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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기업인)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070227134414197345132.jpg
이름 이용태(李龍兌)
필명 이지흠(李之欽)
치장(致章)
본관 재령 이씨[1]
출생 1933년[2] 3월 3일 ([age(1933-03-03)]세)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3][4]
학력 영덕농업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물리학 / 학사)
유타 대학교 대학원 (통계물리학[5] / 박사)
경력삼보컴퓨터 회장
데이콤 초대 사장
나래이동통신 설립자
두루넷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제일학원, 대일학원, 경일학원 원장
도산서원 원장
숙명학원(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저서 수학의 강의
입시수학의 분석연구
해석대전
기하대전
중학수학대전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인, 학원인, 기업인, 유림. 본관은 재령(載寧).

재령 이씨 영해파 18대 종손이다.

삼보컴퓨터 설립자, 데이콤 초대 사장, 나래이동통신, 두루넷 설립자, 이화여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50 ~ 60년대 수학 스타 강사, 수학 참고서 저자, 제일학원, 대일학원, 경일학원 등 대형 입시학원 창업자, 안동 도산서원 원장, 숙명학원(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1933년 3월 3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아버지 이근화(李根華, 1904 ~ ?)[6]와 어머니 영양 남씨(1905 ~ ?)[7]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사서오경 등 한학을 공부했다. 이후 영덕농업고등학교(現 경북 영덕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6개월 다닌 후 자퇴하였다. 이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물리학과서울대학교 전체 차석, 물리학과 수석으로 입학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에는 미국 유타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하여 통계물리학 (부전공 전산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수학 학원 강사 및 수학 참고서 저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이지흠이란 이름으로 대입 수학 참고서들을 써냈는데 특히 '수학의 강의', '입시 수학의 분석 연구' 등의 수학 참고서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수학 참고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당시 영어 스타 강사이자 성문영어 이전 대한민국 영어 참고서의 절대지존이었던 안현필이 세운 학원이자 50~60년대 대한민국 최대의 입시학원 EMI 학원에서 스타 강사가 되었다.

이후 수학 스타 강사로서의 명성으로 EMI 학원에서 독립해서 196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제일학원, 대일학원을 세웠고, 단기간에 성공했다. 제일학원과 대일학원은 설립한지 1년이 안되어 자리잡았고, 충분한 돈을 마련한 그는 학원 운영을 공동창업자들에게 맡기고 1966년 염원했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제일학원과 대일학원, 경일학원이 크게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경영을 맡겼던 이들이 거의 다 가져갔고, 이용태 본인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느라 한국에서 학원이 그렇게 크게 잘나가는지 알지 못하고 큰 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8]

또한 유학 가기 전 이화여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유타 대학교에서 통계물리학 (부전공 전산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처음 접하게 된 컴퓨터를 보고 이것이 미래 사회와 산업을 좌우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1980년, 삼보컴퓨터청계천에서 설립하여 대한민국 1세대 벤처기업가가 되었다. 그가 삼보컴퓨터를 창업하여 사업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는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을 위해 60년대의 경공업, 70년대의 중화학 공업을 넘어 첨단 전자, 컴퓨터, 반도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데이터통신망부터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 적임자들을 섭외했는데, 그 중 이용태는 우선 순위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나라의 전자, 반도체, 통신 관련 산업을 담당하고 있던 오명 체신부 차관이 직접 이용태를 찾아와 부탁했다고 한다. 오명 차관은 IBM의 손에 맡기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데이터망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적임자가 이용태라고 생각했던 것. 이용태는 처음에는 사업 때문에 바빠서 거절했는데, 결국 데이콤의 사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한국 최초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회사인 두루넷, 삐삐 서비스 회사 나래이동통신을 설립했다.

2005년, 두루넷 관련 부실이 커지면서 삼보컴퓨터가 부도 처리되었고 이후 2012년 차남인 이홍선이 삼보컴퓨터를 인수하여 경영 중이다.

2016년, 2005년 삼보컴퓨터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지게 된 채무와 이자 150억원가량을 감당하지 못해 개인 파산을 신청하였다.

3. 여담

  • 이용태 전 회장은 재령 이씨 영해파-청계공파의 18대 종손으로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운 사람인 점은 흥미로운 점. 태생이 종손인 만큼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유림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참고로 부인도 퇴계 이황 집안의 종녀이다. 동서이자 삼보컴퓨터, 두루넷, 나래이동통신 CEO였던 김종길씨는 학봉 김성일 집안의 종손이다.)

[1] #. 본인의 족보에는 영해파(寧海派)-청계공파(淸溪公派) 28세 흠(欽)자 항렬을 써서 문흠(文欽)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용태(龍兌)는 보명(譜名) 옆에 괄호를 쳐서 병기해 놨고, 아내의 족보에도 성명이 이문흠(李文欽)이라고 기재되어 있다.[2] 재령이씨영해파보 권2 1쪽에는 1932년생으로 등재돼 있다.[3] #. 인근의 오촌리와 함께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4] 경상북도는 1988년까지 대부분의 군에서 읍면의 하위 행정단위로 동을 썼다.[5] 컴퓨터과학 부전공[6] 자는 석규(錫圭).[7] 남오진(南五鎭)의 딸이다.[8] 제일학원은 1979년 수도권인구재배치 기본 계획에 따라 재수학원을 4대문 밖으로 이전하라는 정부의 방침이 내려졌을 때, 동대문구 제기동으로 이전했다가 1990년대 고려학원에 인수되어 비타에듀로 이어졌고, 대일학원-경일학원[9]은 1979년 서울역으로 이전했다가 90년대 후반 강남대일학원을 운영한 손주은에 의해 메가스터디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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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일학원은 단과반, 경일학원 종합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