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8 23:17:06

휴 라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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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휴 라티머성 니콜라스 리들리성 토마스 크랜머}}}}}}}}}

옥스퍼드 순교자
<colbgcolor=#d40000><colcolor=#fff>
The Right Reverend
우스터 주교
성 휴 라티머
Saint Hugh Latimer
파일:1024px-Hugh_Latimer_from_NPG.jpg
출생 1485년~1487년???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서캐스턴
사망 1555년 10월 16일 (향년 67~70세)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옥스퍼드
재임 기간 우스터 주교
1535년 9월 12일[1] ~ 1539년 7월 1일
문장
파일:Hugh_Latimer.svg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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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0000><colcolor=#fff>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터하우스
(문학 / M.A.)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터하우스
(문학 / M.A.)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터하우스
(신학 / Ph.D.)
사제 서품 1515년 7월 15일
우스터 주교좌 승좌 1535년 10월 4일
윈체스터 대성당
토마스 크랜머 주교 주례
칭호 종교 개혁 순교자
축일 10월 16일[2] }}}}}}}}}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국교회 설교자, 우스터 주교. 메리 1세 치하에서 이단 혐의로 화형당한 잉글랜드 개신교 순교자이다.

2. 생애

레스터셔주 서캐스턴의 부유한 농가 출신으로 전해지나, 가족 관계와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으며, 정확한 생년월일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475년에서 1495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1506년경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그는 매우 유능한 학생임을 입증했다. 1510년경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1514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515년 7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522년 대학 설교자와 대학 사목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신학 공부를 이어갔고, 1524년에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라티머는 신학 학사 학위를 받을 때 필리프 멜란히톤이 제시한 교리에 대한 반박을 담은 논문을 기고했을 정도로 가톨릭을 지지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교리로 최근 개종한 사제 토머스 빌니가 그를 찾이와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빌니의 설득에 큰 감명을 받고 그날부터 개혁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 후 빌니와 로버트 반스를 포함한 교회 개혁파 인사들과 함께 화이트 호스 선술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성경영어로 번역할 필요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교했다.

윌리엄 틴들이 영어로 최초로 번역한 신약성경이 얼마 전 금지된 상황이었기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건 심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1528년 초, 라티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 앞에 소환되어 훈계와 경고를 받았다. 이듬해 울지가 헨리 8세의 총애를 잃고 실각하자, 라티머는 본격적으로 케임브리지 개혁파를 이끌며 명성을 떨쳤다. 그는 1529년 대림절에 세인트 에드워드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설교했다. 그의 강의는 생동감이 넘치고 감동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일반 대중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많은 인기를 누렸고, 마침 교황청과 단절할 계획을 세웠던 헨리 8세의 주목을 받았다.

1531년, 라티머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결혼 무효를 지지해, 헨리 8세로부터 특별한 호의를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윌트셔에서 성직 수여를 받았고, 그곳에서 교구민들에게 개신교 교리를 자유롭게 강의할 수 있었다. 1535년 우스터 주교로 선임된 그는 교회를 개혁할 필요성을 신자들에게 설파하고, 성인에 대한 숭배를 중단하고 성상을 파괴하라고 종용했다. 그는 앤 불린,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크랜머 등 당대 권력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539년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본 원칙을 담은 6개 조항이 반포하자, 이 조항들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거의 동일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가 실각했다. 그는 성직을 박탈당하고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몇 달 후 런던 탑에서 풀려난 후에는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면서 니콜라스 샘스턴, 니콜라스 리들리, 앤 애스큐, 서퍽 공작부인 캐서린 윌러비 등 개신교 신자들과 만나고 그들 앞에서 설교하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6세에게 발탁된 그는 왕의 궁정 설교자 직책을 맡았으며, 나중에 캐서린 윌러비의 사제로 봉사했다.

1553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등극했다. 그녀는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되돌리기 위해 대표적인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1554년 4월 14일, 에드먼드 보너, 스티븐 가디너를 비롯한 위원들은 옥스퍼드의 보카르도 감옥으로 이송된 라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토머스 크랜머에 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다만 라티머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직접 출석하는 대신 서면으로 답했다. 라티머는 성체성사 때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포도주와 빵이라는 실체로 변한다는 가톨릭의 교리를 비성경정적이라고 주장했고, 미사의 화해 공로 교리 역시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위원들은 그에게 주장을 철회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

결국 토머스 크랜머, 니콜라스 리들리와 함께 이단으로 고발된 라티머는 1555년 10월 16일, 리들리와 함께 옥스퍼드에서 화형당했다. 존 폭스의 순교록에 따르면, 라티머는 화형이 시작되기 전에 리들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용기를 내시오, 리들리. 그리고 남자답게 행동하시오. 오늘,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에 촛불이 켜질 것이오. 그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라고 믿소."

6개월 후인 1656년 3월 21일, 토머스 크랜머 역시 옥스퍼드에서 화형당했다. 이 세 사람은 훗날 사람들에게 "옥스퍼드 순교자"로 알려졌고, 성공회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1843년엔 그들의 처형 장소 근처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1] 승좌식은 10월 4일에 이루어졌다.[2] 옥스퍼드 순교자들 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