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 추정~1755 추정.
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신, 기술자. 장영실과 함께 공밀레의 아이콘.2. 출생
지금의 경상남도 지방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동래 출신이라는 설이 있고 웅천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아들 최야곤이 동래 출신으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 동래 출신일 가능성이 더 높다. 어느 쪽이 고향이든, 재밌는 점은 두 곳 모두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라는 점이다. 실학자 황윤석은 최천약이 왜관을 드나들면 기술을 배웠다고 기록했다. 이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던 명릉, 익릉 공사가 실패하자, 조선의 재정을 탕진하러 온 왜인이라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무인이지만 《무과방목》에는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과 외에 다른 경로로 관직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3. 공밀레
무신이었지만 뛰어난 기술자로 평가받았다. '수백 년 이래로 다시 구하지 못할 재주'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정조 역시 나라에 기술이 필요할 때마다 번번이 최천약 같은 이가 없음을 한탄했다. 기술 덕분에 최천약은 기술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차출됐다. 최천약 본인은 기술자 취급 받는 것을 꺼렸다. 기술자들에게 지급하는 공임마저 거부할 정도였다. 조선의 신분 질서에서 기술자는 천시됐기 때문이다.최천약의 활동 분야는 국방부터 예술까지 다양했다.
무인으로 종3품 첨사 자리까지 오른 최천약은 총차(銃車)라는 무기를 발명한다. 4층 수레에 화포를 스무 문 탑재한 무기였다.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에 있는 문인석으로 최천약의 작품이다.
옥책이나 옥인 등 왕실 용품 제작에도 번번이 차출됐다. 왕실이나 고관의 묘에 쓸 석물 제작 역시 최천약의 몫이었다. 죽기 전까지 영조 시대 왕실 석물 제작은 대부분 최천약의 전담이었다. 영조가 편경, 편종 등 악기를 제작할 때 사도[1]첨사로 있다가 서울로 불려오기도 했다.
조정은 정밀한 기술이 필요할 때도 최천약을 동원했다. 영조가 국가 표준을 정할 때나 보루각을 재건할 때 일선에 투입됐다. 자명종 같은 서양 물건을 잘 다루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조선 최고의 자명종 기술자로 꼽힐 정도였다.
이렇게 뛰어난 기술을 가진 덕에 사신 행렬에도 동행했다. 조선은 외국 기술을 배워오기 위해 최천약을 사신단에 합류시켰다. 1711년 일찍이 조선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왔다. 1730년 그의 후원자이자 영조의 측근인 서평군[2]이 사은사 겸 동지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 청의 문물을 배워오기 위해 사신 행렬에 동행하게 됐다.
1753년에 관직에서 은퇴했고 언제 죽었는지는 알수없지만 고령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봐서는 1755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기타
- 일설에 의하면 1731년 무과에 계속 낙방하자 한성의 약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한다. 어느날, 할 일이 없었던 최천약은 천궁으로 조각을 깎았는데 그 솜씨에 놀란 약방 주인이 그를 서평군(西平君)에게 소개했다. 최천약의 솜씨를 알아본 서평군은 그를 다시 영조에게 소개시켜 준다. 영조는 최천약의 기술을 시험하기 위해 바늘이 떨어진 자명종을 고치게 한다. 서울의 장인들도 쉽게 고치지 못하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최천약은 간단하게 자명종을 고쳤고, 뛰어난 기술자로 영조에게
혹사당했다총애받았다. 최천약의 실제 행적과 비교할 때, 사실성이 떨어지지만 최천약의 뛰어난 기술을 말해주는 일화다.
- 유공이란 사람이 한성부의 현판을 탁본하려 했는데 현판이 너무 높아 할 수 없었다. 최천약에게 방법을 물으니 최천약은 현판을 따라 글씨를 썼다. 화가 난 유공이 사다리를 가져와 현판을 탁본했더니 최천약의 글과 똑같았다고 한다.
- 만화가 윤승운이 어린이 잡지 생각쟁이 창간호에서 최천약의 생애를 다룬 에피소드를 만화로 그린 적이 있다. 맹꽁이 서당을 연재 재개하기 이전이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