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3aacc><colcolor=#ffffff> 토가와 준 [ruby(戸川, ruby=とがわ)][ruby(純, ruby=じゅん)] | Jun Togawa | |
본명 | 토가와 준코 ([ruby(戸川, ruby=とがわ)][ruby(順子, ruby=じゅんこ)], Junko Togawa) |
출생 | 1961년 3월 31일 ([age(1961-03-31)]세) |
도쿄도 신주쿠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여동생[1] |
학력 | 칸토가쿠인대학 (영문학부 / 학사) |
직업 | 배우, 가수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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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0년대 전반에 배우, 가수로 활동한 멀티 엔터테이너로 독특하다못해 괴기스러운 세계관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책을 쓰거나 다른 가수와의 콜라보나 자신의 작품을 커버하는 활동만 이어나가고 있다.2. 약력
2.1. 초기
도쿄 신주쿠 구 출신이며 소학교 시절에는 통통한 체형이었는지 이지메를 당했고 살찐 야마시타 타츠로라는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의외로 아역배우 출신으로 초등학교 재학 중에 여동생인 토가와 쿄코와 함께 극단 히마와리에 입단한다. 아역 시절엔 거의 엑스트라 출연이 많았고 가끔 무대 배역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여동생에 비해 연기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평을 받거나 학업적인 문제로 인하여 퇴단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연극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애당초 본업이 가수보다는 배우인지라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당대 꽤 인기있던 TBS 테레비계열의 형사 부탁해! 라는 형사 드라마에 여경 역으로 캐스팅되어 다시 연기활동을 재개하고 1982년 9월 일본의 변기, 세면기기 회사인 토토의 비데 TV CM을 맡은 것이 전성기 브레이크의 계기가 된다. '엉덩이도 씻어 주면 좋겠다[2]'(...)라는 괴 캐치프레이즈였지만 이 CM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문제의 CM. 그 후로도 다년간 Toto의 CM을 맡게 된다.
기발한 CM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전 토가와 준 본인은 엄격한 집안에서 일요일 외출 금지인 고교생활을 보냈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일요일 외출 금지가 풀렸다. 우연히 일요일에 영화를 보러 외출하던 중 히비야 공원에서 후일 같이 게르니카를 결성하게 되는 키보디스트 우에노 코우지의 노상 라이브를 보게 되어 팬이 된다. 팬에서 지인이 된 우에노 코우지를 따라 시부야의 록 카페에 드나들게 되는데 원래 아역배우 출신에 배우 지망이던 토가와 준은 가수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토가와 준을 우에노 코우지가 맘에 들어하여 밴드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독특한 경력으로 인해 극단적으로는 TOTO 광고에 나온 사람부터 당시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짓을 하는 배우+가수, 가수 활동이 사실상 묻혀버린 현대에는 옛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조연배우라고 인식하는 등 분절된 인지도를 가지게 된다.
2.2. 알파 레코드 시기
1979년에 시작해 3년간의 작업을 거쳐 1982년 6월, 토가와 준과 우에노 코우지의 콤비에 따로 작사담당과 아트워크, 의상담당으로 미술학도 오오타 케이이치가 합류한 게르니카가 결성되어 앨범 데뷔를 한다. 첫 앨범인 '개조에의 역동'은 일본 락계의 거물인 핫피 엔도,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호소노 하루오미가 프로듀서를 맡은 앨범이며 구식 폰트와 외계어에 준하는 가사가 들어있어 따로 오오타 케이이치가 작성한 설명집 소책자가 동봉되어 있다. 이후에도 호소노 하루오미와 다카하시 유키히로가 주로 참여하고 프로듀싱한 알파 레코드의 ¥EN 레코드 소속 아래 솔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개조에의 역동’이 발표되자마자 구 다이쇼 시대의 다이쇼 모더니즘 컨셉의 복고풍으로 꽤 주목을 받았으나 생각보다 큰 반향은 없었는지 게르니카는 결국 활동을 중지하고 토가와 준은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는 등 소일한다. 그 후 멤버 각각의 솔로앨범이 따로따로 발매되기에 이르는데 그 중 토가와 준의 솔로가 바로 玉姫様이다.
게르니카 활동 중지 이후 1983년, 玉姫様의 작사가인 사에키 코우지가 있던 밴드인 하루멘즈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밴드 YAPOOS[3]를 결성하여 다시 앨범을 작업한다. 이후로는 싱글보다는 대부분 앨범 위주의 활동을 하게 된다.
1984년 토가와 준 본인이 이오 요시후미와 공동 프로듀스로 발표한 앨범 ‘玉姫様’는 오리콘 14위까지 올라가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곧이어 출시된 라이브 앨범인 裏玉姫는 '토가와 준과 YAPOOS'명의로 발매되어 야푸즈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시절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 출연해서 행한 라이브는 한때 일본의 엽기 뮤지션(...)으로 알려져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때 즈음부터 모리타 카즈요시의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나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테츠코의 방> 같은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고 전반적으로는 나이 스물셋에 걸맞지 않은 동안과 퍼포먼스, 독특한 가사와 정신세계로 아이돌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디폴트 컨셉은 '이상한 여자(?)' 수준으로 대중에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1985년 3월 토가와 준 유닛 명의로 ‘極東慰安唱歌(극동위안창가)’라는 앨범을 발매한다. 역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호소노 하루오미나 팀의 드러머인 다카하시 유키히로 등 중견급의 뮤지션들이 꽤 참여하였는데 호소노 하루오미의 곡 커버부터 중남미 민요, 동요, 오키나와 전통민요나 초등학교 교가, 오페라 파트의 일어버전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작품인데 의외로 소품집 비슷한 느낌 치고 오리콘 15위까지 올라가는 성적을 낸다.
동년 10월에는 그전까지의 소속사였던 알파 레코드에서 토가와 준의 개인 레이블인 HYS레이블을 떼어주었고 이에 힘입어 토가와 준 솔로 명의로 세번째 정규앨범인 好き好き大好き를 발표한다. 타이틀인 ‘好き好き大好き’는 경쾌하고 정신이 꽤 나가있는 가사로 후일 얀데레의 시초라는 소리도 듣게 되는 곡으로 아직까지 희자되고 있지만 의외로 수록곡 중에 싱글로 발매된 건 프랑스 샹송 Comment te dire adieu의 리메이크인 さよならをおしえて이다. 굳이 야푸즈라고 칭해도 큰 차이가 없는 이유는 야푸즈의 메인 기타리스트인 다카에 타카오와 역시 베이시스트인 나카하라 노부오가 그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6년 さよならをおしえて를 싱글 커트해서 활동한 뒤 1987년 東京の野蛮이라는 베스트 앨범을 마지막으로 알파 레코드와 결별했다.
2.3. YAPOOS 시기
토가와 준은 기존 알파 레코드에서 이적해 YAPOOS 명의로 쇼치쿠 계열인 테이치쿠 레코드에서 야푸즈 첫 앨범 ‘ヤプーズ計画(야푸즈 계획)’을 1987년 발매한다. 수록곡은 야푸즈 멤버들 5명이 2곡씩 각자 작곡해서 수록했고 작사의 대부분은 토가와 준 본인이 맡았다.야심차게 내놓은 해당 앨범은 저조한 성적을 내며 예술적으로는 뉴웨이브, 신스팝 분야의 수작인 것과 별개로 토가와 준의 상업적 인기 하락의 시작을 보여주었다.1988년 우에노 코우지, 오오타 케이이치와 함께 게르니카를 재결성한 토가와 준은 게르니카 2집 ‘新世紀への運河(신세기로의 운하)’를 발표한다. 버블시대답게 풀 오케스트라와 혼섹션의 구성으로 재시작된 게르니카 2집은 오리콘 차트 60위권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그저 숨고르기라는 듯 게르니카 2집 이후 야푸즈 명의의 2번째 앨범인 ‘大天使のように(대천사처럼)’을 발표하고 이는 오리콘 30위권에 올라가는 정도로 소소하게 히트한다. 그리고 1989년 발표한 게르니카 3집과 본인 솔로 명의의 4집이 각각 오리콘 50위권, 70위권에 그치는 아쉬운 성과를 내었다. 이 시기의 토가와 준은 쇼치쿠 영화 시리즈인 <낚시 바보 일지>나 남자는 괴로워에 매진하게 되고 단발성으로나마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치게 된다. 특히 낚시 바보 일지는 초기부터 90년대 중순의 시리즈까지 꾸준히 출연했다.
1991년, 맴버 두명의 탈퇴를 겪으며 토시바 EMI로 이적한 야푸즈의 서드 앨범인 ‘ダイヤルYを廻せ!(다이얼 Y를 돌려라!)’[4] 가 발표되지만 오리콘 60위권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1992년 키보드와 드럼을 맡던 맴버가 추가로 탈퇴하면서 야푸즈의 정체성이 위태로워졌다. 이시기 도움을 준 것이 히라사와 스스무로 비슷한 시기 시작된 히라사와 스스무의 앨범 피쳐링에 참여하고, 토가와 준의 앨범에 히라사와 스스무가 편곡을 도와주었으며, 방송에 동반 출연하거나 언급해주는 등 광범위한 협력이 돋보였던 시기였기에 야푸즈에도 히라사와 스스무의 영향력이 강하게 들어왔다. 더하여 새로 영입한 키보드 맴버가 히라사와 스스무가 이끌던 밴드 P-MODEL의 카피밴드 출신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한 앨범인 ’dadadaism‘(92), ‘ヤプーズの不審な行動(야푸즈의 의심스러운 행동)‘(95), 'HYS'(95)는 보컬보다 악기의 비중이 강해졌다.
1995년 기존 야푸즈 멤버들도 베이스의 나카하라 노부오를 제하면 거의 교체되다시피 하여 소속감도 점점 사라져가던 중. 당시 레이블이었던 콜롬비아 레코드의 방향성과 개런티에 얽힌 분쟁, 과도한 스케줄과 이로 인한 컨디션 악화, 서포트 멤버들의 잇따른 탈퇴와 교체에 이어 콜롬비아에서 무단으로 편집한 라이브 비디오가 발매되자 토가와 준은 자택에서 면도칼로 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하게 됐다. 다행히 면도날이 경동맥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지라 목숨은 건졌으나 거짓으로 자살시도를 했다는 주간지나 스포츠 신문의 악평과 자해시에 나온 피로 방의 벽에 '皆憎(개증, 모두 증오한다)'이라고 써놓은 것으로 매스컴을 달군다.
자살시도 사건 이후 한동안 무대활동이나 뮤지컬에 집중하던 토가와 준은, 가끔 성우 미야무라 유코의 곡을 작사해준다거나 가끔씩 라이브를 하면서 소일하며 영화, 드라마 모두 활동을 금지한 채 인디즈로만 활동한다.
1998~1999년 경에는 발전한 기술력에 따라 홈레코딩을 통해 녹음한 ‘cd-y’를 발매, 라이브 회장에서나 볼 수 있던 환상의 물건이었으나 후일 통신판매 또한 이루어졌다.
2.4. 2000년대
2000년에는 ‘20th TOGAWA JUN’이라는 타이틀의 커버곡으로만 구성된 데뷔 20주년 기념앨범을 발매했다. 해당 앨범 인디즈 레이블에서 발매된 것 치고 굉장한 인기를 얻어 후에 재발매가 된다.2001년 지금은 폐국한 NHK 위성 제2텔레비전에 출연하였다. 야푸즈 스페셜이란 이름으로 그동안의 토가와 준의 행적과 라이브 가 방영되었다. P-MODEL 해체 이후 키보드로 합류한 후쿠마 하지메의 야푸즈 활동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영상물이다.
2002년 Otomo Yoshihide's New Jazz Ensemble의 앨범
’Dreams‘에 친분이 있던 뮤지션 PHEW와 함께 보컬로 참여하였다. 이어서 근 7년만의 정규앨범인 霊長類ヤプーズ品目ヒト科(영장류 야푸즈 품목 인간과(...))를 발매하려 했으나 동생 토가와 쿄코가 그동안 앓아왔던 질병으로 인해 자택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나 발매가 무기한 연기된다. 이곳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ヒト科(인간과)와 12才の旗(12세의 깃발)이 후에 야푸즈 재결성 기념반에서 수록된 만큼 해당 앨범의 발매는 사실상 무산되었다.
2004년 더스탈린의 리더 엔도 미치로우가 이끌던 펑크밴드 MJQ의 기타리스트인 山本久土와 함께 東口トルエンズ(히가시구치 토루엔즈)를 결성 2006년까지 활동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커버하지만, 무리한 보컬 스타일의 지속과 흡연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때의 라이브에서는 괴성에 가까운 보컬을 보여주었다.
2004년 戸川純 バンド(토가와 준 밴드)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에 도전 ‘togawa fiction’ 이란 앨범을 발매한다. 작곡과 작사가 대부분 밴드로 구성한 맴버에 의해 쓰여졌고 오직 オープン・ダ・ドー (오픈 더 도 -) 라는 곡의 작사만 맡았는데 여동생의 죽음에 의한 것인지 대외기피증을 소재로 하고있다.
2006년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허리를 다친 탓에 그 후유증으로 목소리가 완전히 변해버렸다.[5] 야푸즈 또한 이시기에 해체한다. 이때문에 토가와 준이라고 식별할 만한 음색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고, 고음역대의 가창에는 도라에몽 목소리와 같은 비음이 심해져 호불호 요소가 심해졌으나 낮은 음역대에 대한 가창이나 <パンク蛹化の女>같은 락 계열 곡의 창법은 젊었을 때와는 다른 쪽으로 박력 넘쳐 여전히 마이너 영역에서 인지도를 유지하고 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라디오 퍼스널리티로서 대중들 앞에 섰다. 올 나이트 닛폰과 이름이 비슷한 올 니트 닛폰에서 그녀는 본인의 활동 당시 심정이나 의외로 소심한 성격, 동생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전성기 시절의 파격보다는 본연의 모습을 많이 드러냈다.
2.5. 2010년대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밴드 Vampillia의 앨범 ‘The Divine Move’에 보컬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재개에 나섰다. 2016년에는 활동 기념 35주년으로 わたしが鳴 こうホトトギス를 발매 10여년 만의 본격적 복귀 + 토가시 요시히로가 헌터x헌터 휴재 와중에 기념 일러스트를 그려주는 등 여러 요소에 힘입어 오리콘 차트 50위권에 오르기도 하는 등 메이저에 오랜시간 이탈 한 것을 고려했을 때 준수한 성적을 냈다.또한 노이즈밴드인 비상계단(非常階段, Hijokaidan)[6]과 합작 앨범을 내기도 했으나 절반이 비상계단의 오리지널 곡이었기에 혹평을 받았으며 둘의 합작의 라이브 앨범은 그나마 평가가 좋은편.
2019년에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토가와 준의 백밴드 기타리스트의 요청에 힘입어 야푸즈를 재결성, ‘ヤプーズの不審な行動 令和元年’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발매하여 기존 곡의 커버와 1개의 신곡을 내놓았다.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이행하던 시기인 만큼 앨범의 구성 또한 연호가 들어간 곡 위주로 들어갔는데 이때문에 재결성 기념 라이브에 불렸던 많은 곡들이 제외되어 팬들 입장에서는 아쉽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라이브가 불가능에 가까워 졌고 본인의 전성기 시절 잡지에서 연재하던 토가와 준의 인생상담 코너에 착안하여 고민상담을 컨탠츠를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
2.6. 2020년대
2020년대에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주로 만드는 한국인 유튜버가 好き好き大好き를 커버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이 유행이 유튜브나 틱톡으로 번져 대유행을 탔다. 토가와 준의 초기 솔로시절 악곡의 저작권을 관리하던 회사에서 유튜브 채널을 신설하면서 好き好き大好き의 공식 뮤비를 업로드했는데 2023년 2월 3일 기준 700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토가와 준 본인이나 토가와 준을 실시간으로 접하던 세대는 이해가 안된다는 반응.이 유행으로 인해 이전부터 인지도 있던 玉姫様를 제외한 다른 작품이 조명되나 싶었지만 토가와 준 본인의 작품 저작권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접근성도 좋지 않고, 토가와 준 본인도 마이너로 내려온 이후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상황 속에 그다지 조명받지 못했다.
2023년에는 야푸즈의 키보드 山口慎一(야마구치 신이치로)와의 합작형태로 유튜브 채널에서 영상 말미에 진행한 노래코너에서 커버한 노래의 모음집인 ‘戸川純の童謡唱歌(토가와 준의 동요창가)’를 발매함과 동시에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한 고민상담을 엮은 戸川純の人生相談~どうしたらいいかな、純ちゃん~(토가와 준의 인생상담~어떻게 해야할까,준짱~)을 발간했다.
이전부터 팬임을 공인해온 노코와 스즈키 미사코가 소속된 신세이 카맛테쨩의 15주년 베스트 앨범 聖なる交差点에 수록곡 중 하나인 グロい花의 리메이크 보컬로 참여했다.
3. 음악성
본인 작곡이 조금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밴드 맴버 혹은 외부의 작곡이 있었기에 싱어송라이터까지는 아니었으나 여러 작곡자에게 곡을 받으며 굉장히 다양한 컨셉을 내세웠는데, 게르니카의 쇼와시절 컨셉부터 야푸즈의 여성 락커+여고생 컨셉, 본인 솔로의 신들렸다고도 표현할 정도로 괴이한 퍼포먼스의 컨셉까지도 모두 소화해냈다. 물론 기본 컨셉은 '이상한 여자'... 「さよならをおしえて」(안녕을 가르쳐줘) 그나마 대중적인 노선의 곡. |
「好き好き大好き」(좋아해 좋아해 정말 좋아해) 토가와 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곡. 가사가 매우 가관인데 후렴구의 마무리는 '좋아한다고 해주지 않으면 죽일 거야!'라는 가사이다(...). |
1984년 「玉姫様」 (타마히메사마) (영상의 50초부터 시작) 실질적인 출세작. 귀기어린 전반부 퍼포먼스와 더 맛이 간 후반부 퍼포먼스[7]가 압권인 곡.[8] |
1984년 「踊れない」 (춤출 수 없어) 역시나 기이한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곡. |
1984년 「パンク蛹化の女」 (펑크 번데기의 여인) 토가와 준의 열창이 돋보이는 펑크 록. 요한 파헬벨의 카논을 샘플링해서 만든 蛹化の女을 펑크로 또 다시 개조했다. 해당 곡은 본인이 라이브 버전으로만 발매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스튜디오 버전은 없다. 위의 영상은 1992년 버전. 90년대 홍대의 삐삐밴드 등 조선 펑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
1989년 「バージンブルース」 (Virgin Blues) 소설가 겸 전직 참의원이었던 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 부른 동명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 #원곡 사토 히사야스 감독의 『이름 없는 여자들』의 OST로 쓰였다. |
4. 위상
서브컬쳐 계열에선 얀데레의 시초라거나 전파계의 시초라거나 광녀컨셉, 로리타 패션의 선두주자[9] 등등 여러가지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 또 정신과 의사인 R. D. Laing가 쓴 시집 Do you love me?[10]의 일본어 번안 제목에서 따온 좋아 좋아 너무 좋아와 동명의 앨범 수록곡인 사요나라를 가르쳐줘는 각각 동명의 전파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만 각각 원서와 원곡이 있기에 토가와 준이 영향을 끼친건지는 정확치 않다. 게임 사요나라를 가르쳐줘를 비롯한 전파 에로게들에 영향을 받은 니디 걸 오버도즈 역시 토가와 준의 영향을 받은 요소들이 인게임에 등장한다.토가와 준의 리즈시절과 상당히 비슷한 행보와 컨셉을 그나마 잇는 아티스트라면 역시 시이나 링고정도가 있다. 한국내에선 이정현, 삐삐밴드가 토가와 준 컨셉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5. 여담
- 시력이 0.01로 엄청난 난시라 타인과 이야기할 때 사람의 얼굴이 아닌 벽이나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패기발랄한 초차원 컨셉과 달리 평소 성격은 얌전한 편. 본인은 그런 이상한 사람 별로 안 좋아한다고(...).
- 전혀 엉뚱한 4차원의 대답이 나오는 식의 전파 토크로 인기를 끌었으며 라디오에서도 토크력은 나쁘지 않은 편.
- 만만치 않은 기행인으로 일컫어지는 히라사와 스스무와 친분이 깊어[11] 같이 출연한 방송이나 서로 서포트해준 작업물이 은근히 있다. 토가와 준이 자살사건을 일으킨 1995년 이전까진 합작품을 찾을 수 있지만 이후에는 완전히 교류가 끊겨 가끔 서로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 유유백서에도 언급되었는데 센스이 시노부가 이츠키를 쓰러트리고 죽이려 하자 이츠키가 내일 방영하는 TV 프로에 토가와 준이 나온다고 하자 센스이가 요괴인 이츠키에게 마치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꼈고 자기도 매주 보고 있다고 말하고 살려뒀다.
- 밴드 시절엔 80년대 버블 시대와 일본의 밴드 붐에 힘입어 신디 로퍼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컨셉이나 무대매너를 많이 보여줬다. 의외로 메이크업하지않은 본판은 예쁘면서 기믹으로 예쁜 얼굴을 가린다는 것 역시 따라갔다(...).
[1] 토가와 쿄코(1964. 8. 13. - 2002. 7. 18.), 일본의 모델이자 배우. 유리가면 드라마판에서 미즈키 씨 역으로 출연. 친한 자매지간이었으나,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2002년 목을 매어 자살했다.[2] おしりだって洗ってほしい..로 다쟈레.[3] 바로 가축인 야프에서 따 왔다(...).[4] 수록곡 赤い戦車(붉은 전차)의 가사가 니혼바시 요코의 만화 <G전장 헤븐즈 도어>를 통해 소개되었고, 한국에도 정발판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려졌다.[5] 2016년 cinra.net과의 인터뷰에서 밝히듯이 3옥타브 반까지 나오던 목소리가 1옥타브 정도 밖에 안나오게 되어 기절하기도 했다고. 2021년에 가진 라이브를 보면 나이를 감안해도 목소리가 굉장히 굵어졌다[6] 참고로 이들은 BiS나 유루메루모 같은 아이돌 그룹과 합작한 적도 있었다. BiS와 낸 앨범에는 토가와의 솔로 곡인 好き好き大好き를 노이즈 록 스타일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7] 국내에선 일명 '낑꽁깡'으로 통하는 부분이다...[8] 참고로 작곡은 YMO의 호소노 하루오미저기 선생님?가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그가 작곡한 다른 곡으로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금구나 마츠다 세이코의 핑크 모차르트 등이 있다(...).[9] 이제는 멘헤라,양산형,지뢰계의 원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10]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25화의 서브타이틀이 인용한 것도 이 책이라고 한다.[11] 원래 토가와가 히라사와의 팬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