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10:01:31

타무라 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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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타무라 키요시
([ruby(田村 潔司, ruby=たむら きよし)])
생년월일 1969년 12월 17일 ([age(1969-12-17)]세)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국적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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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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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종합격투기 전적 48전 32승 13패 3무
5KO, 13SUB, 8판정, 6기타
4KO, 3SUB, 4판정, 2기타
체격 180cm / 90kg
주요 타이틀 Rings 메가 배틀 토너먼트 1997 우승
Rings 초대 무제한급 챔피언
Rings 3대 무제한급 챔피언
기타 Rings 메가 배틀 토너먼트 1996 준우승
Rings 킹 오브 킹스 토너먼트 1999 3위
테마곡 Fire of Mind - 우치다 코이치

1. 개요2. 전적3. 커리어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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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종합격투기 선수.

2. 전적

3. 커리어



UWF 선수로 활동했을 당시 91kg(200파운드)였는데, Rings 이적 후 85~90kg 체중으로 경기를 치렀다. 실제 본인의 Best 체중은 87kg 정도로 프라이드 미들급(-93kg) 초반 경기 뛸 당시 Best 체중으로 경기를 뛰었다.[1] UWF에서 활동한 프로레슬러 출신으로, 진중한 무사 같은 분위기 덕에 상당한 스타였다. 타무라의 UWF~Rings 시절을 다룬 다큐[2]

고등학교까지 스모를 수련했으며, 신생 UWF가 탄생한 88년 UWF 일반인 연습생으로 20살 나이에 합격하여 프로레슬링에 입문했다.[3] 신생UWF를 거쳐 UWFi 당시 메인 선수로 다카다 노부히코와 더불어 UWFi의 흥행 메이커였으나, 다카다가 UWFi 선수 생활 중 얻은 인기를 이용해 정치권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는 바람에 UWF 재정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결국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다카다의 원칙이었던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손을 잡지 않겠다는 원칙을 깨며 'UWF vs 신일본'이라는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이 과정에서 타무라가 참전을 거부하면서 다카다와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자 다카다 노부히코는 타무라를 UWFi에서 제명시켰다. 이렇게 UWFi에서 고립되어 있는 상태였던 타무라한테 K-1 측에서 UFC 준우승자 출신인 패트릭 스미스와의 경기를 제안했고, 타무라는 패트릭 스미스를 힐훅으로 제압했다.[4] 이 경기의 반향은 꽤 컸는데, 타무라 개인의 지명도와 인기도 수직상승했지만, 무엇보다도 프로레슬러가 데뷔전에서 UFC 준우승자 출신 선수를 상대로 승리한 덕분에 '프로레슬링은 실전에 강하다.'는 주장이 다시 한 번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5] 결국 UWFi는 다시 타무라를 단체 이벤트에 부를 수밖에 없게 됐고, 타무라는 96년 5월 사쿠라바 카즈시[6]와 경기를 승리한 후 UWF 정체성의 상징인 붉은색 다리 보호대를 관중석을 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마에다 아키라가 이끄는 Rings로 이적했다.

Rings에서 초대 무제한급 챔피언,[7] Mega Battle 토너먼트[8] 3대 우승자를 지내는 등 간판스타로 활약했으며, 헨조 그레이시를 꺾기도 했다.[9] 그러던 중 계약 문제 등으로 마에다 아키라와의 불화가 생기자 2001년에 Rings를 퇴단하고, PRIDE로 이적했다. 그리고 약 1년만에 복귀전 겸 PRIDE 데뷔전을 반달레이 실바와 미들급 타이틀전으로 치렀지만,[10][11] 체급차를 이기지 못하고 2라운드 KO패 당하고 말았다.[12][13]

사쿠라바 카즈시, 밥 샙, 반더레이 실바 등 다양한 선수와 싸운 베테랑이다. 그 이전 Rings에서는 볼크 한, 올렉 탁타로프,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프랭크 샴락, 헤나토 소브랄과 경기했다. 대부분 전성기를 Rings에서 보낸 만큼 만만찮은 상대들과 싸웠다.[14]

타카다 노부히코와의 대결에서 워크 제의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15]

추성훈 로션 파문 사건 때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고, 추성훈이 타무라를 다음 상대로 콜했으나 신혼여행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실제 드림 시절 그랑프리 2회전에서 대진이 성사될 뻔 했으나, 1회전에서 김태영한테 패배하면서 주최 측을 물먹였다.[16] 이 경기에서 타무라의 노쇠화가 눈에 띌 정도였으며, 결국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경기를 끝으로 더 이상 MMA 경기를 치르고 있지 않고 있다.

4. 여담

외골수와 다름 없는 마이웨이와 일반인 연습생으로 입문 후 UWF 및 MMA에서 보여준 격투 재능으로 '고고한 천재'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이 별명의 탄생은 UWF에서 나왔지만,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게된 건 패트릭 스미스 전 이후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부터이다. 저 경기가 잡힌 과정과 경기 결과가 앞서 언급한 모든 상황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붉은 무사'는 그의 UWF 정체성을 상징하는 별명으로 서브 별명이다.

상당한 포커페이스로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

사쿠라바 카즈시와는 프로레슬러 시절부터 사연이 많았다. 두 선수 모두 일본 격투기의 상당한 스타였기 때문에 이 대결은 연말 대회 'Dyanamite!!08'의 메인이벤트를 장식했다.[17]

2007년에 결혼했다. 배우자는 띠동갑 연하로 탤런트 사쿠라이 유미코. UWF 최후의 도둑놈 격투기 관련 방송 출연을 했었는데, 이 때 만남을 갖은 것으로 보인다. 김태영과의 경기를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아내의 내조가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5. 둘러보기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최고의 테크니션
딘 말렌코
(1997)
타무라 키요시
(1998)
오오타니 신지로
(1999)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5성 경기 [★]
1998년
6월 27일
Rings
링스 파이팅 인터그레이션 IV
싱글 매치[19]
코사카 츠요시 vs 타무라 키요시


[1] 추성훈도 실력까지 겸비한 일본인 중량급이라는 특징 때문에 HERO'S에서 사쿠라바 카즈시를 이을 일본 중량급 영웅으로 만들어 HERO'S의 인기를 맡기려 했다.[2] 방영 시점은 97년 메가 베틀 토너먼트 우승까지 다룬 일대기. 96년에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듬해 볼크 한에게 리벤지 성공,(토너먼트가 아닌 일반 경기) 토너먼트에서 볼크한을 잡고 올라온 미하일 일류힌을 꺾고 우승했다.[3] 당시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4] 타무라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 경기에서 졌으면, 은퇴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타무라가 프로레슬러로서 입지가 얼마나 불투명했던 상태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5] 타무라 vs 패트릭 스미스 경기가 열리기 정확히 1년 전 안조 요지가 도장 깨기를 하기 위해 힉슨 그레이시와 맞붙었다가 대참패를 당했었는데, 타무라가 패트릭 스미스를 꺾으면서 프로레슬링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평가와 함께 '프로레슬링 vs 브라질리언 주짓수'라는 프레임이 생겼다. 이는 결국 PRIDE 탄생으로 이어졌다.[6] 이때, 사쿠라바는 언더카드 선수였다. 각본이 있는 경기였지만, 타무라한테 하체관절기를 걸고 분전을 한 끝에 패배했다.[7] 3대 Mega Battle 토너먼트 결승전과 통합으로 개최되었고, 이 경기 승리로 무제한급 타이틀과 토너먼트 우승 타이틀을 획득한다.[8] 이후 이 대회는 참가자가 더 큰 토너먼트가 되어 King of Kings(일명 KOK)라는 명칭으로 개최되었다. 기존 16강에서 KOK는 32강으로 확대하였으며, 각각 Block A, B로 나눠서 치렀다.[9] 그러나 Rings는 단체 특유의 선수 보호 룰 때문에 마이너 단체로 전락하였으며, 타무라 개인의 인기도 그즈음 PRIDE에서 그레이시 헌터로 맹활약하고 있었던 사쿠라바 카즈시에게 추월당했다.[10] UWFi 이후 사쿠라바와 타무라도 각 단체에서 흥행을 이끌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Rings의 룰은 재미가 없었고, WOWOW라는 케이블 위성 방송으로 방영되었기 때문에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반해 PRIDE는 시작부터 아사히 TV를 거쳐 후지 TV를 통한 방영으로 대중성이 확보되어 있었으며, 사쿠라바 카즈시의 대활약 덕분에 인지도가 대역전되어 버렸다. 타무라가 헨조 그레이시를 이긴 그 해, 사쿠라바는 호이스 그레이시를 이기면서 완벽하게 묻혀버렸다. 이후 사쿠라바 또한 헨조를 이기면서 더더욱 묻혔다. 그럼에도 인지도와 달리 마이웨이 스타일과 진중한 모습덕에 '고고한 천재'라는 별명이 굳히게 된다. UWFi 이후 사쿠라바와 타무라의 서로 다른 행보로 사쿠라바와의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붙고, UWF 출신에 '실력+흥행성'에 모두 부합되기 때문에 '미들급 타이틀전'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이적 후 복귀 경기가 성사된 것이다.[11] 이 때 실바 레이드로 희생된 선수들 중 일부는 UWF 또는 UWF에서 파생된 격투기 단체 ACE 선수들이 대상이었다. UWF 출신으로는 카네하라 히로미츠, 판크라스 출신으로는 곤도 유키가 대표적인 예.[12] 타무라는 사쿠라바와 비슷하게 평소 체중이 87kg 가량 된다. 평소 체중으로 나온데 반해 실바는 감량한 93kg로 나왔으니... 이때 격투기는 무차별급 구도에서 각 체급별 타이틀로 가는 흐름인 걸 간과하면 안 된다.[13] 한편으로는 PRIDE 측에서 UWF 출신이라는 이유로 흥행카드로만 쓰고 버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말 그대로 타무라가 UWFi에서도 외골수 스타일이기도 했고, 이후 실바 레이드로 복귀전을 치른 이후 밥 샙과의 경기를 치르고, 다카다의 은퇴 떡밥 카드로 소모된 이후 유도계에서 격투기로 전향한 요시다 히데히코의 상대로 출전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흥행성 보장되는 자버 취급을 받은 것. 그리고 선수 본인이 마이웨이가 심했고, 이런 대우를 받고 존심이 상할대로 상하여 왠만한 경기 제안은 일단 거절했다. 그 때 거절했던 경기 중 하나가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대결.(2003 남제에서 추진하려다 실패. 단, 2004년에는 추진될 뻔했으나 사쿠라바의 부상으로 무산되었다.)[14] 다만 Rings는 해체 직전 각 체급별 타이틀이 생겼을 정도로 쭉 무차별급 경기들만 잡았다. 이것 때문에 타무라의 기량 대비 전적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KOK 경기에서 히카르도 아로나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의 경기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 격투기 흐름에서는 성사되기 힘든 경기였던 셈.[15] 다카다가 난데없이 앞으로 전진하다가 타무라의 훅을 맞고 쓰러지며 경기가 종료되었는데, 그때 다카다의 당황한 눈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다카다:아, 원래 오늘 나 지면 안 되는데 본래 워크 경기인데, 타무라가 UWF부터 쌓인 감정 때문에 대놓고 경기를 망쳤다는 얘기도 있다.[16] 김태영은 최홍만의 타격 스승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앤디 훅과 함께 정도회관에서 수련한 가라테 선수이며, K-1에서도 활동한 바 있다. 입식 타격 전문으로 종합격투기에서는 그때까지 전적이 2전뿐인 거의 반쪽짜리 파이터였던 것. 그러나 김태영의 태클 방어 및 그라운드 대응에 타무라가 그라운드에서 아무것도 못 했고, 타격에서는 본인 주특기인 로우킥을 역으로 맞는 등 그야말로 완패했다.[17] 사실 PRIDE가 건재했다면, 이 경기는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PRIDE 도산 사태 이후 격투기 자체 흥행은 이미 수직하락 중이었고, K-1 측에서 흥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재들 대상 UWF 추억팔이 잡은 경기라는 말이 많다. 경기를 치렀을 당시 나이 40세였음을 감안하면...[★]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19] 시간 초과 무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