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 호 | 인회(忍悔) |
본관 | 동래 정씨[1] |
출생 | 1921년 7월 27일 |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마을 | |
사망 | 2008년 9월 23일 (향년 87세) |
광주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91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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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2. 생애
1921년 7월 27일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마을에서 아버지 정항모(鄭沆謨, 1896. 7. 15 ~ 1949. 8. 11)와 어머니 제주 고씨[2](? ~ ?. 10. 23) 사이에서 7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40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직공 또는 잡역에 종사하면서 오사카청년회 예비교(豫備敎) 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1941년 4월 오사카 사립 니혼대학 야간중학교 이부(二部)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했다.
일본에 건너온 이후 그는 줄곧 일본인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극심한 민족차별과 비참한 생활상을 목도했고, 이를 통해 한민족의 자유와 행복은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 해방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 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이어 1942년 5월 9일 조선인 청년들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발표되자, 이를 계기로 그해 5월 중순에 동급생인 이강휘(李焵徽)를 비롯해 윤병윤(尹炳允)·고방웅(高房雄)·김규장(金圭藏)·하백문(河白文) 등과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한국독립청년당(韓國獨立靑年黨)[3]을 결성했다.
그 뒤 이들은 일본 제국이 중일전쟁을 5년간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세계의 강국인 미국·영국 등 두 나라와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원이 풍부한 미국과 영국에 필연적으로 패배할 것임을 확신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조선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목적 하에 40여차례 당원들과 모임을 가지면서 동지 규합 및 당세 확장, 민족정신 고취, 당원간의 단결 등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43년 3월 2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1월 2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120일 통산)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귀국 후 1947년 임시 중등교원 양성소를 졸업하여 수학 과목 중등교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47년부터 1959년 12월 31일까지 전남농업중학교(現 광주북성중학교)[4]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60년 1월 1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면려포장증을 수여받았으며, 1963년 4월 2일 광주 송정중학교 교감, 1969년 5월 1일 강진중학교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 승진하여 1971년 2월 2일부터 1976년 8월 31일까지 초대 함평 신광중학교 교장, 1976년 9월 1일부터 1981년 9월 1일까지 제5대 영암군 구림중학교 교장, 1981년 9월 1일부터 1986년 8월 30일까지 제18대 해남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86년 8월 31일 정년퇴임과 함께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1992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이전에 그는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한 것이고 물론 공직에 있으면서 서훈을 받으면 다양한 혜택을 받게 되겠지만, 내 노력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겠노라'며 한동안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하지 않았고, 이러한 심정을 자녀들에게 피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퇴직 후 동생들의 권유에 의해 결국 신청을 했다고 한다.#
2008년 9월 23일 광주광역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08년 9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