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9 09:59:15

카키하라 마사히토

<nopad>파일:kakihara.jpg
<[ruby(熱風児, ruby=ねっぷう じ)] / Hot wind boy>
[ruby(垣原 賢人, ruby=かきはら まさひと)] / Masahito Kakihara
<nopad> 파일:카키하라마사히토프로필.webp
링네임 카키하라 마사히토
미야마 가면 (ミヤマ[ruby(仮面, ruby=か めん)])
[1]
본명 카키하라 마사히토
[ruby(垣原 賢人, ruby=かきはら まさひと)]
생년월일 1972년 4월 29일 ([age(1972-04-29)]세)
신장 180cm
체중 85kg
혈액형 O형
출생지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에히메현 니이하마시
가족 관계 장녀 카키하라 아야노([ruby(垣原 綾乃, ruby=かきはら あや の)])(1996년생) [2]
학력 니이하마니시([ruby(西, ruby=にし)])고교 (중퇴)
유형 테크니션 + 슈터(U계)
시그니쳐 무브 각종 킥[3]
액스 킥
이나즈마([ruby(稲妻, ruby=いなづま)]) 레그 래리어트
롤링 장저([ruby(掌底, ruby=しょうてい)])[4]
머신건 장저([ruby(掌底, ruby=しょうてい)])
카와즈오토시([ruby(河津, ruby=かわづ)][ruby(落, ruby=お)]とし)
슬리퍼 홀드
힐 훅
크로스 니 락
피니쉬 무브 이나즈마([ruby(稲妻, ruby=いなづま)]) 레그 래리어트
그라운드 헤드락
그라운드 넥 락
캇키 커터[5]
캇키 커터 개([ruby(改, ruby=かい)])[6]
별명 캇키(カッキー)[7]
열풍아 ([ruby(熱風児, ruby=ねっぷう じ)])
테마곡 レガリテート - 오자키 유타카[8]
(1991 - 1996)
HEATS - 카게야마 히로노부 (1998 - 2000)[9]
UWFプロレスメインテーマ[10]
SUNSET CUTTER (2002 - 2006.5)[11]
데뷔 1990년 8월 13일 (18세)
카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코호쿠구
요코하마 아레나
UWF "CREATE"
vs 후케 유스케
은퇴 (공식) 2006년 5월 28일 (34세, 커리어 15년)
도쿄도 분쿄구 코라쿠엔 홀
신일본 베스트 오브 더 슈퍼 주니어 XIII 2일차
vs 카네모토 코지
SNS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주요 커리어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 1회
WAR 월드 6인 태그팀 챔피언 1회
베스트 오브 더 슈퍼 주니어 10 우승
종합격투기 전적 1전 1승 (vs 록키 로메로)
1서브미션

1. 개요2. 커리어
2.1. UWF ~ 킹덤2.2. 전일본 프로레슬링2.3. 신일본 프로레슬링2.4. 아쉬운 공식 은퇴를 맞이하다2.5. 공식 은퇴 이후
3. 여담4. 둘러보기

1. 개요

일본프로레슬러.

2. 커리어

2.1. UWF ~ 킹덤

파일:카키하라마사히토uwf.jpg
중학교 2학년 때부터 UWF를 동경해 왔던 카키하라는 성적 우수로 들어간 진학계열 고교인 니이하마니시 고등학교[12]를 중퇴하고 후지와라 요시아키와의 만남을 통해 1989년에 UWF에 합격한 후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1990년 8월 13일 요코하마시요코하마 아레나에서 후케 유스케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러 무승부를 거두며 커리어를 시작했고, 재격돌에서는 패했지만 3차전에선 승리를 거뒀다.

단체 분열 후에는 타카다 노부히코가 이끄는 UWF 인터내셔널에 합류하였고, 창설전에서 타무라 키요시를 상대했다가 골절상을 입으며 한동안 결장해야 했다. 이후 테네시에 해외 수행을 떠나, '인간 풍차' 빌 로빈슨에게 올드 스쿨 스타일의 레슬링을 1대 1로 지도받았다.

파일:카키하라사사키.jpg
UWF 인터내셔널에서 싱글 및 태그팀 경기를 오가며 같은 일본 레슬러들 외에도 외국인 레슬러들과도 경기를 가지며 보내다가 1995년에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대항전에 출연해 절호조의 사사키 켄스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일약 스타로 올라섰으며, 신일본 프로레슬링 본무대에선 타카야마 요시히로와 팀을 이뤄 무토 케이지 & 나가타 유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1996년에는 초슈 리키와의 싱글경기에선 패하고, 2선 3전승제로 벌어진 태그팀 경기에도 참가했다.

WAR, Battlarts에도 출연해 경기를 갖지만 야마모토 켄이치와 팀을 이뤄 사쿠라바 카즈시 & 카네하라 히로미츠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끝으로 UWF 인터내셔널이 자금 문제로 붕괴하면서 FA가 되었다.

1997년에는 신생 단체 킹덤에서 활동하여 창설전 메인 이벤트를 장식한 적도 있었으나 후배 사쿠라바, 카네하라, 야마모토 켄이치 등에게 밀려났고, 킹덤도 1998년 2월에 붕괴되면서 또다시 소속이 없어지게 되었다.

2.2. 전일본 프로레슬링

1998년에는 격투기와 관계 없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입성 첫 경기에서 타카야마 요시히로와 같이 코바시 켄타 & 아키야마 쥰을 상대로 패하고, 이후부터 UWF 시절의 선배 타카야마 요시히로 & 게리 올브라이트와 같이 제 2차 TOP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1999년 1월에 UNTOUCHABLE오가와 요시나리세계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자리에 도전했지만 패했고, 이후로는 미사와 미츠하루와 오가와 요시나리의 스테이블인 UNTOUCHABLE의 일원이 되어 싱글보다 태그팀 경기 위주로 출전하며 활동했다.

이케다 다이스케와 같이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십 토너먼트 리그에 참가하지만 득점 부족으로 탈락되고, 2000년에 타카야마 요시히로와 같이 혼다 타몬 & 이노우에 마사오를 상대로 패한 것을 끝으로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이 발생하자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퇴단해 프로레슬링 NOAH로 이적한다.

NOAH에서 벌인 첫 경기에서 오가와 요시나리 & 이케다 다이스케와 같이 타카야마 요시히로 & 오오모리 타카오 & 아사코 사토루를 상대하여 오픈 핑거 글러브를 착용하고 오오모리를 두들겨 패면서 승리를 거뒀으나, 다음날부터 카키하라 마사히토의 모습은 NOAH에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고 그대로 퇴단에 이르게 되었다.[13][14]

5달만에 FA 신분으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돌아간 카키하라 마사히토는 리얼 월드 태그 리그에 나가이 미츠야와 함께 출전했지만 득점부족으로 탈락되고, 2001년에 잠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오랫만에 출연해 나가이 미츠야와 같이 나가타 유지 & 이이즈카 타카시를 상대로 패했고, 전일본과 신일본 간의 대항전에서는 타나카 미노루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6월에는 나가이 미츠야와 같이 나가타 유지 & 마카베 신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새로운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하며 첫 챔피언 경력을 만든다. 그러나 카키하라 마사히토가 무릎 부상을 당해 등극한지 1달만에 챔피언 자리를 내려놓는다.

2.3. 신일본 프로레슬링

부상에서 복귀한 10월부터는 대항전 상대였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눌러앉아 활동하며 G1 6인 태그팀 토너먼트에서 나루세 마사유키 & 타나카 미노루와 같이 참가해 우승하게 되고, 2002년 1월에 정식으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하여 전 챔피언 켄도 카신이 이탈하며[15] 공석이 된 IWGP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 출전해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2002년 2월 16일 료고쿠 국기관에서 열린 FIGHTING SPIRIT 2002 최종전 흥행에서 타나카 미노루와 결승전을 치렀으나 타나카의 롤업에 기습 핀폴을 내주며 벨트를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다.

5월의 베스트 오브 더 슈퍼 주니어(BOSJ) 9에 B조로 출전했으나 자도의 기권으로 인한 부전승과 카네모토 코지, 커리 맨에게 승리해서 얻은 3점으로 4점조 2명(카네모토, 수신 선더 라이거)에게 밀려 예선 탈락했다. 12월 7일에는 카네모토가 가지고 있던 IWGP 주니어 헤비급 벨트에 처음으로 도전했으나 16분만에 카네모토의 필살기 앵클 홀드에 견디지 못하고 탭을 쳐야 했다.

2003년 5월에 이번에는 조 2위까지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게 된 BOSJ 10에 B조로 출전하였으며, 나루세 마사유키와 카네모토에게 패하고 자도, 엘 사무라이, 스탬피드 키드, 타이거 마스크 4세를 잡아 승점 8점을 확보해서 카네모토, 타이거 마스크 4세와 공동 8점을 차지했는데 승자승 원칙에 따라 나머지 둘에게 승리한 카네모토가 1등, 타이거 마스크 4세에게는 승리한 카키하라가 2등을 차지하며 결승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했다.
BOSJ 10 결승전 (vs 카네모토 코지)
6월 11일 교토시에서 치러진 준결승전 & 결승전에서 카키하라는 제 3경기에서 A조 1위인 AKIRA를 8분만에 넥 락으로 잡아냈고, 제 4경기에서 A조 2위 스기우라 타카시를 앵클 홀드로 잡고 다시 올라온 카네모토와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제 9경기 결승전에서 카키하라는 카네모토와 그라운드 공방을 줄곧 주고받으며 대치했고, 서로 하이킥을 주고받은 후 재빨리 로프 반동을 한 다음 첫 번째 캇키 커터를 작렬했다. 그 뒤로 장기인 장저 연타를 치다 빈틈을 보이는 바람에 카네모토의 필살기 타이거 수플렉스를 얻어맞았으나 2카운트에서 탈출, 카네모토의 전가의 보도 앵클 홀드에 곧바로 걸려 로프 브레이크로 간신히 탈출했으나 패색이 짙어졌다. 그러나 승리를 확신한 카네모토의 문설트에 무릎을 갖다대면서 약간의 빈틈을 만들어냈고, 레그 래리어트, 저먼, 버즈쏘우 킥을 연타로 이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파일:카키하라bosj우승.jpg
이후 타격전을 걸다 로프반동을 한 카네모토에게 레그 래리어트 2연타를 터트린 카키하라는 재빨리 슬리퍼를 걸어 카네모토를 그로기에 빠트린 후 2번째 캇키 커터를 작렬시키며 철옹성같던 카네모토에게 3카운트를 따냈고, 2번째 BOSJ만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도전권으로 7월 6일에 기후시 산업 회관에서 IWGP 주니어 챔피언 타이거 마스크 4세에게 도전했으나 12분 47초만에 타이거 수플렉스 홀드를 허용하며 다시 도전에 실패했다.

그래도 이후 신일본에서의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부상이 잦아지면서 점점 선수 생활이 위험해졌고 결국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카키하라가 IWGP 주니어 벨트에 도전하는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2.4. 아쉬운 공식 은퇴를 맞이하다

카키하라 마사히토 은퇴전 (vs 카네모토 코지)
2006년에 4월 19일에 경추 추간판 디스크가 원인이 된 제 4, 5 경추 손상으로 인해 은퇴를 선언했고, 5월 28일 코라쿠엔 홀에서 열린 BOSJ 13 2일차 대회에서 IWGP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카네모토 코지와 제 1시합에서 5분 엑시비젼 매치로 은퇴전을 치렀다.

카키하라는 UWF의 테마곡을 마지막으로 틀면서 꽃다발 세례와 함께 등장했고, 그런 카키하라에게 카네모토는 "어이 카키하라, 5분안에 날 쓰러트리면 벨트를 주겠다고!"하면서 은퇴전 답지 않은 격렬한 타격전을 걸어왔다. 그런 카네모토에게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는 것이 아니였던 만큼 카키하라도 캇키 커터 3연발을 날리는 등 뜨겁게 마주했으며, 마지막에 카네모토의 전가의 보도 앵클 홀드에 걸렸으나 항복을 거부, 그 때 5분 경과의 공이 치면서 은퇴 시합이 마무리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카키하라와 뜨거운 악수를 나눈 카네모토는 카키하라의 허리에 카키하라가 끝끝내 허리에 감지 못했던 IWGP 주니어 헤비급 벨트를 직접 걸어주었고, 이렇게 카키하라는 함께 주니어에서 싸워왔던 카네모토와 공식적으로 무승부를 거두면서 은퇴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파일:카키하라은퇴.jpg
은퇴 경기가 마무리된 후에 카키하라의 딸 아야노와 아들 츠쿠시가 링 위에 올라왔고, 딸의 편지 낭독과 본인의 은퇴사를 마지막으로 텐 카운트 공을 들으며 은퇴를 맞이했다.

링에서 내려가기 직전 악역 유닛인 C.T.U 소속의 타나카 마사토가 카키하라를 불러 카키하라가 은퇴 후 곤충 관련 이벤트를 시작하는 것을 팬들에게 어필한 후, C.T.U 모두에게로부터의 선물인데 바로 뜯어보라며 선물을 주었다. 거기서 나온 것은 카키하라가 사랑해 마지 않는 사슴벌레를 닮은 가면. 카키하라는 바로 그 마스크를 써보며 기뻐했고, 이 마스크와 함께 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카키하라는 퇴장했다.

7월 28일에는 도쿄도 시부야구 에비스역 인근의 한 갤러리에서 은퇴 파티를 개최했다. 150명의 팬들과 신일본 소속 선수들, 그란 하마다, UWF 시절 선배 타카야마 요시히로와 후배 사쿠라바 카즈시와 등이 자리를 빛냈고, 여기서 처음 선물받은 가면을 착용하고 '사슴벌레 레슬링의 전도사' 미야마 가면(ミヤマ[ruby(仮面, ruby=か めん)])이라는 가면 기믹을 선보여 신일본의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사슴벌레 레슬링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성대한 은퇴 파티를 마무리했다.

2.5. 공식 은퇴 이후

은퇴 이후로는 골드 짐의 트레이너와 IWGP 실행위원을 거쳐 어렸을 때부터 본인이 좋아하던 사슴벌레를 활용해 어린이 대상 이벤트를 하는 이벤트 업계에 뛰어들어, 본인이 은퇴 파티에서도 선보였던 직접 숲과 사슴벌레를 사랑하는 곤충 히어로 미야마 가면(ミヤマ[ruby(仮面, ruby=か めん)])으로 활동하고 있다.

캠핑카로 직접 일본 전국 각지를 돌면서 사슴벌레와 자연의 소중함을 전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으며, 아이들이 벌레를 좋아하게 하고, 자연과의 공생을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싶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하는 것을 목표로 뛰고 있다.

2011년에 UWF 시절 동료 카네하라 히로미츠가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흥행을 열었을 때 1일 한정 복귀하여 모치즈키 마사아키와 경기를 갖지만 패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 은퇴 이후로도 때때로 프로레슬러로서 다른 단체에서 경기를 갖게된다.

2014년에 악성 림프종, 즉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게 되면서 재활과 항암 치료에 전념했다. 2015년 8월 18일에는 대일본 프로레슬링이 코라쿠엔 홀 대관 일정을 양보해 주어 카키하라 응원 대회인 Moving On~캇키 에이드~가 개최되기도 했다.

파일:후지와라카키하라.webp
다행히도 차도가 좋아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으며, 2017년 8월 14일 대일본 프로레슬링과 함께 하는 카키하라 자주 흥행 '캇키 라이드 2017'에 등장해 스승인 후지와라 요시아키와 경기를 가져서 패하는 것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경기 이후에는 장성해서 아버지의 투병 기간 동안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던 아들 츠쿠시와 딸 아야노가 함께 했다.

파일:카키하라럼블승리.jpg
2018년 1월 4일, 레슬킹덤 12 제 0시합 뉴 재팬 럼블에서 경추 부상으로 전신마비에 처한 타카야마 요시히로를 지원하기 위한 티셔츠를 입고 UWF프로레스 메인 테마곡과 함께 25번으로 등장,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오랫만에 깜짝 등장했으며, 치즈버거와 함께 텐코지를 링밖으로 밀어내고 치즈버거에게 장저 연타에 이은 캇키 커터를 작렬하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우승한다. 우승 후 카키하라는
"링에 돌아왔습니다. UWF의 동지, 타카야마 선수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타카야마! 도쿄 돔의 링에 섰다고. 나도 복귀할 수 있었으니까, 제왕(타카야마의 별명)이라면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극복할 수 있어. 난 그렇게 믿고 있어. 모두들! 부디 타카야마 선수에게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라며 도쿄 돔의 관중들에게 타카야마에 대한 응원을 부탁했다.

2018년 8월 14일 카키하라 자주 흥행 '캇키 라이드 2018'에서는 깡마르긴 했지만 식스팩이 선명한 절호조의 컨디션으로 스즈키 미노루와 경기를 가져 비록 패했지만 건재함을 알렸다.[16]

2020년 이후로는 프로레슬러 활동보다는 미야마 가면으로 활동하며 이벤트 행사에서만 활동하고 다닌다.

3. 여담

  • 부상으로 요양 중이던 고등학생 때 형에게 권유받은 것을 계기로 오자키 유타카의 광팬이 되었다. 오자키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오자키의 곡을 입장곡으로 쓰고, NHK의 오자키 유타카 추모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 취미는 곤충채집으로, 특히 사슴벌레의 스페셜리스트이다. 사슴벌레 사랑이 어마어마해서 아웃도어 계열 잡지에서 관련 칼럼을 연재한 적도 있고, 2004년 방문한 브라질, 2005년 9월 국제 무도 대회로 방문한 북한에서도 사슴벌레를 채집하려고 한 적도 있다. 이 사슴벌레 사랑을 공식 은퇴 이후 제 2의 인생인 어린이 대상 이벤트업에도 적극 활용하였고, 숲과 사슴벌레를 사랑하는 곤충 히어로 미야마 가면(ミヤマ[ruby(仮面, ruby=か めん)])이라는 가면 히어로로 본인도 직접 활동하고 있다.
  •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성은 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쓰긴 했으나 아버지는 이혼 후에 다른 가정을 이뤄서 교류가 끊겼다가 결혼 후에 다시 봤다고 한다. 카키하라가 2014년 암투병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에게 연락했었는데 예상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암 정도로 덜덜 떨지 마라!"라고 한소리 해준 UWF의 선배 마에다 아키라에게 위안을 얻고 자신이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받았다고.

파일:카키하라완치.jpg
  • 20대 초반에 일찍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고, 슬하에 딸 카키하라 아야노(垣原 綾乃,1996년생)와 아들 카키하라 츠쿠시(垣原つくし,2000년~2001년생)를 두고 있다. 가족간의 관계는 좋아서, 부인은 카키하라가 림프암 투병 중에 카키하라를 대신하여 이벤트를 진행했고, 딸 아야노는 아이돌로 잠시 활동한 후 아이돌 탈퇴 후에는 프리랜서 MC로 아버지의 행사를 도와주고 있으며, 아들 츠쿠시는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의 기믹 미야마 가면의 상대역인 쿠와가타 닌자로 활동하면서 멘탈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 게닌 캡틴 와타나베(キャプテン渡辺,1975년생)는 UWF 인터내셔널 시절 카키하라가 돌봐주던 연습생이였다. 카키하라와 스파링 도중 팔이 부러졌고 치료 중에 야반도주해서 카키하라가 자신의 탓인가하고 오랫동안 마음에 걸려했는데, 2011년에 와타나베와 재회했을 때 와타나베가 사실 그 때부터 게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도망간거지 카키하라가 팔을 부러트려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며 오해가 풀렸다.
  • 20대 중반 시점에서 이미 탈모가 오고 있었고, 결국 전일본 참전 즈음인 1998년경 아예 삭발한 이후 줄곧 스킨헤드를 유지해 오고 있다.
  • 2000년 부상 결장 중에 전부터 희망하고 있던 가면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는 것을 결심하여 마스크 디자인과 새로운 링네임도 사전에 준비한 다음 아이디어를 미사와를 비롯한 당시의 프런트진에게 전달했으나 거절되었다고 한다. 결국 은퇴 이후 미야마 가면으로 활동하면서 어느 정도는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 현역 시절 소속된 단체가 전부 망하거나, 분열되거나, 경영 부진에 빠지는 징크스가 있었다.
  • 2004년에 록키 로메로를 상대로 딱 1번 종합격투기 경기를 치러 승리를 거뒀다.

4. 둘러보기

<colbgcolor=black><colcolor=#000000> 파일:Untouchables 로고.png
미사와 미츠하루 오가와 요시나리 카키하라 마사히토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역대 베스트 오브 더 슈퍼 주니어 우승자
2002 2003 2004, 2005
카네모토 코지 카키하라 마사히토 타이거 마스크 IV


[1] 정식 선수로는 은퇴한 후, 어린이에게 곤충 채집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사슴벌레 전문가 겸 곤충 이벤트 전문가로 변신한 후 사용하는 링네임. 미야마쿠와가타(ミヤマクワガタ)는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슴벌레의 일종인 '걍사슴벌레'로, 거기서 '미야마' 만 떼어온 것이다.[2] 일본의 전 아이돌. 바쿠스테 소토칸다 잇초메 4기 멤버로 잠시 활동하였다.[3] UWF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만큼 미들, 하이, 버즈쏘우 등 매우 다양한 킥을 사용했다.[4] 한바퀴를 빙글 돈 후 풀 파워로 장저를 때린다.[5] STO. 캇키(カッキー)는 카키하라의 애칭이다.[6] 코브라 클러치 자세로 쓰는 STO.[7] 카키하라 마사히토의 애칭.[8] LEGALITÄT. 독일어로 '합법성'이라는 뜻. 오자키 유타카의 곡으로 오자키의 팬인 카키하라가 UWF 인터내셔널 시절 입장곡으로 사용했다.[9] 진 겟타로보 세계 최후의 날 2기 오프닝으로, 일본 애니송의 전설 카게야마 히로노부의 곡. 전일본 시절에 사용했다.[10] UWF 프로레슬링 메인 테마. 말 그대로 UWF의 메인 테마로, UWF 인터내셔널 해체 이후 프리 참전 때 사용했다. 공식 은퇴전과 뉴 재팬 럼블때도 사용했을 정도로 애착이 깊었다.[11] 신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사용한 테마곡.[12] 에히메현 전체에서 한자릿수~두자릿수 초반대 편차치이다. UWF에 가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고교도 안 들어가고 현실도피하냐는 말을 듣기 싫어서 진학계열 고교에 들어갔다고.[13] 2015년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밝혔는데, 당시 당했던 부상과, 진작에 이혼했다가 결혼 후 다시 보게 된 아버지와 불화가 생긴 일과 본인이 소속된 단체가 계속 망해서 프로레슬링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점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프로레슬링을 그만둘까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크게 꺾였었다고 한다. 카키하라 본인은 '어떤 개인사정이 있었어도, 사회인이 할 짓이 아니였다'라고 반성했다. 여담으로 오오모리 타카오를 두들겨 패다시피한 경기 때문에 슛 의혹도 있었는데, 슛은 아니였다고 한다.[14] 미사와는 카키하라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퇴단했음에도 카키하라의 퇴단 사실을 발표할 때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언급하며 카키하라의 마음의 짐을 덜어줬을 뿐만 아니라, 카키하라의 은퇴 때도 꽃다발을 전달해 주는 등 대인배로 정평이 나 있는 미사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5] 이노키즘에 질린 무토 케이지와 무토에게 권유받은 코지마 사토시와 함께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탈했다.[16] 최상단의 사진이 스즈키 미노루와의 경기 때의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