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4:17:11

최태규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최태규
崔泰奎
<colbgcolor=#4d7958><colcolor=#fff> 출생 1919년[1] 3월 30일
강원도 정선군
사망 2009년 10월 16일 (향년 90세)
평양시
본관 강릉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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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d7958><colcolor=#fff> 학력 화동공립국민학교 (졸업)
일본전수대학 (법학부)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
경력 대한일보정경부기자
가족 배우자
아들 최종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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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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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북한정치인이다.

2. 생애

1919년 강원도 정선군 동면(현 화암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화동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센슈대학 법학부 3년 과정을 수료한 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해방 후 대한일보 정경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강원도 정선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외무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9월 19일과 11월 23일 각각 한미협정[3]과 미군주둔에 반대하는 성명서[4]에 이름을 올리는 등 소장파 활동을 했다.

1949년 5월 18일 3명의 의원들과 함께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5]#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고 결국 1950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해당 사건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이후 여러 정황과 증언으로 나와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형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1950년 6.25 전쟁 도중 월북하였고, 월북 이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6] 결성에 참여하여 연구원, 교양부부장, 부회장, 부위원장, 상무위원 등으로 일하였다. 하지만 1958년 영웅주의적성품의 소유자란 낙인이 찍혀 황해도의 광산으로 추방당했다.#

1965년 3월 안재홍 장의위원, 1974년 1월 박열 장의위원을 지냈다.[7] 1998년 8월 1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2004년 민족21 취재진이 재북인사릉 취재를 위해 방북했을 때 안내인으로 나오기도 했다.

2009년 10월 16일 오전 6시경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통일신보 부고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사업에 모든 힘과 지혜를 다 바쳤다."라고 밝혔다. 그의 죽음으로 제헌 국회의원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8]

북한은 2021년에 나온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 7권에서 최태규의 일대기를 정리하였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강원 제8선거구[9]

[[무소속(정치)|
무소속
]]
7,757 (31.82%) 당선 (1위) 초선[10]

4. 둘러보기

파일:강원도 옛 휘장(~1962년).webp 강원도 제헌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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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춘성 홍천 횡성
공석 이종순 이재학 원용균
홍범희 장기영 황호현 공석
삼척 울진
원장길 최헌길 김진구 김광준
* 춘천 최규옥 사퇴 (1949.12.21.)
* 정선 최태규 자격상실 (19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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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 측 부고에서는 1920년생으로 서술.[2] 태어나기 전에 최태규가 납북되어 둘은 서로를 본적 없다.[3] 26인 중 한명[4] 18인 중 한명[5] 이를 흔히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부른다.[6] 월북 및 납북 인사들로 이루어진 북한의 선전단체[7] 이를 미루어보아 1958년 추방당한 뒤 얼마 안 돼서 복권된 듯하다.[8] 김인식이 마지막 제헌의원이라고 알려졌으나 최태규가 월북 인사라 많이 조명받지 못한 듯하다.[9] 정선군[10] 1950.2.10: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