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21 22:17:20

한스 바일베허

독일의 前 축구 선수
파일:Hans_Weilbächer.jpg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한스 바일베허
Hans Weilbächer
출생 1933년 10월 23일
바이마르 공화국 하테르스하임암마인
사망 2022년 8월 1일 (향년 88세)
독일 슈발바흐암타우누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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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미상|체중 미상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소속 <colbgcolor=#eee> 선수 아미치티아 하터스하임 (1945~1952 / 유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52~1965)
국가대표 1경기 (서독 / 1955)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은퇴 후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에는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주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이 시기에 독일 축구 챔피언십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바일베허는 어린 시절 고향 클럽인 아미치티아 하터스하임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2년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했으나, 이적 규정상 첫 해에는 주니어팀에서 뛰어야 했기에 1953-54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활약을 시작했다. 데뷔 시즌에 그는 오버리가 쥐트의 30경기 모두에 출전하며 9골을 기록했고,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1958-59 시즌, 파울 오스발트 감독이 부임한 후 아인트라흐트의 경기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팀은 오버리가 쥐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59년 독일 축구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1. FC 쾰른, SV 베르더 브레멘, FK 피르마젠스를 연달아 꺾으며 무패로 결승에 진출했다. 26골 11실점이라는 뛰어난 골 득실로 결승에 오른 아인트라흐트는 지역 라이벌인 키커스 오펜바흐와 맞붙었다. 극적인 경기 끝에 아인트라흐트가 연장전에서 5-3으로 승리하며 독일 챔피언에 올랐다. 바일베허는 왼쪽 윙백 포지션에서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특히 오펜바흐의 헤르만 누버를 견제하는 것이 그의 주요 임무였다. 기술적인 선수들이 많은 아인트라흐트에서 바일베허는 투지 넘치는 파이터 역할을 담당했다.

1959-60 유러피언컵은 바일베허 선수 경력의 절정이었다. 1959년 11월 4일, 아인트라흐트의 첫 유럽 대회가 시작되었다. 첫 상대는 스위스 챔피언 영 보이즈 베른이었는데, 독일의 前 국가대표 알베르트 징이 감독을 맡고 있었고 전년도에 준결승에서 스타드 드 랭스에 아깝게 패한 강팀이었다. 바일베허는 경기 시작 4분 만에 프리킥을 성공시켜 아인트라흐트의 선제골이자 팀의 유럽 대회 첫 골을 기록했다. 그렇게 파울 오스발트 감독의 팀은 영 보이즈 베른, 비너 슈포르트클럽, 글래스고 레인저스를 차례로 꺾고 1960년 5월 18일 글래스고에 위치한 햄던 파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 CF와 맞붙게 되었다.

바일베허에게는 마드리드의 핵심 플레이메이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막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금발 화살이라 불린 디 스테파노는 자신의 페널티 박스에서 상대방 페널티 박스까지 경기장 전체를 누비며 뛰어난 활동량과 플레이를 보여줬고, 바일베허로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하기 어려웠다. 1957년과 1959년 발롱도르 수상자인 디 스테파노가 경기의 템포를 주도했고, 4골을 넣은 페렌츠 푸스카스와 함께 레알 마드리드를 7-3 대승으로 이끌었다.

1961년과 1962년에도 바일베허가 있는 프랑크푸르트는 남부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독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그는 총 4번의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17경기를 소화했다. 1963년 1월 27일, KSV 헤센 카셀과의 홈경기에서 0-1로 패한 것이 그의 오버리가 마지막 경기였다. 1953년부터 1963년까지 그는 오버리가 쥐트에서 241경기에 출전해 48골을 기록했다. 말년에는 동생 요제프 바일베허도 팀에 합류했다.

새롭게 창설된 분데스리가에서 그는 1965년까지 계약을 유지했지만 실제 출전은 하지 못했다. 1965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13년간 570경기를 소화한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20세였던 1953년 6월 13일, 바일베허는 부퍼탈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아마추어 국가대표 경기에 처음 발탁되었다. 두 번째 아마추어 대표팀 경기는 1954년에 치렀다.

1955년 5월 28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에 의해 A매치에 발탁되었다. 우측 하프백으로 데뷔한 그는 VfB 슈투트가르트의 31세 베테랑 로베르트 슐리엔츠와 함께 뛰며 2-1 승리에 기여했다.

헤어베어거 감독은 1957년과 1958년 바일베허의 주포지션인 좌측 윙백 자리로 B팀에서 2경기를 치르게 했다. 하지만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최종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에르켄슈비크 출신의 호르스트 지마니아크가 수년간 그 자리를 국제적 수준으로 지켜냤기 때문이다.

3. 은퇴 후

바일베허는 은퇴 후 오버우르젤과 랑겐의 아마추어팀을 지도했다. 이후 회히스트 AG에서 견적 담당자로 40년간 근무하며 본업에 집중했다. 프랑크푸르트 인근 슈발바흐암타우누스에서 거주하다가 2022년 8월 1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