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9:46

타이거 우즈/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타이거 우즈

1. 개요2. 어린 시절 ~ 아마추어 천하 무적의 시대3. Before Tiger Appearance4. Tiger Appearance
4.1. 1990년대4.2. 2000년대
4.2.1. 2000년 ~ 2004년4.2.2. 2005년 ~ 2009년4.2.3. 2010년대
4.2.3.1. 2010년 ~ 2011년
4.2.4. 2012년 ~ 2017년4.2.5. 2018년
4.2.5.1. The Match: Tiger vs. Phil
4.3.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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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어린 시절 ~ 아마추어 천하 무적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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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U.S. 아마추어 선수권에서[1]
타이거 ‘Eldrick’ 우즈는 1975년 12월 말,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얼 우즈와 쿨티다 우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두 명의 이복형과 한 명의 이복누나가 있다. 아버지 얼 우즈(1947 ~ 2006)는 야구 선수 출신의 직업 군인으로 골프는 한 자릿수 핸디캡을 가진 아마추어 실력자였다.

타이거는 물건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아동용 골프채를 휘두르는 등 탁월한 골프 감각을 보였다. 얼 우즈는 본인이 재적 중인 Los Alamitos의 Joint Forces Traning Base 근처 군인 골프장을 통해 어린 타이거를 대동하며 그린 및 그린 주변의 숏 게임을 시키며 골프에 익숙하게 하였다.

만 3세가 되기 전, 타이거는 아버지 얼 우즈를 따라 ‘천재 골프 소년’이라는 특집으로 TV 쇼 프로에 나와 본인의 샷도 선 보이고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코미디언인 ‘밥 호프’[2]를 상대로 퍼팅 대결을 하며 유명세를 탔다.
The Mike Douglas Show에 출연한 얼 우즈와 타이거 우즈

어렸을 때부터 발군의 재능을 보인 타이거는 4살부터 레슨 프로인 Rudy Duran의 지도를 받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골프 선수로의 길을 걸었다. 5살 때는 ABC 방송이 진행하는 “놀라운 이야기(That`s Incredible)”에도 ‘골프 신동’으로 소개 되었다. 7살이 되기 전에 이미 Under Age 10 섹션에서 우승하는 등 천재의 모습을 보여 준 타이거는 8살이 되자 80타를 치게 되었다.[3] 11살이 되자 핸디캡 한 자리 수의 아버지 얼이 최선을 다해 플레이를 해야 겨우 이길 정도로 어지간한 아마추어 고수의 레벨로 올라선 타이거는, 12살이 되자 70대 타수도 돌파하는 놀라운 실력을 과시했다. 이 시점부터는 ‘존 안젤모’를 레슨 프로로 모시며 본격적으로 골프의 기본과 기술적인 측면을 연마하였다. 물론 멘탈적인 훈련은 대부분 아버지 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타이거는 13살의 나이에 전국 규모의 토너먼트에 첫 출장하였는데 거기서 아직 무명이던 9살 연상의 존 댈리[4][5]와 같은 조에서 플레이 하게 되었다. 최종 1타차로 패하고 말았으나 4홀이 남은 시점에서는 2타차로 앞설 정도로 ‘천재 소년’ 다운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타이거는 10대 중반, LA에 있는 모 클럽에서 처음으로 존경하는 레전드 골퍼 잭 니클라우스를 만나게 된다[6]. 잭이 클럽 회원을 위한 골프 클리닉을 개최하면서 타이거를 초청했는데 잭을 비롯한 클럽 회원들은 당시 보여 준 타이거의 스윙과 잠재력에 감탄하였다. 이 시점부터 얼 우즈는 타이거가 뛰어 넘을 대상으로 잭 니클라우스로 하여 그를 넘어서는 레전드 프로 골퍼가 되기 위한 플랜을 짜고 그에 맞춰 훈련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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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 얼 우즈와 연습에 몰두 중인 타이거 우즈

애너하임에 위치한 웨스턴 고등학교에 입학한 타이거는, 1991년 15살의 나이로 U.S.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이 되며 동 부문 3연패의 서막을 알렸다. 가장 어린 나이의 주니어 챔피언으로써 이 기록은 20년이 지난 2010년이 되어서야 깨졌을 정도로 당시에는 꽤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92년도에 동 대회의 타이틀을 방어한 타이거 우즈는 생애 첫 PGA 투어에 초청을 받아 참가 하였다. ‘닛산 로스앤젤레스 오픈’이었는데 아무래도 프로의 무대에서 활약하기엔 설 익었는지 컷 탈락의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력 골프 매체인 골프 다이제스트 – 골프 월드 – 골프 위크 등에서 모두 ‘올해의 아마추어 선수’로 선정이 되며 골프계의 높은 기대를 받은 타이거는 이듬 해에도 변함없는 활약으로 U.S. 주니어 아마추어 3연패를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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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부터는 타이거 우즈의 초기 스윙을 다듬어 준 부치 하먼[7]에게 시사를 받기 시작한다.

스윙에 완성도를 더하기 시작한 타이거는, 고교 마지막 해인 1994년 처음 출전한 U.S.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챔피언이 되며 역대 최연소 챔피언 등극과 동시에 역시 동 부문의 3연패 서막을 알렸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타이거는 아이젠하워 트로피 월드 아마추어 골프팀 챔피언십과 1995년 워커컵[8]의 미국팀 멤버로 선정이 되었다. 결과는 아이젠하워에서는 승리, 워커컵에서는 패배했다.

고교 수퍼스타의 대학 진학도 남달랐다. 많은 전통적 대학 골프 강호가 타이거에게 러브콜을 보냈으나 그의 선택은 스탠퍼드 대학교였다. 골프 장학금으로 입학한 타이거는 경제학 전공을 택하였고 중년이 되어서도 절친한 사이로 남은 노타 비게이 3세[9]와 이 시기에 만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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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 절친 노타 비게이와의 한 때

1995년에는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2연패를 달성하였고 생애 처음 4대 메이저 중 하나이자 시즌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에 초대 되었다. 2명 만이 초대 받은 아마추어 골퍼 중 유일하게 컷을 통과한 타이거는 41위를 차지하며 ‘아마추어 참가자 중 컷을 통과한 최고 순위자’에게 수여하는 ‘실버 컵’을 수상했다.[10] 1996년 20세가 된 타이거 우즈는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3연패를 달성하며 더 이상 아마추어 선수로 머물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NCAA Individual 골프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한 타이거는, 그 해 7월에 열린 메이저 대회 The Open Championship에 출전하여 3언더의 성적으로 ‘실버 메달’[11]을 수상했다.

‘천하무적’의 아마추어 골퍼로 명성을 드 높인 타이거는, 프로 입문 전임에도 불구하고 프로 선수들 못지 않은 관심을 받았고 많은 스폰서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특히 나이키의 공동 설립자이자 CEO인 필립 나이트는 “저 청년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골프를 그만 두게 하고 의료 대학원으로 보내도록 해야지.”라고 까지 말하며 강한 집착을 보였을 정도다.

결국 나이키의 열성적인 어프로치로 타이거는 4, 000만달러(한화 약 430억원)라는 전대미문의 금액으로 5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엄청난 금액은 앞으로 타이거가 일궈 나갈 성공의 예언이자 나이키가 보여준 확신의 크기라고 볼 수 있다. NBA의 수퍼스타 마이클 조던의 화려한 선수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나이키는 차세대 대안으로 농구장이 아닌 필드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였다.

1996년 8월 말, 나이키와의 계약을 마친 타이거는 스폰서의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반갑다, 세상아(Hello World)”라는 인사말과 함께 프로 무대에 공식적으로 데뷔함을 만방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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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세상아!(Hello World!)

물론 “세계 1위인 그랙 노먼도 받지 못하는 엄청난 돈을, 아직 투어 카드도 받지 못한 애송이가 받아 내다니 기가 찰 뿐이다”라는 선배 프로 골퍼들의 냉소적인 반응이 뒤따랐고, “빠른 시일 내에 우승할 것”, “우승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라는 타이거의 데뷔 일성은 얼치기의 허풍처럼 느껴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필드에 발을 들이기 전이기에 그랬겠지만…

3. Before Tiger Appearance[12]

영국의 닉 팔도[13]가 호주의 그렉 노먼[14]을 상대로 6타차 역전승을 거둔 1996년의 마스터즈는 그야말로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경기 중 하나로 평가 될 것이다.

그렉 노먼의 붕괴(Norman's Great Collapse)로도 잘 알려진 이 경기는, 정신적인 압박이 인간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을지 보여 준 사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한 불세출의 영웅들의 퇴장이 임박했음을 예측해준 무대이기도 했다. 삼십 대 후반 ~ 사십 대 초반의 연령을 가진, ‘미국 국적이 아닌’ 두 선수는 80년대부터 자웅을 겨루며 세계 1위를 나눠 가진 선수들이며 수많은 명 경기와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들이었으나 세계 골프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 시장에서는 신선함도 화제성도 없는 ‘골동품’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후의 메이저 대회를 제패한 30대 후반의 미국인 3인방, U.S Open 우승자 스티브 존스(38세) – The Open Championship 우승자 톰 레먼(37세) – PGA Championship 우승자 마크 브룩스(35세)가 미국 골프계의 새로운 신성으로 자리 잡을 입장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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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팔도와 그랙 노먼 in 1996 Masters Tournament
그야말로 골프계에는 새로운 영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TV의 시대가 된 뒤 혜성 같이 등장하여 큰 사랑을 받은 아놀드 파머[15]나 그 뒤를 이어 메이저 18승을 포함한 수 많은 실적으로 올 타임 No.1 Golfer로도 칭해지는 잭 니클라우스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스타성’을 가진 슈퍼스타급 존재가 눈에 뜨이지 않던,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임팩트 없는 플레이로 소수의 코어팬들에게만 어필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16]

스페인의 전설적인 골퍼 세베 바예스테로스[17]와 닉 팔도 등이 이끄는 유럽세가 80년대와 90년대 초의 PGA 투어를 제패한 바 있으나 이걸로 스폰서의 후원이 늘거나 팬 층 확대에 영향은 없었다. 미국 골프계는 시장의 확대와 팬 확보를 위해서는 과거 “아놀드 파머 vs 잭 니클라우스”, 90년대의 “닉 팔도 vs 그렉 노먼”의 라이벌리로 이슈 몰이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면 NBA의 마이클 조던과 같이 아예 하나의 슈퍼스타가 등장하여 완벽한 제패를 보여 주며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불러 일으켜야 했는데 그런 압도적인 인물이 등장한 적이 없었던 골프계였기 때문에[18] 실제로 그런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요원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에 아마추어 골프계를 완전히 평정한 타이거 우즈는 “Hello World”라는 인사말과 나이키의 후원을 받으며 필드에 발을 들인다. 1996년 8월의 일이었다.

4. Tiger Appearance[19]

4.1.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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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데뷔 전인 ‘그레이트 밀워키 오픈’ 첫 날 기자들에 둘러 싸인 타이거
타이거 우즈는 스포츠계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혁명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골프를 바라 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는 마이클 조던과 같이 종목을 초월한 선수가 될 것이다.
- 필립 햄프슨 “필” 나이트, 나이키 설립자 겸 CEO

만민의 호평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등장한 타이거 우즈는 첫 경기인 ‘그레이트 밀워키 오픈’에서 공동 60위를 기록하며 2, 500달러 남짓의 상금을 획득했다. 컷 탈락만 안해도 잘했다 할 만한 프로 데뷔 전이었지만 타이거 이기에 아쉬울 수도 있을 법한 등수. 하지만 첫 무대에서 336야드 드라이버샷을 보여 주더니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홀인원까지 기록하며 그를 향한 팬들의 기대감에 불을 당겨 주었다. 파3 14번 홀에서 그린 중앙에 놓인 핀을 향해 쏜 샷은 2번의 바운드 후 홀 안으로 들어갔고, 타이거의 유명한 ‘어퍼컷’ 세리머니와 함께 주변은 환호의 물결. 그린 위로 올라가 실제 들어갔는지 슬쩍 홀 안을 살펴 보는 타이거를 향해 방송 아나운서는 “Yeah ~ That`s Yours.”라는 말로 피드백 해주었다.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타이거 효과는 시작 되었다. 시청률이 오르고, 갤러리 숫자가 늘었으며, 티켓 판매율도 함께 오르며 대회를 치른 해당 지역의 경제에 미친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되자 타이거에 대한 기대감과 그에 따른 화제성은 고조 되었다.

그리고, 투어 참전 5번째 대회인 ‘라스베이거스 인비테이셔널’에서 투어 첫 승을 거머 쥐며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 보던 많은 사람들(팬, 동료, 미디어 등)에게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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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데뷔 5번째 경기 만에 첫 우승을 손에 넣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64타를 치며 데이비스 러브 3세[20][21]와 공동 선두로 경기를 마친 뒤, 플레이오프 2번째 홀에서 승리를 확정 지으며 감격의 프로 첫 우승을 거두었다. 빠른 시일 내에 첫 승을 올린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인 시즌 마지막 대회이자 7번째 출전 경기였던 ‘월트 디즈니 월드/올즈모빌 클래식’에서도 2라운드 63타 등의 대활약으로 통합 21언더파를 기록, 페인 스튜어트를 꺾고 프로 2승째를 손에 넣었다.

96년 8월에 데뷔해서 겨우 7경기 뛰었음에도 PGA Tour 신인왕 확정. 아마추어 선수로써의 활약 – 프로 데뷔를 둘러 싼 화제성 만발 – 성공적인 신인 시즌 등의 이슈로 1996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22]가 선정한 ‘올해의 스포츠맨’에도 선정 되었다.

1997년은 그야말로 전 지구적 슈퍼스타 ‘타이거 우즈’의 탄생을 알린 해.

1월에 있은 메르세데스-벤츠 챔피언십에서 배테랑 골퍼 톰 레먼(미국)과 함께 공동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파 3에서 티샷이 헤저드에 빠진 상대에게 핀 20cm에 붙는 날카로운 아이언샷으로 강펀치를 날리며 프로 통산 3승째를 거두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상대가 위기에 빠진 상태여서 느슨해질 법도 하지만 엄청난 집중력으로 홀인원에 가까운 샷을 성공시킨 타이거의 집념이 빛나는 순간. 이제 모든 관심은 타이거가 프로 데뷔 후 처음 맞이하는 메이저 대회인 Masters Tournament가 열릴 4월로 향하였다.

전년도 실버 컵 수상자 자격으로, 전년도 챔피언인 닉 팔도와 한 조가 되어 Masters Tournament에 나선 타이거는 첫 번째 홀 드라이버 티샷부터 페어웨이를 크게 벗어 나는 등 프로 데뷔 첫 메이저 대회라는 부담감을 벗어 내지 못한 채 첫 9홀에서는 4오버파의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후반 9개 홀에서 이글 하나를 포함한 6언더를 치며 데뷔 첫 라운드를 ‘온탕냉탕’ 골프로 마무리 지었지만 대회 첫 날의 후반에 보여 준 타이거의 능숙한 플레이는 “아, 이게 오거스타구나. 별 것 아니네” 라는 의미였는지, 이튿날 부터는 그야말로 펄펄 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2라운드 6언더 - 3라운드 7언더라는 성적은 이를 증명해 보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천재 골퍼에 의해 맹폭격을 당하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미에 그리고 세계 골프계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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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골프 영웅이자 유러피언 투어에서 31승이나 거둔 유럽 챔피언 ‘콜린 몽고메리’는 2라운드가 끝난 뒤 프레스 인터뷰에서 이틀에 거쳐 맹타를 치고 있던 타이거 우즈를 향해 “잘하고는 있지만, 경험의 부족이 (우승을 놓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그에 비해 나는 메이저 대회 경험이 많다.”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였다.

익일의 골프 파트너에게서 이와 같은 발언을 들은 타이거는 훗날, “그 말은 확실히 동기 부여가 되었다. 그가 나 보다 메이저 경험이 많은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나 나나 메이저 우승 경험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둘 다 백지 상태에서 출발인거지, 뭐’라는 생각으로 시합에 임했다.”라고 밝힌다.

상대의 발언에 자극을 받은 타이거는 완전한 제압을 원했고 '승부욕 게이지' 만땅의 상태에서 콜린을 가혹하게 밀어 부쳤다. 그 결과는 타이거 65타, 그리고 콜린 74타로, 완전히 상대의 영혼까지 탈곡한 수준으로 봐야 할 정도의 격차였다.

결국 콜린 몽고메리는 3라운드 후 프레스 인터뷰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발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짧게 말할께요…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인간인데 인간인 이상 타이거를 이번 대회에서 넘어설 수는 없을 거에요. 그건 불가능 해요.”

파이널 라운드에 나서게 된 타이거의 3라운드까지의 성적은 총 15언더로, 파이널 동반자가 될 코스탄티노 로카(이탈리아)와는 무려 9타차 였다.

이 후에도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주게 될 ‘레드 & 블랙 패션’으로 오거스타의 파이널 라운드에 나선 타이거는 여전히 당당한 플레이로 코스 곳곳을 농락하며 3언더를 추가로 적립, 결국 총 18언더라는 대기록으로 우승을 거둔다. 2위 톰 카이트(미국)와는 무려 12언더라는 큰 차이였으며, 이 기념비적인 승리로 인해 타이거는 ‘골프’라는 스포츠 종목을 넘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대스타의 대열에 들어 서게 된다.

파5를 파4처럼, 파4를 파3처럼 플레이 하는 타이거의 플레이는 대회 내내 거침이 없었다. 파5에서 드라이버 티샷을 날린 뒤 숏 아이언으로 세컨 샷을 하여 그린에 올리는 것은 라운드가 거듭되면서 매우 평범한 플레이로 보일 정도로 잦았고[23] 파4에서도 가장 길게 잡은 아이언이 7번 아이언이었을 정도니 다른 선수들과의 퍼포먼스 차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당연하게도 타이거는 대회 통틀어 샷 거리가 가장 긴 선수였는데, 2위와의 드라이버 샷 거리 격차는 25야드(약 23m)나 되었다. 멀리만 친 것이 아니었다. 대회 통틀어 쓰리 퍼팅[24]이 없었을 정도로 '유리 그린'으로 유명한 오거스타의 그린 위에서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오거스타 내셔널이 자랑하는 아멘코너[25]를 4라운드 내내 확실히 공략하며 총 7언더를 기록, 당시 기준 Masters Tournament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대회 내내 보여준 퍼포먼스의 수준은 아마추어 대회에 나선 프로의 모습 그 자체였다.

1라운드의 파트너이자 12오버파로 컷 탈락을 한 전년도 우승자 닉 팔도가, 우승자 타이거에게 그린 자켓을 입혀 주는 장면은 ‘한 시대의 끝’ 과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린 골프 역사의 기념비적인 순간이자 천재 골퍼가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영광에 대한 통과 의례의 한 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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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종말, 그리고 또 다른 시대의 시작

타이거의, 아니 골프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97년 Masters Tournament는 이 외에도 다양한 화제 거리를 낳았다.

1981년 미국에 케이블TV 시대가 열리면서 스포츠 중계가 대폭 확대된 이래 36년 동안 가장 높았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일요일의 시청률은 14.1%로 역대 최고였다(물론 지금도 최고 기록). 이 대회를 TV로 지켜본 시청자는 골프 대회 사상 최대인 4400만 명이 넘은 것으로 집계 되었다. 코스 밖에서는 크고 작은 비극이 벌어졌다. 대회장 입장권을 판매하는 가격이 장당 7, 000달러까지 치솟자 거물들에게 약속했던 입장권 70장을 구할 수 없었던 현지 사업가 앨런 F. 콜드웰 3세는 12구경 산탄총으로 자살했다.[26]

타이거와 얼은 그날 밤 축하 파티를 벌이며 지금까지의 고생을 격려 하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이거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한 얼이 잠시 후 타이거를 찾았을 때 21살의 어린 아들은 그린 자켓을 꼭 껴 안은 채 자고 있었다고 한다.

Masters Tournament의 감동이 끝난 지 한달도 되지 않은 5월 ‘GTE 바이런 넬슨 골프 클래식’에서 17언더의 성적으로 또 다시 우승을 거둔 타이거는 이 후 1승을 더 추가, 총 4승을 거두며 97년 시즌을 마쳤다. 200만달러의 상금왕으로 커리어 첫 상금왕을 비롯, PGA Player of the Year와 PGA Tour Player of the Year를 휩쓸었고 AP 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 스포츠 선수’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세계 1위에 랭크된 것은 덤.

긴장하거나 심리적으로 위기가 닥치면 훅[27] 성 구질이 나와 고생을 했던 타이거는 더욱 안정적인 스윙을 찾기 위해 부치 하먼과 스윙 교정에 들어간다.

1998년에 총 21개 대회에 출전한 타이거는, 1개 대회에서는 컷 탈락 하였지만 대부분은 TOP25 안에 들며 여전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 5월에 열린 ‘벨 사우스 오픈’에서 17언더를 기록하며 우승하였으나 그것은 해당 년도에 기록한 단 하나의 승리였다. 4대 메이저에서도 세 번의 TOP10을 기록했지만 우승은 이루지 못하는 등 평범한 시즌을 보냈다. 타이거이기에 ‘슬럼프’로 받아 들여졌던 98 시즌은 총 180만 달러의 상금으로 투어 상금 4위에 이름을 올린다[28].

하지만 원하는 스윙이 점점 완성되고 본인의 골프에 자신감을 얻은 타이거는, 99 시즌 중반부터 투어를 다시 지배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즌 초반엔 2월에 열린 ‘뷰익 챔피언십’에서 22언더로 7개월 만의 우승을 거두긴 했어도 세계 1위의 타이틀을 같은 나이키 스폰서 프로인 데이비드 듀발(미국)에게 넘겨 주는 등 97년 Masters Tournament에서 보여 준 센세이셔널함에 비교될 바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 해 6월 초에 열린 ‘메모리얼 토너먼트’[29]에서 15언더의 성적으로 비제이 싱(피지)을 꺾고 우승한 타이거는, ‘페인 스튜어트’[30]의 감동적인 우승으로 막을 내린 1999년 U.S. Open에서도 3위를 차지하는 등 안정된 골프를 보여 주기 시작했고 이 시점부터 폭발적인 드라이버 – 날카로운 아이언 – 안정된 숏 게임과 퍼팅 실력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투어의 제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그 해 6월부터 11월까지 짧은 기간 동안 무려 7승을 올린 것. 이 기간에는 생애 2번째 메이저 타이틀인 ‘PGA Championship’과 한 시즌을 정리하는 이벤트인 투어 챔피언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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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PGA Championship에서 생애 두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을 달성

밀레니엄 시대를 앞둔 세기말의 타이거는 1900년대 골프 역사의 피니쉬를 장식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훌륭한 퍼포먼스와 성적으로 마무리 하였고, 그의 압도적인 플레이는 새 시대를 맞이하는 모든 골프팬들의 기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자세한 내용은 바로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타이거는 밀레니엄 시작과 함께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 넘는 놀라운 업적을 만들어 내며 '골프'라는 종목을 초월한 전 세계적인 수퍼스타의 길에 들어선다.

4.2. 2000년대

4.2.1. 2000년 ~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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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U.S. Open에서 압도적인 우승을 거두다. ‘Any Questions?’

1월의 ‘메르세데스 챔피언십’과 2월에 열리는 ‘AT&T 페블비치 내셔널 프로암’, 3월의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에서 차례차례 우승을 거두며 월 1승씩을 적립한 타이거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4월의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에서는 5위로 선전한 타이거는, ‘메모리얼 토너먼트’에서 커리어 2승째를 거둔 뒤 페블비치에서 열린 U.S. Open을 맞이 한다. 그리고 역대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이 대회를 거머쥐며 메이저 3개 대회째를 손에 넣게 된다.

이 대회의 최종 라운드의 스코어는 오로지 타이거를 위한, 타이거에 의한 대회였음을 보여준다. 100회째를 맞이한 U.S. Open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충격을 전한 해당 대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비교되면 너무 처참(!)하므로 5위 이하 선수의 명단은 쓰지 않았다.
순위이름국적스코어결과
1타이거 우즈미국65-69-71-67=272−12
T2미구엘 앙헬 히메네즈스페인66-74-76-71=287+3
T2어니 엘스[31]남아공74-73-68-72=287+3
4존 휴스턴미국67-75-76-70=288+4
T5리 웨스트우드영국71-71-76-71=289+5
T5파드리그 헤링턴아일랜드73-71-72-73=289+5

무려 2위와 15타차 우승은 U.S. Open은 물론이고, 메이저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위대한 기록이다. 2011년 북아일랜드의 신성 로리 매킬로이가 16언더로 우승하기까지 U.S. Open 최저 언더파 기록이기도 했다. 라이벌이자 타이거 덕분에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2등’인 필 미켈슨은, 훗날 골프 관련 토크쇼에서 타이거 우즈와의 라이벌리[32]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2000년 U.S. Open의 타이거 우즈야 말로 골프의 정수이자 위대한 퍼포먼스”였다고 칭송한 바 있다.

위대한 퍼포먼스를 보인 타이거의 Next Step은 골프의 성지 영국의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리는 The Open Championship이었다. 이 대회를 우승할 경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최연소로 달성하게 되는 타이거는 여러모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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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The Open Championship. 골프의 성지에서 티샷 중인 골프 황제.’

워낙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리한 U.S. Open의 화제가 잠잠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주목이 집중되었던 그 경기에서, 타이거는 또 다시 스스로의 위대함을 증명해 내었다. 나흘간 흔들리지 않는 골프로 19언더를 치며 2위 그룹을 8타차로 제치는 완벽한 우승을 거머쥔 것.

매스컴의 과다한 주목과 지나칠 정도로 과열된 팬들의 관심, 그리고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던 스스로의 흥분을 침착히 제어하며 냉정하게 필드를 점령한 타이거는, 고작 24살의 나이였지만 모두가 존경할 수 밖에 없는 뜨거운 승부욕과 냉철한 플레이로 골프 역사의 신화를 새로 쓰고 있었다. 거기에 기존 최연소 그랜드 슬래머였던 잭 니클라우스의 26세를 2살이나 앞당기면서 앞으로 이 젊은이가 역대 최고의 골퍼와 비교되며 어떤 커리어를 쌓아 나갈지 또한 최대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했다.

U.S. Open과 The Open Championship을 연거푸 우승하면서 전대 미문의 우월성을 선 보인 천재 골퍼의 다음 시선에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인 PGA Championship이 있었다. 심지어 앞의 2개 대회와 다르게 이 대회는 타이거가 전년도 우승자로써 방어전을 치르는 대회였기에 관심이 높았다.

발할라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타이거는 첫 날 6언더를 치며 1위로 올라서 메이저 3개 대회 연속 우승에의 가능성을 높였다. 이 기세로 파이널 라운드까지 1위를 지키긴 했으나 복병이 있었다. 바로 노장 ‘밥 메이’(미국)이었다. 이 대회 전까지 PGA 투어에서 1승도 못 거두고 1년 전에 유러피언 투어에서 프로 골퍼로써 첫 우승을 거둔 무명의 프로 골퍼 밥 메이는, 2~4라운드에서 연속으로 66타를 치는 맹타로 파이널 라운드에서 타이거 우즈와 18언더로 공동 1위를 차지하며 플레이 오프에 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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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PGA Championship. 플레이오프 첫 홀에서 클러치 펏을 성공시키는 타이거.

3개 홀를 치르어 총 스코어가 낮은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PGA Championship 플레이오프 룰에 따라 타이거와 밥 메이는 그야말로 피가 튀는 경기를 했다. 첫 홀에서 롱 퍼팅을 성공시킨 타이거가 나머지 2개홀을 파로 세이브 하며 전 홀에서 파만 기록한 밥 메이를 꺾고 우승을 확정, 3개 대회 메이저 대회 제패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는 벤 호건이 Masters Tournament – U.S. Open – The Open Championship을 연거푸 제패한 1953년 이래 처음 달성된 대기록이었다.[33]

PGA Championship이 끝난 뒤 1주일 뒤 열린 NEC Invitational에서도 우승한 타이거는, 보름 뒤 열린 Bell Canadian Open에서도 훌륭한 퍼포먼스로 시즌 9승째, 본인의 통산 24승째를 결정 지었다. 타이거의 All Time 샷 중 하나로 평가되는 파이널 라운드 18번 홀의 세컨드 샷이 이 때 나왔다. 18번 홀의 티샷이 벙커에 빠진 타이거는 1타차로 2위에 앞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장전을 가지 않으려면 뭔가 한방이 필요했다. 216야드가 남은 상황에서 타이거는 6번 아이언을 들어 온 힘을 다해 내려쳤고 그 공은 해저드를 건너 그린 앞 러프에 떨어졌다. 홀과는 겨우 5m 거리. 투 퍼트로 간단히 우승을 손에 넣었다.

2000년 시즌을 마친 타이거의 각 부문별 스탯은 다음과 같았다. GOAT Season의 위엄을 감상하도록 하자.
항목Stat순위
드라이빙 거리298.0야드[34]2위[35][36]
페어웨이 적중률71.2%54위[37]
토털 드라이빙[38] - 1위
그린 적중률75.2%1위
샌드 세이브[39]57.3%51위
평균 스코어67.79타1위
버디 평균[40]4.921위
메이저 대회 우승3회1위

위의 내용은 대표적인 것이고, 위 내용 포함 PGA 정리한 총 36개의 항목 중 24개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니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다. 최고의 퍼포먼스로 한 시즌을 마무리 지은 타이거를 향한 세계 골프팬들의 관심은 2001년의 첫 번째 메이저, Masters Tournament였다.

평생 한번 하기도 어렵다는 메이저 대회 우승을, 4개 대회 연속으로 이루어 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기대가 공존하는 와중에도 타이거는 묵묵히 본인의 플레이로 차곡차곡 승리를 쌓아 갔다. 2001년의 타이거는 시즌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를 앞두고 2승을 거두었는데 이 중 하나는 타이거의 All Time급 퍼팅 퍼포먼스를 보여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41]’이었다.

해당 플레이는 타이거 우즈의 베스트 샷 컴필레이션 영상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들어가는 영상이라 아래의 항목 중 타이거의 TOP 10, 그 중에서도 PGA TOP 10에서 볼 수 있으니 참고.

‘제 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 후,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2001년의 Masters Tournament가 막을 올렸다.

첫 날 2언더파를 치며 예열을 한 타이거는, 둘째 날부터 먹이감을 놓지 않는 강한 승부 근성의 호랑이 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오거스타에서의 첫 우승 이후, 타이거에 유린 당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측은 1999년 대회부터 전체 전장을 약간 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거는 그에 아랑곳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2라운드 6언더파로 공동 2위에 오른 타이거는 3라운드에서 4언더를 추가하며 토탈 12언더파로 1위인 상태로 최종일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라운드의 파트너는 타이거에 1타차 뒤져 있는 필 미켈슨.

톱 스타 두 명의 결전이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예상보다 심심했다. 2타를 줄이는데 그친 미켈슨을 상대로 타이거는 경기 내내 순항하며 4언더파를 친 것. 우승을 눈 앞에 둔 타이거는 Uphill로 구성된 18번홀에서 330야드의 드라이버를 친 뒤, 웨지로 5m 내에 붙여 버디로 대회를 끝마쳤다. 그리고 이를 통해 U.S. Open – The Open Championship – PGA Championship – Masters Tournament의 순으로 메이저 4개 대회를 연속으로 제패하는, 속칭 ‘타이거 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마스터스가 창설된 시점 이후로 지금껏 골프계에서는 단 한번도 캘린더 이어 슬램이 나온 적이 없다. 즉, 한 해의 메이저 대회를 싹쓸이 한 사례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톱 시드의 선수가 유리하다는 테니스에서도 남자는 호주 출신의 ‘로드 레이버’ 밖에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고 [42], 메이저 4개 대회를 2년에 걸쳐 연속으로 쟁취한 사례 조차 여자 선수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세레나 윌리엄스, 남자로는 노박 조코비치 밖에 없다. 즉, 골프에서는 지금껏 단 한번도 없다. 잭 니클라우스조차 한 해 2번 이상 메이저를 차지한 바 없고, 오늘 날의 스윙을 정립시켰다고 평가 받는 ‘위대한’ 벤 호건 만이 앞서 언급했던 1953년의 3연속 메이저 우승을 달성했을 뿐이다.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우며 유례없는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 타이거의 라이벌은 그 시점에선 단연코 없었으며, 벤 호건이나 잭 니클라우스를 뛰어 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을 만큼 위대한 플레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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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슬램 달성의 순간

여담이지만, 타이거의 기념비적인 우승으로 소폭 전장을 늘였던 본 대회 이후 오거스타 내셔널은 개장 68년 만인 2002년 315m를 추가적으로 늘였고, 이 후 2011년에 다시 증축 작업을 하여 지금은 6, 716m가 되었다. 증축에 증축을 더해도 타이거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쳐 내는 엄청난 비거리 때문에 증축에 한계를 느낀 골프 협회 측은, 이제 볼의 반발력을 제어하려는 부분에 대해서 논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타이거의 등장이 골프라는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타이거 슬램’ 달성 뒤 도전한 2001년 U.S. Open에서 타이거는 공동 12위로 대회를 마치며 연속 메이저 우승의 기록이 끊기고 말았다. 이 후의 2개 메이저에서도 20위권을 기록하며 더 이상의 메이저 우승은 추가 하지 못했으나 일반 대회에서 2승을 더 하며 99년부터 이어 온 상금왕 타이틀을 3년 연속으로 거머 쥐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세계 랭킹 및 올해의 선수 부분의 1위도 굳건히 지켰다.

2002년에 들어와 3월에 있은 ‘베이힐 인비테이셔널’[44]을 시작으로 우승 사냥에 나선 타이거는, 시즌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를 통해 1년 만의 메이저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전년도 보다 315m로 전장이 늘어난 만큼 장타자인 타이거에게도 어느 정도는 부담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었으나 역시나 타이거는 그런 예측을 보란 듯이 무너뜨린다. 1라운드 2언더 - 2라운드 3언더 등 총 5언더로 예선을 통과한 타이거는 3라운드에서도 6언더를 몰아치며 남아공의 스타 골퍼 중 하나인 레티프 구센[45]을 맞아 파이널 라운드를 맞이한다. 2001년의 Masters Tournament 챔피언 vs U.S. Open 챔피언의 대결은 많은 기대를 불렀으나, 타이거의 레드 & 블랙이 보여 주는 강렬함과 그에 못지 않은 압도적인 퍼포먼스 앞에 레티프 구센은 2오버파에 그쳤고 타이거는 총 12언더의 성적으로 통산 7번째 메이저 우승 및 Masters Tournament 3회째 우승을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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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연속 우승으로 위원회 측이 직접 그린 재킷을 입혀 주다[46]

통산 7회의 메이저 타이틀은 해리 바든(영국)[47] – 진 사라젠[48] – 바비 존스[49] – 아놀드 파머(이상 미국)라는 굵직굵직한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업적으로, 고작 26살에 지나지 않은 청년이 이룬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엄청난 성과였다.

2달 후 뉴욕의 Bethpage에서 제102회 U.S. Open이 열렸다. 2000년의 압도적 우승 이후 이듬해 공동 12위에 그쳤던 한을 풀려는 듯, 타이거는 1라운드부터 3언더로 1위에 나서며 대회 내내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2위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과 4타차의 여유를 둔, 5언더로 맞이한 파이널 라운드에서도 타이거는 퍼팅이 난조를 보이는 와중에도 크게 무너지지 않으며 경기를 주도하였고, 2타를 잃긴 했으나 결국 3언더의 성적으로 메이저 2개 대회 연속 우승을 달성하였다.

통산 2번째 U.S. Open 우승이자 8회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타이거는, 이로써 대선배인 톰 왓슨(미국)[50]과 통산 메이저 우승 회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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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U.S. Open 타이틀을 쟁취하다

모두의 기대 속에 맞이한 7월의 The Open Championship. 장소는 영국의 뮤어필드로 1892년 첫 대회를 개최한 뒤 이 시점에서 15회째 개최를 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The Open Championship을 개최하는 대표적인 클럽이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타이거는 ‘타이거 슬램’이 아닌, 진정한 ‘캘린더 그랜드 슬램’에 한발 다가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스컴의 집중도는 매우 컸다. 엄청난 수의 기자와 방송 카메라가 타이거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다녔다. 모두가 기대를 하면 언제나 그 이상의 성과를 내곤 했던 타이거이기에 ‘이번에도?’ 하는 기대감이 높았지만, 이러한 타이거의 지나친 독주에 질투가 났던지 이번엔 ‘하늘’이 직접 나섰다.

파 71로 치러진 대회에서 첫 날 1언더를 친 타이거는, 둘째날 3언더를 더하며 총 4언더파로 1위 어니 엘스(남아공)에 겨우 2타차 뒤진 공동 9위였다. 이 정도 타수는 하루 만에 급격히 줄이고 상대를 제쳐 버리는 타이거였기에 골프 팬들의 기대는 최고조로 올라 갔는데, 여기서 어처구니 없는 3라운드 ‘하늘의 장난’이 시작된다.

타이거가 상위권 선수로서 오후에 경기에 나섰을 때[51] 이미 날씨는 평범하게 골프나 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비만 내려도 까칠한(?) 골프장인데 예정에도 없던 태풍이 불기 시작한 것. 가만이 있는 볼이 바람에 의해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중에서 바람이 회오리를 쳤고 비도 덩달아 세차게 내렸다. 타이거는 빗속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번번히 칠 때 마다 공이 제멋대로 휘어 갈대밭에 쳐 박히곤 했으니 미치고 펄펄 뛸 노릇 이었을 것[52].

마지막 18홀의 버디펏 조차 홀을 핥고 나오면서 허무한 표정을 지은 타이거는, 경기가 끝나고 라운드 파트너이자 절친인 마크 오메라와 힘 없는 포옹으로 서로를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이 날 하루만 11 오버파를 치며 81타를 기록, 총 6오버파의 성적이 되며 급격히 하위권으로 떨어진 타이거는 마지막 날 6언더파를 치며 최선을 다했지만 전 날의 악몽을 메울 순 없었고 결국 최종 공동 28위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다.[53]
Tiger Woods, Shoots 81

충격적인 The Open Championship의 결과를 뒤로 하고 일상에 복귀한 타이거는 여전한 경기력으로 8, 9월에 각각 1승씩을 챙겼고, 결국 2002년에도 상금왕 – 올해의 선수상 – 최저 타수상 등을 휩쓸며 변함없는 위치를 확인하였다.

2003년은 타이거에게 있어 다소 평범했던 시즌이었다.

WGC[54] 대회인 ‘악센츄어 매치 플레이 챔피언십’에서 데이비드 톰스(미국)을 꺾고 커리어 첫 매치 플레이[55] 챔피언이 되었으며 통산 4번째 베이힐 인비테이셔널 우승을 포함 5승을 거두며 또 다시 올해의 선수상과 최저 타수상을 차지했다.

다만, 4승을 거두고 더 많은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 비제이 싱(피지)에게 4년 연속으로 달성 중이던 상금왕 타이틀을 내주었으며 무엇보다 메이저 대회 무관으로 그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The Open Championship에서만 4위였을 뿐 나머지 대회는 TOP 10 진입조차 실패.

타이거에겐 변화가 필요했다. 그 변화의 핵심은 바로 ‘스윙’이었다. 1999년 이후 타이거는, 업라이트한 백 스윙과 빠르고 강한 엉덩이의 회전력, 그리고 스윙 이후 무릎을 강하게 펴주며 압력을 지탱함으로써 더 먼 거리를 날렸고 탁월한 숏 게임이 함께 하며 투어를 완전히 지배하였지만 이런 방식의 스윙은 조금씩 몸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무릎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타이거에게는 스윙의 전반적인 변화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자신 만의 스윙을 ‘소유’하길 원했다. 타이밍에 영향을 덜 받는 스윙,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스윙, 미스를 해도 크게 위험에 빠지지 않는 계산 가능한 스윙을 갖고 싶어했다.

이에 비해, 스윙 코치인 부치 하먼은 마이너한 틀에서의 작은 변화로 스윙을 보완하며 다듬길 원했고 이는 시즌 내내 스윙 철학에 대해 두 사람이 부딪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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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의 스윙을 점검 중인 부치 하먼

이미 정점에 오른 타이거는 스윙 변화를 통해 한 단계 더 오르길 바랬고, 예전부터 알려 주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성급하게 진도를 나가는 타이거가 조심스러웠던 부치 하먼의 결별은 예상 가능한 수순이었다.

절친인 선배 마크 오메라를 통해 스윙 코치 행크 헤이니를 소개 받은 타이거는, 2003년 중에도 비밀리에 행크 헤이니를 통해 스윙에 대한 조언을 받았고 결국 새로운 시즌 시작과 함께 부치 하먼과 결별하며 행크 헤이니를 스윙 코치로 영입하였다. 골퍼의 스윙 변경은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한 선수의 선수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선택이다. 스윙 변경으로 인해 커리어를 완전히 망쳐 버렸던 사례가 한 둘이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과 팬들은 타이거의 새로운 여정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었다. 오직 타이거 만을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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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부터)치핑 연습 중인 타이거와 행크 헤이니, 그리고 캐디인 스티브 윌리암스.

무릎에의 부담을 최소화 하고, 업라이트 했던 스윙면을 플랫하게 다듬어 간 타이거의 스윙은 조금씩 몸이 이해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인에게 익숙함을 느꼈다. 데이비스 러브 3세를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WGC ‘악센츄어 매치 플레이 챔피언십’에서의 승리는 2004년의 유일한 승리였고, 이 과정에서 세계 1위의 자리도 264주 만에 내주게 된다. 호랑이 없는 곳에서 투어를 완전히 손에 넣었던 '비제이 싱'이 시즌 9승(메이저 1승 포함)을 차지하며 그 간 타이거가 누려 왔던 영광을 모조리 가져 갔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건지지 못했지만 타이거의 2004년은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와의 정신적인 교감과 멘탈 강화를 위해 4일간 실시했던 군사 훈련[56], 프로 골퍼로서 인생의 도박이라 평가할 수 있는 스윙 변경,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할 인생의 반려자와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골프 황제의 마음을 앗아간 상대의 이름은 스웨덴 출신의 엘린 노르데그린(1980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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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경기를 관람하러 온 타이거 우즈 부부

타이거는 2001년 The Open Championship 이 개최된 영국에서 동료 골퍼인 예스퍼 파네빅(스웨덴)의 보모로 있던 엘린을 처음으로 만났다. 모델 출신 금발의 미녀에게 첫 눈에 반한 타이거는, 오랜 기간 구애를 하여 결국 그녀와 연인이 되었고 두 사람은 결국 2004년 10월 바베이도스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 결혼식을 치렀다.

그간 홀로 세상을 지배 해 온 골프의 황제에게는, 많은 희생과 우려 속에 택한 변화가 성공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4.2.2. 2005년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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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Masters Tournament 우승 후, 포효하는 타이거

철저한 플랜으로 2005 시즌을 준비한 타이거는 1월에 참가한 첫 대회인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16언더파의 성적으로 2위 그룹을 3타차로 따돌리며 우승을 달성했다. 해당 대회 3번째 우승이자 매치 플레이를 제외한 일반 스트로크 대회로는 15개월 만의 우승. 기세를 탄 타이거는 3월에 열린 ‘Ford Championship at Doral’에서 필 미켈슨과의 혈전 끝에 1타차로 제치며 시즌 2번째 승리를 가져 왔다. 특히 1타차 접전이던 18번 홀에서 ‘숏 게임’의 황제 필의 버디 트라이 칩샷이 홀을 핥고 나오면서 연장전이 무산된 씬은 백미.

그리고 실로 3년 만의 메이저 타이틀 도전이 될,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이자 타이거에게는 각별한 Masters Tournament가 열린다.

2002년 U.S. Open 이후 10개의 메이저 대회 동안 타이거는 추가 승수를 올리지 못했다. 2위는 한번 뿐, TOP 10에 들지 못한 것도 7번일 정도였다. 빠른 기세로 잭 니클라우스의 기록에 근접해 가다가 정체에 이르니 여기 저기서 말도 많았다. 그 상황에서 스윙코치를 교체하고, 전면적으로 스윙을 바꾸고, 결혼도 했으니 호사가들 사이에서 논란은 그칠 세가 없었다. 일반 대회에서 우승하는 타이거는 더 이상 감흥을 주지 못했다. 메이저에서의 한 방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더욱이 Masters Tournament는 오늘 날(당시 기준) 타이거를 있게 해준 대회였던 만큼 ‘제 2기 타이거 우즈’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첫 날은 2오버파를 쳤다. 5언더파를 치며 단독 선두에 나선 크리스 디마르코(미국)[57]와는 7타차였다. 2라운드에서 심기 일전하여 6언더파를 몰아치며 4언더파로 상위권에 올라왔으나 디마르코가 이 날도 5언더파를 적립, 총 10언더파로 단독 1위를 질주하며 타이거와의 격차를 6타차로 유지하였다.

그래도 타이거는 타이거. 3라운드에서 불꽃과 같이 7언더파를 몰아치며 그 날 2오버파를 기록한 디마르코를 오히려 3타차로 제치고 단독 1위에 나선 것. 3년 만의 메이저 우승에 성큼 다가선 타이거의 경기력에 다시금 세계 골프팬들의 관심이 집중 되었다.

최종 라운드에서 맞붙은 타이거와 디마르코는 한치 양보 없는 경기를 선보였다. 3타 차의 여유가 있었으나 디마르코가 힘을 내며 경기 내내 타이거를 압박하였고, 경기 전체의 향방을 가른 파3 16번홀에 도착했을 때 타이거와 디마르코는 13언더 vs 12언더로 1타차였다. 누군가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타이거가 친 티샷은 그린과 그린 좌측의 해저드를 넘어 러프 쪽으로 빠졌다. 반면에 디마르코의 샷은 온그린. 우측에서 좌측으로 심하게 경사진 홀이었기 때문에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한 홀이고(심지어 경사의 끝엔 벙커가 있고, 그 벙커를 넘어서면 해저드가 있다) 타이거 입장에서는 칩샷으로 최대한 홀에 붙여 파 세이브로 한 숨 돌리는 전략이 가장 주요한 상황이었다.

2분간 면밀히 그린과 홀 주변을 캐디와 구석구석 살펴 본 타이거는, 캐디 스티브에게 “요 앞에 보이는 동전 모양 자국으로 볼을 떨어뜨리면 공이 홀 쪽으로 타고 갈 수 있을까?”라고 물어 봤고, 스티브는 “아마도 그럴 것 같다”라고 답을 했다.[58] 목표물을 정확히 강타하고 두번 더 그린에서 튄 공은 회전이 멈춘 뒤 홀 방향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너무도 정확한 흐름에 방송 캐스터도 “Oh My Godness”라고 하며 기대를 하였고, 공은 또르르 굴러가 홀 앞에 정확히 선다. 그 시점에서 볼에 새겨진 나이키의 로고가 살짝 보인 뒤 그대로 홀로 쏙 들어간다. 그야말로 완벽한 샷. 몰아 치는 환호성 속에 디마르코는 애써 침착 표정을 유지 했어야 할 정도였고, 결국 버디 트라이가 실패하며 2타차로 벌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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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었어, 넣었다구!” 하이파이브 하는 타이거와 스티브
The Master 역사에 길이 남을 ‘The Shot'
‘The Shot'의 실제 방영분

너무도 대단한 샷을 해서 흥분한 걸까.

타이거는 그 답지 않게 샷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17, 18번홀에서 연거푸 보기를 한다. 덕분에 파로 끈덕지게 버틴 디마르코는 연장전에서 다시금 전의를 다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장전으로 들어가면서 정신을 재무장한 타이거는 첫 번째 플레이오프 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며 3년 만의 메이저대회 우승을 쟁취해낸다.

타이거의 우승으로 PGA 투어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16번 홀의 기적 같은 샷은 한 동안 여기저기서 노출이 되며 명성을 떨쳤다. 타이거가 칩샷한 공이 오거스타의 16번 홀을 가로지르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7초. 홀에 들어가기 전까지 볼을 비추던 방송사 카메라에는 나이키의 로고가 또렷이 찍힌 채 계속 방영이 되었다. 심지어 들어가냐 마냐의 상황이 되었을 땐 클로즈업까지 되었다.

그야 말로 100만번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순간. 이 샷의 장면은 당일 방송 분 외에 엄청나게 노출이 되었고, 지금도 이렇게 유투브 등을 통해 볼 수 있으니 브랜드 광고 효과에 대해선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당시 기준으로 샷이 성공된 당일에만 100만 달러의 광고 가치를 창출했다 하니 말 다한 셈이다.

이 우승으로 통산 9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한 타이거는 남아공의 레전드 선수인 게리 플레이어[59] 그리고 20세기 가장 위대했던 선수 중 하나인 벤 호건[60]과 메이저 타이틀 집계에서 동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2달 뒤 있은 U.S. Open에서 타이거는 2개 대회 연속 메이저 우승과 동시에 두 자릿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뜻밖의 복병인 뉴질랜드의 마이클 캠벨[61]에게 2타차 우승을 내주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연속 메이저 우승은 놓쳤지만, 시즌 두 번의 메이저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거둔 타이거는 새로 바뀐 스윙에 완전히 적응을 하였고, 좋은 경기력에 고무 되어 있었다.

그리고 5년 전 우승했던 골프의 성지, 세인트 앤드루스로 날아가 참가한 The Open Championship에서 통산 10번째 메이저 우승을 달성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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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0번째 메이저 우승이라는 금자탑

이 대회는 열리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레전트 ‘잭 니클라우스’가 The Open Championship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총 3번의 본 대회 우승을 기록하며 PGA 통산 73승을 비롯, 메이저 18승과 총 117승에 빛나는 리빙 레전드와의 이별에 영국이 들썩였고 많은 기자진들이 잭의 마지막을 촬영하기 위해 세인트 앤드루스에 모였다. 잭 니클라우스가 마지막 홀에서 5m 남짓한 버디를 성공시키며 화려하게 The Open Championship 무대를 마무리 하였지만 진짜 주인공은 역시 타이거였다.

첫 날부터 6언더를 치며 1위에 오른 타이거는, 단 한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은 채 선두를 질주하며 총 14언더파로 콜린 몽고메리(스코틀랜드)를 5타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골프 인생을 걸고 도전한 스윙 교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무릎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2000년대 초반의 안정감을 보여 준 타이거는 남은 2005 시즌에서 추가 2승을 거두며 ‘평범했던’ 2004년으로부터 화려하게 복귀했다. 필 미켈슨이 우승한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 PGA Championship에서도 공동 4위를 기록하며 ‘타이거 슬램’이라는 신조어를 낳은 2000년을 제외하면 메이저 대회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시즌이 되었다. 2005년의 타이거는 PGA 올해의 선수상은 물론, 상금왕과 다승왕, 최저 타수상까지 휩쓰는 성적을 남기며 No.1 Ranking Golfer의 위용을 과시했다.

스윙 교체로 바로 효과를 보기도 어려운데, 효과 정도가 아니라 다시 투어를 초토화 하는 수준이었으니 경악할 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2006 시즌에 보여 줄 퍼포먼스에 비교하면 이 해의 성적은 오히려 별 것 아닌 수준이라는 것.

1월의 ‘뷰익 인비테이셔널’[62]에서 대회 통산 네번째 우승을 달성하며 상큼하게(!) 출발한 타이거는, 2월에는 초청 받아 참가한 유러피언 투어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과 3월에 열린 ‘Ford Championship at Doral’에서 우승을 달성[63]한다. 4월의 첫 메이저 대회인 Masters Tournament에서는 나흘 내내 70타대의 꾸준한 경기력으로 총 3언더를 기록했으나 3~4라운드에서 집중력을 보인 필 미켈슨의 안정된 경기력 앞에 우승을 내줘야 했다. 전반적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던 타이거에게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져 온다.

최고의 친구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던 아버지 ‘얼 우즈’가 전립선암으로 5월 3일, 74세의 일기로 사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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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장례식장. 굳은 표정의 타이거 우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골프라는 스포츠를 접한 순간부터 타이거와 얼은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았다. 타이거를 절대적인 위치로 이끈 강한 정신력과 승부사로써의 기질, 늘 도전에 임하는 굳은 의지는 다름 아닌 얼 우즈로부터 영향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 타이거의 골프 인생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영원한 벗’ 아버지의 죽음에 우즈는 정신적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다시 필드에 복귀하여 호령하는 것만이 천국에 있을 아버지의 응원에 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진 타이거의 경기력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그 해 6월에 있었던 U.S. Open에서 이틀 연속 6오버파를 치며, 도합 12오버파라는 성적으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메이저 38번째 대회 만에 컷 탈락의 쓴 맛을 본다.[64] 이 대회를 통해 절치부심한 타이거는 다시 한번 메이저에 도전한다.

영국의 호일레이크 코스에서 개최된 제 135회 The Open Championship에 참가한 타이거는 연습 라운드를 돌면서 그라운드 상태에 걸맞은 플랜을 짜고 시합에 임한다. 딱딱히 말라 굳어 버린 호일레이크 코스에서는 아무리 눌러 때려도 볼이 계속 굴러 갔다. 거리 보다 볼의 컨트롤이 더 중요했던 것. 이 곳에서는 쓸데없이 멀리 쳐 봤자 계산 안되는 골프가 될 것이라 판단한 타이거는 나흘 동안 가장 계산이 안 서는 장비인 드라이버를 딱 한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모든 클럽을 평소 보다 한 클럽 아래로 잡고 경기를 치렀다. 즉, 평소에는 5번 아이언을 들었을 거리에서 6번 아이언을 사용한 것. 그렇게 해서도 충분한 런으로 5번 아이언 만큼 거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볼을 컨트롤 하는 것으로 경기 플랜을 잡은 타이거의 선택은 탁월했다. 첫 날 5언더로 공동 2위의 좋은 출발을 보인 타이거는 둘째 날 단숨에 7타를 줄이며 선두로 뛰어 올랐다. 특히 14번 홀에서 2번 아이언으로 티샷한 뒤 200야드 정도 남은 세컨샷이 이글을 기록했던 것은 대회 중 타이거가 자신감을 갖게 된 터닝 포인트이자 우승을 위한 결정적인 샷이었다. 타이거 최고의 샷 중 하나로 평가되는 이글샷이 나온 뒤 순풍에 돛을 단 듯 타이거는 선두를 질주했고, 3~4라운드에서도 타수를 줄이며 도합 18언더파의 성적으로 우승을 달성한다. 전년도에 이은 대회 2연패이자, 월터 헤이건[65]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통산 11회째 메이저 타이틀 획득.

무엇보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우승을 결정지은 뒤 캐디 스티브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던 타이거의 모습. 코스 밖에서는 밝은 미소를 보여 주지만 코스 안에서는 냉혹한 승부사로, 장갑을 벗은 뒤에야 본심을 드러 내었던 타이거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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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얼굴을 보자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온 타이거 우즈

“아버지의 혼이 느껴진다”라며 대회 전 결의를 다졌던 타이거는 아버지에게 맹세한 자신 만의 약속을 우승으로써 지켜 내었고 인터뷰에서도 “아버지의 영전에 바친 이 우승은 너무도 뜻 깊다. 마지막 퍼트가 들어간 뒤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스티브(캐디)가 ‘이 우승은 너의 아버지 것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라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The Open Championship 에서의 우승 이후 타이거는 그야말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2주 후에 참가한 ‘뷰익 오픈’에서 통산 2번째 우승을 달성한 타이거는, 다시 한 주를 건너 뛴 뒤 시즌 마지막 메이저인 PGA Championship에 참가한다.

일리노이의 메디나에서 열린 본 대회에서 타이거는 첫 날 3언더의 성적으로 공동 10위, 나쁘지 않은 스타트를 끊는다. 이튿날 4언더를 기록하며 순위를 공동 5위까지 끌어 올린 타이거는, 무빙데이인 3일째 7언더를 몰아치며 14언더파를 기록하였고 영국 출신의 스타 골퍼 ‘루크 도널드’[66]와 공동 1위인 상태에서 파이널 라운드를 맞이하게 된다.

팽팽한 경기가 예상되었으나 2타를 잃은 루크 도널드를 상대로 4타를 줄인 타이거가 완승, 18언더파의 성적으로 통산 12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한다.

올 타임 메이저 우승 회수 단독 2위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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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타차의 완승. 2006 The PGA Championship

기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로 다음 주에 열린 WGC 대회 중 하나인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에서 통산 5번째 우승을 획득해 낸 것.

PGA 투어 내에서의 높은 포인트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타이거는, 플레이오프 첫 대회인 ‘도이치뱅크 챔피언십’에서 비제이 싱을 2타차로 제치고 우승하며 출전한 4개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하는 기록을 세운다. 약 한달 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챔피언십’에서도 대회 통산 5번째 우승을 거머쥐며 시즌 8승째를 거머쥔 타이거는 최종적으로 Tour Championship 우승은 놓치지만 해당 시즌 통틀어 최고의 선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2000년 이후 통산 4번째 AP 통신 선정, 올해의 남자 스포츠 선수가 되었으며 상금왕과 올해의 선수상까지 싹쓸이 했다.

1월의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3년 연속이자 통산 5번째 우승을 거머쥔 타이거의 발걸음은 2007년에도 거침이 없었다. Masters Tournament와 U.S. Open에서는 준우승에 그치며 메이저 사냥은 뜻대로 안 풀리는 모양새였지만, 2개의 WGC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큰 대회에서의 장점은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The Open Championship에서 TOP 10 진입은 실패했으나 시즌 마지막 메이저 PGA Championship에서 통산 13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손에 넣으며 4년 연속 메이저 우승, 해당 대회 2년 연속 우승의 기쁨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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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있게 우승을 거둔 2007 PGA Championship

특히 이 대회는 타이거의 메이저 최저타인 63타(파 70의 대회로, 7언더파)를 기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둘째 날 63타를 기록하며 선두로 뛰어 오른 타이거는 3~4라운드에서 각각 1타씩 줄이며 총 8언더의 기록으로 편안하게 경기를 마쳤다. 이변도 없었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따분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었지만 타이거로선 당연히 해야 할 ‘메이저 우승’을 했을 뿐인 대회였다.

페덱스컵 플레이오프에서도 ‘BMW Championship’에서 우승을 차지한 타이거는 결국, 시즌 최종전인 ‘Tour Championship’에서 2위를 8타차로 따돌리는 압도적인 경기력 끝에 페덱스컵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최초로 해당 대회 2번 우승한 선수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활약 끝에 타이거는 상금왕과 평균 타수 1위, PGA 올해의 선수상을 ‘언제나처럼’ 획득해 간다. 동시에 아내 엘린과의 사이에서 첫 아이가 태어난다. 딸 알렉시스 우즈였다.

또 하나의 가족이 추가된 타이거는, ‘언제나처럼’ ‘당연히 해야 하듯’ 매 시즌 1월에 열리는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4년 연속이자 통산 6번째 우승을 거머쥐며 2008 시즌을 스타트 한다.

하지만 참가 대회를 선별하며 스스로를 관리해 왔던 타이거에게 이 시점부터 무릎에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 강한 스윙을 위해 왼쪽 무릎에 압박을 많이 주었던 타이거의 몸이 부상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 2월의 유러피언 투어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에서 통산 2승째를 거둔 뒤 WGC 악센츄어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스튜어트 싱크(미국)을 꺾고 통산 3번째 우승을 거두지만 타이거의 무릎이 심상치 않다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에서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로 이름을 새롭게 바꾼 대회에서도 통산 5승째를 손에 넣은 타이거는, 성치 않은 몸 상태에서도 Masters Tournament 에서도 2타차로 준우승을 거두는 등의 활약을 보여 준다. 결국 타이거는 Masters Tournament가 끝난 뒤 왼쪽 무릎에 관절 경 수술을 받았다. 짧은 재활 기간 동안, 타이거는 왼쪽 경골의 이중 스트레스 골절을 입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복귀를 선언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치를 만하다고 판단한 타이거는 필드로 돌아 왔으나 본인 생각보다 몸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무릎은 물론 허벅지 근육에 문제가 생기는 등 컨디션이 최악에 달한 6월, 캘리포니아 토리 파인즈에서 열린 제 108회 U.S. Open에서 타이거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골프의 역사를 쓴다.

총 71타로 구성된 본 대회 1라운드 18홀에서 드라이버 티샷을 한 타이거는, 순간 자리에 서서 고통스러운 얼굴을 짓더니 절뚝거리며 이동하기 시작한다. 결국 1오버파로 첫 날을 마친 타이거는 대회 내내 다리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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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표정으로 무릎을 집는 타이거

몸이 불편한 가운데에서도 메이저 우승을 향한 타이거의 집념은 보통이 아니었다. 둘째 날 3언더 – 셋째 날 1언더를 추가하는 등 몸 상태에 비해 순항한 타이거는 도합 3언더파로 파이널 라운드를 맞이한다. 특히 3라운드에서 보여 준 클러치 퍼트와 칩 샷은 타이거가 왜 동시대 최고의 선수인지, 왜 메이저 우승을 독점하 듯 싹쓸이 해왔는지 알 수 있는 퍼포먼스를 연속으로 펼쳐 보인다.
  • 파5 13번홀에서 티샷 미스 - 러프에서 세컨샷이 길어 그린에는 올라 왔지만 홀과는 20여미터는 족히 느껴질만한 거리에서 이글펏 성공.
  • 파4 17번홀에서 티샷 미스 - 러프에서 세컨샷이 짧아 그린과 벙커 사이 러프에 볼이 빠짐. 칩샷으로 홀인 시키며 버디 성공.[67]
  • 파5 18번홀에서 90도로 꺾인 10미터짜리 이글펏 성공.

무릎 부상의 여파로 샷이 안정감이 떨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땐 스코어를 지켜 내었다. 좌충우돌(!) 끝에 3라운드 70타, 총 3언더로 1위를 지키며 파이널 라운드를 맞이한다.
2008 U.S. Open 3라운드에서 보여 준 기적 같은 경기력

마지막 날은 덥고 습했으며 무엇보다 러프 상태가 매우 거칠었다. 특히 뙤약볕이 내리 쬐는 시점에 플레이를 해야 하는 상위권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타이거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뜩이나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겨우 겨우 버텨 내었지만 어려운 코스에서 이븐파를 유지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17번홀을 끝낸 타이거의 스코어는 이븐. 3오버파를 친 상태였다. 마지막 날 이븐파를 기록하며 18홀을 끝마친 선두 로코 미디에이트(미국)[68]와는 한타 차.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맞이한 파5 18홀. 전날 이글을 기록했던 곳이지만 페어웨이를 벗어나면 성가신 러프가, 양 사이드에는 길게 뻗어 있는 벙커와 함께 그린 좌측 방향에는 해저드가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홀이기에 파5라고 해도 간단히 버디를 잡을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게다가 훗날 캐디인 스티브가 술회 했듯 “타이거가 이동할 때마다 무릎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솔직히 구역질 나는 줄 알았지만, 너무도 의연하게 버티며 플레이하는 타이거의 모습에 티도 못 냈다. 매우 영웅적인 모습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무릎의 상태는 최악이었으며, 그에 따른 왼쪽 허벅지 근육에도 일부 손상이 일어난 상황이라 멀쩡히 경기를 치르는 타이거의 모습은 기적 그 자체였다.

외다리로 플레이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타이거의 18번홀 티샷은 결국 벙커에 빠진다. 벙커에서 안전하게 아이언으로 세컨샷을 하며 그린에서 가까운 페어웨이에 볼을 옮기려 했으나 약간의 샷 미스와 함께 홀로부터 105야드 떨어진 러프로 볼이 간다.

서드샷에서 핀에 붙이지 못하면 큰 위기에 빠질 뻔한 타이거이지만 침착한 샷으로 핀 4.5미터 가까이에 붙인다. 문제는 옆 라이(Lie)라는 것. ‘라이’는 홀까지 볼이 굴러가는 가상의 선을 말하는데 그린의 위, 아래 라이는 비교적 보기 편하지만 옆 라이의 경우는 위와 아래의 경사 모두를 봐야 하기 때문에 라이 체크가 더 어렵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파이널 라운드 파트너였던 리 웨스트우드[69]도 타이거와 같은 이븐파로 여기서 한 타를 줄이면 연장전에 갈 수 있는 상태였다. 리 웨스트우드도 좋은 서드샷으로 4.5미터 가량의 내리막 라이를 남겨 둔 채 타이거와 함께 그린에 오른다.

매스컴은 이미 선수 대기실에서 화면을 지켜 보는 로코에게 집중 되었다.

리 웨스트우드는 퍼트를 실패하며 연장전 진출에의 꿈을 접는다. 마지막 남은 타이거. 지켜 보는 로코. 세계 골프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타이거의 샷이 성공할 경우, 월요일에 펼쳐지는 18홀 Monday Play-Off가 열리기 때문이다. 수분간 면밀히 그린을 체크한 타이거는 퍼팅 준비를 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가볍게 스트로크 하여 굴린 볼은 홀의 우측을 살짝 핥으며 들어간다.

환호하는 타이거. 그리고 갤러리. “그럴 줄 알았다.”며 주변인들의 격려를 받는 로코[70]. 모든 것이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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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팅 성공 후 환호 하는 타이거와 갤러리
파5 18번홀 중계 영상

그리고 월요일.

통상적이라면 일요일의 우승 뉴스와 해당 주 대회의 전망으로 바빠야 할 날이지만, U.S. Open의 전통대로 18홀 플레이오프가 열린다. 3만여명의 갤러리로 가득 찬 플레이오프에서 타이거와 로코는 환상적인 월요일을 연출해 낸다.

강한 상대와 붙어 쉽게 따돌리곤 했던 타이거는, 2000년 PGA Championship 때처럼 의외로 하위 랭커를 상대로 고전할 때가 있는데 이 날이 그랬다. 다리 부상의 여파이기도 했다. 10번 홀까지 타이거는 이븐파, 로코는 3오버로 타이거의 완승이 기대 되었으나 11번 홀부터 다리 부상 때문인지 타이거의 샷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로코의 경기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로코가 13 ~ 15번 홀에서 연속 버디로 이븐파까지 줄일 때 타이거는 2오버파까지 떨어졌던 스코어를 겨우 1오버파로 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의외의 결과가 나오는가 싶었지만 여기서 타이거의 저력이 나온다. 파5 18번홀에서 티샷이 운 좋게 벙커 턱을 맞고 페어웨이에 올라왔고 아이언 세컨샷을 그린에 올리며 이글 퍼트의 기회를 맞이한다. 이글 퍼트는 실패했지만 버디로 마무리를 지었고 로코가 ‘우승 확정’ 버디 퍼트를 실패하면서 결국 18홀 플레이오프도 무승부가 되었다. 그리고 서든데쓰 플레이오프[71]를 치러 첫 홀에서 타이거가 파, 로코가 보기를 기록하며 기적 같은 타이거의 14번째 메이저 타이틀이 확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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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에서 환담을 나누는 타이거와 로코

한 쪽 다리로만 플레이하며 우승한 타이거의 승부욕과 집념은 화제가 되었다. 몸의 부상을 극복하고 동시대 가장 위대한 골퍼라는 자존심을 지킨 타이거는 “내가 겪었던 모든 대회 중 가장 힘들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우승을 차지해서 너무 감격적이다. 더 이상의 플레이는 도저히 불가능했다.”라고 인터뷰 하였다. 그러나 몸의 부담을 극한까지 밀어 부친 대가는 컸다.

감동적인 우승 뒤 얼마 후, 타이거는 공식적인 성명을 통해 무릎 부상 치료 등을 이유로 투어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힌다. 남은 시즌의 포기를 밝힌 타이거는 메이저대회를 포함 모든 대회의 참가 취소하고 재활에 몰두한다.

재활 및 투어 중단 선언 후 8개월 동안 필드를 떠난 타이거였지만 이 시기에도 축복 어린 소식이 생긴다. 바로 둘째 아이이자 아들인 찰리 엑슬 우즈가 2009년 2월에 탄생한 것. 복귀 직전에 태어난 아들로 인해 타이거는 더 절치부심한 모습으로 재활을 마무리 지었으며 그해 2월 말 투어 복귀를 선언한다.

복귀 후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회 중 하나인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 출전한 타이거는, 1~3라운드에서 계속 언더파를 내며 변함없는 경기력을 과시했다. 파이널 라운드에서 션 오헤어(미국)와 함께 한 타이거가 17번 홀까지 마쳤을 때 4언더파로 션과 동률이었다. 세컨샷을 나란히 그린에 올린 두 선수 중 션이 먼저 퍼팅을 했고 볼은 홀에 미치지 못했다. 신중하게 라이를 살핀 타이거는 대선배 아놀드가 지켜 보는 가운데 6m 가량의 퍼팅을 성공시키며 버디를 획득, 2009 시즌 첫 승을 거두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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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후 환호하는 타이거와 스티브

이 후 또 다른 대선배 잭 니클라우스가 호스트인 ‘메모리얼 토너먼트’ 우승을 거둔 뒤 WGC 대회인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에서도 우승한 타이거는 도합 시즌 6승을 획득, 무릎 수술로부터 정상적으로 회복했음을 경기력을 통해 입증하였다. 투어 챔피언십에서도 1승을 거두었고, 비록 최종전인 ‘Tour Championship’에서 우승은 필 미켈슨에게 빼앗겼으나 종합 페덱스컵 포인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1천만달러의 보너스까지 획득하는 등 화려한 컴백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상금왕 – 다승왕 – 올해의 선수 – 평균 타수 1위 등을 싹쓸이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메이저 타이틀로 이야기를 옮기면 다소 서운한 시즌이었다. Masters Tournament와 U.S. Open에서는 각각 6위를 차지하며 선전했으나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열린 The Open Championship에서는 1~2라운드 5오버파라는 성적으로 프로 생활 두번째 메이저 컷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첫번째 컷 탈락은 아버지와 관련한 심리 상태가 작용했다 볼 수 있지만 이번 탈락은 실력으로 컷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기에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PGA Championship은 타이거에게 중요한 대회였다. 복귀 후 첫 메이저 타이틀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질적으로 해당 대회 3회 연속 우승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2006 ~ 2007년 연속 우승에, 2008년은 부상으로 인해 출전 포기), 무엇보다 The Open Championship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에 시즌 마지막 메이저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1라운드에서 5언더파를 기록하며 선두로 치고 나간 타이거는, 3라운드까지 총 8언더를 기록하며 와이어 투 와이어[72]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파이널 라운드의 파트너는 한국의 양용은[73]. 첫 날 73타를 쳤으나 가파른 상승세로 파이널 라운드 챔피언조까지 오른 선수이고 2006년도 HSBC Champions에서 타이거를 2타차로 제치고 투어 첫 우승을 기록했기 때문에 다소 껄끄러운 상대이기도 했다. 다만, 8언더인 타이거가 6언더인 양용은 보다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통산 15회째 메이저 우승에는 상대적으로 가까웠다.

그러나 막상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하자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강한 상대와 붙어 쉽게 따돌리곤 했던 타이거는, 2000년 PGA Championship 과 전년도 U.S. Open 때처럼 의외로 하위 랭커를 상대로 고전할 때가 있는데 이 날 또한 그랬다. 양용은이 어제의 타수를 유지하며 나쁘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준 사이, 타이거는 2타를 까먹으며 결국 13번홀에서 동타를 이룬 것.

운명은 파4 14번 홀에서 갈렸다. 짧은 파4였기에 둘 다 드라이버로 원 온을 노리는 티샷을 했는데 타이거의 샷은 벙커로, 양용은의 샷은 벙커 옆 러프로 빠졌다. 타이거는 버디가 가능한 거리까지 벙커샷을 잘 쳐 놓았고 양용은의 결과를 기다렸는데, 양용은의 칩샷이 그대로 홀로 빨려 들어가며 이글이 나오고 만다. 여기서부터 분위기는 양용은에게 갔고 다급해진 타이거의 샷과 퍼트는 목표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3라운드까지 선두 유지했을 시 단 한번도 역전 우승을 허용치 않았던 타이거의 ‘불패 신화’가 깨지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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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타이거 우즈 시련의 시작인 PGA Championship에서의 패배

서로 한타씩을 잃고 맞이한 마지막 18번홀에서 양용은은 세컨샷을 버디 가능한 위치에, 타이거는 세컨샷이 그린을 살짝 벗어나며 러프로 향했다. 러프에서 친 타이거의 샷이 홀을 외면하며 실낱 같은 희망은 사라졌다. 그 상황에서 양용은의 버디 퍼트는 들어갔고, 파 퍼트를 남긴 타이거의 앞에서 양용은은 기쁨의 우승 세리 머니를 보여준다. 쓴 웃음을 지은 채 패배를 인정한 타이거는 파 퍼트 마저 실패하며 보기로 마지막 홀을 마쳤고, 그렇게 충격적인 패배는 최악의 모습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PGA와 유러피언 투어 대회에서 각 1승씩을 거두며 패배의 아픔에서 금방 헤어 나왔음을 보여준 타이거에게 다음 시즌은 매우 중요했다. 2008년 The U.S. Open 이후 메이저 타이틀을 다시 획득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 11월 말, 타이거는 물론 그의 가족과 그의 플레이를 사랑하고 동경했던 수많은 골프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 대형 스캔들이 터진다. 골프를 포함한 타이거의 인생 자체가 큰 전환점을 맞이 하게 된 것이다.

4.2.3. 2010년대

4.2.3.1. 2010년 ~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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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스캔들 이후 조롱의 대상이 된 타이거 우즈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 내내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고, 내 주변의 모든 유혹을 받아들여 즐겨도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돈과 명예 덕분에, 그 모든 것들은 내 주변에 항상 있었다. 이 모든 건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2009년 11월 말에 터진 타이거의 섹스 스캔들은 아마도 21세기 셀러브리티 관련 이슈 중 가장 큰 화제이자 많은 이들에게 배신감과 당혹감을 준 사건일 것이다. 사건의 당사자인 타이거는 그에 대한 반향으로 전 세계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스캔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별도의 글을 통해 읽어 보도록 하자.

스캔들이 터진 후 3주 후인 12월 중순,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무기한 골프를 중단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팬들의 곁을 떠난 타이거는 약 4개월 뒤 Masters Tournament를 통해 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엉망진창이었다. 진심으로 환영하는 매스컴과 팬, 동료들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 연일 스캔들에만 열 올리는 매스컴과 핫도그까지 집어 던진 갤러리,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동료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수선함 속에서 타이거는 공동 4위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대회 주인공은 유방암을 이겨 낸 아내 앞에서 감동의 우승을 차지한 필 미켈슨이었지만, 본인이 주인공이 아닌 건 이제 상관없었다. 어쨌든 빠르게 투어의 흐름에 다시 참여해야 했고, 본인의 가치는 ‘골프’로만 증명될 수 있었기에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하던 승리 소식은 요원했다.

그 사이 아내인 엘린과 최종 이혼에 합의하며 당시 기준으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1억달러의 위자료를 주는 것으로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된다. 엘린이 평생 타이거에 대한 인터뷰 금지 및 양육권을 고스란히 가져 가는 조건으로 합의하였고, 졸지에 가족과 이별하게 된 타이거는 옛 기량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정진 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연간 수천만 달러의 광고후원을 해주던 스폰서들마저도 자신의 곁을 떠나는 불행을 맛보았다. 거기에 본인의 스캔들을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감당 안 될 수 있다는 부정적인 뉴스까지 나왔다.

2010년 11월에는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세계 1위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이 후에도 성적이 나오질 않아 97년에 처음 세계 1위에 오른 후 최저 순위인 52위까지 추락하게 된다. 말 그대로 ‘종이 호랑이’가 된 타이거에게 불행은 끊이질 않았다.

전설적인 순간을 함께 했던 캐디 스티브 윌리암스와 2011년 7월 이별 수순을 밟은 것. 이 후 그에게 해고[74] 되었던 스티브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타이거를 비난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타이거에게는 그야말로 좋을 것이 없었던 시기.

하지만 타이거는 다시 좋은 시절이 올 것을 믿고 꾸준히 활동하였다. 부상 치료에 전념하며 2010년에 새로이 맞이한 코치 ‘션 폴리’와 스윙을 가다듬은 타이거는 11년 10월에 있은 호주 오픈에서 3위에 오르며 점점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후 미국 vs 인터내셔널팀(아시아, 호주, 남아공 등)이 겨루는 프레지던츠컵에서는 막판에 승점을 더하는 플레이를 하면서 미국의 승리를 견인했다.

프레지던츠컵 폐막 2주 후 타이거는 본인 재단이 주최하는 PGA 투어 이벤트 대회[75]인 ‘셰브론 월드 챌린지’[76]에서 드디어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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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이후 첫 우승

비록 이벤트 대회이고 본인 재단이 주최한 경기였지만 상금액이 만만치 않기에 우승의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거머쥔 소중한 승리였던 것이다. 이 우승으로 타이거의 세계랭킹은 21위로 상승했다.

타이거에게 있어 무엇보다 이 승리의 중요한 포인트는, 우승하는 법을 다시 되찾았다는 것 그리고 변함없이 자신의 곁에서 함께 승리에 환호해주는 팬들이 있다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4.2.4. 2012년 ~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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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의 2013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77]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진 건지, 아니면 타이거의 이미지가 워낙 좋았기 때문인지 그의 실력이 그리웠는지 간에, 시간의 흐름 속에 타이거의 스캔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아니, 스캔들이 터지자마자 많은 사람들한테 비난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별 상관도 안했다. 유명인 중에 사생활이 막장인 것도 허다하고, 타이거가 가족과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라는 의견 조차 있었다. 사생활과 골프 실력은 별개의 것이라면서 그의 복귀를 지지하는 이들 또한 많았다.

특히 투어의 볼륨을 키우기 위해 타이거의 카리스마가 절실히 필요했던 동료들이 오히려 타이거에 대한 좋은 코멘트를 해주면서 그의 활약에 대해 호의적인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78]

가장 든든한 스폰서였던 나이키는 스캔들이 터진 후에도 보란 듯이 타이거를 광고의 메인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3년 6개월 만에 투어 공식 우승을 손에 넣는다. 2012년 3월 26일, 인연의 대회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 감격의 승리를 쟁취한 것. 무릎 부상에서 복귀한 2009년에도 타이거에게 첫 승을 안긴 대회였으니 그에겐 정말 은인과도 같은 대회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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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월 만의 승리. 포효하는 타이거.

2위인 그래엄 맥도웰(북아일랜드)[79]에게 5타차의 완승을 거두며 타이거는 완전한 부활을 선언했다. 특히 이 대회에서 3번 아이언으로 260야드를 때리며 그린에 볼을 올리는 장면은 경쟁자를 주눅들게 만드는 타이거의 스윙 스킬을 유감없이 보여 준 장면으로 평가된다.

누구보다 타이거의 우승을 기뻐한 것은, 그의 부활을 간절히 바라던 바로 PGA 측 일 것이다. 타이거가 부상과 스캔들로 몰락하면서 덩달아 PGA의 시청률까지 하락했기 때문이다. 스폰서의 변화도 극심하였기 때문에 PGA 투어의 위기감은 고조된 상태였다. 메르세데스-벤츠를 비롯한 세계적인 기업들이 PGA 스폰서를 맡지않으면서 우승상금도 타이거가 몰락하던 2년 6개월 사이 급격히 줄어 들었으며 시청률 또한 추락을 거듭하여 이 여파로 중계권 금액도 값싸게 계약하는 수 밖에 없었다.

타이거가 등장하고 세계 골프의 황제로 군림할 때 덩달아 PGA의 경제적 이익 또한 급성장 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타이거의 암흑기였던 2010년대 초반 PGA가 무주공산의 양상을 띠었던 것도 하락의 원인 중 하나였는데, 마틴 카이머(독일) - 그레이엄 맥도월 -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 - 버바 왓슨(미국) – 더스틴 존슨(미국) 등의 젊은 피의 선수들이 새로이 공급되어 기존의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투어를 지탱하였지만 기존의 골프 황제에 비견될 강력한 카리스마의 원톱은 없었다.

타이거의 우승이 얼마나 PGA에 반가운 소식이었는지는 해당 대회의 시청률에도 나온다.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 최종 라운드의 미국 시청률은 4.8%로 집계됐는데 이는 2011년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시청률이었다고 한다. 여전히 타이거는 골프팬들에게 있어 가장 인기 있는 선수이기에 PGA에겐 돈줄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다. 대회 우승 하나로 부활이라고 호들갑 떨 것 까진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PGA로선 모처럼의 반가운 소식이었던 것은 사실.

이 후 2승을 더 추가하며 투어 통산 74승을 기록했다. 이로써 레전드 잭 니클라우스의 통산 승수인 73승을 넘어섰으며 통산 82승으로 PGA 투어 최다승에 올라 있는 샘 스니드(미국)[80] 기록에 8승 차로 따라붙었다. 샘 스니드가 30년 동안 활약하며 통산 82승을 기록한 데 반해, 우즈는 17년 간 74승을 올리며 빠른 속도로 따라붙어 역대 최다승 경신도 문제없어 보인다.

2013년이 시작되자, 메인 스폰서인 나이키가 세계 1위의 ‘Next Tiger’ 로리 맥길로이와의 대형 계약을 발표한다. 이제 나이키는 타이거만의 이미지가 아니게 되었다. 타이거도 시간의 흐름, 현재 본인의 위치 등을 고려하며 ‘납득한다’라는 반응. 13년 초부터 둘이 함께 하는 나이키 광고가 공식 릴리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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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와 로리가 함께 한 나이키 광고 중 한 컷

3월에는 WGC 대회인 ‘캐딜락 챔피언십’을 우승하면서 통산 76승을 달성했고, 보름 뒤인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 8회째 우승을 획득하며 통산 77승째 승전보와 함께 29개월 만의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회복한다. 그리고 동시에 샘 스니드가 세운 단일 대회 최다 우승 기록과 타이를 이룬다.

그리고 5월 ‘제5의 메이저 대회’로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통산 2회째 우승을 차지했다[81]. 2001년 이 대회 우승한 뒤로 12년만에 거두는 우승이었다. 이 우승으로 시즌 4승을 거두며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더욱 단단하게 다지고 우승 상금 171만달러를 받아 상금 랭킹 1위 자리도 지켰으며 PGA 투어 78승을 기록하며 샘 스니드(미국·82승)의 최다승 기록에 4승차로 다가섰다.

파이널 라운드 파트너였던 스페인의 세르히오 가르시아와 샷을 하는 시점[82]에 대한 설전이 깔끔치 않은 뒷맛을 남겼고, 이 여파는 세르히오가 타이거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83]을 하고 세간의 비난을 흠뻑 받은 후 타이거의 라커룸에 사과 편지를 전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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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의 THE PLAYERS Championship 우승

Masters Tournament에선 아이언 샷한 볼이 헤저드에 빠진 뒤 볼을 드롭하는 과정에서 본래 볼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위치를 변경하고 진행했는데, 사실은 벌타를 받아야 하는 것이나 타이거는 그대로 넘어간 채 진행이 되어 '타이거 룰'이라는 명명 하에 이슈가 있었다. 이해에는 하반기 경기 중, 티샷한 볼 위에 놓인 낙엽을 치우는 과정에서 볼이 움직였는데 타이거는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한 반면에, 카메라는 볼이 움직이는 순간 타이거의 손이 움찔하는 것을 잡아 내어 또 다시 논란이 되었다.

타이거는 모든 플레이가 촬영이 되니 본인에게 불리한 측면이 있다고 징징 대다가 언론의 뭇매를 맞기도.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타이거는 승리를 챙겼다. 8월에는 텃밭인 WGC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에서 통산 8회째 우승을 거두었고 PGA 투어 통한 79승을 찍었다. 이러한 활약 상으로 '제 3의 전성기' 속에 2013년 최고의 선수임에는 틀림 없었으나, 스캔들 발생 이후 4대 메이저대회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는 것이 옥의 티다.

특히 우승에 근접한 메이저 파이널라운드에서 예전 만한 집중력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15번째 타이틀 획득에 번번히 발목을 잡는 모양새이다.

2018년 9월 전까지 타이거는 13년도 WGC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을 마지막으로 투어 우승을 차지 하지 못했다. 기량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상이 문제. 급기야 2014년에는 1995년 아마추어로 참가한 이래 19년 간 개근해오던 Masters Tournament를 허리부상으로 인해 참가 포기를 발표했다. 부상에 시달리면서 이 후에도 거의 대회 참가를 하지 못했다.

최근 3년간은 계속 복귀 선언 - 처참한 경기력으로 화제에 오름 - 다시 부상으로 수술 - 재활 후 다시 복귀 – 재발 – 수술의 순이다. 세계 랭킹은 600위대까지는 뉴스가 되다가 이제는 아예 이슈가 되지 못할 정도.

복귀해서 정상적으로 플레이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부상에 시달리는 시간이 너무도 길기에 최근의 모습은 ‘은퇴’가 가까워 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40대에 접어든 상태에도 20대 전성기 시절에 못지 않은 파워풀한 스윙을 하였는데, 이것이 드라이버 티샷의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데다가, 수십 년을 운동한 끝에 허리 - 무릎 등 스윙에 필요한 부위가 버티질 못하는 것이 최근의 부진 및 부상의 이유라 볼 수 있다. 스윙 코치도 바꿔 보았지만 지금은 스윙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 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느냐 수준의 심각한 부상이기에 골프팬들은 물론, PGA 투어 관계자들도 타이거의 복귀에 대해선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 보는 중이다.

필드에서는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은 타이거 이지만, 틈틈히 본인의 골프 철학을 담은 코스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고, 2016년 텍사스 주 블루잭 내셔널에 그가 설계한 코스를 만들었다. 프로 골퍼 은퇴 뒤에 대선배인 잭 니클라우스 등을 따라 자신 만의 골프 철학으로 골프의 다양한 재미를 전해 줄 코스 디자이너로써 전직할지도 모르는 일.

타이거가 부상 치료 및 재활에 매달리던 2016년, 메인 스폰서인 나이키의 '용품 시장' 철수가 발표 되었다. 타이거 - 로리 등 업계의 스타들을 활용하여 전면적인 마케팅을 펼쳤으나 기존의 강자들인 테일러메이드 - 타이틀리스트 - 캘러웨이 - 핑 등이 이미 형성하고 있던 용품 시장에서 인정 받기는 쉽지 않았고[84] 결국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던 골프 의류와 신발 사업을 제외하고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로 인해 타이거가 어떤 용품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화제가 되었고, 각 브랜드가 타이거의 나이키 시절 스펙에 맞춰 다양한 클럽들을 직접 보내 왔다고 한다. 활동도 하지 않는 골퍼에게 이 정도이니 역으로 타이거의 이름값이 여전함을 보여준 셈.

여러 시도를 통해 용품들을 써 보고 확정[85] 지은 후 2016년 말에 코스 복귀를 발표 했다. 그리고 라이더컵에서는 부단장에 선임되어 8년 만에 미국으로 우승컵을 가져 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때의 활약으로 일찌감치 2017년 프레지던츠컵에도 부단장에 선임된 상태.

16년 12월 자신이 주최하는 이벤트 대회 '히어로 월드 챌린지'를 통해 복귀를 발표한 타이거는 변변치 못한 활약 속에 출전 선수 중 최하위권의 성적을 거둔다. 하지만 출전선수 중 최다인 24개의 버디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전성기를 느끼게 하는 좋은 샷을 보여 주며 기대감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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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의 책이 론칭 되었음을 알리는 뉴욕의 한 서점

이 와 중에 타이거는 유명한 골프 전문가인 론 루벤스타인과 공동 집필한 '1997년 마스터스: 나의 이야기'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2001년에 책을 낸 이후 16년 만의 일로, 자신을 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준 97년 Masters Tournament를 포함한 자서전 형식의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복귀가 너무 빨랐을까.

2017년 1월에 열린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에서 컷 탈락을 한 뒤, 유러피언 투어 대회인 '오메가 두바이 디저트 클래식' 1라운드 5오버파 기록 후 기권 등의 행보를 보이더니 참가를 약속했던 2개 대회를 모두 취소하며 다시 골프계와 팬들의 우려를 샀다. 그리고 결국 허리 수술 발표를 하며 시즌을 중단하고 만다.

활동 중단 이후 한 동안 타이거 관련 소식이 없었으나, 미국 동부 현지시간 2017년 5월 29일에 음주운전 기사가 올라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실 확인 결과, 음주 운전이 아니라 약물 중독이었는데, 부상에 힘겨워 하던 타이거가 자포자기 상황에 몰려 막장 인간화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결국 부상으로 인해 약물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상태였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동정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별도 항목에 설명이 되어 있으니 읽어 보자. 지금은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전문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17년 8월 초, 미국의 스타일리스트인 크리스틴 스미스와의 열애설이 났으나 곧장 본인의 SNS를 통해 작년을 끝으로 만나지 않는다며 이별 했음을 밝혔다.

17년 12월, 본인이 주최하는 대회인 '히어로 월드 챌린지'를 정상적으로 소화하며 2018년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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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히어로 월드 챌린지 우승자인 리키 파울러와 함께

10개월 만에 복귀전을 치른 타이거는 최종 8언더파로 공동 9위를 하며 오랫 만의 TOP10에 들어 갔다. 해당 대회가 공식 대회는 아니지만 세계 랭킹에는 포인트가 적용되는 대회인 만큼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고 봐야 할 것. 3오버파를 친 3라운드를 제외하면 모두 60대 타수를 기록했고 대부분의 평론가도 연초 보다는 스윙이 편해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

4.2.5. 2018년

부상 없는 시즌을 목표로 복귀한 골프 황제. 2번의 메이저 대회 TOP 10 및 Tour Championship의 우승으로 화려한 부활을 알리다.[86]
5년 만의 우승[87]

18년 1월, PGA 투어에서는 '올해 PGA 투어 주요 관전 포인트 5가지'를 발표했는데, 이중 2가지가 타이거의 부활과 관련되었다.

그만큼 투어의 기대가, 그리고 팬들의 기대가 큼을 반증하는 것으로 현재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타이거도 나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 2013년 시즌 이후 첫 풀 타임 시즌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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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 갤러리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타이거[88]

그리고, 1월 25일 ~ 28일까지 열린 PGA투어 파머스 인슈런스 투어에 참가, 2년 5개월 만에 정규 투어 대회를 온전히 마쳤다. 60대 타수는 한번도 기록하지 못했으나 358야드의 드라이버를 뿜거나 4라운드 평균 27개 대의 퍼팅을 하는 등 전성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여전히 불안정한 드라이버로 안정된 타수 유지를 위해서는 '곧게, 똑바로 가는' 드라이버가 필수인데 아직은 '경기 감각'과 동시에 타이거가 돌려 놓아야 하는 숙제 중 하나로 남은 듯 하다.

4라운드 최종 23위로 대회를 마치면서 한 때 1100위까지 떨어졌던 세계 랭킹을 539위까지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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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클래식 3라운드의 경기 모습 중

2월 말 시즌 2번째 경기로 '혼다 클래식'을 선택, 출전하였다.

첫 날 340야드의 드라이버 샷을 날린 뒤, 둘째 날에는 360야드의 드라이버 샷을 날렸으며 역대급 스윙 스피드 기록을 내는 등 '건강한' 타이거로 완벽한 복귀를 한 것이다, 라는 평가를 내기에 충분한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특히 세째 날에는 PGA 투어 정규 대회에서 2015년 8월 윈덤 챔피언십 3라운드(68타) 이후 2년 6개월만에 60대 타수를 기록하는 등 전성기 못지 않은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오랫 만의 정규 투어 TOP 10 기록을 노리고 마지막 날 경기에 임했으나, 버디 4개 - 보기 2개 - 더블 보기 1개를 기록하며 타수를 줄이지 못해 최종 12위에 그쳤다. 하지만 드라이버의 들쑥날쑥함이 덜해지고 안정적인 숏게임을 보여 주면서 18 시즌은 온전히 플레이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기 시작했다.

18년 3월 4일에 끝난 WGC 멕시코 챔피언십에서 오랜 기간 자웅을 겨루었던 필 미켈슨이 4년 7개월 만에 우승을 달성하며,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골프팬들은 필의 부활에 자극을 받은 타이거의 도약을 이야기 하였다. 타이거 또한 별도의 인터뷰를 통해 필의 우승을 축하하며 본인도 정진하겠음을 밝히는 등 지난 20여년간 골프계의 슈퍼스타로 군림해 온 두 선수로 인해 다시 한번 PGA가 들끓어 오르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필의 우승 다음 주에 열린 PGA 투어 '벌스파 챔피언십에 출전, 그야 말로 물 오른 기량과 부상에 시달리지 않는 건강한 타이거의 모습을 선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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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우승을 향해

3라운드 한 때 공동 1위로 나서기도 하였으며,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드로우와 페이드 샷, 귀신 같은 숏게임 등 전성기 타이거가 그대로 돌아온 듯한 모습으로 전 세계 골프팬들을 흥분 시켰다. 3라운드에 기록한 드라이버 스윙스피드는 시속 129.2마일(207.9㎞)로 측정 되며 17~18 시즌 투어 베스트를 기록하였고, 그린 적중률도 80%에 육박하는 훌륭한 경기력을 선 보였다.

비록 우승은 1타 차이로 놓쳤지만,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 준 타이거에의 기대감은 점점 올라 가는 중이다.

"오늘은 다소 무뎠지만 전체적으로는 예리한 감각을 찾고 있는 것 같다."며 오랜만의 우승권 성적에 대해 소감을 밝힌 타이거는, 바로 다음 주에 열리는 그리고 본인 커리어 최대 우승 텃밭이었던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다짐했다. 한 때 '의미가 없었던' 세계 순위는 또 다시 뛰어 오르며 전주 388위에서 149위로 겅충 뛰어 올랐다.

2019년으로 예정된 미국 vs 인터내셔널 팀과의 대결인 '프레지던트 컵'에 미국 팀 단장을 맡게 되었다. 16년 라이더 컵, 17년 프레지던트 컵에서 연달아 부단장 역할로 미국을 우승에 이끌더니 드디어 단장의 자리에 까지 오른 것. 여기서 성과를 내고 좋은 평판을 받으면 1단계 위의 이벤트로 여겨지는 라이더 컵의 단장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2017년 이 후 부단장을 역임 하면서 조금씩 단장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파머를 비롯해 잭 니클라우스, 프레드 커플스, 제이 하스 등 위대한 역대 단장들의 뒤를 잇게 돼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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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Big Easy[89]

통산 8번을 우승했던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 대회에 출전, 첫 날부터 안정된 경기력을 보이며 선전하였고 최종 10언더파 / 공동 5위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다. 2주 연속 TOP 5라는 호성적을 올리며 통산 80승은 물론, 15번째 메이저 우승을 노릴 만한 건강한 몸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중이다.

타이거의 경기력이 올라오면서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Masters Tournament의 주최 측과 골프 관련 미디어들이 들끓고 있는 중이다.

해당 주간 첫 날 인 월요일에 대선배인 '프레디 커플스'[90]와 한 조를 이뤄 연습 경기를 치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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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 & Phil... Together???!??!

이튿날인 화요일에는 무려 필 미켈슨과 연습라운드를 치르며 화제를 불렀다.

1998년 LA오픈 이후 무려 20년 만의 진기한 광경으로, 로리 맥길로이와 같은 현역 대스타들 조차 "둘이 연습 라운드를 하다니... 여전히 꿈만 같다. 왠지 뭉클하다."라는 반응. 18년도 들어 부상을 떨치고 좋은 경기력을 보이는 타이거와, 좋은 경기력 끝에 4년 만의 우승을 거머 쥔 필 모두 '오거스타 주인공'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이 같은 콜라보에 미 전역이 들끓고 있는 모양새이다.

많은 기대를 안고 출전했지만 Masters Tournament에서의 타이거는 팬들과 스스로에 대한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었다. 1, 2라운드에서 각각 73타, 75타를 치며 간신히 컷을 통과한 뒤 3라운드 이븐파, 최종일 3언더파 등으로 4라운드 토털 1오버파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는 공동 32위의 성적이다.

당분간 "클럽을 잡지 않고 쉬겠다"고 선언한 타이거는 아마도 5월에 있을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 등장할 듯 하다. 한 때 세계 랭킹 1, 400위대까지 떨어졌던 타이거는 Masters Tournament 컷 통과와 함께 오랫 만의 100위권 이내의 순위인 '88위'에 자리 잡았다.

예상대로 5월 중순에 열린 '제5의 메이저' 대회인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 출전하였다. 타이거의 굵직굵직한 커리어와 비교해서 '겨우' 2번 밖에 우승하지 못한 대회이긴 하나 전반적으로 경기력에 과거의 모습을 찾고 있는 상황이라 많은 기대를 받았다. 거기에 1~2라운드 파트너가 필 미켈슨이어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1~2라운드에서는 평범한 경기력을 보였으나 3라운드에서 본인의 해당 대회 한 라운드 신기록인 7언더를 몰아치며 단숨에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한 때 3개 홀 연속 버디를 기록하는 등 전반에만 4타를 줄여 선두의 선수[91]가 타수를 줄이지 못하는 틈을 타 한 때 중간 합계 14언더파로 공동 2위까지 치솟아 전 세계 골프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14번 홀에서 첫 보기를 기록한 뒤, 해당 대회의 시그내쳐 홀인 17번 홀에서 더블 보기를 범하며 그만 TOP 10에서 벗어 나고 말았다.
‘2018 Players Championship Tiger's Highlights

“주말 경기는 환상적이었다”고 자평한 타이거는 비록 ‘톱10’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멋진 버디쇼를 보여 주며 복귀 후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6월 중순에는 시즌 2번째 메이저인 U.S Open에 참가하였다.

부상으로 인한 3년 만의 출전이었고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첫 날부터 부터 코스 컨디션, 바람의 영향 등으로 좋은 경기력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 주면서 8오버파, 공동 102위로 스타트 하였다. 1개의 버디 외에는 보기 2개, 더블 보기 2개, 트리플보기 1개 등 흡사 주말 골퍼 수준의 스코어를 내었다. 급기야 이튿날에는 10오버파를 기록하며 최종 컷 탈락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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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안 풀리네, 아오...

경기가 끝난 후 타이거는 "나의 경기와 퍼트가 실망스러웠다. 나의 10오버파라는 성적이 골프팬들에게 즐거운 일인지, 흥분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코스를 뒤로하였다.

6월 28일 ~ 7월 1일까지, 본인이 운영 하는 '타이거 우즈 재단'의 주최 대회 '퀴큰론즈 내셔널'에 출전하였다.

첫 날 이븐파로 평범한 출발을 한 타이거는, 2라운드에 5언더파를 치며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다. 3라운드 2언더파를 치며 숨고르기를 한 타이거는 결국 최종일 4언더파를 추가하며 총 11언더파의 성적으로 4위를 기록, 오랜만에 TOP 10 기록을 올렸다. 우승자인 이탈리아의 프랜시스코 몰리나리가 21언더파라는 말도 안되는 성적으로 압승을 해서 그렇지 2~4위는 1타차의 접전을 보이며 나름 팬들에게 좋은 경기력을 선 보였다.
‘2018 Quicken Loans, Round 4, Tiger's Highlights

이 대회 직전의 연습라운드 부터 타이거는 기존의 블레이드 퍼터[92]을 써 왔으나 올 시즌 중 퍼트로 인한 고전이 계속 되어서 인지 지금까지 사용한 바 없는 말렛형 퍼터[93]를 사용하는 것으로 예상되었고, 실제 대회에서도 이를 활용하여 호성적을 거둔 만큼 앞으로의 대회에서는 당분간 말렛형 퍼터의 사용이 계속될 전망이다.

7/19 ~ 7/22에 걸쳐 열린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 'The Open'에 참가 하였다. 147회째를 맞아 스코틀랜드 앵거스의 커누스티 골프링크스에 열린 대회에서 10년 만의 메이저 우승을 노린 타이거는 첫 날과 둘째 날 모두 이븐파를 기록하며 첫 관문인 컷 통과는 달성했다. 특히 첫 36홀을 돌면서 더블보기 이하의 치명적인 실수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무엇보다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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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라운드 중인 타이거

그리고, 선두와 6타차로 맞이한 3일째.

아이언 티샷 위주로 경기를 풀어 나갔지만 종종 드라이버도 활용했고 전체적으로 샷이 안정적이었다. 페어웨이 안착률이 80% / 그린 적중률이 77%. 퍼트 개수 29개,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 327야드를 찍은 타이거는 무려 6개의 버디를 쏟아 내며 최종 5언더파를 기록, 1위 기록인 8언더와 3타차의 접전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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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을 향하여...

메이저대회 통산 15번째 우승을 노리며 4라운드를 맞이한 타이거의 전반 9홀은 완벽했다. 1~3라운드와는 달리, 링크스 특유의 강한 바람이 불면서 난이도가 올라간 4라운드였지만 4번홀에서 첫 버디를 잡은 타이거는 승승장구했다. 580야드짜리 6번홀 파5에서는 2번째 샷만으로 그린 근처로 올렸고, 두번의 퍼트로 버디를 잡아내며 단숨에 선두권을 압박하였다. 그 시점에 선두를 달리던 조던 스피스 등이 실수를 범하여 타이거는 10번홀 즈음 전체 선두로 올라섰고 전 세계 골프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10년간의 메이저에서 뒷심이 부족했다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파4 11번홀에 맞은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만다. 티샷은 바람에 밀려 갈대밭으로 갔고, 거기서 친 세컨샷 또한 당겨치면서 그린 주변 갈대밭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린 주변에서의 숏게임을 실패한 타이거는 결국 더블 보기를 기록하며 순위에서 미끌어졌고, 12번 홀에서도 아쉽게 보기를 기록하며 전날 대비 오히려 한 타를 잃고 말았다.

경기 후반 다시 버디를 기록하며 전 날의 스코어를 회복하긴 했지만, 타이거가 발휘한 힘은 딱 거기까지만 미쳤고 최종 6위[94]를 차지했다.

하지만 타이거가 우승권에 근접한 것만으로도 골프계는 들썩였다. 여전한 타이거의 파워.

해당 대회의 미국 중계권을 가진 NBC와 골프채널은 디오픈 최종 라운드 평균 시청률이 5%에 이르렀다고 밝혔는데, 이는 타이거가 우승을 차지한 2000년과 2006년에도 기록한 수치와 같다. 순간 최고 시청률은 타이거가 10번홀을 지나면서 선두로 올라섰다가 11번홀(파4) 더블보기로 내려앉을 때로 6.74%.

또한 4라운드까지 총 17만여명의 구름 관중이 필드를 방문, 커누스티 골프 링크스에서 치러진 The Open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우며 여전한 티켓 파워를 과시했다. 특별한 건강 문제를 보이고 있지 않은 타이거가 이처럼 메이저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하니 전 세계 스포츠팬들의 관심은 다시 PGA로 집중 되고 있는 중이다.

The Open에서의 성과로, WGC가 주최하는 Bridgestone Invitational에 참가 할 수 있게 되었다. 해당 대회에서 총 8회의 우승으로 올 타임 1위 선수로써, 그리고 메이저 대회에서 보여 준 인상적인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참가하였으나 첫 날 4언더, 둘째 날 2언더의 호조를 잇지 못한 채 3~4라운드를 내리 3오버씩 기록하며 최종 31위로 대회를 마쳤다.

3라운드 중간, 부상 재발설이 있었으나 본인은 이를 일축하였고 바로 다음 주 열리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 'PGA Championship'에서의 선전을 다짐했다.

대회 전 열린 프레스인터뷰에서는 지난 2009년 양용은과의 경기에 대한 질문도 받았으나 "다 지난 일이고, 양용은이 워낙 좋은 경기를 펼쳤었다. 많고 많은 PGA Championship 중 한 경기에 불과할 뿐."라고 답하였다타이거 우즈 "양용은에게 당한 역전패, 다 지나간 일".

첫 날은 이븐파인 70타로 평범한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버디를 4개 했으나 보기 2개, 더블 보기 1개의 불안정한 기록.

그러나 2~3라운드에서 4언더파 씩을 기록하며 토탈 8언더의 성적으로 TOP 5의 성적을 보여 주었고, 3라운드까지 1위를 달리고 있던 2018년 U.S. Open 챔피언인 '브룩스 캡카'와는 불과 4타차로 타이거에게는 10년 만의 메이저 챔프 기회가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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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경기력을 보여 준 PGA Championship 4라운드에서의 타이거

그리고 대회 최종일.

2~3번홀을 기분좋게 버디로 마무리 하며 출발한 타이거는 보기 1개를 기록하긴 했으나 2개의 추가 버디를 기록하므로써 3언더파의 성적으로 전반 9홀을 마친다. 타이거가 피치를 올리며 상위 그룹과의 격차를 줄이기 시작하자 갤러리의 일방적인 응원이 시작되었다. 방송국도 타이거의 한 샷 한 샷에 흥분하며 오랫 만에 메이저 우승컵을 쟁취할지에 대해 지켜 보며 리포팅 하였다. 전체적인 최종 라운드 흐름 속 주인공은 타이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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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갤러리 속 타이거의 샷 모습

후반 9홀에서도 4개의 버디와 1개의 보기로 추가 3언더를 기록한 타이거는 데일리 베스트를 기록하며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비록 우승은 후반전에도 지치지 않고 훌륭한 골프를 보여 준 브룩스 캡카에게 돌아가며 그의 시즌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 완성 되었지만 이미 타이거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부활극은 많은 갤러리와 골프팬들을 흥분 시키기 충분했다.

오랫 만에 메이저 대회에서 기록한 단독 2위의 성적.

경기를 마친 타이거는 공식 프레스 인터뷰에서 "다시 골프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고 털어 놓으며, "올해 얼마나 많은 대회에 출전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모든 대회가 나에겐 어려운 도전이었다"고 덧붙였다. 준우승자였으나 우승자와 다름 없는 대우를 받은 타이거는 이 대회에서의 선전으로 세계랭킹 51위에서 26위로 훌쩍 올라섰다.

이미 라이더컵에 부단장으로 선임된(단장은 짐 퓨릭) 타이거는 "선수로 뛰고 싶다"라는 욕망을 감추지 않았으며, 어려웠던 이번 대회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에 대한 자신감 또한 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이거의 선전에 따른 효과는 바로 시청률 수치에서 나타났다. 해당 대회를 중계한 미국 CBS 방송은 대회 최종 라운드 시청률은 6.1%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도 최종 라운드 시청률보다 무려 69%가 높아진 내용이자 양용은과의 접전으로 유명한 2009년 대회 최종일 시청률 7.5% 이후 가장 높게 기록된 수치이다.

메이저대회에서의 선전 후 타이거는 2주 후 플레이오프 첫 대회인 'The Northern Trust'[95]에 참가하였다. 퍼터 난조로 고생한 타이거는 본 대회에서는 4언더의 성적으로 공동 40위를 차지, FedEx 포인트 51점[96]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우승자는 미국의 브라이슨 디솀보[97].

다음 주에 열린 플레이오프 두 번째 대회 'Dell Technologies Championship'에 참가[98], 첫 대회 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한 그린 위에서의 불안한 플레이로 7언더 - 공동 24위 - FedEx 포인트 130점의 평범한 수치를 기록했다. 우승자는 2주 연속 브라이슨 디솀보가 차지하며 1, 000만 달러 우승 보너스를 차지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도달한 상황.

이틀 후 타이거는 꿈 같은 소식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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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컵 멤버로 최종 선출된 뒤, 기쁨의 포옹을 하는 타이거와 필

필 미켈슨, 브라이슨 디솀보와 함께 9월 28일부터 3일간 진행되는 '2018 Ryder Cup' 팀에 선발된 것. 이미 '부단장'으로 선임은 되어 있었으나 타이거가 원했던 것은 플레이어로써의 참가였기 때문에 큰 꿈을 이룬 셈. 예전에는 워낙 대단한 성적과 명성에 라인업에 포함되는 것을 걱정할 위치가 아니었으나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2012년을 끝으로 해당 대회에서 멤버로 선발되지 못했던 타이거였기에, 그리고 '부상 없이만 시즌을 치르는 것'이 목표였던 그였기에 감격이 매우 컸다고 한다.

2018년에 접어 들어 회복된 관계를 보인 필 미켈슨 또한 WGC 우승 등의 성과 덕에, 불안정한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최종 선발되며 둘 모두에게 감회가 새로운 순간이 되었다.

뭔가 심적 계기가 일어났는지 플레이오프 세 번째 대회인 'BMW Championship'의 첫 날 8언더를 치며 공동 1위로 치고 나왔다. 둘째 날 이븐파에 그치긴 했으나 남은 3~4라운드에서 각각 4, 5언더파를 치며 총 17언더파의 성적으로 공동 6위를 기록했다. 380 포인트를 추가로 따며 최종 30위 만이 출전할 수 있는 플레이오프 최종 대회, Tour Championship 진출 또한 확정 지었다.

그리고 맞이한 시즌 최종전 Tour Championship.

타이거는 드라마를 쓴다. 전 세계 골프팬들의 응원과 염원 속에 마침내 2018년 9월 24일, 무려 1, 876일 만의 투어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1라운드 65타를 치며 대회 선두로 나선 타이거는, 2라운드에서 2타를 더 줄이며 '우승'의 가능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3라운드에서 다시 5타를 줄이며 2위 그룹과 3타차 단독 선두를 달리자 우승 가능성에 대한 기사들이 줄을 잇기 시작하고 급기야 타 종목의 선수들도 경기 후 인터뷰 도중 타이거의 경기 결과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등, 골프계 외에도 많은 곳들이 들썩였다.

3타 차 선두 속에 맞이한 최종 라운드. 타이거가 3타 차 선두로 최종 라운드를 맞이했을 때 한번도 역전을 허용한 적이 없었기에 많은 이들은 오랫 만의 우승으로 투어 80승째를 거두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4라운드 경기를 관람했다.

첫 홀 버디 이후 전반 9홀은 지리한 파 행진이었다. 하지만 타이거는 무너지지 않았고, 누구하나 치고 나오지 못했다. 후반 홀에는 보기와 버디가 오간 끝에 1타를 잃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위가 9언더까지 밖에 쫓아 오지 못했고 18홀 앞에 선 타이거의 우승 확률은 거의 100%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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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PGA의 슈퍼스타 로리 맥일로이 마저 놀라고 설레였던 군중몰이. 타이거의 힘이다.

투온을 노리고 친 아이언샷은 비록 벙커에 빠졌으나 깔끔한 벙커샷으로 탈출, 가볍게 파로 마무리 하며 타이거는 그토록 염원하던 우승을, 5년 만에 손에 넣었다. 타이거 뿐만 아니라 많은 스포츠팬들과 동료들이 감격에 벅찼던 바로 그 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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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의 순간
‘2018 The Tour Championship, Round 4, Tiger's Highlights

우승 달성 후 로리와 포옹하며 좋은 라운드를 해주었음에 기쁨을 표한 타이거는, 오랜 기간 자신을 지켜 준 캐디 '조 라카바'의 머리를 스다듬으며 감회에 젖었다. 이후 여자친구 에리카 허먼과 키스하고, 에이전트 마크 스타인버그와도 포옹한 그는 많은 군중을 뚫고 스코어를 정리하기 위해 스코어 룸 앞으로 갔다. 그 앞에는 리키 파울러를 비롯한 투어 동료들이 감동을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고 이들과도 가벼운 인사와 함께 악수를 하였다. 최종 대회에서는 4위를 기록했지만, 토탈 FedEx 포인트 1위로 1, 000만 달러의 주인공이 된 세계 랭킹 1위 '저스틴 로즈'와도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 타이거는 스코어 기재가 끝난 뒤 곧바로 프레스룸으로 가서 대회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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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면에 웃음을 띄고 인터뷰에 임하는 타이거

"마지막 홀에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참고 제대로 샷을 치자'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 시즌 시작하면서 '우승'이란 건 아직 무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경기를 치르면서 나는 점점 나아졌고, 스윙을 되찾았고, 내 모습을 찾았다. 조만간 다시 해낼 줄 알았는데, 그게 오늘이 될지는 몰랐다."

그리고 아이들과 아버지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특히 11살 딸 샘과 9살 아들 찰리는 골프 선수 아빠의 능력을 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내가 골프를 치면서 아파한 것을 아이들은 계속 봐왔고 그들에게 있어 골프란 곧 '고통'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이젠 아이들도 아빠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았을 것이며, 골프라는 스포츠를 통해 기쁨과 감동을 맛 봤을 것이다."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 또한 지금의 저를 자랑스러워 하실 거라 믿습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마쳤다.

경기 후 타이거는 지난 주 대비 8계단 상승한 성적으로 세계 순위도 13위로 올라섰다. 한 때 1000위 밖으로도 밀려 나갔던 황제의 완벽한 귀환이 시작된 것이다. 라이더컵을 마치면 당분간 쉬겠다고 밝힌 타이거의 2019년 목표는 명확해 보인다.

세계 1위 탈환, 그리고 15번째 메이저 타이틀...
4.2.5.1. The Match: Tiger vs. Phil[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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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상금에서 1억 1,550만 달러(약 1,305억 원)를 번 타이거와 8,825만 달러(약 997억 원)를 벌어들인 필이 붙은 세기의 대결.

캐피털 원·터너스포츠· PGA투어·베팅회사 MGM이 기획하고 HBO를 통해 11월 23일(미국시간) 방영되었다. 라스베가스에 위치한 '쉐도우 클릭 골프 클럽'에서 열리는 본 대회는, 승자가 900만 달러[100]를 독식하는 매치 플레이 대회로, 스폰서나 VIP 등 소수의 인원만이 투입 되는, 일반 갤러리 없이 진행되는 매치이다. 최초의 유료 시청되는 골프 대회가 될 예정이었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결국 무료로 풀렸다.

승자 독식의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별도로 홀 당 내기도 진행하는 등 '상금이 걸리긴 했으나 친선 경기의 분위기'였던 이벤트는 시종일관 불타 올랐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니 타이거의 극적인 17번 칩인 성공으로 연장으로 접어 들었고 파3에서의 4번에 걸친 연장전 끝에 필이 승리하였다. 당초 도박사 예상에서는 타이거의 승리가 유력시 되었으나 필이 전반적으로 경기를 리드한 끝에 어렵게 승리한 것.

심지어 홀 당 내기에서도 필이 60만 달러, 타이거가 20만 달러를 획득하며 필이 완승하였다.[101]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하단 영상을 통해 확인해 보자.
Top-10 highlights from The Match

4.3. 2019년

2019년 첫 대회로 익숙한 토리파인스에서 열리는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에 출전하였다. 작년 복귀전보다 좋은 스코어로 10언더파를 기록하면서 공동 20위로 마쳤다 또한 마지막 날 언제나 입던 빨간 셔츠가 아닌 핑크색으로 보이는 셔츠를 입고 나왔는데 나이키의 답변으론 살짝 연한 색의 붉은 셔츠라고 한다.

그리고 제네시스 오픈과 WGC 멕시코 챔피언십에 출전했는데 특히 WGC에선 신기에 가까운 슬라이스 샷을 보여주면서 벌써부터 올해의 샷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통산 8승을 거둔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션에는 목 부상으로 불참하면서 부상 우려를 살짝 낳았다.

그러나 별거 아니었는지 금방 복귀했고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2라운드 17번홀까지 5언더파를 기록하면서 선두권을 넘보고 있었지만 17번홀 티샷한 볼이 물에 빠지고 벌타를 받고 친 공도 빠지면서 한번에 4타를 잃는 실수로 선두권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3라운드는 이븐파로 그냥저냥 평범한 경기력을 보였으나 라운드 시작전 한 갤러리가 우즈의 머그샷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응원온걸 보고 씩 웃고 지나가거나 전날 쿼드러플 보기를 범했던 17번홀에서 홀 바로옆에 붙인 뒤 케빈 나[102]의 퍼팅 습관을 흉내내는 등 갤러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순조롭게 마쳤고 마지막날 69타를 치면서 6언더파 공동 30위를 기록했다.

뒤이어 출전한 WGC 매치플레이에선 16강에서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자인 로리 매킬로이와 경기를 했는데 맥길로이가 타이거에게 기가 눌렸는지 부담이 됐는지 황당한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타이거는 안정적인 드라이버와 아이언으로 맥길로이에게 승리하였으나 8강에서 퍼팅난조로 짐을 쌌다. 그러나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자인 맥길로이와 대등한 경기력 그리고 작년보다 실수가 확연히 줄어든 모습을 보여주는 타이거는 2019년 마스터스를 맞이했다.
파일:타이거.jpg
11년 만의 메이저 타이틀 획득 in 오거스타

2019년 4월 15일(한국시각) 마스터스 토너먼트 우승을 통해 11년 만의 메이저 대회 우승, 14년 만의 마스터스 토너먼트 우승을 달성하면서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활에 성공하며 황제의 귀환을 알렸다.첫날 2언더를 치더니[103] 결국 마지막 라운드에서 토니 피나우(미국),프란체스코 몰리나리(이탈리아)와 함께 챔피언조에서 플레이한다.[104] 4번 홀에서 첫 버디를 기록했으나, 5,6번홀에서 보기를 기록해 힘든가 했지만 7,8번홀에서 연속버디로 바운스백에 성공했다.10번홀에서 보기를했으나 몰리나리가 12번홀에서 더블보기를 기록,타이거가 다시 처음으로 공동1위에 올라섰다.그 후 파5인 13,15번홀에서 2온 2퍼트로 깔끔하게 버디에 성공하고 파3 16번 홀에서 홀인원성 티샷으로 버디를 잡으면서 사실상 우승을 예약했다.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했지만 그래도 2위 브룩스 켑카와 더스틴 존슨 젠더 쇼플리에게 한타 앞서며 안정적인 1등을 하였다. 우승을 확정한 뒤엔 1997년 첫 우승때가 오마주 된듯한 아버지와 아들의 포옹[105]으로 감동을 주었다.
마지막 퍼팅과 아들과 아버지의 포옹 그리고 투어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타이거

그러나 그후 대회 출전자체가 뜸하다... 5월부터 8월까지 PGA 챔피언십-메모리얼 토너먼트-US 오픈-디 오픈으로 4개대회 출전에 그쳤는데 또한 허리수술의 후유증으로 인한 추위에 대한 약점을 드러내며 PGA와 디오픈에서 컷탈락 했다.[106]

10월 28일 일본 지바현의 아코디아 골프 나라시노 컨트리클럽(파70·7041야드)에서 막을 내린 PGA 조조 챔피언십(975만달러)에서 최종합계 19언더파 261타로 일본의 마쓰야마 히데키(16언더파 264타)를 3타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우즈는 지난 4월 마스터스 이후 약 6개월 만에 우승을 추가해 PGA투어 개인 통산 최다승 부문에서 샘 스니드(82승)와 함께 공동 1위가 됐다. 스니드는 47세에 82승을 기록했는데 우즈는 이보다 약 4년 어린 나이에 대기록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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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연히 우승을 했고, US 아마추어 주니어 선수권 3연패에 이어, 해당 선수권도 3연패를 달성했다.[2] 1903 ~ 2003,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언으로 ‘골프광’이기도 했다. PGA 투어에서도 ‘밥 호프 클래식’의 호스트를 맡아 대회 운영을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3] 일반적인 시니어 골퍼들, 즉 초등생 고학년 중학생 저학년 레벨에서는 1년 안에 80타 대에 도달은 한다. 하지만 8살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4] 1966 ~ 현재. 골프 역사상 한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 시대를 연 최초의 골퍼. 엄청난 장타를 뿜어 내지만 무명의 골퍼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대기 순번에 따라 겨우 참가 하게 된 메이저대회 1991년 PGA 챔피언십에서 12언더로 첫 우승을 거두며 일약 골프계의 슈퍼스타 대열에 들어섰다. 1995년 디 오픈에서도 우승하며 평생 한번 하기도 어렵다는 메이저를 2번이나 제패한 선수이지만 술과 여자, 성숙되지 않은 멘탈리티로 미국 스포츠 계가 원하는 대안이 되기에는 많이 모자랐고, 이 후 타이거 우즈가 등장하며 미디어 및 골프팬의 관심에서 완전히 밀렸다. 갤러리와 싸우고, 술 먹고 음주운전도 하고, 샷이 안 되자 치던 아이언을 물가에 집어 던지는 등 ‘필드의 악동’이라는 별칭에 딱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현재는 시니어 대회에 참여하며 우승도 거두는 등 여전히 미디어와 골프팬들의 관심을 받는 업계 셀러브리티로써의 존재는 유효하다. PGA 5승을 포함하여 이벤트 대회 포함 전 세계적으로 22승을 거두었으며 2003년에는 한국 오픈에 초대 받아 6언더를 치며 우승한 바 있다.[5] 존 댈리[6] 아직 현역 슈퍼스타 시절[7] 1943 ~ 현재. PGA 투어 프로 출신이나 성공은 하지 못하고 레슨 프로로써의 삶을 시작. 1990년대 초반 당시 세계 1위였던 그랙 노먼의 레슨 프로로 이름을 날린 뒤, 타이거 우즈가 프로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아 지금은 세계 최고의 교습가 중 한명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필 미켈슨을 비롯, 어니 엘스 - 아담 스콧 – 더스틴 존슨 – 리키 파울러 등이 그의 손을 거쳐 간 유명 프로들.[8] 2년에 한번 개최되는 미국과 영국의 아마추어 골프팀 대항 경기로 아마추어의 ‘라이더컵’이라고 불리운다. 명칭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증조부인 조지 허버트 워커[107]의 이름을 땄다.[9] 인디언 혈통을 가진 전 PGA 투어 프로. 1999년과 2000년도에 각각 2승씩 거두었으나 이 후에는 침체를 겪었고 결국 은퇴, 현재는 골프 채널의 해설자를 맡고 있다. 특히 타이거에 대한 민감한 소식은 거의 이 사람 전문이라 봐도 무방하다.[10] 2017년 현재까지 Masters Tournament 실버컵 수상자 중 프로에 입문하여 다시 Masters Tournament를 제패한 사람은 총 6명이며, 캐리 미들코프(PGA 투어 40승, 메이저 2회 우승의 명 선수), 벤 크랜쇼(PGA 투어 19승, Masters Tournament 2회 우승의 퍼팅의 마술사), 잭 니클라우스, 필 미켈슨, 타이거 우즈와 스페인의 세르히오 가르시아가 있다.[11] The Open Championship의 ‘실버 컵’으로, 역대 수상자 중 프로가 되어 The Open Championship을 우승한 선수는 단 2명이다.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매킬로이.[12] 타이거 우즈가 프로 무대에 등장하기 전인 1996년 초를 기준으로 정리하였다.[13] 1957 ~ 현재. Masters Tournament 3회 + The Open Championship 3회 등 총 6회의 메이저 우승에 빛나는 영국 출신의 레전드 골퍼. 현재는 Sir. 닉 팔도이다. 프로 골프 선수들에게 터부시 되던 ‘레슨 프로’의 역할론에 대해 몸소 보여주었던 최초의 사례로 그 스스로가 레슨을 받으며 기존의 스윙을 완전히 뜯어 고치며 좌충우돌한 끝에 세계 1위의 골퍼로 까지 성장하였다. 그 ‘레슨 프로’는 바로 데이비드 레드베터로 얼마 전까지 리디아 고의 스승으로 한국 골프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레슨 프로’의 전설적인 인물 중 하나.[14] 1955 ~ 현재. 세계 1위 타이틀을 331주 보유하며 역대 2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호주 출신의 레전드 골퍼. The Open Championship 2회 우승의 메이저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으나 나머지 3개 메이저에서는 모두 2위의 분루를 삼킨 바 있다. 별명은 ‘백상어’로 그의 챙 모자(Straw Hat) 이미지 또한 매우 유명하다. 골프 역사상 드라이버를 가장 멀리, 곧게 쳤던 인물 중 하나.[15] 1929 ~ 2016. 역대 5위의 PGA 62승 등 프로 통산 95승을 거둔, 그리고 오늘 날의 범 대중적인 스포츠로 골프가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한 레전드 골퍼. PGA Championship을 제외한 나머지 3개 메이저에서 총 7회의 우승을 거두었고 은퇴 뒤에는 사업과 사회 봉사로 대중들의 변함 없는 사랑을 받았던 인물.[16] 1980~1990년대 중반을 거치며 빛나는 플레이들을 선 보인 수 많은 프로 골퍼들을 비난한다라기 보다, 훗날 등장한 타이거 우즈의 영웅적 퍼포먼스에 빗대어 표현한 글이니 참고 바람.[17] 1957 ~ 2011. 창조적인 골프로 유러피언 투어는 물론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던 골퍼. 유러피언 투어 통산 50승은 역대 1위의 기록이며, Masters Tournament 2회 및 The Open Championship 3회로 총 5회의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2011년 뇌종양으로 이른 나이에 병사.[18] 잭 니클라우스의 경우는 20여년간 쌓아 올린 업적이었고, 늘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지만 ‘압도적’이라 불리울 정도로 다른 경쟁자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나 아놀드를 비롯, 게리 플레이어 – 리 트레비노 – 톰 왓슨 등의 경쟁자들이 함께 했었다. 최소 10년간 경쟁자를 두지 않고 2인자들만 잔뜩 배출한 타이거에 비한다면 ‘지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선수는 아니다.[19] 타이거 우즈 등장 후의 커리어를 정리하였다.[20] 1964 ~ 현재. 프로 통산 36승에 PGA 투어 21승을 거둔 배테랑 골퍼. 1997년 PGA Championship 우승으로 메이저 1승을 보유 중. 현재는 시니어 투어에서 뛰고 있으나 PGA 투어에서도 2015년 ‘윈덤 챔피언십’에서 7년 만의 우승을 거두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아들 ‘데이비스 러브 4세’도 PGA 투어 프로.[21] 참고로 골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샷 중 하나가 될 2005년 Masters Tournament에서의 타이거 우즈 칩샷과 거의 동일한 퍼포먼스를, 동일 대회에서 먼저 성공 시킨 사례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타이거는 우승, 러브 3세는 우승에 실패하였다는 것. 데이비스 러브 3세, 환상의 칩 샷 in Masters Tournament[22] 타임 워너 소속의 미국 스포츠 주간지. 본지도 유명하지만 64년부터 시작한 ‘수영복 특집’은 매우 유명하다.[23] 보통은 드라이버 티샷 – 우드나 롱 아이언으로 세컨샷 – 숏 아이언이나 웨지로 온 그린. 이걸 타이거는 드라이버 티샷 – 숏 아이언으로 온 그린이라는 파격을 선 보인 것. 장타를 날릴 힘은 물론 원하는 곳으로 샷을 할 줄 아는 정확성이 겸비되지 않으면 어려운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이야 PGA 투어라면 너도 나도 하는 플레이지만, 1997년 당시에는 매우 드문 모습이었다.[24] 파4 기준으로, 티샷 – 세컷샷을 하고 나면 ‘버디’를 위해서는 첫번째 퍼트가 필요하다. 실패 하면 파 세이브를 위해 2번째 퍼트를 시도 해야 하고 이 조차 실패하면 결국 3번째 퍼트로 ‘보기’를 기록하게 된다.[25] 후반 11 ~ 13번홀을 의미. 3개 홀을 지나고 나면 저절로 ‘아멘’이라고 외치게 된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은 아놀드 파머가 1958년에 이 구간에서 기적적인 샷을 성공 시킨 뒤 ‘아멘’이라고 외친 것에서 인용 되었다. 범 대중적으로 이 워딩을 알린 것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였던 허버트 워렌 윈드의 기사를 통해서이다.[26] 출처: '골프의 상징' 타이거 우즈가 바꿔놓은 마스터스의 역사 by 美스테리한 기자들, 17.3.31자 기사 중.[27] 오른손 골퍼 기준으로, 타겟을 향해 가던 볼이 급히 좌로 방향을 트는 것을 의미. 체중이 뒤에 남거나 급히 다운 스윙을 하여 엎어치는 형태가 될 때 나오는 구질로 볼 수 있다.[28] 98년의 상금 1위는 미국의 데이비드 듀발로, 총 4승으로 다승 1위이기도 했다.[29] 아놀드 파머가 ‘아놀드파머 인비테이셔널’이라는 대회의 호스트 이듯, 잭 니클라우스가 호스트로 있는 대회. 메이저는 아니지만 메이저급 주목도와 난이도를 자랑하는 대회이다.[30] 1957 ~ 1999. PGA Championship과 U.S. Open에서 각각 1승을 거두며 통산 메이저 2승, PGA 투어 11승에 빛나는 스타 골퍼였다. 니커보커 스타일의 독특한 개성으로 유명했으며 필 미켈슨과 자웅을 겨룬 1999년의 U.S. Open은 그야말로 커리어의 대미였는데, 대회가 끝난 후 4개월 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 하며 세계 골프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매년 U.S. Open이 열리는 6월쯤이면 반드시 언급되는 골프계의 영원한 레전드 중 한 명.[31] 최종 라운드 파트너였는데 거의 TV에 못 나왔다. 올 타임 레전드급 선수인데도…[32] 말이 좋아 라이벌리지 솔직히 필도 타이거를 라이벌로 보지 않는다. 그럴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 자세한 내용은 '여담' 항목에서.[33] LPGA는, 여자 골프계의 잭 니클라우스로 평가 되는 베이브 자하리스(1911 ~ 1956)가 1950년에 달성한 바 있다.[34] 약 272.5m[35] 1위는 존 댈리의 301.4야드[36] 요즘이야 타이거보다 멀리치는 선수들이 꽤 되지만 이때만 해도 타이거 보다 멀리치는 선수는 존 댈리 밖에 없었다. 타이거는 이때만큼은 확실히 장타자로 분류되었고 또한 밑의 스탯에서 나타나듯이 단타자들의 능력이였던 정확성까지 겸비하고 있었다.[37] 장타자들은 대부분 페어웨이 적중률이 낮다. 하지만 페어웨이에서 멀지 않은 러프라면 잔디가 성기지 않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는 편. 그래서 정확히 치기 보다는 짧고 안전하게 세컨샷을 하기 위해 멀리 치는 것을 선호 하는 편.[38] 드라이브 샷 거리 + 페어웨이 적중률을 고려한 방식[39] 벙커에서 공을 빼내어 파 세이브를 할 확률[40] 라운드당 버디 회수[41] 제 5의 메이저라고 칭해지는 대회로, 상금이 메이저급이며 난코스로 유명한 대회. 특히 대회장인 TPC 소크래스의 파3 17번홀은 시그니처 홀로써 PGA 투어에서도 가장 유명한 홀 중 하나이다. 한국의 선수로는 2011년 최경주, 2017년 김시우가 우승을 차지하는 등 인연이 깊은 대회이다.[42] 여자는 슈테피 그라피, 마거릿 코트가 달성[43] 사실 남긴 성적이나 업적으로 보아 벤 호건은 이미 넘었고, 잭 니클라우스와 동급 혹은 우위급이다. 다만, 메이저 대회의 성과가 유난히 중요시 되는 종목이다 보니 올 타임 우승(18승) 및 준우승 회수(19회) 1위인 잭 니클라우스의 위상이 쉽게 떨어질 리는 없을 것이다.[44] 현재의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45] 1969 ~ 현재. 2001년 및 2004년 U.S. Open 챔피언. PGA 7승을 포함, 프로 통산 36승을 거둔 톱 클래스 골퍼.[46] 전년도 챔피언이 입혀 주는 것이 관례이나 2년 연속 우승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다.[47] 1870 ~ 1937. 골프 역사 초기의 위대한 골퍼로, 현재는 오버래핑 그립으로 불리는 즉 오른손 새끼 손가락을 왼손 집게 손가락에 포개는 ‘바든 그립’의 창시자이다. The Open Championship 6회 우승은 역대 최다의 기록. 최저타수상인 ‘바든 트로피’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48] 1902 ~ 1999. 역사상 최초의 골프 그랜드 슬래머. 모래에서 손쉽게 볼을 쳐 내는데 용이한 ‘샌드웨지’의 개발자이기도 하다.[49] 1902 ~ 1971. The Masters 대회의 창설자 중 하나. 끝내 프로에 전향을 하지 않고 아마추어로 남았던 인물로(본업은 변호사였다) 본인이 창설한 마스터스가 4대 메이저로 발돋움하기 전의 4대 메이저 대회가(US 아마추어, US 오픈, 브리티시 아마추어 챔피언십, 브리티시 오픈) 운영되던 시절에 유일무이한 '캘린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인물이다.[50] 1949 ~ 현재. 미국 출신의 레전드 골퍼. 역대 11위에 해당되는 PGA Tour 39승을 비롯, 프로 통산 70승을 거뒀다. 4대 메이저 중 3개 대회 우승 경험이 있다. 특히 The Open Championship에서 특히 강점을 보여, 역대 2위인 통산 5회의 우승을 자랑하며 60세가 다 되어 출전한 2009년 대회에서도 '거의' 우승할 뻔 했다. 마지막 한 홀에서 보기를 하는 바람에 연장에 끌려가 패배했기 때문이다. 1988년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었다.[51] 1~2라운드를 통해 컷을 통과한 선수들은, 3라운드 본선 부터는 성적 순위에 따라 라운드 순번을 배정 받는다. 성적이 끝에 있는 선수가 가장 먼저 라운드를 시작하며, 1위권에 있는 선수가 소위 말하는 ‘방송조’로 편성이 되어 오후에 티업 시간이 잡힌다.[52] 여담이지만 모 선수는 200여 야드의 파 3에서 드라이버를 잡아야 했다고 술회했다. 드라이버 샷이 가다가 멈추고는 다시 티를 향해 달려 왔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로 그 날의 악천후는 역대급으로 남아 있으며 왜 경기를 강행했는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대회가 끝나고도 멈추지 않았다[53] 우승자는 남아공의 어니 엘스. 본인 커리어의 세 번째 메이저 우승이자 첫 번째 The Open Championship 타이틀. 그 전까지는 U.S. Open만 2회 우승한 바 있었다. 현재까지 통산 4회의 메이저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앞서 말한 2개 메이저 대회에서 각각 2회씩 달성했다.[54] World Golf Championship. 국제프로골프투어연맹이 주관하는 대회로, PGA / 유럽 / 일본 / 호주 / 남아공 / 캐나다 / 아시아(일본, 호주 제외) 투어 등 총 7개 투어가 참가하고 있음. 1년에 4개 대회가 열리며 컷오프가 없는 대회로 참가만 하면 상금이 주어지나 참가 조건 자체가 매우 까다롭다. 세계 랭킹 상위권이 배정 받는 대회로, 프로 골퍼들에게는 메이저 대회 다음으로 높이 평가 받는다. 4개 대회의 스폰서는 지속적으로 변화 되었고 2017년 현재는, 멕시코 챔피언십 – 델 매치 플레이 –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 – HSBC 챔피언스로 구성 되어 있다.[55] 2명이서 한 홀 마다 승패를 겨루는 방식. 18홀 스트로크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어 각 투어별로 연간 1회 정도의 매치 플레이 대회가 열린다.[56] 노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포트 브래그. 아버지 얼 우즈가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57] 1968 ~ 현재. PGA 투어 3승을 거두고 있는 베테랑 골퍼. 메이저에서도 강한 편이라 우승에 많이 근접했으나 결론적으로는 단 1승도 못했다. U.S. Open에서만 최고 순위가 9위였고, 나머지 메이저에서는 모두 2위까지 해봤다. 이 중 2번은 타이거 때문에 2위. (시대를 잘못 만난) 아쉬움이 클 만 하다.[58] 훗날 타이거의 칩샷이 정확히 동전 모양을 때리고 굴러 가는 순간부터 본인은 닭살이 돋았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59] 1935 ~ 현재. 잭, 아놀드와 함께 따로 항목을 만들어야 할 레전드 골퍼 중 한 명이었다. 남아공 출신으로 PGA 투어 24승을 포함, 시니어 프로가 된 지금까지 통산 승리를 합치면 165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찍은 선수다. 그랜드 슬래머 중 한 명으로 Masters Tournament와 The Open Championship을 각각 3회 우승, U.S. Open 1회, PGA Championship은 2회 우승을 달성했다. 70세 이후에도 누드 사진을 스포츠 잡지 표지에 올리는 등 건강하고 정력적인 모습으로 모두의 존경을 사고 있는 리빙 레전드.[60] 1912 ~ 1997. PGA 45승 포함 통산 64승을 거둔 선수로, 그랜드 슬래머 중 한 명이다. 현대 골프의 아버지로 불리며 골프 스윙의 이론을 정립시킨 인물로 평가 된다. 1957년에 발간한 ‘Five Lessons’는 한 동안 골프 레슨프로와 꿈나무들의 필독서였다.[61] 1969 ~ 현재. PGA Tour 통산 1승 기록. 이 1승이 메이저 타이틀이다.[62] 현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63] 대회 2연패[64] 12오버파라 충격적인 숫자로 생각하겠지만, 당시 대회가 열린 윙드풋은 역대 U.S. Open 최고 난이도 대회장 2위를 기록할 정도의 난코스이다. 우승자인 호주의 제프 오길비가 총 5오버파로 우승했을 정도.[65] 1892 ~ 1969. 미국 출생. PGA 45승 포함 통산 75승을 거둔 선수로, 메이저에서는 Masters Tournament를 제외한 나머지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달성한 바 있다.[66] 1977 ~ 현재. 전성기인 2011 ~ 2012년에 40주 동안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하기도 했던, 칼날 같은 아이언과 정교한 숏 게임을 자랑하는 선수. 2011년에는 사상 최초로 PGA 투어와 유러피언 투어의 상금왕에 등극하였고, 이런 활약으로 PG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깔끔한 용모와 스윙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골퍼이지만 메이저 우승 기록이 없는 것은 아쉬움. 4개 대회 모두 TOP10은 기록했으나 우승과의 연은 아직 맺지 못한 상태이다.[67] 샷을 성공한 뒤 어처구니 없는 표정 후 함박 웃는 타이거의 미소는 매우 귀엽다. 하지만 스티브에 이끌려 그린에 올라 와서 절뚝 대는 걸 보면 확실히 무릎 상태는 최악이었음에 분명하다.[68] 1962 ~ 현재. PGA 투어 통산 6승을 기록 중인 베테랑 골퍼.[69] 1973 ~ 현재. 영국 출신의 프로골퍼. 주로 유러피언 투어에서만 뛰었으며 PGA에서는 통산 2승. 프로 커리어 전체로는 현재 42승을 기록 중인 베테랑이다. 안정된 경기력을 바탕으로 2010년에 스캔들로 자리를 비운 타이거를 대신하여 세계 1위에 오른 바 있다. 메이저 4개 대회에서도 모두 공동 3위 이상은 기록했으나 현재까지 우승은 경험하지 못한 비운의 골퍼이기도 하다.[70] 로코는 훗날 “당연한 이야기지만, 타이거가 넣을 줄 알았고 나는 안 들어가길 바랬다. 내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이라고 말했다.[71] 둘 중 한명이 이기는 홀이 나오면 경기가 끝나는 형식. 일반 대회에서 플레이오프 경기는 이렇게 치르는 경우가 많다.[72] 1~4라운드 중 모든 라운드를 1위로 마치며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뜻함[73] 1972 ~ 현재. 최경주에 이어 PGA 투어에 진출한 두번째 한국인 선수. PGA 통산 2승을 가지고 있는데 최경주 조차 품어 보지 못한, 아시아 최초 그리고 2017년 현재까지 유일한 메이저 타이틀 보유자이다.[74] 타이거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호주의 미남 골퍼 ‘아담 스콧’의 백을 잠시 메었던 것이 이유였다.[75] 투어 정식 우승에 포함되진 않지만 세계 랭킹 포인트는 적용된다[76] 현 'Hero World Challenge’[77] 타이거의 (현 시점에서) 마지막 전성기인 2013년도의 표지인데, 최근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짙게 드리워진 정서가 느껴진다. 과연 타이거는 다시 Back(복귀)할 수 있을까.[78] 물론, 휴 헤프너는 "타이거 우즈같이 매력적인 남자의 마누라는 다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라는 놀라운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79] 1979 ~ 현재. 2010년도 U.S. Open 챔피언. PGA 통산 3승 포함 프로 통산 14승을 기록 중인 선수. 작은 체구에 비거리도 짧은 편이지만 언제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80] 1912 ~ 2002. PGA 투어 82승으로 역대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프로로써는 모두 165승이나 거둔 레전드 골퍼. ‘Slamming Sammy’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으며 그 별명에 걸맞은 장타자로 투어 역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메이저는 도합 7승을 기록했는데, 필 미켈슨과 마찬가지로 U.S. Open만 손에 넣지 못해서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달성은 실패한다. 동시대에 활약한 바이런 넬슨 – 벤 호건과의 라이벌리도 유명했다.[81] 어째 타이거의 커리어에 비해 이 대회에선 우승 회수가 적다[82] 세르히오가 샷을 하기 직전에 타이거가 일부러 갤러리의 환호를 이끌어 내는 행동을 했다는 비난. 물론 이 건으로 타이거 보단 세르히로가 훨씬 많은 비난을 받았다.[83] 모 이벤트에서 인터뷰 중 "U.S. Open 때 타이거를 집으로 초대할 것인가?(즉, 화해의 의사가 있느냐는 물음)"라는 질문에 "만약 그가 우리 집에 오면 프라이드 치킨을 대접하려 한다" 라고 답변을 했는데 흑인과 프라이드 치킨을 엮는 것은 인종차별로 인식된다. 이로 인해 세르히오는 골프팬들의 집중 비난과 스폰서인 ‘아디다스’와의 계약 마저 끊어질 뻔 했다.[84] 오히려 조롱 당했다. 주말 골퍼 중에서 나이키 용품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 나이키 용품이 아닌 다른 브랜드를 썼더라면 타이거가 더 우승했을 것이라는 소문도 많았을 정도. 실제 용품의 재질 문제라기 보다, 브랜드 평판을 낮춘 몇몇 제품의 실패에 따른 낙인이라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용품 철수 이후에도 드라이버를 제외하면 우드나 아이언은 나이키 용품을 쓰는 선수들이 있다.[85] 드라이버 - 테일러메이드, 볼 - 브리지스톤 등[86] 메이저 대회만 따지자면 The Masters 공동 32위, U.S Open는 컷 탈락을 했다. 하지만 이 후 The Open 공동 6위, PGA Championship 단독 2위의 호성적을 내며 다음 시즌에의 기대감을 키웠다.[87] 그것도 2017 ~ 18 시즌 최종 경기인 Tour Championship에서의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이었다.[88] 예전엔 흔치 않았던 행동이다. 40살이 넘어서 둥글둥글해진 것인가...[89] 어니 엘스의 별명. 엄청난 거구와는 달리 부드럽고 손쉬운 스윙으로 빅 샷을 날리는 것에 비유[90] 1959년~현재. 별명은 'Dr. Boom Boom'. 올타임급 장타자 골퍼로써 유명하다. 특별히 힘들이지 않은 리드미컬한 스윙 속에서 나오는 장타인지라 아마추어들이 동경하는 스윙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92년 Masters Tournament 우승으로 통산 메이저 1승을 보유 중. PGA 투어 15승 - 챔피언스 투어 13승 등 평생을 괴롭히고 있는 허리 디스크 속에서도 늘 꾸준한 성적을 올리고 있는 베테랑.[91] 웹 심슨. 미국 출생으로 2012년 U.S Open 챔피언 경력자이다.[92] 일반적인 1자형 퍼터 모양[93] 납작한 모양의 퍼터로 시각적으로는 블레이드 보다 편해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자세한 설명은 2018 Hot List 10편 - 말렛 퍼터 에서 보도록 하자.[94] 우승은 총 8언더의 성적으로 2위 그룹을 2타차로 따돌린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시스코 몰리나리가 차지했다.[95] 2007년부터 오픈한 일반대회였으나 2017년 시즌부터 플레이오프 대회로 변경되었다. 기존의 플레이오프 대회 중 하나였던 'Barclays' 대회의 대체 대회이다.[96] 플레이오프는 FedEx 포인트제의 합산으로 최종 1, 000만 달러의 우승 보너스를 받는 대회이다.[97] 1993년 ~ 현재. 미국 출신의 골퍼. 영문으로는 Bryson DeChambeau로 한글표기상 '디솀보'로 되어 있으나 '디셈보'도 상관 없다. 2017~18시즌까지 투어 통산 4승을 기록한 신예 골퍼로, 헌팅캡을 쓰는 독특한 패션과 스윙으로도 유명하지만 물리학도로써 모든 아이언 샤프트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플레이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논란이 있었지만 투어 데뷔 후 4승이나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그라든 편.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골퍼들이 그의 의견을 따를지가 관건이다.[98] 시즌 FedEx 포인트가 모자라면 첫 번째 대회 결과에 따라 두 번째 대회 참가가 불가할 수도 있다. 타이거는 Major 대회에서의 선전으로 포인트를 꽤 따놓은 편이라 큰 이변이 없다면 세 번째 대회까지는 참여가 가능했다.[99] 본 문서는 필 미켈슨 항목의 글을 옮긴 내용이다.[100] 한화 약 100억원[101] 내기에서 얻은 합산액수 80만 달러는 자선 단체에 기부 되었다.[102] 1983 ~ 현재 PGA통산 4승을 기록중인 한국계 미국인으로 타이거의 옛 스윙코치였던 부치 하먼이 타이거처럼 아마추어때부터 스윙코치를 맡은 유이한 선수다. 최근 한국에선 사실혼 관계에 있던 전 여자친구와 법정다툼을 벌이기도 했다.[103] 마스터즈에서 우승한 4승중 3승을 거둘때 모두 1라운드에 70타를 쳤다. 또한 1라운드 70타 이하를 기록했을 때 타이거는 언제나 톱텐 안에 들었다.[104] 2009년 PGA 챔피언십 이후 타이거는 메이저 대회 챔피언조에서 경기하는 것은 10년 만이였다.[105] 97년엔 아비지 얼과 19년엔 아들인 찰리와[106] 물론 작년과는 다르게 메이저 대회 일정 자체가 빡빡해졌으며 메이저 전 주에 대회 출전을 꺼리는 타이거 특성상 메모리얼 토너먼트 정도를 제외하면 일반대회 출전할 짬이 안나긴 했다 또한 본인의 몸상태가 예전의 모습도 아니기 때문에 출전 대회 수를 작년보다 줄이면서 조심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