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페르난도 카베나기 Fernando Cavenaghi |
본명 | 페르난도 에세키엘 카베나기 Fernando Ezequiel Cavenaghi |
출생 | 1983년 9월 21일 ([age(1983-09-21)]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오 브리엔 |
국적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키 181cm | 체중 78kg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소속팀 | CA 리버 플레이트 (2001~2004)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2004~2007) FC 지롱댕 드 보르도 (2007~2011) → RCD 마요르카 (2010 / 임대) → SC 인테르나시오나우 (2011 / 임대) CA 리버 플레이트 (2011~2012) 비야레알 CF (2012~2013) CF 파추카 (2013~2014) CA 리버 플레이트 (2014~2015) 아포엘 FC (2015~2016) |
국가대표 | 4경기 (아르헨티나 /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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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다.2. 선수 경력
17세의 나이에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명문 구단인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데뷔했으며 데뷔 시즌인 2000-01시즌에는 8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다.[1] 2001-02시즌에는 클라우수라에 15골을 터뜨리며 18세의 어린 나이에 리그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쥠과 동시에 팀에게 우승을 안겼다. 이후에도 2002-03시즌 클라우수라 득점 3위(12골), 2003-04시즌 아페르투라 득점 4위(8골), 클라우수라 득점 3위(9골)에 이름을 올리며 팀의 리그 3연패를 이끌었다.이 시기 아르헨티나 U-20 대표팀에서의 활약상도 대단했는데 2003 남아메리카 유스 챔피언십에서 8골을 넣는 활약으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후에 개최한 2003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아랍에미리트에서도 4골을 넣어 아르헨티나가 4강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대회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이러한 동나잇대 어린 선수들 가운데서 돋보이는 월등한 활약들로 제 2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로 불렸고, 카를로스 테베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최고의 재능 중 하나로 꼽히며 세계 축구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다른 초특급 유망주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빅클럽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다르게 돌연 축구 변방국인 러시아행을 택한다. 2004년 7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계약을 맺었고 이적료는 당시 러시아 리그 사상 최고액인 1,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축구 강국 아르헨티나의 초특급 유망주가 유럽 빅클럽들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변방 리그인 러시아 리그에 역대 최고 이적료까지 경신하면서 이적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에 러시아 현지 팬들과 언론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큰 기대와 관심이 무색하게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폭망해 버렸고 결국 블라디미르 페도토프 감독과의 불화까지 겹쳐져 팀을 떠나게 된다.
2006-07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프랑스 리그앙의 명문 FC 지롱댕 드 보르도와 700만 유로에 4년 6개월 계약을 맺었다.
첫 시즌은 후반기에 합류했고 이전 소속팀인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서 오랜 기간 뛰지 못한 탓에 하락한 폼을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별다른 활약 없이 리그 9경기 2골로 마쳤다.
2007-08시즌에는 리그 23경기에 나서 15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펼치며 부활을 알렸고 팀의 주포로서 웬데우, 다비드 벨리옹과 함께 팀이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참고로 이 시즌에 기록한 리그 15골은 보르도 구단의 역대 단일 시즌 리그 최다 득점 기록으로 2023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고[2] 훌리오 크루스의 백업 선수로 A매치 4경기를 뛰었다. 테베스, 세르히오 아궤로, 리오넬 메시, 곤살로 이과인 등 쟁쟁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존재로 인해 2008년 이후로는 소집된 적이 없다.
2008-09시즌에는 리그 29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하며 마루앙 샤막(13골), 요앙 구르퀴프(12골)와 함께 팀을 10년 만에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2009 트로페 데 샹피옹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넣어 팀에게 우승컵을 선사했다.
2009-10시즌에는 폼이 급격하게 하락하면서 부진하였고 결국 2010-11시즌 350만 유로에 라리가의 RCD 마요르카로 임대를 떠난다. 그곳에서 13경기 6골을 기록하고 다시 복귀했으며 복귀하자마자 다시 브라질 세리에 A의 SC 인테르나시오나우로 임대를 떠나게 된다.
2011년 7월, 2부 리그로 강등된 친정팀 CA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했으며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37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13골을 기록한 파트너 다비드 트레제게와 함께 팀의 나시오날 B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친정팀을 승격시키자마자 스페인 세군다 디비시온의 비야레알 CF로 이적했고 19경기 4골을 기록했다.
이후 리가 MX의 CF 파추카에서 1.5시즌을 뛴 뒤 다시 친정팀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하여 주장으로서 팀의 토르네오 파이널 우승, 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끌었다.
2015년 8월 25일, 프로타트리마 A 카티고리아스의 명문 아포엘 FC로 이적하였고 경기당 득점 1을 상회하는 어마무시한 득점력으로[3] 리그 득점왕과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8개월짜리 장기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아포엘과 상호협의 하에 계약을 해지했고 2016년 12월 27일, 리버 플레이트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 CA 리버 플레이트 (2001~2004, 2011~2012, 2014~2015)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002 클라우수라, 2003 클라우수라, 2004 클라우수라, 2014 토르네오 파이널
- 프리메라 B 나시오날: 2011-12
- 코파 수다메리카나: 2014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2015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15
- FC 지롱댕 드 보르도 (2007~2011)
- SC 인테르나시오나우 (2011)
- 캄페오나투 가우슈: 2011
- 아포엘 FC (2015~2016)
- 프로타트리마 A 카티고리아스: 2015-16
- 아르헨티나 U-20 대표팀 (2003)
- 남아메리카 유스 챔피언십: 2003
3.2. 개인 수상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2001-02 클라우수라
- 남아메리카 유스 챔피언십 득점왕: 2003
- FIFA U-20 월드컵 득점왕: 2003[4]
- 프로타트리마 A 카티고리아스 득점왕: 2015-16
4. 여담
[1] 리그 5경기 1골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경기 2골[2] 유망주 시절에도 상비군으로 소집되어 디에고 밀리토의 대타로 비공식 경기를 뛴 적이 있다.[3] 18경기 19골[4] 공동 득점왕[5] 2003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8강 미국전에서 페널티 킥으로 득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