
토미나가 요시유키([ruby(冨永義之, ruby=とみながよしゆき)]) 애칭 토미, 1966년 4월 14일 생, 도쿄도 키타구 아카바네 출신. 키 171cm, 혈액형 B형.
드럼 담당. 미야모토가 작곡하지 않은 유이한 곡 중 하나의 주인으로, 1988년 출시한 앨범인 <THE ELEPHANT KASHIMASHI Ⅱ>에 수록된 <土手>를 작곡했다. 베이시스트인 타카미도리를 영입한 장본인이고 학창시절 미야모토와 이시모리가 록을 처음으로 접하게 해준 사람이며, 과거 실연당한 미야모토가 한탄&상담 전화를 몇 번이고 걸었는데 이를 단 한번의 거절없이 전부 받아주기도 하는 등 밴드의 숨겨진 버팀목이다.
8. 기타
- 밴드 멤버 4명 중 3명의 고향이자 밴드 활동의 무대였던 아카바네에서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11월 16일부로 에레카시의 대표곡인 '今宵の月のように'와 '俺たちの明日'가 아카바네역의 각각 6번선, 5번선 발차 멜로디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야모토는 이에 대해 '저는 아카바네에 가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카바네는 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향 아카바네역의 발차 멜로디로 우리들의 곡이 사용되는 건 정말 믿기지 않고,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뭔가 아주 따뜻한 기분이 듭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 미야모토가 음악적으로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RC 석세션. 이외에도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같은 밴드의 영향도 받았으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 충격을 받아 반복 청취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설을 즐겨 읽으며 거기에서 예술적 감상을 많이 받는 것으로 보이는데, 모리 오가이나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소설가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모리 오가이를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2006년 발매한 앨범 <扉>의 첫 곡이자 모리 오가이의 일생과 남자로써의 삶을 연관지어 이야기한 <歷史>라는 곡도 있다. 모리 오가이에 대한 헌정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扉>와 <歷史>는 밴드의 무수히 많은 음반과 노래들 중에서도 명반, 명곡으로 꼽히는 작품들 중 하나다.
- 이전에는 오로지 밴드 4명만이 라이브 무대에 섰지만 2008년 이후로는 녹음 및 라이브 전용 세션을 두고 있다. 키보드에 츠타야 코이치, 기타에 히라마 미키오[15], 현악기에 바이올리니스트 긴바라 지에코와 첼리스트 카사하라 아야노를 비롯한 긴바라 지에코 스트링스 팀 멤버들, 관악기에 야마모토 타쿠오 크루를 라이브 세션으로 두고 있다.[16]
- 한 해에 앨범을 두 장 이상 발매한 경우가 세번이나 된다. 첫번째는 1988년의 <THE ELEPHANT KASHIMASHI>와 <THE ELEPHANT KASHIMASHI II>, 두번째는 2002년의 <ライフ>와 <DEAD OR ALIVE>, 세번째는 2004년의 <扉>와 <風>다. 평균적으로 앨범이 나오는 주기가 평균적으로 1~2년도 채 안되며, 앨범 발매 주기가 3년을 넘긴 경우는 커리어가 완전히 완성된 이후로 볼 수 있는 2012년 <MASTERPIECE>에서 2015년의 <RAINBOW>, 그리고 또 그로부터 2018년의 <Wake Up>까지 두번의 사례 밖에 없다. 이중에서 Wake Up은 2024년 현재 밴드의 최신 앨범이다. 다만 밴드의 모든 곡을 작사 & 작곡하는 미야모토 개인의 창작 활동으로 여길 경우, 2020년에 첫 솔로 앨범 <宮本、独歩>가 발매되어 <Wake Up>이후로 또 한번 2년 내에 앨범이 발매됐다.
- 2004년에 앨범 '扉'의 작업 기간을 다룬 '扉の向こう'라는 TV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다. 2013년에 'the fighting men's chronicle'이라는 데뷔 25주년 극장판 다큐멘터리도 방영했었다. 이 다큐의 감독은 야마시타 노부히로다.
- 4명의 멤버 중 미야모토 히로지가 유일한 미혼자이다. 나머지 셋은 전부 기혼자이며 이시모리는 3번째 결혼을 했다. 미야모토는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동갑 여배우 '에스미 마키코'[17]와 연애한 적이 있었고 현재는 싱글이다.
- 이시모리는 항상 미야모토의 장난 표적이다. 공연 도중 선글라스를 뺏기거나, 밀려 넘어지거나, 팔로 치인다거나. 인터뷰 도중에도 볼을 잡힌다거나 하기도 한다. 워낙 미야모토의 움직임이나 언행이 산만하고 활달해서, 공연 도중에 연주를 하고 있는 타카미도리나 토미나가에게 뜬금없이 어깨동무를 하기도 한다. 방송이나 인터뷰 도중의 행동은 장난성이겠지만 라이브 도중의 행동은 '단순 장난'이라기보단 일종의 파이팅을 불어넣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학생 시절, 타카미도리의 집에 미야모토와 토미나가가 놀러갔는데 타카미도리의 아버지가 타카미도리를 깨우자 타카미도리가 "와도 깨우지 말라고 했잖아!"라며 소리를 질러 집안싸움이 일어났고, 미야모토와 토미나가는 그냥 돌아가며 속으로 '저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 '엘리펀트 카시마시'라는 밴드명은 딱히 의미가 없다고 한다. 영화 'Elephant Man'과 일본의 만담 트리오 카시마시 딸에서 따왔다고 한다.
- 토미나가가 2006년 만성 경막하 혈종이 발병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완치된 상태.
- 미야모토가 밴드의 리더이자 모든 곡을 작사&작곡 하지만 기계치인지라 앨범 작업 시 프로듀싱 장비들을 다루는 건 이시모리의 몫이라고 한다.
- 공연 시 이시모리의 기타치는 자세가 참으로 묘하다. 두 다리를 거의 ┌┐모양으로 벌리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 30년의 세월 동안 머리 모양에 변화가 매우 잦았기 때문에 이시모리의 모습 변화도 밴드 공연 시 보는 재미 중 하나였다. 2018년 이후로는 평범한 짧은 머리를 유지 중이다.
[1] 포크 록에 영향을 받은 컬리지 록, 인디에서 시작해 국민적 인기를 얻은 과정, 얼터너티브 록의 확산에 기여, 독특하면서도 감성적인 가사 등 닮은 지점이 많다.[2] 낙관적과는 조금 다른 것이, 낙관적은 모든 것을 좋게 되리라고 여기는 것이지만 낙천적은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하더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가깝다. 에레카시의 현재 스타일은 <RAINBOW>의 수록곡 <雨の日も風の日も>에서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맑게 갠 날도, 안개가 낀 날도 걸음을 멈출 수 없어', '빛나는 나 자신을 깨달았을 뿐, 난 내가 깨달은 만큼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싶어. 나는 언젠가 상처받은 마음을 해방시키고 싶어. 나는 언제든지 상처받은 마음을 다시 북돋우고 싶어'같은 가사를 미루어보아 '낙천적'인 성향이다.[3] 소니 뮤직 산하의 음반사.[4] 특히 초기에는 RC 석세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사회 비판적인 가사와 무대 위에서의 과격한 퍼포먼스, 그리고 언뜻보면 음치같아 보이는 창법이 그렇다. 대놓고 관객에다가 RC 석세션은 듣고 오라고 쿠사리를 먹였을 정도이니.[5] 같은 오디션에서 유니콘(밴드)도 합격. 이 오디션에서만 일본 록의 거성인 미야모토 히로지와 오쿠다 타미오가 데뷔하였다. 영상에는 잘 안나오지만 TOKYO TACO BLUES를 부른 ‘테츠 100%‘의 키보디스트가 칸노 요코였다.[6] 바로 앞 앨범인 <奴隷天国>의 성과가 부진하여, 음반사로부터 다음 앨범은 높은 판매량을 벌어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7] 이 공연의 관객 중에 스핏츠의 쿠사노 마사무네가 있었다.[8] 방송 출연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고 그나마 음악 방송만 드물게 나가는 정도였다.[9] 음악 평론가이자 Bridge를 비롯해 음악 관련 잡지를 발매하는 Rockin' On사의 사장. 해당 인터뷰에서 진행을 맡았다.[10] 에픽 레코드에서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당했던 것을 뜻한다.[11] 포니캐년 시절 8집의 孤独な旅人에서의 4분20초부터[12] EPIC 레코드 시절 1집의 やさしさ, 4집의 男は行く[13] 앙코르 포함, 무려 31곡을 불렀다.[14] '부세'는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단어.[15] 도쿄지헨의 1대 기타리스트[16] 야마모토 타쿠오와는 2002년 12집 '라이프' 앨범 작업 및 투어를 계기로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카우보이 비밥의 여러 OST에서 색소폰 연주를 맡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17]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배우 생활 동안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잦았고 이 때문에 2017년에 연예계를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