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25 18:42:17

파헬

파일:펠라 15.png
유적지 주요부 (오데온 및 중앙 바실리카)
파일:펠라 성당 1.jpg
중앙 바실리카 유적
1. 개요2. 역사
2.1. 그리스-로마 시대 (펠라)2.2. 이슬람 시대
3. 볼거리

1. 개요

아랍어 فحل
그리스어 Πέλλα
영어 Pella

요르단 서북부의 고대 유적. 이르비드움카이스에서 각각 서남쪽과 남쪽으로 25km, 아질룬에서 서북쪽으로 17km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다. 기원전 6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은 도시로, 가나안 문명에서 압바스 왕조 시기까지 다양한 유적이 층층이 쌓여 있다. 옛 지명은 '펠라'로, 마케도니아 왕국펠라에서 유래했다. 오스만 제국 무렵에는 시가지가 서쪽의 평지로 옮겨져 타바케트 파헬 (طبقة فحل)이란 소도시로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국경과 불과 4km 거리로, 요단강 건너편의 베트셰안 (베이산)과 마주보고 있다.

2. 역사

파일:펠라 미그돌.jpg
미그돌 신전 유적

기원전 6천년 무렵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기원전 4천년 무렵에는 성벽이 둘러졌으며 신전 및 행정 건물이 세워지는 등 초기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수메르 문명보다 빠른 도시 형성으로, 가나안 문명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800년 무렵 진흙 벽돌 성벽이 세워졌고, 궁전도 조성되었다. 이집트 신왕국 시기 아마르나 서신에서 '파힐' 혹은 '페할'로 기록되었고, 현지 귀족이 이집트측 총독으로 서임되었다. 기원전 1650년 경에는 이집트 양식과 유사한 미그돌 (첨탑) 형태의 신전이 세워졌다. 기원전 1350년경 총독이던 셰쳄의 라바야의 아들 무탑발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했고, 반도인 '하비루'로 기록되었다.

2.1. 그리스-로마 시대 (펠라)

파일:펠라 21.jpg
중앙 바실리카 일대
파일:펠라 22.jpg
동부 바실리카 일대

5세기 가량 도시 국가로 이어지던 파헬은 기원전 850년경 바다민족 혹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고, 이때 미그돌 신전 역시 폐허가 되었다. 이후 폐허이던 파힐은 기원전 3세기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에 재건되었고, 그리스 인들이 듣기에 페할 지명과 유사한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인 '펠라'로 명명되었다. 다만 도시 규모는 크지 않아서 주택들과 신전 정도로 구성되었고, 기원전 83년경 하스몬 왕조알렉산드로스 야나이의 공격으로 재차 파괴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다시 재건했고, 현지인들의 요청에 따라 로마의 속국인 헤로데 왕조에 편성되는 대신 다른 요르단 지역 도시들과 데카폴리스 연맹을 이루었다.

고정 회원이던 펠라 (파헬)를 포함하여 필라델피아 (암만), 스키토폴리스 (베트셰안), 게라사 (제라시), 가다라 (움카이스), 카나트 (카나와트), 다마스쿠스 등 10개 도시들로 구성된 데카폴리스는 상당한 자치권이 있었고 기원전 63년을 1년으로 하는 달력을 사용했다. 로마 제국 시기 펠라는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했다. 서기 66년 1차 유대 반란 당시 카이사레아의 시리아 주민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자 분노한 유대 반군은 펠라를 공격해 파괴했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 공격에 나서자 유대계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계시를 받아' 펠라로 피신했고, 초기 교회를 세웠다.

따라서 펠라는 주요 초기 기독교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예루살렘에 이은 성지로 추앙받기도 했다. 로마 제국 후기 펠라 시가지는 점차 북쪽의 협곡 (와디 알-지름)과 남쪽의 언덕 (텔 알-후슨) 기슭으로 확장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기 펠라는 팔레스티나 세쿤다 속주에 속했고, 자체 주교구를 구성했다. 5세기 무렵 3개의 바실리카가 세워졌고, 주교궁도 있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는 언덕 위에 격자형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많은 상점들이 입주했다. 634년 아즈나딘 전투에서 동로마 군을 격파한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이슬람 제국 군대가 북상하자 스키토폴리스와 펠라로 피신했던 동로마 패잔병들은 제방을 터뜨려 일대를 진창으로 만들었다.

2.2. 이슬람 시대

파일:펠라 우마이야.jpg
우마이야 시기 시가지 유적
파일:펠라 압바스.jpg
압바스 시기 시가지 유적

그럼에도 이슬람 군대는 요단강을 건너 펠라로 향했고, 최대 5만의 동로마 대군을 격파했다. 이후 패잔병들은 펠라에서 농성했고, 4개월 간의 포위 끝에 아랍측 사령관 아부 우바이다는 협상하여 동로마 군대의 다마스쿠스로의 안전한 철수 및 교회 유지를 보장하며 도시를 항복시켰다. 아부 우바이다는 펠라에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슈라빌 빈 하사나의 부대를 남겨둔 후 북상했고, 그들은 스키토폴리스와 티베리아스를 항복시켰다. 펠라는 셈계 지명인 파헬로 불리게 되었고, 636년의 야르무크 전투 당시 이슬람 제국군의 후방 거점이었다. 정통 칼리파 시기 준드 알-우르둔 주에 편성된 파헬은 다른 레반트 도시들처럼 안정을 유지했고, 큰 시장과 공방들이 들어섰다.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도 안정을 누리던 파헬은 749년 갈릴리 대지진 당시 진앙과 가까워 크게 파괴되었다. 모든 2층 석조 / 벽돌 건물들이 붕괴되어 많은 인명 사상이 났고, 압바스 왕조 들어 시가지 북부가 2중 사각 형태로 재건되었으나 크게 축소된 규모였다. 또한 파헬은 암만, 베이산, 티베리아스에 가려져 더욱 쇠퇴하였다. 다만 이후로도 무역과 유리 공예 산업으로 도시는 이어졌고, 950년경 카라반사라이 (칸)이 세워졌다. 그외에 분수대와 회반죽 바닥 등이 발굴되었다. 12세기 도자편이 발견되는 등 십자군 전쟁기에도 마을이 있었고, 아이유브 왕조 지배 하에서 석조 모스크와 시가지 및 묘지가 조성되는 등 재차 도시화되었다. 오스만 제국기에는 파흘 엘 타흐타라 불렸고, 밀과 보리 및 깨 등을 생산했다. 유적지는 1958년부터 발굴되었고, 주로 호주 대학들이 주도한다.

3. 볼거리

파일:펠라 지도 요르단.png
유적 지도
파일:펠라 요단강.jpg
언덕에서 바라본 요단강 방면
파일:펠라 오데온.jpg
오데온 1
파일:오데온 펠라.jpg
오데온 2
파일:미그돌 펠라.jpg
미그돌 신전
파일:펠라 서 성당.jpg
서부 바실리카 1
파일:펠라 서.jpg
서부 바실리카 2
파일:펠라 성당.jpg
중앙 바실리카 1
파일:펠라 중간 교회.jpg
중앙 바실리카 2
파일:펠라 ㄷㅇ.jpg
중앙 바실리카 3
파일:펠라 동 교회.jpg
동부 바실리카 1
파일:펠라 동 성당.jpg
동부 바실리카 2
파일:우마이야 펠라.jpg
우마이야 시기 시가지 1
파일:중세 펠라.jpg
우마이야 시기 시가지 2
파일:압바스 펠라1.jpg
압바스 시기 시가지 1
파일:펠라 압밧.jpg
압바스 시기 시가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