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忠崇
1848-1941
1. 개요
하야시 타다타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조자이번의 다이묘이다. 전무후무한 다이묘의 탈번 등의 특이한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2. 생애
조자이번주 하야시 타다아키라의 오남으로 태어났다. 형들의 요절로 삼촌 하야시 타다카타가 다이묘가 되었고 삼촌 사후 다이묘가 되었다. 문무를 모두 겸비해 고위직에 오를 만한 인재로 에도 막부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대정봉환 이후 조자이군을 근대화하며 유사시에 대비하였고, 결국 1868년 보신 전쟁이 터졌으나 막부파에 선 조자이번은 항전파와 공순파로 나뉘어 논쟁이 있었다. 이때 구 막부군이 조자이번에 지원 요청을 보냈고, 5월 24일 타다타카는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바로 번사 70여명과 함께 다이묘가 탈번해 유격대에 합류한 것이다.
타다타카는 조자이번 근처를 돌며 지원병을 모아 3백여 명으로 세력을 불렸으나 신정부군이 5월 27일 조자이번 인근으로 진입하였다. 이에 타다타카는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함선을 타고 탈출해 에도의 4천 창의대와 합류하고자 오다와라로 향했다. 그러나 창의대는 신정부군에 의해 와해되었고, 도호쿠로 향해 도호쿠에서 싸웠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의 존속이 확실해지고 센다이 번의 항복을 시작으로 도호쿠 번들이 항복함에 따라 타다타카도 센다이에서 항복했다.
번에 속해 있는 사무라이가 탈번(자신의 번을 버리고 떠남)하면 사형에 처해지지만 이 경우는 다이묘가 탈번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인 데다가 막부 말 혼란기라서 영지를 몰수하는 가이에키로 끝났다. 가이에키 처분은 막부가 내린 게 아니라 메이지 신정부가 내렸다. 그는 일본 역사상 마지막으로 가이에키 처분을 받은 다이묘이다.
그 후 옛 가신들의 탄원으로 더 큰 처벌은 피했으나 다이묘였음에도 화족이 되지 못하고 사무라이 계급인 사족이 되었고, 도쿄부 하급 공무원, 상점 대리인, 비서 등의 일을 하며 살았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역적 취급을 받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복권되는 등 상황이 좋아져 타다타카도 화족이 되고 종5위에 서임되었다. 그 후 궁내성에서 일을 했고, 닛코 동조궁에서 신관으로 일하는 등 일을 하다가 은퇴 후 차녀 미츠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최후의 다이묘로써 인터뷰도 하고 평온한 노후를 보냈다. 향년 92세의 나이로 1941년 1월에 사망했다.
3. 여담
- 막부의 기대를 보면 거대 다이묘로 보이지만 의외로 조자이 번은 고쿠다카가 딱 1만석이었다. 하야시 가문이 원래 하타모토 출신이었는데 영지를 더 하사받으면서 19세기 초반에 다이묘가 된 가문이기 때문.
- 보신 전쟁때 역대급 행적을 남겨서 그런지 토탈 워 사가: 사무라이의 몰락에서도 등장한다.
- 타다타카 본인은 탈번을 해서[1] 메이지 정부에 반역을 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작위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조카가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는 방식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 주변에서 마지막 다이묘의 사세구를 듣고 싶어서 타다타카가 죽기전에 사세구를 요청했는데, 보신 전쟁때 이미 했었기 때문에 지금 할 말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 보신 전쟁시기 다이묘 중 거의 유일하게 보신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겪은[2] 파란만장한 삶을 산 다이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