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09 10:55:53

한흥삼

파일:한흥삼.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배량(裵粱)
본관 청주 한씨[1]
출생 1875년 10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옹지면 일리
(現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2] 일리마을 1063번지[3])
사망 1912년 7월 11일[4]
전라북도 전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4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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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5년 10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옹지면 일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일리마을)에서 아버지 한혜리(韓惠履, 1848. 1. 21 ~ 1922. 10. 2)와 어머니 전주 최씨(1849. 2. 5 ~ 1922. 12. 16)[5]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20살 되던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전주부를 거쳐 전주부 창덕면 후정리(現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삼례역까지 진출하였으나 곧 일본군에게 패하자, 귀향하지 못하고 피신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음력 4월 태인군 고현내면 원촌리(現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에 입대해 전라북도 정읍군·순창군 등에서 활약했다. 이후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가 해산하자 다시 기회를 엿보다가 1908년부터 임실군 출신의 의병장 정성현(鄭成玄)[6]이 부하 30명과 함께 총 20정, 칼 1자루를 휴대하고 의병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고, 가산을 팔아 총기, 병기 등을 다수 구입하여 마침내 1909년 음력 2월 10일, 정성현 의진에 입대했다.

그는 이 부대에서 양운경(梁雲京)·김윤오(金允五)·김낙필(金洛必)·김기만(金琪萬)·이홍길(李弘吉)·조기성(曺基成)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의 각 마을을 전전하며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던 중, 1909년 8월 중순에 일본군 순사에 체포되었다.

결국 1909 9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2년 7월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출옥 직후인 7월 11일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공안공파(恭安公派) 29세 교(敎) 항렬. 족보명은 한현교(韓顯敎).[2]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3]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이 지번은 한흥삼의 형으로 추정되는 한윤식(韓允植, 족보명 한윤교韓允敎, 1870. 8. 25 ~ 1944. 12. 23)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4]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7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최귀동(崔貴東)의 딸이다.[6] 鄭成, 鄭玄, 鄭聖鉉, 鄭聖賢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