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3 23:52:22

캘배재르 작전

캘배재르 작전
Kəlbəcər əməliyyatı
Operation Kalbajar
Битва за Омарский перевал[1]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일부
1993년 12월 15일 ~ 1994년 2월 20일[2]
장소
아제르바이잔 캘배재르 구[3] 북부
교전국

[[아제르바이잔|]][[틀:국기|]][[틀:국기|]]

[[아르메니아|]][[틀:국기|]][[틀:국기|]]

[[아르차흐 공화국|
아르차흐 공화국
나고르노카라바흐
]][[틀:국기|
행정구
나고르노카라바흐
]][[틀:국기|
속령
나고르노카라바흐
]][4]

[[러시아|]][[틀:국기|]][[틀:국기|]][5]
지휘관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헤이대르 앨리예프[6]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수래트 휘세이노프[7]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내지매딘 사드코프[8]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발레흐 래피예프[9]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살레흐 일리아소프[10]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 레본 테르페트로샨[11]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 세르지 사르키샨[12]
파일:아르차흐 공화국 국기.svg 로베르트 코차랸[13]
병력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아제르바이잔군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제1군단[14]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캘배재르 구 경찰대
총 1만여 명[15]
파일:아르차흐 공화국 국기.svg 나고르노카라바흐 방위군
파일:아르차흐 공화국 국기.svg 중앙자위집단[16]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 아르메니아 국군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제555차량화소총연대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제7공병대대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제9공병대대
총 2,000명 이상
피해규모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4,000명 전사[17]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 파일:아르차흐 공화국 국기.svg 2,000명 전사
결과
아르메니아의 승리

1. 개요2. 배경3. 작전 준비
3.1. 작전 계획3.2. 병력
4. 작전 전개
4.1. 순조로운 출발4.2. 후퇴, 사실상 전멸
5. 작전 결과

[clearfix]

1. 개요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1988-1994)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전투. 아제르바이잔 북서부의 캘배재르(Kəlbəcər) 구에서 진행된 전투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발생한 총 전사자의 1/6이 이 전투에서 발생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94년 5월 5일 비슈케크 의정서를 교환하여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끝냈다.

2. 배경

1993년, 아제르바이잔은 내정과 외정 모두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92년 5월 민족간 분규에서 전면전으로 발전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군은 끝없이 패배를 겪었고 서남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손실했다. 독립을 요구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뿐만 아니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와 아르메니아 사이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도 아르메니아측에 모조리 상실했다. 1993년 말 아제르바이잔군의 공세가 벌어질 캘배재르 구도 1993년 3월에 공격받아 4월에 점령당했다. 이곳은 무로브 산맥이 솟아있는 곳이자 카라바흐 전역에서 가장 높은 무로브다그 산이 있는 곳이었다.

지도부는 계속되는 패전의 책임을 놓고 극심한 정쟁을 겪었다. 1대 대통령 아야즈 뮈탤리보프는 잇따른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그 뒤를 이은 애뷜패즈 엘치배이 대통령도 1992년 6월 중순에 있었던 대대적인 반격작전 실패의 책임을 두고 갈등에 휩싸이다가 이듬해 6월 작전을 지휘하던 수래트 휘세이노프(Surət Hüseynov)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엘치배이의 뒤를 이어 전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헤이대르 앨리예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아제르바이잔이 이런 혼란을 겪는 동안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인근의 다른 도시들도 속속 점령했다.

앨리예프는 아르메니아군의 점령지 수복을 천명하는 한편 조금이라도 병력을 더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앨리예프는 징병연령을 16세까지 낮추는 한편 아프가니스탄에 무자헤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무자헤딘이 아제르바이잔에 입국하여 1993년 말에 실행될 대대적인 반격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충성심이 의심되는 의용군 대대들을 해산하고 그 자리를 젊은 징집병들로 채웠다.

1993년 말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접경한 북부 전선과 이란과 접경한 남부 전선에서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그 중 북부 전선에서 시행된 반격작전을 캘배재르 작전이라고 일컫는다.

3. 작전 준비

3.1. 작전 계획

파일:1024px-Azerbaijan_relief_location_map.jpg 파일:Kalbajar_District_in_Azerbaijan_2021.svg.png
붉은 타원형은 무로브 산맥의 위치. 붉은 색은 캘배재르 구의 영역.[18]

1993년 12월, 아제르바이잔은 북부 전선의 아르메니아군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다. 우선 서쪽의 무로브(Murov) 산맥에 공세를 펼쳐 바르데니스(Vardenis)와 마르타케르트(Martakert)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뒤이어 캘배재르 시(市)를 탈환하고 캘배재르 구 안으로 깊숙히 진격하여 북부 전선 동쪽의 태르태르(Tərtər)에서 진격한 다른 아제르바이잔군 부대와 함께 아르메니아군을 포위하는 것이 작전의 내용이었다.

수많은 아제르바이잔군 지휘관들이 캘배재르 작전에 반대를 표명했다. 작전이 벌어질 곳은 해발고도 2,500-3,000m에 달하는 고지대로 기후조건이 열악하며 폭설강풍, 산사태가 빈발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작전에 참여할 병력 대다수는 신병들이었고[19], 그들은 동계작전을 위한 훈련은 고사하고 산악용품과 방한용품도 지급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강행되었다.

3.2. 병력

캘배재르 작전에서 아제르바이잔측의 주공은 제1군단 예하 701여단이었다. 제1군단은 총 3개 여단(130여단, 701여단, 708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전투 직전 아제르바이잔 제1군단의 총 병력은 1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것은 1993년 12월 기준 701여단이 총 6개 대대 3,500명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701여단 지휘관은 발레흐 래피예프(Valeh Rəfiyev) 중령이었는데 작전 도중 살레흐 일리아소프(Saleh İlyasov)로 교체되었다. 이외에 현지 경찰병력도 작전에 참여했다.

아르메니아측 군대는 크게 나고르노카라바흐 현지의 아르메니아인으로 편성된 나고르노카라바흐 방위군과 아르메니아 본토에서 파병된 아르메니아 국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방위군 소속 중앙자위집단은 1개 연대, 1개 자위구역, 4개 자위대대로, 아르메니아 국군은 1개 차량화소총연대, 2개 공병대대로 구성되었다. 일부 아제르바이잔군 지휘관들은 러시아군 포병이 아르메니아군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4. 작전 전개

4.1. 순조로운 출발

파일:Operation_Kalbajar.png
청록색이 캘배재르 작전 중 아제르바이잔군이 수복한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군은 1993년 12월 북부 전선 전역에 걸쳐 캘배재르 작전을 개시했다. 북부 전선 서쪽의 701여단은 무로브 산맥을 넘어 1월 말까지 적잖은 전과를 올렸다. 질이 낮은 징집병으로 구성된다 아제르바이잔의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아르메니아군은 곳곳에서 패퇴했다. 여단은 얀샤그, 가미실리, 바그를르 등 캘배재르 구 북부의 여러 마을을 탈환했고, 무로브 산맥을 지나는 오마르 고개를 수복하여 지뢰밭을 청소했다. 1994년 2월까지 아제르바이잔군이 탈환한 지역은 캘배재르 구의 30%에 달했다. 서쪽의 701여단 1대대와 3대대, 4대대는 아르메니아 국경까지, 중앙의 2대대는 가므실르와 치채클리 인근까지, 동쪽의 5대대는 바그를르까지 진격했다. 1월 말 아제르바이잔군 사령부는 곧 있을 캘배재르 시 공격의 준비작업에 관한 지시를 각 대대에 내렸지만 2월 초 아르메니아군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히게 된다.

2월 초 재편성된 아르메니아군은 2일 2대대가 방어하는 가므실르와 치채클리를 공격했다. 2대대의 방어를 뚫는 데 실패하고 1대대와 3대대에 국경 인근의 고지대를 빼앗기자 그 대신 마르타케르트 방면에서 압력을 가했다. 11일 폭설이 막 시작된 직후 아르메니아군은 아제르바이잔군의 보급로를 목표로 아제르바이잔군의 북동쪽에서 공격했다. 아르메니아군은 2월 15일 얀샤그와 얀샤그비내를 점령하여 오마르 고개와 캘배재르의 아제르바이잔군을 잇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제르바이잔군을 포위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보급로를 재개하기 위해 한라르 구 방면으로 몇 번이나 공격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여기서 캘배재르 작전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 너무 멀리 진격함: 아제르바이잔군은 무로브 산맥 북편의 아제르바이잔군 진지에서 너무 멀리 진격하여 아르메니아군에 약점을 노출했다. 반면에 아르메니아군은 무로브 산맥 북편과 아제르바이잔군 사이의 약점을 파고들어 쉽게 포위했다.
  • 병력 부족: 병력이 부족하여 부상병과 손상된 장비를 후방으로 옮길수도, 또는 지원군을 받을 수도 없었다. 반면에 아르메니아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병력을 증원할 수 있었다.
  • 물자 부족: 아제르바이잔군은 무로브 산맥 남편으로 남하하면서 방한용품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한파에 대처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마르타케르트 방면의 아제르바이잔군 조공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4.2. 후퇴, 사실상 전멸

14일, 아제르바이잔군은 캘배재르 구에서 다시 무로브 산맥 북편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르메니아군이 오마르 고개로 향하는 도로를 점령했으므로 아제르바이잔군은 다른 좁은 도로를 통해 퇴각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아제르바이잔군은 모든 중장비를 망실했다.아르메니아군은 산꼭대기를 포격하여 눈사태를 일으켜 수많은 아제르바이잔군을 생매장했다. 어떠한 산악용품과 방한용품도 챙겨오지 않은 아제르바이잔군은 추위에 벌벌 떨었다. 몇몇 병사는 추위를 피한다며 입고 있던 외투를 불에 태웠고, 어떤 병사는 아예 실성하여 옷을 벗고 수영을 한다며 강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일부는 아예 제자리에 주저앉아 그대로 얼어죽어버렸다. 퇴로에서 아제르바이잔 병사 수백여 명이 동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아제르바이잔군의 후퇴는 20일까지 계속되었지만 2개 여단(130여단, 701여단)은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몇몇 병사들은 3월이 되어서야 겨우 탈출하기도 했다.[20] 아르메니아군은 BM-21 그라드 로켓포로 포위된 아제르바이잔군을 맹렬히 포격했다. 이 포격으로 죽은 아제르바이잔군만 1,500명에 달했다.

5. 작전 결과

캘배재르 작전은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전투 중에서도 비길 데가 없는 혈전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자체 추산에 다르면 아제르바이잔군의 전사자는 1,592명에 달했다. 그 중 1,337명은 동사자, 111명은 실종자였다. 그러나 동유럽 및 캅카스 방면 전문가 토마스 디월(Thomas de Waal)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군의 전사자는 4,000명, 아르메니아군의 전사자는 2,000명에 달했으며, 공세가 끝난지 몇년이 지난 후에도 무로브 산맥의 여행자들은 동사자들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군은 기갑차량 60대도 상실했다.

또한 캘배재르 작전은 그때까지 아제르바이잔군이 겪어본 적 없는 최악의 참사였다. 아제르바이잔 내에서 캘배재르 작전은 매우 민감한 주제가 되었다. 작전을 명령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거론되는 책임자는 헤이대르 앨리예프 대통령, 앨리 외매로프(당시 아제르바이잔 검찰총장), 내지매딘 사드코프(당시 아제르바이잔 참모총장) 등이 있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책임진 사람이 없었다. 대신에 일선에서 분투했던 아제르바이잔군 장교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1995년 아제르바이잔 대법원은 701여단장 살레흐 일리아소프, 5대대장 개라이 애새도프, 대대참모 잴릴 이브라히모프에게 각각 징역 7년, 6년, 10년을 선고했다.

참사로 끝난 캘배재르 작전과 달리, 이란과 접경한 남부 전선 퓌줄리 방면의 작전은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다. 1994년 1월 초 아제르바이잔군은 무자헤딘의 도움을 받아 퓌줄리 구 일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퓌줄리 시를 탈환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1994년 5월 5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흐, 러시아비슈케크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종료되었다.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적어도 4만이 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2020년 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일으켜 1994년 되찾지 못했던 캘배재르 구 전 영역을 되찾았다.


[1] 러시아어. "오마르 고개 전투"[2] 단 20일 이후로도 아르메니아군의 포위망에 갇힌 아제르바이잔군 2개 여단과 아르메니아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다.[3] 아제르바이잔 북서쪽의 구. 아르메니아,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와 접경함.[4] 오늘날 아르차흐 공화국[5] 아제르바이잔의 주장.[6] 아제르바이잔 대통령[7] 아제르바이잔 총리. 전임 애뷜패즈 엘치배이 대통령을 쿠데타를 일으켜 내쫓았음.[8] 아제르바이잔군 참모총장[9] 제701여단 사령관. 작전 초기에 교체됨.[10] 래피예프의 후임.[11] 아르메니아 대통령[12] 아르메니아 국방장관. 후일 아르메니아 제3대 대통령(2008-2018) 역임.[13]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국방장관 겸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국방위원회 의장. 후일 아르메니아 제2대 대통령(1998-2008) 역임.[14] 제130여단, 제701여단, 제708여단 총 3개 여단으로 구성.[15] 701여단이 6개 대대 3,500명인 것으로 보아 1군단 전체 병력은 1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됨.[16] Central Self-Defence Group[17] 일각에서는 최대 6,000명 전사로 추산하기도 한다.[18] 옅은 붉은색은 명목상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폐지하여 캘배재르 구로 편입한 영역이다.[19] 앨리예프가 충성심이 의심된다고 의용군 대대를 해체하고 모집한 바로 그 신병들이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바쿠 시내에서 마치 면화수확 하는 것마냥 아무나 징집했다고 한다.[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