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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여왕 키우기/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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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삼중 연방)→미엥지모제(인테르마리움)2. 세계
2.1. 스페인2.2. 영국2.3. 교황청2.4. 조선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삼중 연방)→미엥지모제(인테르마리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1569~1697)
[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

삼중 연방(1697~1711)[1]
[Rzecczpospolia Trajga Narodów]

미엥지모제(1711~)[2]
[Międzymorze]
파일: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국기.png
국기[3]
Si Deus Nobiscum quis contra nos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누가 우리를 반대할 수 있겠는가[4]
(1699~)
작중 지도나 팬제작 지도 첨부
1569년 ~
국가 어머니 폴란드여, 기뻐하라
수도 크라쿠프(1569 ~ 1596[5])
바르샤바(1596~)
정치 체제 군주제[6](귀족공화제)
국가 원수 (폴란드 국왕)
대공 (리투아니아 대공 및 루테니아 대공 및 프로이센 대공)
주요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1569~1572)[7]
스테판 바토리, 안나 야기엘론카(1575~1587)
지그문트 3세 바사(1587~1632)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1632~1648)
얀 3세 소비에스키(1674~1697)
야쿠프 소비에스키(1697~1699)
엘주비에타 안나 소비에스카 & 정훈 바코비에(1699~)
인구 불명
민족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루테니아인(루스인), 벨라루스인, 독일인, 아슈케나짐, 조선인
언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루테니아어[8]
독일어[9]
라틴어
이디시어
인터슬라빅
종교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유대교[10]
통화 즈워티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연방 설립 1569년
데울리노 조약 1618년
대홍수 1648년
몰다비아 원정 1691년
포돌레 원정 1692년
1693년 세임 1693년
1694년 로코슈 1694년
아치칼레 원정 1695년~1697년
볼라 조약 1697년
대북방전쟁 참전 1698년~1699년
엘라 여왕과 바코비에 공동 즉위 1699년
[clearfix]
  • 몰다비아 원정 성공
    원 역사에서 실패했던 원정이었으나 이번에는 정훈이 원역사의 실책들을 매우다 못해 대활약하며 몰다비아 공국의 작위를 소비에스키 가문 명의로 가져온다.
  • 식문화 발전
    엘라의 전생 취미가 제과와 제빵이어서 마카롱 등 다양한 디저트를 만들게 되었다. 또 정훈은 사탕무로 만든 설탕의 사용법을 고심하다가 정수를 통해 보드카를 개량하였다.그 결과 프랑스계인 마리 왕비도 감탄하고 프랑스 대사도 (자존심 때문인지)프랑스 바로 밑이라고 평가하게 되었다.
  • 사탕무 종자 개량
    엘라가 제과와 제빵을 하던 도중 설탕을 더 추출하기 위해서 사탕무의 종자를 개량하였다.
  • 포돌레 원정
    얀 3세가 정훈에게 약혼을 조건으로 건 임무. 이로 인해 폴란드는 브라츠와프까지 영토를 얻게 되었다.
  • 1693년 세임
    몰다비아 원정, 포돌레 원정 성공 및 얀 3세의 정치적 술수로 인해 정훈을 브라츠와프의 스타로스타 및 포돌레의 보예보다-대리로 임명하고 비벤테 레게와 피아스트 법을 통과시켰다.[11]
  • 경자유전 제도
    포돌레의 보예스타가 된 이후 포돌레에 한해서 소작금지, 최소 경작지와 최대 경작지의 존재[12]라는 개념을 가진 경자유전의 원칙이 세워졌다. 이로 인해 인구조사와 토지조사가 원할하게 되고 징병을 하더라도 토지 및 자영농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높은 징병률이 나타났다.
  • 1694년 결혼식 암살미수 및 로코슈
    소비에스키 가문이 몰다비아 원정 및 포돌레 원정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자 이에 반감을 품은 라돔 연맹이 결혼식에서 정훈을 암살 시도하고 실패하자 합법적 반란인 로코슈를 일으킨다. 야누시 비시니오비에스키의 개인적 원한으로 테레사 쿠데군다의 결혼식에서 돌아오던 콘스탄티 왕자가 피살된다. 로코슈는 왕실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으며 비벤테 레게(국왕 생전 선거법)과 피아스트의 법(피선거권 연방인 제한)이 완전히 통과되고 헨리크 조항 중 '세습에 의해 계승되지 아니한다.' 라는 구절을 삭제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헨리크 조항의 일부를 수정함으로서 '설령 마그나트라도 반란 주동자는 처별될 수 있다'는 국왕의 징벌권이 생겼다. 또한 토바고에 히에로님을 유배시킴으로서 유배에 대한 전례가 생겼고 소비에스키 가문은 주동자 가문의 땅을 얻고 정훈은 그 땅의 사람, 기술을 얻게 되었다.
  • 카페 사업
    푸른 병 아래의 집이라는 카페를 인수해 엘라가 발전시킨 디저트 기술을 더해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는 엘라의 의도대로 토론의 장이 되어서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게 되었다.
  • 아치칼레 원정
    대튀르크 전쟁 중 1695년~1697년까지의 폴란드-오스만 사이의 전쟁. 폴란드는 이 원정을 통해 포돌레 전역, 드니프로 강 우안을 얻고 몰다비아 공국의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얻었다.
  • 사윤작법 보급
    정훈과 엘라가 포돌레에 한하여서 사윤작법을 보급하였다. 이로 인해 스페인왕위계승전쟁 시기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생산력은 나아지지 않거나 오히려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생산량은 경자유전의 원리와 흑토와 사윤작법 덕에 1인당 농업 생산량이 동유럽 최고이고 네덜란드 같은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밀리지는 않게 되었다.
  • 포돌레의 세이마크와 네칸 만화 창설
    포돌레 지역의 세이마크(지방의회)가 열렸는데 다른 지역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정훈이 경자유전 제도를 세워서 대다수의 자영농이 있다는 점과 다수결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돌레의 세이마크는 자영농에 의해 이끌어지게 되었다.또한 포돌레의 자영농에게 신문을 나눠주었으나 자영농이 글자를 못 읽는다는 점을 고려해 만화를 만들게 되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재편
    정훈의 원정(몰다비아 원정, 포돌레 원정, 아치칼레 원정) 성공으로 인해 대폭 늘어난 남부영토인 루테니아 일대는 코자키 문제나 폴리투 연방과 괴리된 정체성, 정훈의 반쯤 독자적 영지에 가까운 특성[13]을 고려한 중재안 격으로 루테니아를 공국으로 승격하고 정훈이 루테니아 대공으로 즉위하며 삼중연방으로 재편된다. 삼중연방은 기존 폴란드, 리투아니아에 루테니아를 추가하며 폴리루 연방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 미엥지스워비안스키 개발
    폴란드어, 루테니아어[14], 리투아니아어 등 다양한 언어가 쓰이는 연방의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엘라가 인터슬라빅과 17세기 당시 폴란드어, 루테니아어 등을 절충하여 인공어를 만들었다. 이후 군대 등에서부터 보급해 나가면서 연방의 공용어로 정착시키려고 노력하는 중. 현실에서는 2006년에 만들어진 언어인데[15], 17세기 폴란드어와 루테니아어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아 현실의 인터슬라빅과는 제법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신 수도 엘주비에투프 건설
    정훈은 엘주비에타의 도시 라는 뜻의 '시비엥타 엘주비에티', 줄여서 엘주비에투프라는 도시를 원 역사의 미콜라이우 건너편 남보흐강 하구에 런던을 모델로 건설하여 루테니아 공국의 신 수도로 삼는다.
  • 대북방 전쟁 승전
    덴마크 왕을 포로로 잡고 루스 차르국의 군대를 처부수며 진군한 스웨덴 군은 연방의 매국노인 빌노 연맹의 협조를 받아 바르샤바를 공격, 국왕 야쿠프를 사로잡는데 성공했으나 정훈이 스웨덴과 회전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승전으로 끝난다. 패배한 칼 12세도 정훈을 훌륭한 전사로 인정하여 유감없이 평화조약을 맺고 폴란드는 대북방 전쟁에서 빠지게 된다. 야쿠프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진 퇴위하고 엘주비에타와 정훈이 폴란드 공동 국왕에 즉위한다.
  • 여왕의 개혁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를 바탕으로 엘주비에타는 빌노연맹의 마그나트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즉위 초의 유리함을 이용, 세임의 무제한 거부권인 리베룸 베토를 철폐하는 데 성공한다. 또 약화됐던 마그데부르크 법을 다시 부활시켜 슐라흐트의 힘을 빼놓는데 성공하고 비밀경찰인 국가보호청(UOP)를 창설한다.
  • 연방사관학교 개설 및 군복 통일
    연방사관학교는 더 일찍 계획되었지만 거듭된 전쟁 때문에 스웨덴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 승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또한 스웨덴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 루테니아 군복도 통일되기 시작했는데 군복은 대부분 모직코트에 일부는 버프 코트이고 모구는 트레후그와 트리코튼으로 정해졌다. 다만 비용문제로 곧바로 모두에게 지급되지는 못했다.
  • 3차 오스만 원정
    이번 원정에서는 도나우 강 하류의 오스만 점령지들을 공격해 왈라키아 공국을 수복하는 것을 목표했으나 오스만에서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라소바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전멸시키고 발칸 산맥을 넘어, 반란군을 피해 무스타파 2세 황제가 은거하던 에디르네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에디르네의 황궁으로 들어가 무스타파 2세와 대면하여 조약을 받아낸다.

2. 세계

  • 대튀르크 전쟁카를로비츠 조약
    제2차 빈 공방전인 1683년부터 시작한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 공화국, 러시아 차르국, 헝가리 왕국)사이에 이러난 전쟁. 원역사와 작 중 모두 카를로비츠 조약의 체결로 끝난건 동일하지만 전쟁이 끝나는 시기와 조약의 내용이 다르다. 원 역사에서는 1699년에 끝난 반면 작중에서는 1697년으로 2년 일찍 끝났으며 합스부르크는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를 루스는 아조프와 타간로크, 노보노가이시크를, 베네치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달마티아의 영토를 폴란드는 이 원정을 통해 포돌레 전역, 드니프로 강 우안을 얻고 몰다비아 공국의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얻음으로서 오스만은 원역사에 비해 더 많은 땅을 잃게 되었다.
  • 국제단위계 제정
    잉글랜드를 방문하던 정훈-엘라 부부가 크리스토퍼 렌과 만나 명확한 기준을 가진 도량형 체계의 필요성에 대해 힘을 실어주어, 레이스베이크 조약이 맺어져 잉글랜드,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루스, 사보이아의 군주, 왕세자들이 모인 것을 기회로 '국제단위계에 대한 협약'을 맺어 국제단위계를 제정한다. 다만 원역사랑 달리 1미터를 '1초의 진자막대의 길이'로 정해서 정치적인 명분을 쌓기 위해 정훈의 제안에 따라 미터 기준점와 본초자오선은 원 역사의 영국 그리니치가 아니라 조약이 맺어진 레이스베이크를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발발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건강하게 있었기에 그를 스페인 왕으로 하는 것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요제프 페르디난트에 대한 암살시도가 벌어지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간 신뢰가 깨지고 전쟁이 벌어진다.

2.1. 스페인

2.2. 영국

2.3. 교황청

  • 바오로 6세의 즉위
    인노첸시오 12세의 선종 이후 이루워진 콘클라베에서 폴란드가 영향력을 행사하여 본래 선출되었던 클레멘스 11세 대신 지아코모 안토니오 모리지아 추기경이 선출되어 바오로 6세가 되었다.

2.4. 조선

  • 조선의 폴란드 접촉
    폴란드 선교단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에서는 이런저런 논란이 발생했으나 결국 정훈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도자기 장인과 정계에서 밀린 인물 중심으로 폴란드로 답례를 보낸다.

[1] 작중 1697년 볼라조약으로 루테니아 대공국 신설과 함께 재편되었다.[2] 작중 프로이센 대공 즉위와 함께 개편되었다.[3] 엘라가 즉위하면서 바뀐 국기[4] 로마서 8:31, 원역사에서도 구호였으나 엘라가 먼저 사용함.[5] 명목상 1569~[6] 세습군주제(1569년 ~ 1572년)→선거군주제(1573년 ~)[7] 폴란드의 왕으로서는 1548년부터 재위.[8] 우크라이나어벨라루스어의 전신[9] 단치히, 프로이센 공국,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에서 사용[10]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여러 인종과 함께 종교가 혼재되어있다.[11] 다만 비벤테 레게에 대한 철회를 요구한 1694년 로코슈로 인해, 로코슈 이후에 완전히 통과된다.[12] 여기에는 이익의 최소 경작지 개념(한전론)과 박지원의 최대 경작지(한전론) 개념을 차용했다.[13] 작중 소비에스키 가문의 몰다비아 공국과 유사하지만, 몰다비아 공국은 작위를 넘겨받은 타국이라면 루테니아는 탈환한 폴리투의 영토라는 차이가 있다.[14] 현대 우크라이나어벨라루스어의 조상 언어.[15] 정확히는 과거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슬로비오 등 범슬라브 권역국제어를 목표로 한 여러 인공어 프로젝트들이 나왔는데, 2006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슬로비안스키와, 2009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슬로비오스키와 네오슬라브어가, 2011년에 인터슬라빅이라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합쳐지며 생겨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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