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02:01:28

하이비전

1. 일본에서 개발한 HD 방송 규격
1.1. 예시
2. 출판사

1. 일본에서 개발한 HD 방송 규격

하이비전 정규 방송 시작 기념식(1994년 11월 25일)
JO2C-BS-TV[1]
JO***-BS-HDTV[2]

Hi-Vision / ハイビジョン

일본에서 개발된 세계 최초의 고화질(HD) 방송 규격이다. 대역폭 압축을 위해 MUSE(Multiple sub-Nyquist Sampling Encoding)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이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날로그 HD의 연구는 도쿄 올림픽이 끝난 1964년 NHK 방송기술연구소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1972년에 규격제안이 이루어졌고, 1976년 세계 최초의 하이비전 모니터(30인치)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날로그 HD신호의 막대한 대역폭을 기록할 수 있는 비디오 카메라와 테이프 및 편집장치의 개발이 늦어졌고, 제일 중요한 MUSE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이라 실제 방송은 훨씬 늦었다. 1979년 MUSE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고, 1982년에 처음으로 하이비전으로 촬영된 TV 프로그램이 등장했으며,[3] 이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서 대역폭을 압축하는 작업을 거쳤고, 1984년 규격 개발이 완료되었지만, 본격적인 HD 테스트 방송은 1989년 6월 4일 시작된 데다가,[4][5] 1991년 11월 25일 오후 3시부터 NHK, WOWOW, 간토 5개 지역 민영방송[6], 아사히 방송[7]이 참여하여 최소 8시간의[8] 실용화 시험방송을 시작했다.[9] 하이비전 정규 방송은 1994년 11월 25일 BS-9ch의 정규방송이 시작되면서 시작되었다.[10]

NHK 기준, 극초창기의 MUSE 하이비전 방송은 5:3(1125라인,1035 유효주사선) 영상을 송출하는 방식이었다. MUSE 하이비전 시험방송[11]영상의 필러박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초창기 방송의 녹화분에는 5:3 화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89년 16:9 화면비 송출로 변경되었다.

방송 비율이 변경된 것은 1988년 SMPTE(영화ㆍ텔레비전 기술자 협회)가 16:9 화면비를 HD의 표준으로 결정한 것의 영향으로, 이전까진 NHK가 7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표준화한 5:3 화면비가 사용되었다.[12] 1987년 당시 출시된 주력 하이비전 카메라인 소니 HDC300이 5:3비율을 가졌었던 것과 달리 1992년 출시된 주력 하이비전 카메라인 소니 HDC500이 16:9비율을 가진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화면비가 달라짐에 따라 송출 비율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실용화 시험방송에서 자체 제작 프로그램 편성, TV광고 방송 등을 내세웠다. 여기에 참여한 민영 방송사들은 이때의 경험으로 훗날 BS/CS 디지털 채널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덤으로 하이비전 시험방송 편성을 위해 16:9 비율로 제작된 애니메이션도 있다.[13]

사실 MUSE 하이비전은 완전한 아날로그 시스템은 아니었고 디지털 압축도 같이 사용하였지만, 대역폭 절감을 위해 화질 손실을 감수했기에 현재의 HD 영상 품질은 물론이고 HDV-1000 등 당시 녹화에 사용되었던 테이프 레코더보다 더욱 못했다. 하이비전이 1980년대에 방송을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자.[14][15] 그러나 이것도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혁명적인 화질이여서 일본의 HD 본방송 시작 당시(1991년) 워싱턴 포스트 지의 기자는 "뉴욕 시의 공중 풍경을 방송하는 동안 멀리서 찍은 장면은 일반 컬러 TV와 거의 비슷해 보였지만, 자유의 여신상을 클로즈업하기 위해 카메라를 확대했을 때, 그 선명도와 디테일은 관객들이 큰 소리로 헐떡거릴 정도로 놀라웠다. 마치 관람객이 손을 뻗어 동상의 청동 가운 주름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HD 화질을 처음 접한 충격을 묘사했다. #

그러나 막상 인기는 별로 높지 못했는데, BS방송이 MUSE 하이비전 방식으로 방송되었다고 하나 아무리 화질이 좋다고 한 들 일본 시청자 입장에서 굳이 지나치게 비싼(자세한 것은 후술) TV를 사느니 매달 수천엔의 시청료를 주는것이 훨씬 싸게 먹혔기 때문이고 방송 다시보기 서비스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라서 다시 보려면 비디오로 녹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16], BS방송을 순 HD로 녹화하기에는 W-VHS VCR의 가격이 비쌌다는 것도 걸림돌이었다.[17] NTSC로 변환해 녹화가 용이하게 해주는 다운컨버터가 있긴 했으나.. 이러면 HD방송이라는 메리트를 다 깎아먹게 되었고, 이마저도 가격이 싼 것은 전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이비전 TV의 가격이 지나치게 비쌌다. 1992년 7월 15일[18] SONY가 16:9 비율의 CRT 하이비전 TV 'KV-3200HD'를 출시하기도 했는데, # 세트 가격이 140~290만 엔[19]으로 1992년 당시 일본인 평균 급여(471만 엔)[20]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었다. 심지어 1993년 중반까지만 해도 하이비전 TV 가격은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것도 시험방송 때보다는 싸진 것이다. 1990년 12월 소니가 출시한 새계 최초의 하이비전 TV 'KW-3600HD'(36인치)의 가격은 250만 엔[21]이었고, 정식 방송 시작 직전인 1991년 10월 파나소닉이 출시한 하이비전 TV 'TH-36HD1'의 가격은 36인치짜리가 무려 450만 엔[22]이나 되었다. 여담으로 1992년 기준 미국 근로자의 평균 연봉이 정확히 25903달러였고, 1991년 기준 한국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약 707만 원(8994달러)였다.[23] 이를 봐도 알 수 있듯 버블경제 시기 일본 기준으로도 도를 넘은 수준의 가격이었기에 실용화 시험방송 시작 이전까지 일본에서 팔린 하이비전 TV는 겨우 2000대에 불과했고, 그것도 대다수가 신기술 과시를 위해 NHK가 직접 판 것을 호텔 로비와 터미널, 대형 공공 건물 등에서 사간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90년대 중반까지 하이비전 TV의 가격과 입지는 50년대 미국/60년대 초중반 일본에서의 컬러 TV, 70년대 한국에서의 에어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1990년대 중반이 되면 하이비전 TV 가격은 5~60만 엔 수준으로 떨어졌고, 1995년 일본에서 팔린 하이비전 TV 개수는 10만 대 가량이었다고 전해진다.[24] # 그리고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열린 1998년 말 기준 하이비전 TV 출하대수는 누계 73만 9000대가 되며 가구당 하이비전 TV 보급률은 1.6% 가량으로 자리잡았고, 시기가 흐를수록 하이비전 TV 보급률도 자연스레 늘어갔다.

거기다 하이비전 방송이 시작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디지털 방송 규격 ATSCDVB의 개발이 완료되면서[25]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이 되어버린 하이비전을 채택할 이유가 없어졌다.
2007년 아날로그 하이비전 방송종료 안내영상

결국 일본도 하이비전을 포기하고 자체적으로 ISDB이라는 방송규격을 만들었고, ISDB 방송규격은 2003년 본방송을 시작, 이에 따라 하이비전은 완전히 구세대의 산물이 되었고, 해당 인공위성의 설계수명도 다한 2007년 9월 30일 그대로 방송을 종료했다. 2011년 7월 24일 종료한 아날로그 지상파 TV 방송보다 4년 먼저 종료한 셈이다.[26]

하이비전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HD(720p, 1080i/p)를 가리키는 말로 계속 쓰이고 있다. 일제 영상 기기나 게임, 영상물 등에서 하이비전이라는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유튜브 등에서 검색하면 하이비전으로 제작한 프로그램을 W-VHS로 녹화한 자료로 볼 수 있다.

1997년 2월 5일 하이비전 공식 사이트 아카이브

1.1. 예시

1988년에 NHK가 진행한 1988 서울 올림픽의 중계방송 녹화본.
1990년에 소니가 제작한 MUSE 하이비전 데모 레이저디스크. 재생목록[27]
1990년 파이오니아가 제작한 MUSE 하이비전 데모 레이저디스크.
[28]

2. 출판사

해리와 몬스터』를 출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엄마성적이 아이성적이다』(2005), 『루돌프처럼 일하고 산타클로스처럼 인생을 경영하라』(2006), 『아름다운 도전』(2006), 『한국단편소설 30선 특강』(2007), 『희망 그 찬란한 행복의 아침』(2010), 『의친왕 이강』(2009), 『(인생을 바꾸는) 면접 자기소개서 디자인 기술』(2008) 『삼성 SSAT 직무적성검사 모범 답안』(2006), 『2008 삼성 LG SK 직무적성검사 최종 마무리』(2006), 『(SSAT) 삼성그룹 직무적성검사 최종마무리』(2007), 와~ 공룡이 움직인다』등의 책을 발행하였다.

『짱들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비밀이 있다』(2004)라든가, 『울 엄마교』(2008)라든가, 『이쯤되면막가자는거죠』(2003) 등의 특이한 이름의 책들도 발행하였다.

2010년의 『희망 그 찬란한 행복의 아침』 이후로는 한동한 어떠한 책도 발행하지 않았다.

2020년 6월 『나는 누구인가』라는 회고록을 발매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최서원. 즉, 최순실의 회고록이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2동 724-1 화성빌딩 302호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화번호는 02-929-9313, 팩스번호는 02-929-9496. 대표자는 서지만이다. 이 정보들의 출처는 국립중앙도서관 한국문헌번호센터의 자료들이다.

[1] 본채널 BS-9ch HPA위성텔레비전의 호출부호.[2] e.g. JO341-BS-HDTV N~H~K~[3] 1982년 5월 시범적인 하이비전 프로그램을 2개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부터 1988년까지 홍백가합전을 시범적으로 하이비전으로 녹화했다고 한다. 당시 사용된 카메라는 소니의 HDC100, HDC300, 히타치 사의 프로토타입 카메라.[4] 그 일환으로 1989년 이후 홍백가합전도 시범적으로 하이비전으로 방송하기도 했다.[5] 당시에는 NHK BS2에서 매일 오후 2시~오후 3시에 정기적으로 하이비전 테스트 방송을 내보냈으며, 프로 스모 대회 기간에는 오후 5시~오후 6시에도 테스트 방송을 내보냈고, 매주 월요일 오전 1시~오전 5시에는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NHK 방송 기술 연구소에서 '기술 실험 시간'으로써 하이비전 외에도 데이터 방송, 팩시밀리 방송 등을 실험했다. 참고로 이 '기술 실험 시간'은 9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었다.[6] TV 도쿄, 니혼 TV, TBS, 후지TV, 테레비 아사히[7] 아사히 방송 테레비 포함[8] NHK가 4시간, WOWOW가 1시간 반, 나머지 민방 각국이 30분씩 돌아가며 방송했다고 한다. 주말에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방송했으며,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방송시간을 확대해 나갔다.[9] 다만 말이 시험방송이었지 실질적으로는 이때부터 일본에서 HD 정규방송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에서 컬러 방송이 정규 시작한 지 5년이 지난 1965년 기준으로도 일본 방송사들은 하루에 1시간만 컬러 방송을 하고 나머지는 죄다 흑백으로 방송한 것과 어떻게 보면 비슷한 셈이다.[10] 당시 민방들과 WOWOW가 요일마다 돌아가며 하루 6시간씩 HD 방송을 했고, 아사히 방송 테레비는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만 HD로 방송했으며, 남은 시간에는 NHK가 HD로 방송했다.[11] 해당 영상의 제목에선 1050i라고 되어있지만 1035i이다.[12] 실제로 변경 후 과도기에 생산되었던 HD 모니터들은 5:3과 16:9 화면비를 전환하는 스위치가 있다.[13] 대표적으로 1994년 말에서 1995년 방영된 슬레이어즈, 마법기사 레이어스 (1994)가 있다. 21세기에 블루레이 디스크로 발매일 당시에 억지로 비율로 늘린게 아닌 완전한 16:9 비율로 나왔다. 물론 이들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방영된 1990년대에는 디지털 방송이 시험방송에 머물렀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 다만 최초로 하이비전 기술이 적용되어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울트라맨 키즈 엄마 찾아 3000만 광년이다.[14] 이때는 일반 영상신호조차 대역폭이 막대하다고 여겨지던 시절로 이를 담을 비디오테이프의 값도 비싸서 미국, 서유럽, 일본 아니면 테이프를 재사용해서 원래 방송분이 없어지는 대참사가 즐비했던 시기였다. 한국에서도 8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방송자료들이 영원히 사라진 것도 바로 이 때문. 애초에 따로 녹화하지 않아 생방송으로만 흘러간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버블 시대 일본이어서 이런 시험방송이 가능했던 거지, 미국도 HD 방송 시작이 일본에 비해 늦었다. 미국이 비공개 HD 테스트 방송에 처음으로 성공한 것도 일본이 HD 정규방송을 시작하기 직전인 1994년 8월 14일에 처음으로 공개적 HD 테스트 방송을 시작한 것도 1996년 7월 23일이었고, HD 본방송은 1998년도11월에야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 호의 발사와 존 글렌의 귀환 중계로 성사되었다. 둘 다 일본보다 7년이나 늦은 셈이다. 이 무렵에 미국 민간 시장에 HD TV가 풀리게 된다. 참고로 한국은 2000년 8월 31일 HD 시험 방송이 시작되고 정규 HD 방송은 2001년 10월 26일에야 시작되었는데, 둘 다 일본보다 11년이나 늦은 셈이다.[15] 다만 디지털 방송 시작으로 따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국과 미국의 첫 HD 공개 방송이 디지털 방송 시작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디지털 방송은 2000년 12월 1일에야 시범적으로 시작된 후 2003년 12월 1일 본방송이 시작되었다.[16] 더군다나 당시 PC통신이나 인터넷은 동영상을 도저히 볼 수 없거나, 보더라도 심각한 저화질의 영상을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걸 타개하기 위해 나온 것이 다름아닌 리얼 플레이어.[17] 시청할 수 있는 BS디코더, 컨버터도 고가이기는 했다. 실제로 1991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NEC가 출시한 하이비전 TV용 VCR은 무려 11만 5천 달러였는데, 이는 엔화로 환산하면 약 1547만 엔이었고, 한화로 환산하면 8734만 원이었다. 후술할 하이비전 TV보다도 훨씬 비쌌던 것을 넘어 당시 일본인의 4년치 봉급이랑 동급이었던 셈이니 제대로 팔릴 리가 없었다.[18] 공개는 동년 6월 1일 했다.[19] 당대 환율로 환산하면(이하 생략) 미국 달러로는 약 11100 ~ 22900달러, 한국 원으로는 약 886만 ~ 1836만 원이었다.[20] 미국 달러로는 약 37881달러, 한국 원으로는 약 2988만 원이었다. 참고자료 당시 미국에서 일본 평균 이상으로 많은 급여를 받는 곳은 컬럼비아(미국)(37971달러) 한 곳밖에 없었다.[21] 미국 달러로는 약 17300달러였고, 한국 원으로는 1331만 원이었다.[22] 미국 달러로는 약 33500달러였고, 한국 원으로는 2732만 원이었다. 당연히 이거보다 큰 건 더 비쌌다.[23] 그리고 1992년 기준 1달러는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약 2.2달러고, 1992년 기준 1원은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약 2.5원이다. 역설적이게도 (버블경제가 붕괴한) 1992년의 1엔은 2021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1.06엔으로 가치가 사실상 제자리걸음 수준이었는데, 이는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일본의 디플레이션이 얼마나 극심한지 보여주는 증거이다.[24] 이는 그 이전까지 팔린 하이비전 TV까지 고려해 일본 내 하이비전 TV 개수를 최대로 잡아도 당시 일본 가구의 1% 미만만이 하이비전 TV를 가졌다는 말이 된다.[25] 덤으로 유럽에서는 HD-MAC이라는 규격을 개발했었다. DVB 때문에 바로 버려졌지만 다채널 규격인 MAC의 일종이라서 한 채널에 여러 방송사가 시간대별로 편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26] 당시 BS-9ch에서 송출했는데 1채널에 NHK를 포함한 모든 방송사가 시간대별로 공유하고 있었다(...)가 2000년부터는 NHK만 편성하여 BShiアナログ(아날로그) (BShi 재송신 채널)가 되었다.[27] 무려 1988년에 녹화된 HD 영상도 포함되어 있다.[28] 아래 두 영상 모두 영상의 윗부분에 레터박스와 유사한 검은 공백이 있는데, 이는 1080i 장비에서 1035i 신호를 캡쳐한뒤 따로 보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실 수직 귀선 시간을 포함한 전체 신호는 둘다 1125라인이지만 편의상 영상이 존재하는 유효 주사선만을 부르는 것이다.) 1080i는 90년대 중후반에 정사각형 픽셀에 맞게 수직 귀선 시간를 줄이고 유효주사선을 45라인 늘려 만들어진 신호인데, 1080i에서 1035i의 신호를 캡쳐하니 유효 주사선뿐만이 아니라 그 위의 신호까지 짜부된 채 캡쳐되어버린 것이다.(이는 세번째 영상의 24분경에 나오는 테스트 패턴의 원의 형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035라인을 캡쳐할 때 원본 화면비를 보존하려면 위의 빈 공간을 수직으로 늘려서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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