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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8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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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0.5px" | 클리블랜드 168인 (41.9%) | ✔ (58.1%) 233인 해리슨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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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일시 | 11월 6일 | ||||
투표율 | 77.7% | ||||
선거 결과 | |||||
후보 | [[공화당(미국)| 공화당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 부통령 리바이 P. 모턴 | [[민주당(미국)| 민주당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부통령 앨런 G. 서먼 | |||
선거인단 | |||||
233명 | 168명 | ||||
전국 득표 | |||||
47.8% 5,443,892표 | 48.6% 5,534,488표 | ||||
대통령 당선인 | 부통령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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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wiki style="margin: -5px -10px" |
1. 개요
미국에서 26번째로 열린 대통령 선거이다.2. 배경
4년 전 대선에서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뉴욕주 출신의 개혁파 민주당 후보로 나서, 20년 가까이 지속된 공화당의 백악관 지배를 무너뜨렸다. 이는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이 처음으로 대통령직을 탈환한 사건으로, 당시 클리블랜드는 공직 부패 척결, 행정 개혁, 균형 재정을 앞세운 청렴한 이미지로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공화당 내부에서 이탈한 개혁파, 소위 머그웜프(Mugwumps)들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대통령에 오른 클리블랜드는 전반적으로 정직하고 근면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과감한 추진력보다는 관료적 안정성에 집중했다. 그는 거부권을 자주 사용하며 예산 낭비와 정치적 보은 인사를 줄이려 했고, 특히 남북전쟁 참전 군인들의 연금 청구에 대해 부정수급 가능성을 이유로 다수 거절하면서 참전용사 계층과 마찰을 빚었다.
한편, 클리블랜드는 고율 관세로 인한 연방정부의 막대한 흑자를 문제 삼으며, 소비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관세 인하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 같은 입장은 남부와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도시 상공업자들에게는 호응을 받았지만, 북부 제조업 지대에서는 자신들이 요구하는 산업 보호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공화당은 이를 노동자 일자리 위협이라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정권 중반이 넘어가면서, 클리블랜드는 남부의 보수적 지지층과 북부의 개혁주의 지지층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점차 어려움을 겪었다. 이 틈을 노린 공화당은 1886년 중간선거에서 회복세를 보이며 다음 대선의 발판을 다지기 시작했다.
3. 정당별 상황
3.1. 민주당
3.1.1. 클리블랜드의 정치적 고립
1885년,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된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취임 직후부터 강한 재정 보수주의자이자 행정 개혁론자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했다. 4년 동안 무려 414건의 거부권을 행사하며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의회의 입법을 강하게 견제했고, 그 숫자는 당시까지 모든 전임 대통령의 거부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클리블랜드가 특히 집중했던 것은 의회의 방만한 지출과 정실 인사, 그리고 참전 군인 연금 확대 시도였다. 그는 이런 정책들이 국가 재정을 좀먹고 있다고 보았고, 이에 따라 수많은 법안을 거부했다. 이런 강경한 태도는 곧 반발을 불러왔다. 대표적으로 남부연합 전쟁기를 원래 주로 돌려보내라는 행정명령까지 내렸다가,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철회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북군 참전용사 단체인 Grand Army of the Republic(GAR)의 강한 반감을 샀고, 클리블랜드가 국가를 위해 싸운 이들조차 외면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행정에서뿐 아니라 정치적 행보에서도 클리블랜드는 타협보다 원칙을 중시하는 스타일을 고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신을 정치적으로 키워낸 기반인 뉴욕주의 태머니 홀(Tammany Hall) 조직과의 정면충돌이었다. 태머니 홀은 뉴욕 민주당의 핵심 권력 기반으로, 인사권과 지역 조직 운영을 주도하던 강력한 정치 기구였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이들의 인사 개입을 거부하고 공직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사실상 뉴욕 정당 조직과의 결별을 선언한 셈이 됐다.
덕분에 그는 ‘정직한 대통령’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노동자·농민·참전 군인층과의 거리감은 점점 벌어졌다. 당내에선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라는 비판이 뒤따랐고, 정치적 고립은 점차 심화됐다. 그럼에도 클리블랜드는 정치적 거래나 타협보다, 정책의 일관성과 행정의 정당성을 우선시했고, 이는 곧 재선을 준비하던 그에게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3.1.2. 당내 권력투쟁과 재지명 도전
1888년 재선을 앞둔 클리블랜드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책보다 당 안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쥐는 것이었다. 첫 임기 내내 정실 인사를 거부하고 조직정치와 거리를 둬왔지만, 재선 국면에 접어들면서는 정당 내부의 파워게임에서 밀리지 않아야 했다. 실제로 당시 민주당 내에는 클리블랜드의 노선에 반기를 든 세력이 적지 않았다.대표적인 인물이 펜실베이니아의 사무엘 J. 랜들 하원의원과 데이비드 B. 힐 뉴욕 주지사가 있었다. 랜들은 보호무역의 대표 주자였고, 힐은 태머니 홀을 배경으로 한 뉴욕의 조직정치를 이끌고 있었다. 둘 다 클리블랜드의 관세 개혁 드라이브에 노골적인 불만을 품고 있었고, 동시에 독자적 기반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려 하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이런 움직임에 정면으로 맞섰다. 당 지도부를 향해 자신이야말로 전국 단위에서 승산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결국 이를 받아들인 당 지도부의 지원으로 전당대회에서도 경쟁 없이 재지명에 성공했다. 이는 마틴 밴 뷰런 대통령 이후 민주당이 현직 대통령을 재지명한 첫 사례였다.
이번에는 단순히 후보로 나선 데 그치지 않았는데, 자신의 관세 인하 노선을 아예 당 강령으로 못박고 정책 기조 자체를 당 전체의 입장으로 끌어올렸다. 공화당이 고율 관세를 앞세워 북부 산업지대를 공략하는 데 맞서, 클리블랜드는 민주당이 소비자 중심의 개혁 정당으로 나서야 한다고 믿었다.
3.1.3. 러닝메이트 교체
대선 한참 전인 1885년 11월, 부통령 토머스 A. 헨드릭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지라 클리블랜드는 재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 러닝메이트를 고르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선택은 오하이오 출신의 원로 정치인 앨런 G. 서먼이었다.상원의원을 지낸 서먼은 중서부 유권자들과 민주당 내 보수파 사이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고, 정책보다 안정감을 중시하는 흐름에 부합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오하이오는 선거인단 수가 많은 핵심 주였기에, 지역적 균형을 고려한 선택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1888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클리블랜드-서먼 티켓을 공식화하는 자리였고, 동시에 클리블랜드의 정책 노선에 대해 당 전체가 다시 한 번 지지를 확인하는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표면적인 단결과 달리, 물밑에선 여전히 불안 요소가 많았다.
태머니 홀과의 갈등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서부 농민층과 북부 노동계의 반응도 미지근했다.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정책 스타일에 대한 내부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전당대회로 당을 표면적으로 하나로 묶는 데는 성공했지만, 조직과 지역 기반에서의 균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3.2. 공화당
3.2.1. 풍요 속 빈곤, 그리고 해리슨
1888년 대선을 앞두고, 중간선거 선전을 바탕으로 공화당은 다시 백악관을 탈환할 후보를 물색하고 있었다. 실제로 공화당 내부에서는 민주당 집권이 일시적인 반동일 뿐, 권력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강했지만 문제는 뚜렷한 대세주자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하이오의 존 셔먼 상원의원, 미시간의 러셀 A. 앨저 전 주지사, 아이오와의 윌리엄 B. 앨리슨 상원의원, 심지어는 체스터 A. 아서 전 대통령까지 유력하게 거론되는 이름은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누구를 밀 것이냐보다 누구를 막을 것이냐가 중심에 있었던 대회였다.존 셔먼은 정책과 경륜에선 강점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보호무역 노선과 대중적 확장성 부족이 약점이었다. 러셀 앨저는 참전 장군이었지만, 정치적으로 거친 인상을 지우지 못했고, 체스터 아서는 건강 악화와 과거 행정부에 대한 피로감으로 무게감이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인디애나 출신의 벤저민 해리슨이 차선책으로 서서히 지지를 끌어올렸다. 북군 장군 출신으로 클리블랜드 행정부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벌이던 참전용사 단체와의 관계가 좋았고, 정치적으로는 중도적이며 공격성도 낮은 절충형 인물이었다. 게다가 윌리엄 헨리 해리슨 전 대통령의 손자라는 상징성도 당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4. 결과
최종 선거 결과 | ||
투표 시간 | ||
1904년 11월 8일(UTC +9} | ||
투표 결과 | ||
후보자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선거인단 수 | 233 / 401명 | 168 / 401명 |
전국 득표 수 | 5,443,892표 (47.8%) | 5,534,488표 (48.6%) |
당선인 | ||
| ||
벤저민 해리슨 |
결과는 해리슨 233 대 클리블랜드 168로 해리슨에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득표에서는 클리블랜드가 해리슨을 0.8%(9만표) 가량 앞섰는데 클리블랜드가 진 이유는 해리슨에게 2% 내로 인디애나(15명), 뉴욕 (36명)를 내준게 결정적 패배 요인이다. 이로서 해리슨은 득표에서 밀리고 선거인단 승리한 2번째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