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淸匪청나라의 비적(匪賊)을 말한다. 비적이란 말 자체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반군[1]이나 의병 등 조정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을 통칭하는 데 쓰인다.[2] 청비는 주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던 마적이나 군벌을 가리킨다.
사실상 1900년대 초중반 대한제국군 진위대 4-6연대의 가장 큰 주적이었다. 이 시기에 의화단 사건으로 청나라의 행정력이 급감하면서 만주 지역의 혼란이 심해졌다.[3] 서울의 중앙군이 일본군에 잠식되는 동안 한반도 북부의 진위대 3개 연대는 청비 소탕에 매여 있었다. 넓은 평야 지대에 압록강이 있는 평안도 지역에 관서사령부라고 별도의 야전사령부를 세울 정도였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가서 살던 한인인 월간민들이 이들에게 입은 피해를 이유로 민병대를 조직하거나 진위대의 파병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2. 역사
2.1. 대한제국 수립 이전
만주 지역은 청나라 황실인 만주족의 봉금 정책에 따라 비어 있었지만 한민족이나 한족이 넘어가 사는 일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틈관동 이후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는데 행정력은 부족하였다. 그러면서 비적이 발생하기 좋은 구조가 되었다.1869년에는 의주부에 비적이 침입하여 청나라에 대처를 요구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 1870년에는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와의 국경 지역에 비적이 언급되었다. # 훈춘에서 비적 8명을 압송해와 조사하는 등 조선과 청나라가 비적을 두고 협조하는 일도 있었다. 무관인 황계훈(黃繼賢)이 중국 훈춘에 가서 비적들을 압송하였다. #
1871년엔 후창군에 비적들이 넘어와 불을 질렀다. #
1872년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 압록강 인근의 중국 국경은 비어 있어야 했으나, 청나라의 행정력이 감소하여 무단으로 들어와 살고 월경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자가 생겼다. # 중국 상선이 마적을 피해 월경하였고 마적도 따라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조선군이 비적과 교전하였다. #
1876년에도 비적이 들어와 경원부를 약탈하였다. #
1890년대 후반엔 점차 의화단 등과 관련되어 청비의 준동이 확대되었다.
2.2. 1899년
기록에서 삼수군과 갑산군이 비적의 피해가 심하다고 말하고 있다. 북청지방대가 있지만 거리가 400리가 넘어 지원이 어려워 주민들은 포수를 모아 계를 설치하여 대응하고 있었다. 이 일로 북청진위대는 5연대로 확장되어 종성과 덕원에 대대가 설치되었다. # 원수부내거안에 따르면 1899년 주한영국공사관을 통해 청나라와 이 문제 관련해 교섭했다. 청일전쟁 이후 1899년 9월 11일 한청통상조약까지 대한제국과 청나라는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청나라 측에선 청비를 청나라 관원이 타이를 수 없다며 한국 관원이 진압하는 것을 묵인하였다.2.3. 1901년
삼수 군수인 채규승(蔡奎昇)이 삼수의 변성에서 비적을 격퇴시켜 포상하였다. # 채규승은 포계(砲契)를 만들어 민병 위주로 방어한 것으로 추정된다. #1월 원수부 조복 1호에 따르면 관서사령부의 장병들에게 강을 건너 만주 지역으로 진입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청나라에서 외교 채널로 계속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5월에 북청진위대 소속의 소대장들인 조기설(趙基卨), 김상열(金商說), 강희규(姜煕圭)가 삼수 지역에서 청비를 격퇴하여 포상하였다. # 종성진위대 소속의 소대장 나영훈(羅泳熏)도 비적 150명을 격퇴하여 포상을 받았다. #
2.4. 1902년
1902년의 청비 관련 포상 #- 길림성 약탈 사건
1월 16일 외부대신인 박제순이 원수부 검사국총장 민영철에게 보낸 조회 1호에 따르면 청국공사 허태신이 1910년 음력 8월에 한국군이 강을 건너와 길림성에서 인민을 묶고 가옥을 부수고 약탈했다고 항의하고 있다. 이 병력은 무산성에서 건너왔다고 하는데 무산에 주둔한 소대급 병력으로 추정된다.
종성진위대의 보고에 따르면, 청국인 수백명이 무산성 인근의 북로덕에서 약탈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약탈로 추수철이 늦어지자 한국군에서 이들을 주시했는데, 비적들이 강가에서 한국군의 순초군(정찰병)을 보자 강 건너에서 일제사격을 했고 한국군도 대응사격하였다. 한국군의 결론은 아래의 회인현은 한국군의 잘못이 있어 처벌하였고, 무산군에서는 청비와 싸운 것이라 문제가 없단 입장이다.
- 회인현 약탈 사건
회인현에서도 1901년 8월 11일에 한국군 병사가 도강하여 번갱경 부자를 결박하고 국길수의 집을 약탈했다고 성경장군이 보고하였다. 4월 7일에 검사국 총장인 조동윤이 외부에 보낸 조회 6호에 따르면, 강계진위대에서 회인현 사건을 조사하였다. 확인 결과 회인현에서 약탈을 한 게 사실이어서 소대장인 이종덕 등이 처벌되었다.
- 초산주대 월강 사건
조회 8호에 따르면 청나라측 봉천장군의 보고로, 1901년 12월 24일에 초산성 소속의 한국군 병력이 도강하여 손파도의 집에서 윤간을 하고 왕공순, 송득재를 살해했다. 그러자 청나라 측 둔민들이 한국군을 추적하여 2명을 체포하고 총기 2정을 빼앗았다.
같은 해 7월의 조복 9호에 따르면 초산대 소대장인 이교상이 회인현의 요청에 따라 사람을 보내 손파도의 집에서 일어난 윤간사건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손씨 집안과 갈등이 있는 인물이 꾸며낸 소문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초산대의 병사인 조형칠과 김응규가 청국인들에 체포되어 회인현에 갇혔는데, 한국 측에서는 죄를 지었더라도 부대에서 처벌해야 한다며 이들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8월에 외부는 원수부에 청국인 왕공순과 송득재가 살해된 일에 대해 해명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청국에 전달할 수 없다고 반응했다.
9월 5일의 조복 13호에 따르면 왕공순과 송득재가 살해된 연유는 이렇다. 진위 6연대 2대대의 대대장서리인 참령 권용철이 보고하였다. 1901년 음력 12월 21일에 러시아어 통역관인 강응서가 초산주대에 찾아와 청비들이 불법적으로 무기를 수레에 실어서 운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왕무충의 물건을 옮기는 중이라 하였다. 강응서는 이 물건이 장물이라며 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육군부위 김종진이 민병조직인 충의사[4]와 협력하여 포수 10명, 병사 7명과 함께 추적하였다. 통구(길림성 집안 근처)에서 총기 8정과 탄약 등을 압수하였다. 포수인 김찬국이 썰매를 타고 먼저 앞으로 갔는데 청국인들이 둔기를 들고 김찬국을 구타하며 칼을 뺏으려 했다. 김찬국이 이에 발포하여 2명을 죽였다. 김찬국은 사람을 죽인 죄로 일단 한국군 측에서 옥에 가뒀다.
이 사건은 아래의 러시아군 협력자 사건과도 연관이 있다. 이성지는 위의 무기 주인인 왕무충과 협력했다. 중대장 김귀성은 이와 관련해 관서사령부에서 이성지의 체포 명령을 받았다. 이성지가 나타나자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러시아와 연관이 있던 강응서가 알아보았다. 강응서가 이에 찾아와서 무기를 압수하러 가고 사망자가 나왔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발포로 일어난 사망이라서 원수부 측에서는 수사는 한국과 청국의 지방관이 협력할 일이며, 소대장 김종진이 자의적으로 초산주대의 병력을 국경을 넘어 멋대로 파견했다며 근신 처분하였다.
1903년 1월에 청국 측은 포수 이해금, 한문독 등 16명이 청국 국경을 넘어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고 왕공순과 송득재를 살해했다고 하였다. 청국은 이 증언을 청나라에 억류 중인 조형칠, 김응규에게 들었다고 적으며, 한국에서 보내온 공문과 내용이 다르다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 상화사 약탈 사건
5월 5일에는 청국측에서 다시 항의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1901년 11월에 수수평의 병관인 한국인 이씨가 병사들을 데리고 청나라 상화사에서 중국인 왕수천을 결박하고 고문한 뒤 돈을 뺏었다. 이후 다른 중국인 왕문괴를 데리고 강을 건너갔다. 10월에는 양호 김내문[5]이 결박되어 강을 건너갔고, 초가집 18칸이 방화되었다. 한국 군인이 월경하여 숭화사와 선화사에서 청국인을 구타하였다. 오인안 등 20채의 가옥이 한국군에 약탈되었다. 강주성 온화보에선 11월 26일에 한국인들이 월강하여 청국인 양유춘의 산에서 키우던 나무를 벌채하려고 했고, 양유춘이 이를 막자 구타하였다. 청국의 주장을 듣고 원수부에서 조사를 지시하였다.
- 러시아군과 협력한 한국인 약탈자
6월의 조회 22호에 따르면, 외부에서 한국인 이성지, 임병수가 청나라 땅에서 러시아군과 협력하여 한국의 민인을 약탈한 일이 있어 러시아공사관 측에 체포와 소환을 요청하였다. 5개월 전인 1902년 1월에 이미 한국군 부위 김병도[6]가 봉천에 가서 이성지가 부윤을 살해했다며 체포를 요청하였다는 내용도 전했다. 초산대 소속의 병사가 국경을 넘어 이성지의 가족들을 찾아내 죽이겠다고 협박한 일도 있었다. 이를 두고 청나라 측에서 월경은 불법이며, 이성지가 무고를 당했다며 이성지의 가족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외부에서는 원수부 검사국에 김병도의 상황을 파악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10월 2일의 조회 14호에 따르면 이렇다. 이학균은 1901년 11월에 이성지의 범죄 행위를 두고 러시아의 크라스키노 국경사무관인 유진 스미르노프[7]가 의주에 방문하자 만나서 논의하였다. 이때 수행원으로 육군부위 김병도가 동행하였다. 이후 스미르노프가 청나라 통화현에 주둔중인 러시아군 주둔대장 마트리토푸하야에게 이성지의 체포를 요청했고, 주둔대장은 이들을 압송해 봉천으로 넘겼다고 하였다. 봉천 주둔 러시아군 사령관인 크베친스키는 이들의 한국 인도를 거부하였다.[8]
이학균은 병사들이 이성지의 가족을 체포한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김종진이 월경할 때 따라온 병사는 자성대 소속이었는데 1년 정도가 지나서 병사들이 이동하거나 제대하여 당시를 기억하는 병사를 찾아내 조사하였다. 병정 김준승이 진술하였는데, 1901년 12월에 부대에서 군량미를 사도록 병졸 김응규와 조형칠을 강계와 만포 등에 보냈다. 이들이 며칠이 지나도 귀대하지 않자 김준승이 가서 이들과 만났다. 이들은 물량 문제로 구입이 늦어졌는데, 해명을 들은 김준승이 귀대했다. 그 뒤에도 이들은 귀대하지 않았는데, 빨리 돌아오려고 청나라 국경 쪽으로 오다가 덕순천의 한국인 집에서 숙박했다. 이후 이 둘은 강간살인 혐의로 청국에 체포되었단 게 1903년 조회 1호에서 확인된다.
- 유전원 사망 사건
7월 12일에는 청국공사가 조회를 보냈다. 이에 따르면, 1901년 11월 15일에 길림성 상화사에서 한국군 병사 이소삼 등 2명이 청국인 임상진의 집안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임상진의 친척인 유전원은 뺨에 총을 맞아 혀가 잘렸고, 11월 29일에 사망했다. 이에 따라 국경부대에 조사 명령이 내려졌다.
8월 26일에 보고가 올라왔는데 무산주참 4중대장인 정위 반돈식이 유전원은 한국군병이 아닌 청비의 총알에 맞아 사망했다고 병사들의 진술을 전하였다. 이도경의 아들이라는 이소삼이란 병사는 없고 대신 이도경의 아들 이화영은 있었다.
이후 검사국총장인 조동윤이 사병들의 증언만으로 불충분하다고 여겨서 강가에 사는 청국인 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청국인 왕수전이 유전원이 청비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증언에 따르면 임상진과 유전원은 한국인과 청국인을 상대로 불법적으로 재산을 취득했는데, 이로 인해 적이 많았다. 청비들이 찾아와 유전원을 찾아 불고문을 하며 돈을 요구했는데 거절해 총을 맞았다. 이후 유전원은 한국인 이여천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청국인 왕배의 집으로 가서 사망하였다. 조동윤은 이를 두고 한국과 청국의 장교들이 공동으로 수사할 것을 제안하였다.
- 한국인 정탐관 납치
1902년 9월 29일 조회 14호에 나오는 내용이다. 특파변계정탐관 서상무는 음력 7월 20일에 간도로 넘어간 월간민의 현황을 파악하려고 넘어갔다. 음력 8월 2일에 청비 15명이 정탐관이 머무는 집을 찾아와 사람들을 납치했다. 이를 후창주둔 소대의 소대장 정민화가 자성주둔 중대장 이대규에게 보고했고, 이후 강계대대장서리 권용철을 거쳐 관서사령관 민영철에게 보고되었다.
10월에 조복 29호에 따르면, 청나라 측은 정탐관의 소재 파악이 안 된다고 답하였다. 봉천장군이 조사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고 한국군이 강을 건너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12월 30일의 조회 34호에서 청국 측은 정탐관 서상무의 납치 사건이 한국 관리들이 무단 월경하여 생긴 문제라며 재발 방지를 요구하였다. 청나라 측은 보정 왕보산이 8월 15일에 청비를 기습하여 한국인 관원 4명을 구출했다고 전했다.[9] 한국 관원은 성을 수리하고 지세를 조사하러 왔다고 증언하였다. 이를 두고 조약 위반이라며 청이 항의하였다. 당시 한국 정부에서 간도나 요동 등지에서 정보 활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무산 민간인 집단 납치
1902년 10월 17일 조회 30호의 내용이다. 무산군 작목곤촌에 청비 수백명이 나타났다. 7명이 총에 맞아 1명이 사망, 6명이 중상을 입었다. 41명이 붙잡혔고 3명은 풀려났으나 38명이 청비에 끌려갔다. 이들은 몸값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함북교계관 채현식이 전보로 바로 보고하려고 했으나, 장마로 전신주가 고장나서 전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 간도 한인 민원
1902년 10월 29일 조회 16호의 내용이다. 당시 진위 5연대 3대대장인 김원계의 보고에 따르면, 종성의 강건너에 사는 한인 김용택과 조상갑이 공소하기를, 청나라의 군인들이 폭행과 수탈을 하고 청비들까지 길림과 태성 등지에 출몰한다며 한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한편으로 청국 관리인 형현기가 청비들을 함께 소탕하자며 원수부 군무국총장인 윤웅렬에게 공함을 통해 지원을 요청했다. 윤웅렬이 이를 두고 외부 측에 전하기를 청국에서 한국군이 월경하여 일어난 문제를 따지면서 정작 청비들이 일으키는 문제엔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다며 외부에서 청국공사관과 대화하여 적절한 처리를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2.5. 1903년
1903년에는 강홍대가 상소하여 진위대만으로는 막기 어렵다며, 옛 제도를 복구하여 진과 보를 재건하자고 하였다. # 그해 여름에는 청비들이 진위 5연대 2대대의 삼수주둔대를 공격하여 총기 34정과 탄약 5천7백 발을 약탈하는 일도 있었다. 중대장인 조기설은 이들의 추적을 지시했는데, 2개 소대가 월경하여 청나라 땅에 들어가 17명을 사살하여 국경을 넘은 죄로 처벌을 받았다. #- 포 설치
1903년 조회 8호로 함경북도교계관인 최남륭이 전달한 내용이다. 간도 지역에 사는 한인들이 청국의 수탈이 심하다며 포[10] 설치를 요구하였다.
- 한국 부사관 실종 사건
1903년 10월 19일 조회 20호의 내용이다. 한국군 진위 5연대 벽동분참대 소속의 하사(부사관)인 최우명이 물에 떠내려온 목재를 사기로 포구에서 계약을 했다. 이후 식량을 사러 병사 김인관, 강정룡과 포구를 방문했다가 청국 노동자들이 해당 목재를 훔쳐가는 것을 보았다. 이에 따지자 청국인들이 군인 셋을 다발로 묶고 뗏목에 실어 하류로 데려간 뒤 물에 밀었다.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 외에도 국경 강가에서 발생한 사건이 더 있다. 강계진위대 대대장서리인 정위 김귀성에 따르면, 순초정교(정찰부사관) 이길우가 병사 10명을 인솔해 자하동으로 이동하던 중에 청비들이 뗏목을 뺏어 묶었다. 뗏못 한 척당 금전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였고 청비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9월 17일에도 청비들이 무기를 들고 건포로 건너와 뗏목을 뺏고 평양으로 가져갈 예정인 목재를 탈취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이 목재는 풍경궁을 만드는 데 쓸 것이었다.
- 후창군 민간인 납치 사건
1903년 11월 9일 조회 35호의 내용이다. 청비가 후창군 무창면의 주민 5명을 납치했다. 함경남도 삼수군에도 청비가 찾아와 인명을 살상했다. 이후 관련 진위대에 원수부의 명령이 하달됐다.
- 연길청 한국군 약탈
1903년 11월 23일의 조회 37호 내용이다. 청국공사 허태신이 외부에 조회하였다. 청나라는 연길청의 숭화사, 선화사에서 일어난 한국군에 의해 곡물 약탈이 일어났고, 한국군이 파병하여 상화사와 덕화사를 정탐하고, 우심산 일대에 병사들이 초소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해당 병력이 청나라 측에 통지하기를 "전쟁을 일으켜 월간지를 요구하겠다(開仗索地)"고 하였다.
- 길림성의 한국군 월경
위와 같은 조회 37호 내용이다. 9월 11일과 15일에 한국군이 강을 건너 월간한인들과 규합해 청군을 공격하고 방화를 저질렀다고 길림장군이 보고하였다. 길림장군은 한국군이 강을 마주한 구덩이[11]에 몸을 숨기고 청군 병사가 왕래하며 총을 쏘았다고도 했다. 청나라 측은 이 사실을 10월 2일에 전보로 전달받았고, 청나라 외무부가 한국 측에 항의하였다.
이를 두고 조복 24호에서 군무국총장인 이봉의는 진위대에 국경을 건너지 않도록 다시 강조하며, 청나라가 근본적으로 청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12월 5일의 조회 39호에서 후일담이 나온다. 길림장군의 전보에선 한국군 700-800명이 봉천 임강현을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다.[12] 또한 9월 11일에 청나라 좌초초관[13] 강기순이 남둔에서 길을 조사하던 중에 한국인 허씨 집에서 한국군 40명이 나와 사격을 개시했다고 한다. 월간한민[14]들이 지원 사격하였다.
- 무산/종성 접경지역 교전
조복 25호의 내용이다. 무산, 종성, 회령 등에서 청비 약 1천 명이 넘어와 한국군 병정과 교전하였다.
1903년 12월 8일 조회 26호에서 원수부 측은 이 문제에 대해 답하길, 국경에 군대를 배치한 것은 단지 방어하고 수호하기 위한 것이며 월경을 허락한 적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정탐관 서상무나 간도관리사 이범윤의 문제는 원수부의 소관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의 안보 환경이 완전히 급변하고, 한국 정부가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청비 문제는 다른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3. 실존 인물
- 노귀(盧貴)
- 손양한(孫良漢)
- 송인광(宋仁光): 무산 지역에서 청비 활동을 벌였다가 다른 비적과 달리 도주하지 않고 근처에 있다가 체포되었다. 청국인이지만 정황상 한반도 내에 생활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적 6명이 송인광을 소위 동주(洞主)[15]라 하며 약탈한 재물의 1/7을 주었다고 하며, 송인광 본인은 도적의 재물을 받은 게 잘못이었다며 비적 행위 관여는 부인하는 쪽으로 주장하였다.
- 왕무충(王懋忠): 서양식 총과 총탄을 수입하는 등 규모가 큰 군벌로 추정된다. 러시아와 연줄이 있는 한국인 이성지 등이 왕무충과 연관이 있었다.
- 유패진(劉珮珍): 손양한과 함께 한청 국경 지역에서 방어사(防禦使)를 자칭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원수부내거안을 볼 때 이들도 다른 청비를 막겠다며 자경단을 만들었다가 그대로 갱단화된 것으로 보인다. 전장식 총으로 무장했고 후창군과 장진군 인근에서 약탈을 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대한제국군 진위대의 국경 부대들이 청비와 주로 교전하였다.5. 관련 문헌
- 대한제국기 간도 자료집(2) - 정보문서
[1]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에게 태평천국의 난을 물을 때, 비적이란 표현을 쓰고 동학 관련해서도 비적이라 표현한다.[2] 이 표현은 중화민국 시대에도 이어져서 무장공비 같은 단어의 기원이 된다.[3] 청나라 조정은 수도인 베이징 근처에 신식군대 부대들을 우선적으로 편제했고, 상대적으로 동북 지역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만주 대신에 산해관 인근 등에 북양군벌 부대를 배치하는 등 철저하게 수도 중심으로 방어했다. 신건육군이 점차 확대되면서 1907년에서야 만주 지역에 사단급 부대를 설치하게 된다.[4] 사포대는 1903년에 생겼고 충의대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시기상으로 창설 이전이지만 비슷한 이름을 쓰는 민병 조직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김씨란 성으로 볼 때 한국계 청국인으로 보인다.[6] 부위 김병도는 몇 해 전에 이학균이 강계와 의주 진위대의 검찰사로 파견됐을 무렵에 대동하여 갔던 인물이다.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장교였는지 관서사령부 측에서는 김병도의 현재 상황을 모르겠다고 답변하고 있다.[7] 이 인물은 1901년 11월에 서울을 방문하여 러시아와 한국의 간도공치안(공동통치)을 제안하였다. 대신에 경흥-러시아간의 전신선 가설과 마산포 조차를 요구하였다.[8] 정황상 이성지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9] 서상무와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10] 민병조직인 포군을 말한다.[11] 참호를 판 것으로 보인다.[12] 당시 문서들을 살펴보면 청비를 청군이라고 적는 경우도 있는 등, 병력의 규모를 말할 때 민간인이나 비적, 민병대, 정규군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진위대들이 대대급 부대라도 국경 지대에 독립중대나 독립소대로 흩어져 각자 작전을 담당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 숫자를 신뢰하더라도 이 병력은 진위대로만 구성된 게 아닌 한인 민병들이 상당수를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13] 아직 서구식 군제가 아닌 초와 초관 등의 제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도 친군영까지 사용한 개념이다.[14] 간도 지역의 한인을 말하며 내내 월간한인과 같은 말이다.[15] 그 지역의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