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정성옥(鄭成玉, Jong Song Ok) |
출생 | 1974년 8월 18일 ([age(1974-08-18)]세) |
황해남도 해주시 |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종목 | 육상 |
주종목 | 마라톤 |
신체 | 155cm, 42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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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북한의 前 육상 선수이다.2. 선수 경력
2.1. 유년 시절~1992년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에서 출생, 해주시 새거리인민학교를 졸업한 후 1985년 9월에 해주시 체육학원 중등반으로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체육인 경력을 걸었다. 1989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체육학원 육상경기에서 5000m와 10000m 경기에서 모두 우승했다. 1991년 4월, 만경대상 체육경기대회에서 일반단체부문 육상경기 1등을 하는 등 여러 차례 우승을 거두어 이에 1992년 압록강체육선수단 마라톤 선수로 배치되었다.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0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역대 출전한 국제대회 중 가장 최고 성적이었다. 1997년 4월, 만경대학 체육경기대회, 1998년 2월, 백두산상 체육경기대회, 1999년 4월, 만경대상 체육경기대회에서 모두 1등을 기록하였다.
2.2. 1999년
저는 기자들을 통해 세계면전에 웨친[1]것처럼 아버지 장군님의 그리운 영상을 안고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려는 일념으로 백공오리[2]를 달려 세계패권을 쥐게 되였습니다.
귀국 직후, 평양국제비행장(평양 순안공항)에서 가진 인터뷰 일부.[3]
귀국 직후, 평양국제비행장(평양 순안공항)에서 가진 인터뷰 일부.[3]
조선의 기상을 만방에 떨친 세계 《마라손녀왕》 정성옥선수가 지금 해주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속에 자기의 고향속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해주에서 열린 환영식 방송 때 방송원의 말 일부.[4]
해주에서 열린 환영식 방송 때 방송원의 말 일부.[4]
1999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마라톤 은메달리스트인 김창옥의 페이스메이커로 참가하였다. 2시간 26분 59초로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남북한을 통틀어 첫 메달을 획득했다.[5] 이는 현재까지 북한의 유일한 세계선수권 메달 기록이기도 하다. 막판까지 선두 다툼을 했던 일본의 이치하시 하리는 불과 3초 뒤진 기록으로 2위를 기록했다. 이때 김창옥과 달리 유니폼에 국기나 국가명이 없어 국적을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우승보다 그 소감으로 특히나 주목을 받았는데[6][7]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시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고 말하자, 김정일은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상금을 받은 북한 선수들이 이를 모두 당에 바치도록 하는 전례를 깨뜨리고 세계선수권 우승 상금인 5만 달러를 정성옥 개인이 소유하도록 허가했다.
이외에도 그녀가 김정일로부터 받은 혜택들은 다음과 같다.
• 북한 운동선수 최초이자 유일무이하게 무려 공화국영웅과 인민체육인 칭호를 수여받았다.[8]
• 벤츠 S클래스 S550을 선물받았다.
• 평양 보통강구역의 48평짜리 37층 아파트에 거주하였다.
• 정성옥 세계제패 기념주화까지 발행하였다.[9]
•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다.[10]
일단 정성옥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것 자체는 확실한데, 정확히 언제 대의원이 되었는지가 불분명하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정성옥이 있긴 한데,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정성옥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나오면 정성옥은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고 되어 있는데,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정성옥이 있긴 하지만 문제는 이 선거는 정성옥이 아시안 게임에서 이겨서 공화국영웅이 되기 전에 치러진 선거였다. 이후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도 정성옥이 당선되었는데, 이전부터 대의원을 한 정성옥인지 이 정성옥인지 불분명하다.
이후 고향인 해주에서도 환영 행사가 열렸다.
여하튼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이 끝나지 않은 암울한 시기였던만큼 정성옥의 마라톤 우승과 멘트(...)는 북한 주민들에게 큰 희망을 줄 수밖에 없었다.
3. 은퇴 이후
2001년 압록강체육단에서 은퇴하였다. 북한 선전사이트 '메아리'의 이력 소개에 따르면 2005년에 선수생활에서 은퇴하여 조선체육대학에서 공부한 후 륙상협회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조선륙상협회 부서기장을 거쳐 2019년에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륙상협회에서 사업하면서 3명의 감독들(인민체육인 1명, 공훈체육인 2명)과 김금옥, 김혜경, 리광옥 등 10여명의 마라톤 선수를 비롯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2022년 현재에도 조선륙상협회 서기장으로 재임중이며 TV연단에도 출연했다.2022년 4월 북한 조선중앙TV의 특집 프로그램인 '체육명인들'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북한 영상 주의) 북한에서 이런 프로는 대부분 김씨일가에 대한 찬양으로 결론을 맺으며 끝내는데, 정성옥을 포함한 체육명인들은 각 선수의 노력과 선수를 직접적으로 지원한 가족, 지도자들에게 공을 돌리고 끝맺었다. 이는 상당히 특이한 일로, 코로나-19로 극한의 어려움에 처한 북한 내부에 활력을 주기 위한 의도로 풀이되었다.#
2024년 3월 4일에 새로 편성된 "《극한점》, 끝까지 달려라"에 북한 마라톤 감독으로 등장했다. 방송에서 마라톤 여왕으로 불렀으며, 1999년 7차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우승 일화도 다시 방영되었으며 당시의 썰을 풀었다.
2024년 8월 5일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도 언급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정성옥의 소감 때문에 후배 운동선수들이 정성옥 이상의 소감을 짜내야 하느라 고생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4. 수상 기록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99 세비야 | 마라톤 |
5.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1] '외친'의 문화어 표기.[2] 105리. 문화어로는 '중간'의 숫자 0은 표현한다. 예를 들어 150리는 그대로 '백오십리'라 칭한다.[3] 출처[4] 출처[5] 남북한 통틀어 두번째 메달은 경보 김현섭이 기록했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다.[6]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우승이었던지라 당시 우승 소감을 통역해 줄 사람이 없어 주최측도 곤혹을 겪고 있었는데, 마침 현장에서 취재를 하던 대한민국의 원로 스포츠기자 조동표 씨가 통역을 자청해 기자회견이 원활히 이루어졌다고 한다.[7] 나중에 2003년에 제주도에서 열린 민족평화축전에서 조동표 기자와 재회해 북한 술인 들쭉술을 선물로 주며 은혜에 보답했다.[8] 북한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레슬링선수 김일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지 못했다. 한번은 결승에서 남한의 김종신을 꺾었고, 다른 한번은 북한의 철천지 원쑤 미국 땅에 인공기를 휘날렸는데도 말이다. 원래 공화국영웅 자체가 애초에 체육인들 주라고 만든 칭호가 아니다. 진짜 국가에 어마어마하게 특출난 무공을 세웠다던지, 역사적/시대적/세계적 명성을 떨쳤을 때나 주는 최고의 훈장이다. 원래 체육인 신분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는 로력영웅이며, 일반적으로 메달권 진입에는 인민체육인 칭호가 수여된다. 정성옥은 체육인 신분으로 북한에서 유일하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앞으로도 북한에서 체육인 신분으로 공화국영웅을 받을 일은 매우 요원하다.[9] 쉽게 말하면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를 제외하고 유일무이하게 신격화되고 있는 인물이다.[10] 한 마디로 금메달 땄다고 지방의원도 아니고 국회의원된 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