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08:08:15

프랑스알베르 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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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이셸 국장.svg
세이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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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세이셸 공화국 대통령
제2대 세이셸 공화국 총리
프랑스-알베르 르네
France-Albert René
파일:프랑스 알베르 르네 대통령.jpg
<colbgcolor=#6e0104><colcolor=white> 성명 프랑스-알베르 르네
France-Albert René
국적
[[세이셸|]][[틀:국기|]][[틀:국기|]]
출생 1935년 11월 16일
영국령 세이셸, 빅토리아
사망 2019년 2월 27일 (향년 84세)
세이셸, 마에 섬
직업 정치인, 법조인
서명 파일:프랑스알베르 르네 서명.svg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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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e0104><colcolor=white> 모교 <colbgcolor=#fff,#1f2023>킹스 칼리지 런던 법과대학 (법학 / LL.B.) (1957년)
소속 정당 (SPPF)[1]
재임 기간 제2대 세이셸 공화국 대통령
1977년 6월 5일2004년 7월 14일
전임자: 제임스 맨첨
후임자: 제임스 미셸
제2대 세이셸 공화국 총리
1976년 6월 29일1977년 6월 5일
전임자: 제임스 맨첨
후임자: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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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3.1. 종합
3.1.1. 경제정책3.1.2. 사회정책
4.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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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리카 세이셸의 정치인이자, 27년간의 장기집권에 성공한 독재자.

르네는 소련 붕괴 이전까지는 인도양 사회주의를 내세웠으며 이후 2004년까지는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세이셸을 통치했다.

2. 생애

르네는 세이셸의 빅토리아에서 태어났다. 영국 사우샘프턴의 세인트 메리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대학 교육을 마치고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세이셸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르네가 영국에 머물던 시기는 클레멘트 애틀리와 그 후 휴 게이츠컬이 당수로서 노동당을 이끌던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때의 노동당 정책 노선에 깊이 감화되어 사회주의 노선을 받아들이게 된다.
법학 공부를 마치고 세이셸로 돌아와 세이셸 인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혜택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나머지는 극도로 빈곤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악한 생필품으로 생활했습니다. 1961년까지 나는 국가가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때 나는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죠. 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다른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위해 식민주의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는 것을 내 의무이자 소명이라고 느꼈습니다.
2007년 인터뷰에서

1964년 그는 오늘날 연합 세이셸(United Seychelles)의 전신인 세이셸 인민진보전선(Seychelles People's Progressive Front. 이하 SPPF)을 창당한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세이셸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르네가 창당한 SPPF가 영국으로부터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와 반대로 제임스 맨첨이 이끄는 세이셸 민주당(Seychelles Democratic Party)은 영국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중시하는 세력으로 르네의 SPPF와는 독립을 향한 노선이 달랐다.

1970년부터 독립을 위한 협상에 돌입한 세이셸은 1974년 총선거를 통해 맨첨을 제1대 대통령에, 르네를 맨첨 행정부의 총리로 선출한 후 비로소 1976년에 영연방의 일원(자치령)으로 독립했다. 그 후 맨첨이 영국을 방문한 틈을 타 1977년 6월 5일, 르네의 지지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대통령으로 임명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르네는 본인이 쿠테타를 주도하지 않았으며 그저 쿠데타 세력의 요구에 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쿠테타 이후 93년 다당제 인정 전까지는 그의 정당만이 합법 정당이었다. 다당제 인정 이후에도 민주적 선거로 정권 연장에 성공하며 대통령으로 집권한다. 이러한 장기집권 비결에는 르네는 백인이었음에도 크리올들을 위한 경제, 복지정책을 펼치면서 수혜를 입은 크리올들이 르네에게 몰표를 던져주었기 때문이었다.

임기 마지막해인 2004년, 제임스 미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27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났다.[2] 허나 퇴임 후에도 당시 여당이자 자신이 창당한 정당인 SPPF의 대표직을 계속 맡으며 영향력을 이어가다가 2019년 2월 27일에 세이셸 마에 섬의 병원에서 호흡 부전으로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생전에 3명의 아내를 두고 들까지 두며 자식까지 낳는 등 여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해 세이셸 내에서도 가십거리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3. 평가

3.1. 종합

세이셸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만 하는 인물로 르네의 집권 시절을 논하지 않고는 지금의 세이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자비로운 독재자(Benevolent Dictator)[3]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혔던 인물이다. 다만 세이셸이 지정학적으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에리히 호네커의 동독에 비해 국제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 및 중요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인지도는 다소 낮은 편이다.

르네가 세이셸을 인간개발지수(HDI)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로 이끌었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가진 나라로 건설하는데 기여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제로 세이셸의 유아 사망률, 문해률, 경제적 복지와 같은 지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제일 높은 수준이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세이셸은 코모로마다가스카르와 같은 이웃한 섬 국가들의 불안정한 국내 정치 환경과 저성장을 피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지상락원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2018년 진실화해민족통일위원회(TRNUC)는 르네 집권기에 고문당한 사람들의 증언을 청문회에서 공개했는데 살해, 고문, 실종, 암살, 재판 없이 구금된 사람들의 친척들의 증언이 흘러나오며 잔혹함에 대한 비판도 따라붙는다.

3.1.1. 경제정책

르네는 자신을 구소련식 사회주의자가 아닌 인도양 사회주의자라고 칭했고, 이에 따라 소련식 국유화 정책은 거의 없었다.또한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광산업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익으로 다양한 사회 복지 시스템을 도입, 정비했다. 르네가 도입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는 완전 고용 계획 외에도 무료 초등학교 교육, 무상 급식, 무료 건강 관리, 저렴한 주택 및 새로운 도로가 포함된 사회 복지 프로그램 등이 있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유사한 실용주의를 채택한 르네는 주로 민간이 운영하는 관광 산업을 방치했습니다.
열대의 얼굴로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세이셸 - 워싱턴 포스트

1980년대 워싱턴 포스트는 르네의 경제 정책을 "로버트 무가베와 같은 실용주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4]

그 결과 세이셸의 1인당 GDP는 그가 집권할 동안 1044달러(1977년)에서 10177달러(2004년)으로 10배 가까이 상승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3.1.2. 사회정책

1981년 세이셸을 일당체제로 통치하던 시기, 국가 청소년 서비스(National Youth Service)라는 것을 만든 것도 평가가 갈린다. 1984년 전까지는 청소년들을 의무적으로 참석시켜 논란이 됐고, 정권 반대파들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사회주의 세뇌 작업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난하고 어려운 가정환경의 청소년들에게 마약과 알코올 중독을 극복할 기회, 적절한 교육과 기술 훈련을 제공하여 효과를 봤다.

4. 선거

대선 <rowcolor=white> 연도 정당 총 득표수 (명) 득표율 결과 비고
1979년 26,390 97.99% 1위 - 당선 단독 후보
1984년 32,883 92.72% 1위 - 당선
1989년 37,703 96.21% 1위 - 당선
1993년 25,627 59.50% 1위 - 당선 다당제 시행 이후 처음 실시된 대선
1998년 31,048 66.67% 1위 - 당선 다당제 선거
2001년 27,223 54.19% 1위 - 당선


[1] 現 연합 세이셸 (United Seychelles)[2] 참고[3] 자비로운 독재란 독재자가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지만,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다. 이는 자신의 지지자나 사적인 이익에만 집중하는 확연히 사악한 전형적인 독재자와는 대조적이다.[4] 물론 워싱턴 포스트가 이러한 평가를 내릴 당시에 무가베는 후대인 2008년에 그 악명높은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한 무능한 통치자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온건한 사회주의 정책을 펴면서 짐바브웨 경제를 그럭저럭 운영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