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1:52:38

최태규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최태규
崔泰奎
<colbgcolor=#4d7958><colcolor=#fff> 출생 1919년[1] 3월 30일
강원도 정선군
사망 2009년 10월 16일 (향년 90세)
평양시
본관 강릉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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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d7958><colcolor=#fff> 학력 화동공립국민학교 (졸업)
일본전수대학 (법학부)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
경력 대한일보정경부기자
가족 배우자
아들 최종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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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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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북한정치인이다.

2. 생애

1919년 강원도 정선군 동면(현 화암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화동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센슈대학 법학부 3년 과정을 수료한 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해방 후 대한일보 정경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강원도 정선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외무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9월 19일과 11월 23일 각각 한미협정[3]과 미군주둔에 반대하는 성명서[4]에 이름을 올리는 등 소장파 활동을 했다.

1949년 5월 18일 3명의 의원들과 함께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5]#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고 결국 1950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6]

1950년 6.25 전쟁 도중 월북하였고, 월북 이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7] 결성에 참여하여 연구원, 교양부부장, 부회장, 부위원장, 상무위원 등으로 일하였다. 하지만 1958년 영웅주의적성품의 소유자란 낙인이 찍혀 황해도의 광산으로 추방당했다.#

1965년 3월 안재홍 장의위원, 1974년 1월 박열 장의위원을 지냈다.[8] 1998년 8월 1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2004년 민족21 취재진이 재북인사릉 취재를 위해 방북했을 때 안내인으로 나오기도 했다.

2009년 10월 16일 오전 6시경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통일신보 부고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사업에 모든 힘과 지혜를 다 바쳤다."라고 밝혔다. 그의 죽음으로 제헌 국회의원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9]

북한은 2021년에 나온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 7권에서 최태규의 일대기를 정리하였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강원 제8선거구[10]

[[무소속(정치)|
무소속
]]
7,757 (31.82%) 당선 (1위) 초선[11]

4. 둘러보기

파일:강원도 옛 휘장(~1962년).webp 강원도 제헌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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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춘성 홍천 횡성
공석 이종순 이재학 원용균
홍범희 장기영 황호현 공석
삼척 울진
원장길 최헌길 김진구 김광준
* 춘천 최규옥 사퇴 (1949.12.21.)
* 정선 최태규 자격상실 (19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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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 측 부고에서는 1920년생으로 서술.[2] 태어나기 전에 최태규가 납북되어 둘은 서로를 본적 없다.[3] 26인 중 한명[4] 18인 중 한명[5] 이를 흔히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부른다.[6]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 2면에 따르면 남파 공작원 성시백에 의해 포섭된 국회의원이란 표현이 나와 어떻게든 최태규를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관련있음이 들어났다.[7] 월북 및 납북 인사들로 이루어진 북한의 선전단체[8] 이를 미루어보아 1958년 추방당한 뒤 얼마 안 돼서 복권된 듯하다.[9] 김인식이 마지막 제헌의원이라고 알려졌으나 최태규가 월북 인사라 많이 조명받지 못한 듯하다.[10] 정선군[11] 1950.2.10: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