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찬 레이트너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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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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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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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 |
| 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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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찬 레이트너 Christian Laettner | |
| 본명 | 크리스천 도널드 레이트너 Christian Donald Laettner |
| 출생 | 1969년 8월 17일 ([age(1969-08-17)]세) |
| 뉴욕 주 앵골라 | |
| 국적 | |
| 학력 | 듀크 대학교 |
| 신장 | 211cm (6' 11") |
| 체중 | 107kg (235 lbs) |
| 포지션 | 파워 포워드 / 센터 |
| 드래프트 |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지명 |
| 소속 구단 |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1992~1996) 애틀랜타 호크스 (1996~1998)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99~2000) 댈러스 매버릭스 (2000~2001) 워싱턴 위저즈 (2001~2004) 마이애미 히트 (2004~2005) |
| 지도자 | 포트 웨인 매드앤츠 코치 (2012) |
1. 개요
미국의 전 농구선수. 그 유명한 1992년 올림픽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었던 유일한 대학 선수이기도 하다.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
고화질 영상은 이쪽
듀크 대학교 소속으로 4년 연속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 Final Four에 진출했으며, 91년에 이어 92년까지 2년 연속으로 NCAA 우승을 견인한 대학농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이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잘생긴 백인 미남 선수였기 때문에 흑인들이 지배한 농구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로 기대를 모았다. 버저 비터로 듀크의 우승을 확정지은 것이 압권.[1]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1기 시절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2년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이른바 드림팀 1기에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선발된다. 1988 올림픽까지 그랬듯 NBA 선수 없이 대학 선수끼리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레이트너가 팀의 에이스가 됐겠지만, 쟁쟁한 NBA 올스타가 총출동한 드림팀에서 레이트너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유일하게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드림팀 안에서는 "College kid" 라고 불렸으며, 당시 드림팀 멤버들은 33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를 "College kid" 라고 부른다. 그나마 레이트너는 4.8점을 득점해서, 부상 회복 중이었던 존 스탁턴을 제치고 꼴찌는 면했다.
사실 미국 1기 드림팀은 지구의 다른 어떤 국가대표팀도 상대가 안 될 막강한 팀이었다. 허리가 아작나 제대로 뛰지도 못하던 래리 버드와 은퇴 상태였던 매직 존슨을 상징성을 우선해서 데려온 것도 그렇고, 6' 6" 미만인 선수가 존 스탁턴 하나일 정도로 로스터 밸런스에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대회 내내 타임아웃을 한번도 안 부르고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올림픽에서 불과 7.6분 뛴 레이트너, 부상 회복 중이라 7.3분만 뛰었던 존 스탁턴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은 17~23분 사이 균일한 출장시간을 기록할 정도로 코치진 입장에서 이기기 위한 운영보다는 올스타전처럼 섭섭치 않게 출장시간을 배분하는데 중점이 된 운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몸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버드조차 18분이나 뛰었는데, 너무나 압도적인 전력이라 별 부담이 없는 경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팀에서 레이트너의 존재에 큰 의미는 없었다. 레이트너 외의 대학생 선수 후보로는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지미 잭슨, 해롤드 마이너 등이 있었는데, 초대형 유망주인 오닐과 모닝을 제치고 레이트너가 선발된 것이 후대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오닐과 모닝이 훨씬 대성할 것으로 여겨지긴 했어도 오닐과 모닝의 팀은 2라운드 탈락한 반면 레이트너는 2년 연속 우승에 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차지할 정도로 최고의 대학선수였기 때문에 상징성을 고려하면 딱히 부당한 선발은 아니었다.[2]
2.2. NBA 데뷔 이후
2.2.1.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지명을 받아 1992년 드래프트에서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에 이은 3순위로 데뷔했으며, 대학 시절의 포스에 잘생긴 외모까지 갖춰 아직 신생팀 딱지를 벗지 못한 미네소타의 간판 스타가 될 것이라 여겨졌다. 미네소타에서의 시즌별 평균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92-93: 81경기 18.2득점 8.7리바운드 2.8어시스트 1.0블록 1.3스틸
- 1993-94: 70경기 16.8득점 8.6리바운드 4.4어시스트 1.2블록 1.2스틸
- 1994-95: 81경기 16.3득점 7.6리바운드 2.9어시스트 1.1블록 1.2스틸
- 1995-96: 44경기 18.0득점 6.9리바운드 2.9어시스트 1.0블록 0.9스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키 시즌에 이미 수위급 빅맨으로 활약하며 평년 드랩이라면 신인왕도 노려볼만한 활약을 펼쳤지만, 앞서 지명된 샤킬 오닐과 알론조 모닝이 워낙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3] 거기다 레이트너는 루키 시즌이 득점 커리어하이 시즌일 정도로 이렇다 할 성장세가 없었는데, 어찌보면 대학 4년을 거치면서 NBA에 입성하자마자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을 완성했지만 그 이상의 실링은 없었던 셈. 그러다 훗날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의 선수로 성장할 당시 고졸 출신의 케빈 가넷이 입단하여 알력이 생기자 4년차 도중 거의 내쫒기다시피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됐다.
2.2.2. 애틀랜타 호크스 시절
그래도 이적 직후 당시 강팀이었던 애틀랜타의 한 축으로 활약하며 미네소타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플레이오프 무대를 처음으로 밟을 수 있었다. 그 다음 시즌에는 82경기를 모두 소화하며 18.1득점 8.8리바운드 2.7어시스트 0.8블록 1.2스틸을 기록했으며, 커리어에서 유일한 올스타 선정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당시 애틀랜타는 꽤나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엄청난 골밑 수비력을 자랑하던 레전드 센터 디켐베 무톰보, 조던과 페이튼 바로 다음가는 수준의 가드 수비수이자 포인트 가드로서 득점과 어시스트도 고루 해주는 무키 블레이락, 평균 20득점을 기대할 수 있는 스윙맨 스티브 스미스가 있는 팀에 나름 수준급 공격형 빅맨인 레이트너가 합류한 것.
블레이락과 스미스, 그리고 레이트너는 호크스에서 뛰는 동안 각각 한 번 씩은 호크스의 선수로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특히 무톰보는 명예의 전당까지 올랐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한 구성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레이트너는 올스타에 선정된 바로 다음 시즌인 1997-98시즌에 부진에 빠지고 급격히 내리막을 탔다.
2.2.3. 이후
디트로이트 이적 후 부상을 당한 뒤 그나마 준 에이스급의 기량마저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댈러스, 워싱턴, 마이애미를 거치며 롤 플레어로 활약하다가 2005년에 은퇴했다.3. 평가
커리어 전반을 요약하면 대학 농구계에서는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NBA에서는 대학 시절 기대치와 위상을 그대로 이어가지 못했고, 결국 드림팀 1기 멤버들 중 개인 자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 유일한 선수로 남았다.[4] 애당초 그는 명전의 문턱을 두드려보긴 커녕 All-NBA Team에도 선정된 적이 없으며,[5]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대학시절 그의 드림팀 참가 이력이 마치 초사이어인들 사이에 크리링이 끼어있는 것마냥(...) 기묘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6]다만 그렇다고 별볼일 없거나 그냥저냥 널려있는 수준의 선수로 기억되기는 뭣 한게, 어쨌든 레이트너는 대학 4년을 꽉 채우고 넘어와 NBA에서도 나름 장수하며 통산 누적 득점도 10000점은 넘긴 선수다. 한 번이라지만 올스타에도 선정되었으니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수준급의 커리어를 보낸 선수가 맞겠으나, 너무 높았던 대학 시절의 업적 및 기대치나 드림팀 1기 멤버라는 출신 성분에 비하면 여러모로 너무 아쉬운 족적이라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미네소타 시절에 들어온 20년만의 고졸 출신 루키인 케빈 가넷이 역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 중 하나로 거듭난걸 생각하면 레이트너의 커리어는 더욱 아쉬운 편이다.
레이트너는 확실한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다방면에서 공헌할 수 있는 선수였으며, 전성기 기준으론 약팀의 에이스나 플옵권 팀의 2~3옵션 역할까지는 가능한 선수였다. 어찌보면 한때 같이 뛰었던 톰 구글리오타, 후대 선수인 키스 밴 혼과 비슷한 정도의 위상.[7] 당시 빅맨 중 슛거리가 상당히 긴 편으로 슈팅터치도 괜찮아 4할 후반대 야투율, 8할이 넘는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했으며, 패스나 시야를 포함한 농구센스도 나쁘지 않았다. 수비에서는 파워가 강한 편이 아니어서 림프로텍팅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해준 편. '센터급 장신에 적당한 파워, 수비나 골밑장악능력보다는 공격 위주'란 점에서 좀 거칠게 표현하면 보급형 케빈 맥헤일 정도 되는 선수인데, 지금은 3점을 세트슛으로 쏠 수 있는 장신이 롱2를 잘 쏘면 바로 두세 걸음 뒤에서 쏴보라고 하며 3점슛 장착을 권유하는 시대지만 레이트너는 3점슛 자체가 지금처럼 부각되지 않던 시대의 선수라서 현대 기준으로는 스타일이 딱 맞는 비교군을 찾기 애매하다.
종합적으로는 전성기 때 꽤 잘했던 선수라고 정리할 수 있으며, 사실 두드러지는 약점은 하나도 없는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뛰어난 점도 딱히 없는 선수라 팀 입장에서 애매한 상황을 정리할 때 보내기도 쉬운 선수였다. 보내기 부담스러운 에이스급 재능은 아니라 자기 팀 코어로 삼을 정도는 아닌데, 실력이 좋은 건 사실이라 핵심선수를 낙점하고 팀을 구성해보려는 팀들에게 비싼 대가를 받아낼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 이 때문인지 3순위 지명선수임에도 꽤 일찍 팀을 옮겼고[8] 이후에도 팀을 꽤 옮긴 편이다. 재밌는 건 위에 언급된 구글리오타와 밴혼 역시 팀을 꽤 옮겼다. 팀을 비교적 자주 옮기는 선수들은 1) 레전드급인데 우승이나 돈 등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자의로 옮겨다니거나[9] 2) 스타급인데 팀 케미스트리에 융화되지 못했거나, 3) 실력은 괜찮은데 스타급이라고 하긴 애매해서 값만 잘 쳐준다고 이적이 성사될 수 있거나, 4) 평범한 롤플레이어여서 그때그때 팀별 사정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하는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4. 수상 내역
| 수상 내역 |
5. 관련 문서
[1] 위의 영상은 결승이 아니라 8강전(Elite Eight)에서 켄터키 대학을 침몰시킨 영상이다.[2] 미국에서 NCAA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상상을 초월하며, 그 NCAA에서 2년 연속으로 팀을 우승시킨 레이트너의 당시 인지도는 오닐과 모닝을 압도했다. 상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선발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대학농구계의 간판이었던 그가 뽑히는 게 오히려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할 만 하다.[3] 샤크는 루키 시즌에 이미 올스타 스타터였으며, 하킴-유잉-로빈슨과 경쟁해야 하는 센터 포지션만 아니었다면 All-NBA Team에 무난하게 들어가고도 남을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닝의 경우 비록 올 루키 퍼스트팀에만 선정되는 데 그쳤지만 20-10에 3.5블록이라는 올스타 레벨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4] 1992 드림팀은 "팀" 자체로 2010년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5] 오히려 대학 시절 동료이자 후배였던 그랜트 힐이 짧은 전성기였지만 NBA의 슈퍼스타로 자리잡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애초에 힐은 All-NBA Team 5회(1st 팀 1회, 2nd 팀 4회), 올스타 7회로 NBA에서 레이트너보다 훨씬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았다.[6] 이들 중 최종 커리어가 가장 약한 선수는 유일하게 NBA 역사상 위대한 50인 선수와 NBA 75주년 팀에 모두 포함되지 못 한 크리스 멀린인데, 그 멀린도 올스타 5회, All-NBA Team 4회(퍼스트팀 1회, 세컨드팀 2회, 서드팀 1회)로 자신이 전성기를 보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영구결번되고 명예의 전당에도 개인 자격으로 입성했으니 올스타 1회 선정에 그친 레이트너의 커리어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매우 크다.[7] 다만 다른 둘과 달리 밴 혼은 멘탈 면에서 지나치게 유약한 면이 있었다.[8] 레이트너와 구글리오타는 비슷한 수준과 플레이스타일을 지닌 선수였고 장단점도 비슷한 선수였지만, 당시 실력이 무섭게 올라오고 있던 케빈 가넷이 주전으로 올라오자 7피트 언저리에 행동반경도 비슷한 세 명이 몰려다니는 핵무리수 라인업이 되는 바람에 정리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당시 가넷을 포함한 어린 선수들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던 레이트너가 타깃이 된 것. 그리고 가넷은 이 때를 기점으로 기량이 더욱 성장하면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자리잡았다.[9] 샤킬 오닐, 르브론 제임스, 케빈 듀란트와 같은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