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0 02:32:19

주인철

제1·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주인철
朱仁喆
파일:주인철.pn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출생 1924년 3월 9일
전라남도 여수군 율촌면 조화리
사망 1990년 11월 13일 (향년 66세)
본관 신안 주씨[1]
학력 여수공립수산학교 (양식과 / 졸업)
조선대학교 (체육학 / 4년 중퇴)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경찰공무원 출신 정치인. 본관은 신안(新安).

2. 생애

1924년 3월 9일 전라남도 여수군(현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에서 태어났다.[2] 1940년 3월 여수공립수산학교[3] 양식과에 진학해[4] 졸업한 뒤 조선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하였으나 4학년 때 중퇴하였다.

이후 경찰공무원으로 입직하였다. 경위 진급 후 1952년 영암경찰서, 1953년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등지에서 근무하였다. 경감 진급 후 1955년 7월 1일 금성충무무공훈장을 수훈하였다.[5] 이후 1956년 3월 3일부터 1957년 2월 12일까지 제20대 곡성경찰서장, 1957년 2월 12일부터 1957년 7월 14일까지 제21대 광산경찰서장, 1957년 7월 18일부터 1958년 11월 24일까지 광양경찰서장, 1958년 11월 24일부터 1959년 5월 5일까지 제21대 완도경찰서장, 1959년 5월 5일부터 1959년 8월 31일까지 제29대 담양경찰서장 등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던 1959년 7월 14일 오후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 22-1번지 향사당(鄕射堂)[6]에서 활쏘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 담양고등학교 1학년 재학생 이금화(李金華, 당시 16세) 등 5명의 소년이 자전거를 불법으로 승차한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제지하려 하였다. 이때 소년들이 도주하였고, 이를 추격하던 중 땅에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이후 흥분하여 수사계 형사 5명을 동원하여 그날 저녁 7시에 이들을 모두 담양경찰서로 연행하였으며, 취조를 계속하였으나 자전거 취체법 위반으로는 이들을 송치하기 어려웠기에 형사들을 시켜 대나무 방망이 등으로 소년들에게 심한 구타를 가하도록 하여 마침내 소년들이 "친척집의 외막에 들어가 오이를 따먹었다"고 진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조서를 작성하게 하였고, 7월 25일 이들을 광주지방소년원에 송치하였다.[7]

1959년 8월 7일 광주지방검찰청에서 소년 불법 감금 및 구타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1959년 8월 31일 전라남도경찰국 경무과로 대기발령되었다.[8] 이후 광주경찰서장 서리를 지내고 공직에서 퇴임하였다. 이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서 정부양곡 도정공장, 제재소 등을 경영하였다.

1972년 제1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9] 1978년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남도 여천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국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여수시·광양군·여천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안민당 신순범 후보와 민주정의당 김재호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 31세 중(中) 항렬.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주인중(朱仁中).[2] #[3]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4] 1940년 3월 22일 동아일보 기사[5] 1955년 7월 5일 동아일보 기사[6] #[7] 1959년 8월 9일 조선일보 기사[8] 1959년 9월 4일 동아일보 기사[9] 1972년 12월 15일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