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50><tablebordercolor=#fff> | 서울지방변호사회 역대 회장 |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한성변호사회장 (1907~1909) | |||
| 초대 이면우 | 제2대 정명섭 | |||
| 경성변호사회장 (1909~1920) | ||||
| 제3·4대 이면우 | 제5·6대 장도 | 제7-10대 최진 | 제11·12대 오쿠보 마사히코 | |
| 제13대 장도 | ||||
| 경성조선인변호사회장 (1920~1936) | ||||
| 제14대 장도 | 제15대 유문환 | 제16대 김찬영 | 제17대 윤태형 | |
| 제18대 김종건 | 제19대 허헌 | 제20대 김병로 | 제21·22대 이승우 | |
| 제23대 심상식 | 제24대 정구영 | 제25대 유문환 | 제26대 강세형 | |
| 제27대 정구영 | 제28대 유문환 | 제29대 최진 | ||
| 제일경성변호사회장 (1936~1938) | ||||
| 제30대 최백순 | 제31대 이홍종 | 제32대 서광설 | ||
| 경성변호사회장 (1938~1945) | ||||
| 제32대(보선) 아카오 토라키치 | 제33대 이승우 | 제34대 마루야마 케이지로 | 제35대 서광설 | |
| 제36대 영도암 | 제37대 정구영 | 제38대 노무라 쵸타로 | ||
| 조선변호사회 서울분회장 (1945~1948) | ||||
| 제39대 이홍종 | 제40대 정구영 | 제41대 서광설 | ||
| 서울변호사회장 (1948~1980) | ||||
| 제42대 이창혁 | 제43·44대 이종성 | 제45대 장후영 | 제46대 최병석 | |
| 제47대 장후영 | 제47(보선)·48대 양대경 | 제49·50대 김종근 | 제51·52대 최백순 | |
| 제53대 정구영 | 제54대 신태악 | 제55·56대 한격만 | 제57대 배정현 | |
| 제58대 이병린 | 제59대 고재호 | 제60대 김준원 | 제61대 신순언 | |
| 제62대 이병린 | 제63대 전봉덕 | 제64대 양윤식 | 제65대 임한경 | |
| 제66대 양정수 | 제67대 변기엽 | 제68대 김재옥 | 제69대 김태청 | |
| 제70대 편영완 | 제71대 김두현 | 제72대 이병용 | 제73·74대 김은호 | |
| 서울제일변호사회장 (1960~1980) | ||||
| 제54대 조진만 | 제55대 임석무 | 제56·57대 조평재 | 제58대 오승근 | |
| 제59대 홍승만 | 제60대 김윤근 | 제61대 정경모 | 제62대 김섭 | |
| 제63대 양준모 | 제64대 곽명덕 | 제65대 박현각 | 제66대 민동식 | |
| 제67대 김남이 | 제68대 노영빈 | 제69대 강봉제 | 제70대 임갑인 | |
| 제71대 장병철 | 제72대 홍현욱 | 제73대 김영복 | 제74대 권태홍 | |
| 수도변호사회장 (1969~1974) | ||||
| 제63·64대 김준원 | 제65대 최돈연 | 제66·67대 용태영 | 제68대 이해우 | |
| 서울통합변호사회장 (1980~1983) | ||||
| 제74대(보선) 문인구 | 제75대 조규광 | 제76대 이택규 | ||
| 서울지방변호사회장 (1983~현재) | ||||
| 제77대 이병호 | 제78대 박승서 | 제79대 이세중 | 제80대 함정호 | |
| 제81대 황계룡 | 제82대 김창국 | 제83대 김성기 | 제84대 정재헌 | |
| 제85대 이진강 | 제86대 박재승 | 제87대 천기흥 | 제88대 이준범 | |
| 제89대 하창우 | 제90대 김현 | 제91대 오욱환 | 제92대 나승철 | |
| 제93대 김한규 | 제94대 이찬희 | 제95대 박종우 | 제96·97대 김정욱 | |
| 제98대 조순열 | ||||
趙平載
1909년 8월 8일 ~ 1968년 7월 14일[1] (향년 58세)
1. 개요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변호사. 본관은 풍양(豊壤)[2].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경제학자 조순의 작은아버지이다.2. 생애
1909년 8월 8일 강원도 강릉군 하구정면(현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서 태어났다.[3]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경성고등상업학교 어학부에서 주최한 제3회 전조선중등학교 영어변론대회에서 3등에 입상하였으며, 1927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우등졸업하였다.[4]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A반[5]에 입학하여 1933년 3월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대학 시절부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호걸풍 쾌남으로 평가받았다.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 서기로 근무하다가 1937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를 거쳐 1940년 5월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부임, 1943년 3월까지 근무한 후 사직하고 경성부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1945년 8월 해방 후 홍순엽[6]과 손잡고 1946년 2월 좌익 법률가 단체인 조선법학자동맹(법맹)을 조직해 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동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임시헌법기초위원,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맡았다. 조선정판사 사건의 변호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서울제일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상무위원장, 국제법률가협회 회장, 한국법학원 이사, 대한중석과 삼성물산 법률고문 등을 지내다가 1968년 7월 14일 저녁 6시 5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08-1번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일본 제국 고등관인 판검사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