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3 20:17:19

최종응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최근응(崔謹應)
자 / 호 성문(聲聞) / 금전(琴田)
본관 경주 최씨[1]
출생 1871년[2] 8월 21일[3]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둔산동
(現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4] 옻골마을 382번지)[5]
사망 1944년 1월 24일[6]
묘소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종응은 1871년 8월 2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둔산동(現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382번지)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최남교(崔南敎, 1846. 6. 30 ~ 1907. 7. 3)와 어머니 청주 정씨(1844. 12. 13 ~ 1923. 9. 25)[7]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달성군 해안면 둔산리(現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72번지[8]이주했다.

1919년 음력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고일청(高一淸, 1886 ~ ?)[9]은 내무총장 이동녕과 임시의정원 의원 최창식(崔昌植)의 소개장을 들고 비밀리에 입국하여 윤영선(尹榮善)[10]을 방문하여 조선 내에 장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을 설치할 것이라며 「선정대사(宣政大使)」라는 신임장과 「지방행정조직서(地方行政組織書)」·「지방행정관리통칙서(地方行政官吏通則書)」·「경고부내대소민(警告部內大小民)」이라는 제목이 붙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교서 등을 보여주며 도움을 청하였고, 윤영선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 조직서들에 의하여 각 도에 선정사(宣政使) 및 각 군면에 관장(管長)을 두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최종응은 경상북도 선정사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여 동지 고정일(高政一)·윤영선·이태훈(李泰勳)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조달기반을 조성하였으며 그해 9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순방하며 자산가들의 자산명부를 작성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해 11월에는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 오계동(現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에 사는 조석환(曺奭煥)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8백원을 받아 임시정부 파견원 고일청[11]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1년 2월 경상북도에 거주하는 부호들에게 2천원 내지 5천원을 요구하는 군자금 납입명령서를 발송하고 이중 경상북도 영천군 청경면 상리동(現 영천시 고경면 상리리)에 사는 손계창(孫啓昌)과 칠곡군 지천면 금호동에 사는 윤병돈(尹炳敦)으로부터 300원씩 받아서 이태훈에게 전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해 6월 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1년 12월 19일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미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1922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은거하다가 1944년 1월 24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광정공파(匡靖公派)-대암공파(臺巖公派) 31세 종(鍾) 항렬.#[2] 경주최씨광정공파보 권5 9쪽에는 187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1921년 12월 19일 판결문에는 8월 22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인근의 봉무동과 함께 경주 최씨 광정공파 집성촌이다.[5] 이 지번에는 현재 최종응의 생가인 금전고택이 자리해 있는데, 이 지번은 1943년 1월 27일 이후 최종응의 7촌 재종질(再從姪)인 최현영(崔顯永, 1913. 2. 23 ~ 1975. 2. 6)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98년 12월 28일 최현영의 장남 최완식(崔完植, 1939. 11. 26 ~ )의 소유가 되었다. 2006년 12월 28일 현재 경주최씨백불암파종중(백불암(百弗庵)은 최종응의 6대조 최흥원(崔興遠, 초명 최흥원崔興源, 1705. 2. 15 ~ 1786. 8. 22)의 호이다.) 소유로 되어 있다.[6] 음력 1943년 12월 29일.[7] 한강 정구의 후손으로, 정인화(鄭仁和)의 딸이다.[8] 이 지번은 1935년 6월 14일부터 5촌 당질(堂姪)인 최장영(崔章永, 초명 최장영崔長永, 1905. 11. 12 ~ 1980. 11. 23)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85년 5월 14일 이후 7촌 재종질(再從姪)인 최도영(崔道永, 1920. 11. 27 ~ )의 소유가 되었다. 2009년 5월 8일부터 지금까지 최도영의 차남 최춘식(崔椿植, 1949. 6. 17 ~ )과 최춘식의 아들 최규돈(崔規惇, 1981. 9. 12 ~ )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다.[9] 창씨명은 다카미네 이세이(高峰一淸). 평안도 의주부 주내방(現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 1912년 일제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을 받고 일제강점기 초 관료를 지내다가 3.1 운동 직후 퇴직하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임시정부에서 재무부 비서국장, 임시공채관리국장,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27년 임시 정부기금 5만 원을 횡령해 독일로 유학가서, 베를린 대학교 법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다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10] 이명 윤철(尹喆), 윤병각(尹炳覺).[11] 또는 고일치(高一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