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세븐 Chicago Seven | |||
애비 호프먼 (Abbie Hoffman) | 제리 루빈 (Jerry Rubin) | 데이비드 델린저 (David Dellinger) | 존 프로인스 (John Froines) |
톰 헤이든 (Tom Hayden) | 레니 데이비스 (Rennie Davis) | 리 와이너 (Lee Weiner) | 바비 실* (Bobby Seale) |
* 재판 도중 기소 무효, 이후 후속 재판으로 회부 |
<colbgcolor=#5f5f5f><colcolor=#fff,#fff> 제리 루빈 Jerry Rubin | |
본명 | 제리 클라이드 루빈 Jerry Clyde Rubin |
출생 | 1938년 7월 14일 |
미국 오하이오 신시내티 | |
사망 | 1994년 11월 28일 (향년 56세) |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히브리 대학교 신시내티 대학교 (편입, BA) UC 버클리 (중퇴) |
배우자 | 미미 레오나드 (1978년 결혼, 1992년 이혼) |
자녀 | 2명 |
종교 | 유대교 |
소속 | 청년국제당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사회운동가, 금융 투자자. 히피에서 여피로 전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1]2. 생애
1938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유대인 트럭운전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전미 최대 트럭 노조인 팀스터스의 간부였던 덕에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으며, 히브리 대학교와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부모가 사망한 후, 그는 친척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로 이주해, 잠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공동체인 키부츠에서 일했다.[2] 몇년 후 미국으로 귀국한 루빈은 쿠바를 여행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배우고, UC 버클리에 진학하며 좌파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버클리에서 중퇴했으며 정치 활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그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최초의 조직 중 하나인 "베트남의 날 위원회"를 조직, 미국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나섰다. 또 버클리 시장에 출마했고, 장난스러운 출마이긴 했지만 20%를 넘게 득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그는 폴 크래스너(Paul Krassner), 애비 호프먼 등과 함께 청년국제당(YIP)을 창당해 스스로를 "이피"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최초의 히피로 여겨지게 된다.
루빈은 급진좌파적인 행보만큼이나 장난기 많은 행보로 유명했다. 하원 반미위원회 청문회 도중에는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나타나 의원들까지 폭소시킨 바 있으며, 장난감 기관총을 들고 출석하거나, 18세기 미국 군복을 입고 출석하는 등 기상천외한 코스프레를 해서 전국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 대선 때는 아예 돼지를 출마시키자는 주장을 했다. 주류 대선 후보가 모두 베트남 전쟁에 찬성하므로 그냥 돼지를 대통령으로 뽑는게 더 평화에 이바지된다는 식. 또, 월스트리트 증권가에서 돈을 뿌려 은행가들이 돈을 줍는 모습을 찍어 비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이는 최초의 장난 정당의 시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도중 주의 경계를 넘어 폭동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시카고 세븐" 재판에 회부되었다. 루빈은 이 자리에서도 경찰복을 입거나, 호텔 가운을 입거나, 나치식 경례를 하며 판사를 조롱하는 행보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판사는 극대노해 루빈에게 이례적으로 법정 모독죄로 3년형을 부여했으나 항소심에서 뒤집히며 출소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을 지지했으나, 맥거번이 크게 패배하자 실망하여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3] 그는 존 레논, 오노 요코가 주최한 맥거번 낙선 기념 파티에서 활동을 은퇴하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대신 그는 사업가의 길을 택하기로 했는데, 당시 거의 듣보잡급 회사였던 애플에 전재산을 투자했다. 이 역시 주목을 받기 위한 미치광이 행보라고 조롱당했으나 애플의 주식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루빈은 가장 부유한 주식 투자자 중 한명이 되었다.
그는 72년 대선 이후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들었고, 성적 쾌락과 마약 중독에 찌들면서도 주식 투자자로 엄청난 돈을 벌었기 때문에[4] 최초의 여피족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당연히 그와 함께 시위를 했던 사람들은 그를 상당히 경멸하였으나, 루빈은 그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에서 자본주의자로 전향했음을 밝히며 "미국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많이 창출해 나눠줘야한다"[5]라는 말을 남겼다. 1980년대부터는 펀드매니저로 공식 취업해서 그가 한때 경멸하던 월스트리트에 정장을 입고 드나들게 되었는데, 많은 이들은 그것을 히피 운동의 종말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그다지 호평받지 못한 자기계발서까지 출판했다.
1994년, 자신의 펜트하우스 앞에서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여 숨졌다. 향년 56세.
3. 여담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서는 제레미 스트롱이 분했다.
[1] 젊은 시절에는 극렬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70년대 이후로는 정치적 무관심과 신자유주의, 쾌락주의에 경도되었다.[2] 동생은 이스라엘로 귀화했다.[3] 이는 당시 절대다수 히피에게서 관찰되는 현상이다.[4] 이런 루빈의 모습은 여피족을 풍자한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그린 전형적인 여피족의 모습에 들어맞는다.[5] 원문은 "Wealth creation is the real American revolution. What we need is an infusion of capital into the depressed areas of our country." (자본 창출이야말로 진정한 미국의 혁명이다. 우리 나라의 슬럼가에 자본을 밀어넣는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