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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휴 라티머 | 성 니콜라스 리들리 | 성 토마스 크랜머 | }}}}}}}}} |
성명 | 니콜라스 리들리 Nicholas Ridley | |
생몰년도 | 1500년경 ~ 1555년 10월 16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틴들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옥스퍼드 | |
아버지 | 크리스토퍼 리들리 | |
직업 | 잉글랜드 국교회 설교자, 런던 주교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잉글랜드 국교회 설교자, 런던 주교. 메리 1세 치하에서 이단 혐의로 화형당한 잉글랜드 개신교 순교자이다.2. 생애
1500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의 지주 크리스토퍼 리들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기에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주임 목사이며 아버지의 사촌인 랜슬롯 리들리의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 뉴캐슬의 왕실 문법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펨브로크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525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로 서품을 받고 더 많은 교육을 받기 위해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로 진학했다. 1529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153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수석 감독관을 맡았다.이 무렵, 헨리 8세가 의회의 동의하에 반포한 수장령을 놓고 대학에서 논쟁이 있었다. 리들리는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들을 설득하여 "로마 주교는 이 잉글랜드 왕국에서 다른 어떤 외국 주교보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더 큰 권위와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결의안을 반포해, 헨리 8세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1537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의 사목자로 선임되었고, 1538년 4월 크랜머에 의해 켄트주 헌의 교구 목사로 선임되었다.
1540~41년 왕의 사제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캔터베리 대성당의 사제도 겸임했다. 1540년 펨브로크 대학 학장을 맡았고, 1541년 신학박사 학위를 역임했다. 1547년 로체스터 주교를 역임한 그는 취임 직후 교구의 교회에 있는 제단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테이블을 놓으라고 지시했다. 1548년 크랜머가 최초의 공통 기도서를 편찬하는 것을 도왔고, 1549년에는 스티븐 가디너 주교와 에드먼드 보너 주교를 조사하는 위원 중 한 명을 맡아 가톨릭을 고수하는 두 주교가 해임되는 걸 동의했다. 1550년 4월 1일 해임당하고 감옥에 갇힌 에드먼드 보너를 대신해 런던 주교가 되었으며, 런던 교구가 해체된 웨슽트민스터 교구를 흡수했기 때문에 "런던 및 웨스트민스터 주교"로 불렸다.
1550년 2월, 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을 받들던 존 후퍼가 에드워드 6세 앞에서 사순절 설교를 했다. 이때 그는 1549년에 크랜머가 제정한 서품 서약서에서 "모든 성인"이 언급되고, 새로 선출된 주교와 서품식 참석자들에게 성직복을 착용하도록 요구한 것에 대해, 이러한 요구사항은 초기 사도 교회에서는 언급되지 않았고 성경에도 언급되지 않은, 단지 유대교와 가톨릭의 잔재라며 단호히 배척했다. 그 후 글로스터 주교에 선임된 존 후퍼는 성인들의 서약과 필수 예복 착용을 거부하며 서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성직복 논쟁이 불거지자, 크랜머는 리들리에게 이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구했다. 리들리는 의회에서 규정한 대로 모든 주교는 서임식에서 예복을 입어야 한다며, 후퍼의 주장을 반대했다. 후퍼는 이에 대응해 예복이 위선과 미신을 조장하여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모호하게 한다고 반박했다. 리들리는 바울로가 유대교 전통 상당수를 받아들인 것을 지적하며 성직복에 대해서도 관용적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왕에게 복종하는 것이 주교의 도리라고 맞받아쳤다. 추밀원 위원들은 리들리의 간결하고 절제된 반박에 깊은 인상을 받고, 끝까지 수용하지 않는 후퍼가 너무 과격하다고 여겨서 리들리 쪽으로 기울었다. 하인리히 불링거, 피에트로 마르티레 베르밀리, 마르틴 부처 등 잉글랜드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개신교 지도자들은 초기엔 후퍼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나중엔 후퍼에게 왕에게 복종하고 서임식에서 성직복을 입으라고 권고했다.
1550년 12월 중순, 존 후퍼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고, 그 기간 동안 <경건한 고백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항변>을 집필하여 출간했다가 책 내용이 반 잉글랜드 국교회적이라는 이유로 1551년 1월 13일 추밀원에 의해 플리트 교도소로 보내졌다. 결국 후퍼는 당국의 압력을 못 이겨서 2월 15일 크랜머에게 서한을 보내 성직 서임을 받겠다고 밝혔고, 1551년 3월 8일 글로스터 주교로서 성직복을 입고 서임식에 참석했다.
1553년 2월 2일, 토머스 크랜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개신교 설교자 존 녹스를 런던 브레드 스트리트의 올 헬러우스 교회 사제로 선임하고, 리들리가 그를 감독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녹스는 사순절 동안 왕과 궁정 앞에서 설교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갔지만, 그 후 임명된 직책을 수락하기를 거부했다. 같은 해, 리들리는 에드워드 6세에게 사용하지 않는 궁전 중 일부를 런던 시에 넘겨서 집 없는 여성과 어린이를 수용하라고 청원했다. 그 후 크라이스트 병원, 세인트 토머스 병원, 브라이드웰 병원을 설립하는 왕실 헌장이 발행되었는데, 이중 브라이드웰 병원은 나중에 위틀리의 킹 에드워드 학교로 변경되었다.
1553년 6월 17일, 죽음이 임박한 에드워드 6세는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제인 그레이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유언을 발표했다. 리들리는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수여하는 특허장에 서명했다. 그 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제인 그레이가 여왕이 된 7월 9일,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설교를 하며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사생아이므로 왕위 계승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메리 공주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추종자들의 지지를 받고 거병한 뒤 민심이 메리 공주 편으로 급격히 기울자, 결국 추밀원은 7월 18일 메리 공주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 후 리들리는 제인 그레이, 그녀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 남편 길포드 더들리, 존 더들리 등과 함꼐 런던 탑에 갇혔다.
1554년 2월, 제인 그레이와 그녀의 주요 지지자들이 처형되었다. 그 해 3월 8일, 추밀원은 토머스 크랜머, 리들리, 휴 라티머를 옥스퍼드의 보카르도 감옥으로 이송하도록 했고, 4월 14일에 옥스퍼드에서 그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이후 유죄를 선고받은 리들리는 1555년 10월 16일 옥스퍼드에서 휴 라티머와 함께 화형 당했더. 존 폭스의 순교록에 따르면, 당시 리들리는 매우 느리게 타들어가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집행관은 그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장작더미에 더 많은 부싯깃을 올려놓았지만, 그것은 그의 하체만 타게 했다. 그가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휴 라티머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용기를 내시오, 리들리. 그리고 남자답게 행동하시오. 오늘,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에 촛불이 켜질 것이오. 그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라고 믿소."
6개월 후인 1656년 3월 21일, 토머스 크랜머 역시 옥스퍼드에서 화형당했다. 이 세 사람은 훗날 사람들에게 "옥스퍼드 순교자"로 알려졌고, 성공회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1843년엔 그들의 처형 장소 근처에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