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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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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전옥숙 (全玉淑)
출생 1929년 9월 25일
경상남도 통영시
사망 2015년 7월 9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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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천안 전씨 (天安 全氏)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 / 학사)
배우자 홍의선
가족 아버지
어머니
큰아들
둘째딸 홍난실
둘째사위 오세정
막내아들 홍상수
막내며느리조성혜
손녀
직업 영화 제작자
활동기간 1960년 ~ 2015년
경력 1984년 시네텔서울 회장
1974 월간 일본연구편집인
1964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 대표
1960 주간영화 발행인

1. 개요2. 소개3. 생애4. 출연작
4.1. 영화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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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2. 소개

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이며, 출판계·영화계·방송계 등에 걸친 광범위한 활동으로 '대중문화계 전설'로 불리었다.

그녀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뉴데일리의 기사 "YS 부를까?" 여왕봉(女王蜂) 전옥숙 한 마디에…를 추천한다.

3. 생애

1929년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태어났고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대학 시절에 연극 활동을 했고, 1960년 '주간영화' 발행인으로 나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1963년 대한민국 내 첫 영화 제작 스튜디오 '은세계영화제작소'를 차리기도 했다.

육군 중령 출신 홍의선과 결혼했으며, 1964년에는 남편과 함께 연합영화사 대표를 맡아 부부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알렸다. 일본어에 매우 능했다.

1975년엔 문학계간지 '한일문예'와 '소설문예'를 창간했고, 일본 후지TV한국지사장을 지냈다. 1982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가수 조용필의 노래 "생명" 가사를 작사하며 화제가 됐다.[1] 1984년 대한민국 내 최초로 외주제작사인 '시네텔서울'을 설립해 <베스트셀러극장>에 드라마 <웃음소리>를 첫작품으로 제작했으며, 1991년 한국방송아카데미를 열어 방송인 양성에도 앞장섰다.

말년에 치매를 앓았으며 홍상수의 배우자가 치매에 걸린 전옥숙을 4년간을 모시고 살아왔다고 한다. #

2015년 7월 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

4. 출연작

4.1. 영화

  • 1964년 부부의 전쟁 - 기획
  • 1965년 나는 죽기 싫다 - 기획
  • 1965년 추풍령 - 기획
  • 1966년 민검사와 여선생 - 기획
  • 1966년 잘 있거라 일본 땅 - 기획
  • 1967년 가고파 - 기획
  • 1967년 기적 - 기획
  • 1967년 냉과 열 - 기획
  • 1967년 방콕의 히마리오 - 기획
  • 1967년 보은의 기적 - 기획
  • 1967년 애수 - 기획
  • 1967년 청사초롱 - 기획
  • 1968년 수전시대 - 기획
  • 1968년 마녀성 - 기획
  • 1968년 세계로 뻗는 한국 - 기획
  • 1968년 순덕이 - 기획
  • 1968년 오대 복덕방 - 기획
  • 1968년 절벽 - 기획
  • 1969년 사랑이라는 것은 - 기획
  • 1969년 산울림 외칠때 마다 - 기획
  • 1969년 이별의 모정 - 기획

5. 여담

어르신들 사이에서 전옥숙이 가수 임희숙의 생모이며, 홍 감독의 아버지를 만나기 전 다른 남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이야기가 나도는데, 사실은 이민용 감독의 가정사가 와전된 것이다.[2]
사실, 임희숙의 생부는 6.25 전쟁 때 납북되었고, 모친은 이후 이 모씨와 재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민용 감독인 것이다. 링크 [3]

하필이면 두 감독의 대표작 제목에 모두 이름이 들어가고, 개봉 시기도 비슷해서 이런 식으로 혼선이 빚어졌다.

기사에 결혼 시기가 불분명하게 나온 것도 이런 혼선에 한 몫을 한 듯하다. 이 기사의 경우 1964년에 부부가 영화 제작소를 설립했다는 것은 나오지만, 결혼을 몇 년도에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으며 다른 기사도 대동소이하다.

또한 일부 기사에서는 이들 부부가 1964년에 결혼했다고 나왔다. 링크 이 기사대로라면 홍상수와 그의 형은 속도위반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 [4]

이병주의 소설 남로당에 전(全)'을 '김(金)'로 바꾸어 '김옥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구적 미모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에 대해 1993년 고용노동부 장관을 했던 남재희는 "실제로 전 여사는 6·25 때 서울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 후 공산측이 후퇴하자 엉겁결에 휩쓸리어 북쪽으로 가게 된 모양이에요. 미아리 고개를 넘어 의정부 쪽으로 가다가 국군에게 투항을 했는데 다행히 헌병대장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 헌병대장과 결혼이 성사가 되고, 그 헌병대장은 대령으로 예편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학생때 좌익활동을 했고 이후 이를 극복하고 리버럴 성향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포로가 된 빨갱이 여학생 옥숙에게 반해 결혼까지 해버린 헌병대장이 '홍의선'으로 결혼 후 홍상수 감독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사가 전하는 내용은 더욱 극적이다. 원래 홍의선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전쟁 중에 사형수 신세가 된 전옥숙의 미모에 한눈에 반해 사형을 면해 주고[5], 약혼녀와는 파혼해 버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6]

남편 홍의선과 함께 1960년대에 답십리(현 장안동) 일대에 스튜디오, 의상실, 후시녹음실, 사진현상실 등 영화 촬영을 위한 촬영소를 만들어 활동했다. 지금은 일대가 평범한 시가지로 변모하여 관련 인프라를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촬영소사거리’ 라는 지명으로 흔적만 남아 있다.


[1] 1988년에는 6.10 민주 항쟁을 배경으로 한 조용필의 노래 "서울 1987년"을 작사하였다.[2] 위키백과에는 잘못된 정보가 그대로 적혀 있어 혼선을 더한다.[3] 나무위키의 임희숙 문서에 모친의 성함이 전옥숙으로 기재되어 있기는 하나, 홍상수의 모친과는 다른 인물이다. 사연의 유사성으로 인해 성함이 잘못 기재되었거나,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다.[4] 다만,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뒤늦게 혼인신고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술할 특이한 사연을 감안한다면 말이다.[5] 당시는 전쟁 중이라 재판 없이 사형 집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형을 면해 주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6] 이 이야기의 출처는 정진우 감독의 말인데, 말년의 홍의선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참고로 아들인 홍상수 감독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중학생이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였다고는 하나, 정진우 감독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전옥숙이 자주 안 온다고 서운한 감정을 나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의 교류는 했던 것으로 보이며 죽기 직전까지도 전옥숙을 사랑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