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임천택 |
출생 | 1903년 3월 19일 |
경기도 광주 | |
사망 | 1985년 9월 6일 (향년 83세) |
묘소 |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clearfix]
1. 개요
“우리가 한국인임을 기억하라”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쿠바의 한인 1세대 후손으로 일제강점기 시기 칼데나스 및 마탄사스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도 한인 사회의 정체성을 이어나자고자 쿠바 한인의 이민 기록을 정리한 책인 『쿠바이민사』를 남기기도 하였다.
쿠바 한인사회의 주축이 되었던 인물로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서기 및 총무, 회장, 대한여자애국단 고문, 민성국어학교와 진성학교 교장 등 조국의 독립과 한인 후손의 민족의식 함양에 일평생 힘쓴 인물이다.
독립 운동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1997년, 쿠바에서는 최초로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2. 생애
===# 멕시코로의 이주 #===1903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05년, 3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멕시코로 이주하였다. 구한말 한국에서는 『황성신문』 등을 통해 멕시코 이민 모집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4년만 일하면 부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많은 한인들이 금의환향의 꿈을 안고 멕시코로의 계약노동 이주를 선택하였다.[1] 임천택의 어머니도 이와 같은 이유로 멕시코 이주를 택했다. 이때 임천택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임천택과 함께 멕시코 행 배에 올랐으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임천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으며, 생활고 해결을 위해 이민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2] 멕시코에서의 생활은 예상과 달리 살인적인 더위 속 에네켄,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종일 노동해야하는 노예 생활과 다름이 없었다. (참고)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임천택과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많은 한인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했으나,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국권을 피탈당한 이후였으며, 외교권 또한 박탈당한 상황에서 자국민들을 송환시킬 수 없었다. 조국으로 돌아갈 여비도 없었기에 그들은 새로운 조건으로 재계약을 하고 멕시코에 정착한다. 궁핍한 생활 속 임천택은 보다 좋은 곳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1921년,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영업을 하던 이해영의 주선[3] 으로 임천택은 15년여간의 멕시코 생활을 뒤로하고 한인 273명과 함께 쿠바로 이주한다. 쿠바로의 이주에 대해 임천택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묵국에서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 우연한 기회라 할는지 필연이라 할는지 달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우리 동포들의 생활 형편이 어렵게 될 뿐 아니라 불쌍 모양에까지 이르게 됨에 너나 할 것 없이 생활상 형편이 좀 좋다는 곳이 있다면 귀가 번쩍 뜨이게 되었습니다.
즈음에 앞서 쿠바에 와서 있던 이해영 씨가 마니티 설탕농장에 이민하러 와서 쿠바에 생활 형편이 좀 좋다고 하는 말에 솔깃하여 15년이나 살고 있던 제2고향인 묵국을 뒤에 두고 묵국에 이민한 1033명 중에서 근 3백 명이 남녀노소가 1921년 즉 신유년 3월 초에 쁘로그레소 항을 떠나 쿠바 이민국에 일반수속을 하느라고 경우 3월 25일에야 마티니 항구에 상륙 하게 되었습니다.”[4]
즈음에 앞서 쿠바에 와서 있던 이해영 씨가 마니티 설탕농장에 이민하러 와서 쿠바에 생활 형편이 좀 좋다고 하는 말에 솔깃하여 15년이나 살고 있던 제2고향인 묵국을 뒤에 두고 묵국에 이민한 1033명 중에서 근 3백 명이 남녀노소가 1921년 즉 신유년 3월 초에 쁘로그레소 항을 떠나 쿠바 이민국에 일반수속을 하느라고 경우 3월 25일에야 마티니 항구에 상륙 하게 되었습니다.”[4]
===# 쿠바에서 한인사회를 구축하다 #===
사실 임천택 이전에도 이해영과 같은 소수의 한인들이 쿠바에 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신한민보』 1920년 9월 30일자 기사에 의하면 쿠바에 재류하는 이해영씨의 득남 소식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1918년 이전에 이해영 등의 한인들이 쿠바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5]이는 하와이로 갔던 노동이민자들이 계약기간이 끝나 미국 본토로 재이주하면서 쿠바까지 갔던지, 아니면 멕시코로 갔던 이민자들이 노동계약기간이 끝나 그들 중 일부가 쿠바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규모 있는 한인들이 쿠바에 이주하여 살게 된 것은 임천택과 함께 300여명이 마나티 항에 상륙한 1921년 이후이다.[6]
한인들의 성실함으로 농장주에게 노력을 인정받음으로써 쿠바에 본격적으로 한인들이 정착하였고 그 결과 마탄사스를 중심으로 칼 데나스, 하바나 등지에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 무렵 조선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으며, 국내외적으로 독립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임천택 또한 식민지 시기에 쿠바 한인 사회의 중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임천택은 1922년 대한인국민회 마탄시스 지방회에서 서기로 시작하여 1953년까지 회장 및 고문을 맡아 활동했으며, 1929년에는 카르데나스로 이주하여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카르데나스지방회의 회장과 학무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접촉하여 쿠바의 한인 소식을 전파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에는 아래와 같이 서술되어 있다.
“멕시코에선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에서는 임천택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후원하고…쿠바의 한인 교포는 전부가 정부 유지 발전에 공동 책임을 지게 되었다.”
임천택 등 쿠바한인들은 국민회 지방회를 통해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60.52원, 1940년 말부터 41년 초까지 78.30원, 그리고 41년 10월부터 12월까지 858.88원을 모금하여 재미국민회와 중경임시정부 김구에게 송금하였다.[7] 한인들은 일주일에 2~3달려를 벌던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임금을 쪼개 독립자금을 모았으며,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식구 수대로 쌀을 한숟가락씩 모아서 판 돈으로 뜻을 보태기도 했다. 관련 기사 임천택은 1938년 마탄사스에 대한여자애국단 지부가 설립됐을 때 고문으로 활동하며 광복군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또한 1941년 쿠바 대한인국미회 3개 지방대표회 11인의 한사람으로 재큐한족연합외교회을 결성하였으며, 1943년에는 하바나 등에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통해 재큐한족단을 창립하였다. 임천택은 민족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1925년부터 1952년까지 쿠바의 민성 국어학교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또 청년학원 원장 및 교사로서 한국 동포들의 국어교육에 힘썼다. 국가보훈처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쿠바한인사회 또한 9월 6일 태극기를 앞세우고 승전축하 기념행렬을 가짐으로써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
===# 광복 이후 #===
꿈에 그리던 광복 이후 1947년 5월 19일 임천택은 쿠바 국적을 취득한다. 광복 다음해인 1946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한인들은 쿠바 국적 취득을 위해 노력하는데 이는 당시 쿠바의 노동정지 사태에 원인이 있다. 경제 공황의 여파로 자국 노동자에게 취업의 우선권을 주는 방향으로 쿠바 내 노동법이 개편되면서 쿠바 국적이 아니었던 한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불이익을 당했기 때문이다.[8]
또한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한국의 정세가 불안정해진다. 1954년, 임천택은 쿠바 한인의 이민과 민족 정체성 보존을 위한 노력을 담은 『쿠바이민사』를 발간한다.
1959년에는 쿠바 혁명이 성공으로 마무리되며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여 미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북한과 수교를 맺는다. 이로 인해 쿠바는 아메리카의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가 됨과 더불어 쿠바에 남아있는 한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임천택 조국과의 연결을 다시 시도했음에도 결국은 조국의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쿠바에서 1985년 9월 6일 별세한다. 이후 2004년 임천택의 유해는 한국으로 봉환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관련 기사
3. 천도교
쿠바한인사회, 그리고 임천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천도교이다. 사실 임천택은 멕시코 거주 시절과 쿠바 생활 초기에는 기독교를 신앙하였다. 임천택은 1927년 천도교가 발행한 종합 잡지인 『개벽』의 발행인인 이두성과 서신 연락을 하는 과정에서 천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28년 4월 1일 천도교에 입교했다.[9] 임천택은 천도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천도교를 믿게 되기는 그 이유가 간단합니다. 처음 말씀과 같이 첫째는 이 선생(이두성-필자)의 간곡한 성의에 감복하였고, 둘째는 교회에서 발행하는 여러 가지 잡지에는 많은 새 지식과 아울러 크게 감사를 느꼈고, 셋째는 시대사상에 따라 천도교의 인내천주의에 자연 감동되는 동시에 천도교는 절대로 전체를 시인하게 되었습니다.”[10]
임천택은 1930년 3월 23일에 칼데나스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설립하여 교리사업을 펼쳤으며, 총서기를 맡아 사무처리를 총책임하였다. 임천택은 1933년에는 천도교청년당 당원으로 입당하였으며, 이듬해 1934년 3월 8일 도호로 덕암(德菴)을 수여받았다.[11]
그러나 1937년 임천택은 천도교 본부의 최린 일파가 친일로 돌아선 사실을 알고 이에 회의감을 느끼며 종교시설을 폐쇄하고 감리교에 관여한다. 관련 기사 당시 상황에 대해 임천택은 아래와 같이 밝혔다.
"본국 중앙교회에서 왜놈과 보조를 같이 하려는 경향이 발견된 뒤로 중앙교회와 관계를 끊고 쿠바에 천도교 사업은 이것으로 종막을 지었습니다." [12]
다만 임천택은 종교시설 폐쇄 이후에도 『신인간』과 같이 천도교에서 보내는 각종 문서는 꾸준히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 교단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천도교 신앙을 재개한다. 이후 그는 쿠바에 다시 한 번 천도교를 설립하려 시도하나 당시 교인들이 거의 다 별세하여 이루지 못한다.[13]4. 관련 문서
[1] 당시 황성신문 1904년 12월 17일자 기사에 따른면 ‘아메리카 북쪽의 멕시코는 미국과 같은 나라로 문명이 부(富)한 강국으로 들과 땅이 좋고 기후가 온난하여 부유한 사람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이 별로 없으며, 최근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독신 또는 가족으로 와서 많은 돈을 벌었다.’ 고 묘사되어 1,033명의 한인들이 멕시코는 하와이와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여 모집에 응하였다.[2] 성주현, 「쿠바한인사회를 통해본 천도교와 민족운동」, 『한국민운동사연구』 95, 2018.01.[3] 『신한민보』 1920년 12월 22일자 기사에 의하면 이해영이 주선하여 쿠바 이민국장과 농장주들에게 한인 약 400명을 데려오기로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재외동포사총서[4] 임천택, 『쿠바이민사』, 5쪽[5] 파일:신한일보_1920_09_30 .png[6] 김재기, 임영언 「쿠바한인 디아스포라의 독립운동 재조명과 정부 서훈 문제」, 『한국보훈논총』 16, 2017.[7] 성주현, 「쿠바한인사회를 통해본 천도교와 민족운동」, 『한국민운동사연구』 95, 2018.01.[8] 안금영, 「1940년대 이후 쿠바의 사회변화와 한인 후예의 삶」, 『스페인어문학』 31, 2004.[9] 임천택, 『쿠바이민사』, 2쪽[10] 임천택, 「내가 천도교를 믿기까지」, 『신인간』 24호, 1928.06, 40-41쪽[11] 임천택, 『쿠바이민사』, 2쪽[12] 『신인간』 537호, 73쪽[13] 성주현, 「쿠바한인사회를 통해본 천도교와 민족운동」, 『한국민운동사연구』 95, 20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