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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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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1. 개요

周勤
(? ~ 16년)

백제 온조왕 대 반역자로 기록상 백제 최초의 반역자. 단, 이는 후술되어있듯 이견이 있다.

2. 생애

기록에 의하면 주근은 본디 마한 출신 장수로서 삼국사기상 기록으로는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게 패하면서 밀려나자 백제에 복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에서는 이 때 마한이 멸망했다고 되어 있다. 백제 초기 기사의 기년은 고고학적으로도 그렇고 중국 사서와도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연도는 믿을 수 없지만, 기사 자체는 신빙성이 있다.

서기 16년(온조왕 34년), 주근은 우곡성에 웅거해 반역을 시도했지만, 온조왕은 5천 군사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했으며, 싸움에서 패한 주근은 결국 자살했고 백제인들은 그 시체를 허리를 끊어버리고 처자를 잡아 죽여 본보기를 보였다고 되어 있다.

온조왕의 아들 다루왕 대에 같은 지명이 나오지만 다루왕 대에 쌓은 우곡성(牛谷城)의 경우 말갈(동예)에 대비해서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서 주근이 웅거한 우곡성과 동일 지역인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 명단에 우곡성을 기재했다. 21세기 들어 한성백제박물관이 발간한 백제사시리즈 제2권에서는 우곡성의 위치를 경기도 동북부로 비정하기도 했다. 백제가 충청도 내륙 북부에 소재한 목지국 및 목지국을 여전히 따르는 마한 거수국들을 해체할 때 그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사민하는 일이 잦았던만큼, 아마 목지국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백제 직접 지배지인 경기도 동북부로 옮겨진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인 천안 청당동 목지국의 쇠락 및 소멸 시기로 보았을 때 이 일은 3세기 후반에 벌어졌을 개연성이 높으며, 주근을 참살한 백제 왕은 온조왕이 아닌 고이왕 혹은 책계왕일 가능성이 높다.

3. 평가

조선 후기의 국학자 안정복성리학적인 명분론의 입장에서 주근을 재평가했는데, 《동사강목》에서 주근을 단순한 반역자가 아니라 조국(마한)을 부흥시키려 한 절개 높은 충신이며, 기존의 역사에서 주근과 관련된 기록에 반란(叛)이나 토벌(討), 주살(誅)이라고 한 것은 춘추의 의리와는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춘추 이후 명분론에 따라 해당 사건을 표현하는 글자를 달리 써서 역사가 자신의 평가를 가미하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삼국사기 이후 기존의 역사책은 모두 주근의 행위를 '반란'으로 지목했는데, 안정복은 주근의 행위가 백제의 입장에서는 반역일지 모르지만 백제에 의해 멸망당한 마한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1]
경향신문에 올라온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이라는 기사에는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는 배은망덕한 나라로, 마한은 이복형에게 쫓겨 내려온 온조 세력을 받아줬지만 결과적으로 배신당했고, 그러니 주근과 같은 마한의 잔여 세력들의 반항 역시 만만찮아 백제로서는 이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일단 명심해야 할 것은 초기 백제국은 마한과 별도의 나라가 아니라, 마한 연맹의 거수국 중 하나로 천안에 위치한 목지국을 마한의 수장국으로 섬기는 나라였다. 그리고 애초에 온조왕조의 마한 관련 기사 중 신뢰할만한 것은 백제국이 처음 자리잡을 때 얘기지, 그 이후 마한 급습 및 복속 등의 기사는 전부 백제 후대 왕들의 치세에 일어났다고 보는 게 현재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결과적으로 주근의 반란은 단순한 반역이라기보단 상당한 명분[2]이 뒷받침된 자립 활동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물론 어느 경우든 백제 입장에선 반란이겠지만, 애초에 그 백제도 마한의 기존 수장 목지국을 일종의 하극상으로 쓰러뜨리고[3] 수장 자리를 차지한[4] 백제가 목지국 입장에서 반란 세력이었다. 한편으로 목지국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주근은 자신들의 수장국의 위치를 빼앗은 백제에 대항한 충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안정복의 발언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주근에 대한 평가는 속한 집단의 관점에 따라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 주근에 대한 재해석은 안정복의 스승이었던 성호 이익의 영향도 있는데, 《성호사설》권25 경사문 '전대군신사' 항목에서 이익은 마한이 백제에게 패망할 무렵에 주근만이 조국 부흥을 위해 싸우다 죽었는데 그것을 역사책에서 '반역'이라고 적은 것은 역사 서술에서의 공정성의 원칙을 상실한 것이며 오히려 주근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충신으로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2] 목지국을 배반하고 수장국을 차지한 백제를 징벌하고 목지국에게 수장국을 돌려주자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 삼국사기에 백제국 거수가 국력이 약해져가는 목지국 마한왕을 대놓고 업신여기는 기록이 분명히 나와 있다. 또한 기리영 전투 패배 후 마한 맹주가 강원도, 황해도, 경기 북부 일부에 대한 영향력을 전부 위나라에게 빼앗기게 되는데 이는 중국측 사서에서 검증되는 내용이다. 한편 고고학적으로는 이 시기에 백제국의 직접 지배지는 경기도 거의 전체로서, 백제가 분명히 목지국 급습 이전에도 맹주인 목지국을 능가하는 마한 내 최강국이었던 걸로 드러난다. 직접적 기록이 없어 재구성이 어렵다는 얘기는 이 세 가지 사항이 검증된 오늘날에는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4]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마한 소국들을 병합하고 직접 지배 영역을 넓혀가다 마한을 전부 통합하면서 백제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내세우게 된다. 마한판 춘추전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