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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홀랜드(초대 켄트 백작)

<colbgcolor=#8FBC8F><colcolor=#000000> 초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Thomas Holland, 1st Earl of Kent
파일:토머스 홀랜드(초대 켄트 백작).jpg
이름 토머스 홀랜드 (Thomas Holland)
출생 1315년
잉글랜드 왕국
사망 1360년 12월 28일 (향년 44~45세)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루앙
배우자 켄트의 조앤 (1340년 결혼)
자녀 토머스, 에드먼드, 조앤, 모드,
아버지 로버트 홀랜드
어머니 모드 드 라 주시
형제 조앤, 로버트, 엘레노어, 마가렛, 앨런, 오테스, 존, 엘리자베스, 메리
직위 홀랜드 남작, 켄트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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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켄트의 조앤과 비밀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1315년경 초대 홀랜드 남작 로버트 홀랜드와 아스비의 초대 라 주시 남작 앨런 드 라 주시의 딸 모드 드 라 주시의 두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조앤[1], 로버트[2], 엘레노어[3], 마가렛[4], 앨런[5], 오테스[6], 존[7], 엘리자베스[8], 메리[9]가 있었다.

아버지 로버트 홀랜드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플랜태저넷의 기사로, 토머스의 광대한 영지 경영에 참여했고, 에드워드 2세로부터 체셔 판사로 3차례 임명되었다. 1314년부터 홀랜드 남작에 선임된 뒤 의회에 자주 출석했다. 이후 토머스 플랜태저넷이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디스펜서와 전쟁을 벌였을 때 토머스를 지지했으나, 1322년 3월 버러브리지 전투 직전에 500명의 강력한 병력을 이끌고 에드워드 2세에게 투항해 토머스가 패사하게 만들었다. 이후 에드워드 2세에 의해 목숨과 재산은 보전받았지만 런던 탑에 감금되었고,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타도된 뒤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에 의해 석방되었다. 1328년 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가 로저 모티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헨리의 가신 중 한 명인 윌리엄 위더가 하트퍼드셔의 숲에서 로버트 홀랜드를 습격해 살해한 뒤 그의 머리를 헨리에게 보냈다.

아버지가 이렇게 피살당한 후, 형 로버트가 홀랜드 남작에 선임되었고 주요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남동생 앨런, 오테스, 존과 함께 기사로서의 경력을 선택했다. 1330년대 초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337년 로베르 3세 다르투아의 원정군에 가담해 보르도로 가서 가스코뉴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1338년 왕실 기사로 발탁되었다. 1338~1339년과 1340년에 플란데런 백국에서 복무했으며,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 참여했으며, 뒤이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투르네 공방전에 참여했다.

이 무렵, 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막내 아들이자 초대 켄트 백작인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딸 켄트의 조앤과 비밀리에 결혼했다. 결혼이 언제 이뤄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략 1339년에서 1340년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341년, 토머스는 고대 프로이센에 대한 십자군을 단행하고 있던 튜튼 기사단에 가담했다. 이때 조앤의 어머니인 리들의 웨이크 여남작 마거릿 웨이크는 조앤에게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결혼하라고 지시했다. 조앤은 자신이 비밀 결혼한 것을 밝히게 되면 홀랜드가 잘못될 것을 두려워해 순순히 따랐다. 이후 홀랜드가 살아 돌아왔지만, 조앤은 윌리엄 몬타구에게 남았다. 가세가 지극히 미약했던 그는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1344년 직후 윌리엄 몬타구 영지의 세네샬이 되었다.

그 후 홀랜드는 1342 ~ 1343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브르타뉴 원정에 참여한 뒤 존 하르데샬과 함게 바욘으로 가서 외교 활동을 수행했고, 1343년에는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그라나다로 향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의 원정군에 배속되어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의 부관이 되었다. 1차 캉 공방전에서 프랑스 무관장 라울 2세 드 브리엔을 직접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높게 평가하고 1348년에 토머스 홀랜드와 홀랜드의 부관 역할을 하던 남동생 오테스를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발탁했다. 또한 토머스는 라울 2세로부터 8만 플로린에 달하는 몸값을 챙길 수 있었다.

그렇게 재산을 확보한 토머스 홀랜드는 아내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부와 명성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1347년 6월, 토머스는 에드워드 3세에게 사실을 고한 뒤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앤을 되돌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조앤과 합법적으로 결혼했으며 자신이 없는 동안 조앤이 "친척과 친구들의 희망에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그들의 합의에 따라" 솔즈베리 백작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솔즈베리 백작이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소송이 시작되었다. 교황 특사들이 솔즈베리 백작을 찾아가서 법정에 출두하라고 요청했지만, 솔즈베리 백작은 이를 거부하고 조앤이 조사 위원회에서 증언할 수 없도록 성채에 감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교회의 압력을 받자 어쩔 수 없이 풀어줬고 조앤은 자신이 토머스 홀랜드와 결혼하길 원했으며 그와 이미 결합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1349년 11월 13일 클레멘스 6세는 조앤과 솔즈베리 백작과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토머스 홀랜드와 조앤의 혼인 관계를 인정했다.

1350년, 토머스 홀랜드는 윈첼시 해전에 참전해 잉글랜드 함대가 카스티야 함대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352년 처남인 켄트 백작 존 플랜태저넷[10]이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아내 조앤이 뒤를 이어 켄트 여백작이 되었고 토머스 홀랜드도 아내의 영지 관리인이자 부유한 지주가 되었다. 다만 켄트 백작이 되지는 못했고, 1354년 3월 홀랜드 남작이라는 이름으로 의회에 소환되었다. 1352년 8월 칼레 성의 대장이 되었으며, 1353년 브르타뉴로 갔고, 1354년 브르타뉴의 대장이자 왕실 중위가 되었다. 그는 이 직위를 근거로 브르타뉴 공국의 어린 상속자에 대한 후견권을 얻었으며, 브르타뉴 지역 수입 일부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1356년 채널 제도의 수호자로 선임되었으며, 자신의 부관이자 형제 오테스에게 일부 함대를 맡겨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코네 성을 탈환하게 했다.

1357년 노르망디로 파견되었고, 11월에 크로시 성주가 되었으며, 1358년 생소뵈르 자작 조프루아 다르쿠르의 소유였던 코탕탱 반도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1359년 10월 코탕탱 바르플뢰르 항구도시의 보안관이 되었으며, 롱그빌 백작이자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형제인 필리프와 함께 노르망디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360년 9월 노르망디 총독에 선임되었으며, 11월 20일에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켄트 백작에 선임되었다. 또한 10월에 브레티니에서 체겨래된 평화 조약의 이행을 감시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병에 걸렸고, 12월 28일 루앙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루앙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링컨셔 스탬퍼드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이장되었다.

3. 가족

파일:Joan of Kent.jpg
<colbgcolor=#8FBC8F><colcolor=#000000> 켄트의 조앤(Joan of Kent)

아내 켄트의 조앤에드워드 1세의 친손녀로[11] 이 결혼을 통해 토머스 홀랜드도 아내의 작위를 따라 켄트 백작이 되었다. 이후 1360년 토머스 홀랜드가 사망하고 1년 뒤인 1361년에 흑태자 에드워드와 재혼했다.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Thomas Holland, 2nd Earl of Kent)
1350년 1397년 4월 25일 앨리스 피츠앨런
슬하 4남 6녀[12]
1녀 브르타뉴 공작부인 잔
(Joan, Duchess of Brittany)
1350년 1384년 10월 장 4세 드 브르타뉴
2남 초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John Holland, 1st Duke of Exeter)
1352년 1400년 1월 16일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13]
슬하 3남 2녀[14]
3남 에드먼드 홀랜드
(Edmund Holland)
1354년 1354년
2녀 생 폴 백작부인 모드
(Maud, Countess of St Pol)
1359년 1392년 4월 13일 휴 코트니
리니 백작 발레랑 3세
슬하 1녀

[1] 1302 ~ 1347, 기사 휴 더튼의 아내, 초대 더튼 남작 토머스 더튼의 어머니[2] 1312 ~ 1373, 2대 홀랜드 남작[3] ? ~ 1341년 11월 21일 이전에 사망, 제2대 다아시 남작 존 다아시의 부인[4] 기사 존 라 워의 아내[5] ? ~ 1339, 기사[6] ? ~ 1359, 토머스의 부관으로서 백년전쟁의 여러 전장에 참여함.[7] ? ~ ?, 기사[8] 1320 ~ 1387, 기사 헨리 피츠로저의 부인[9] ? ~ ?, 브레이스웰의 기사 존 템페스트의 부인[10] 아내 조앤의 남동생.[11] 에드워드 1세의 막내아들인 켄트 백작 에드먼드의 차녀.[12] 초대 서리 공작 토머스 홀랜드, 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13]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차녀.[14] 2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