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1.1. (기록상) 조선 최초의 영세 가톨릭 신자
이름 | 이승훈(李承薰)[1] |
생몰년도 | 1756~1801 |
직업 | 조선 후기의 관리로 천주교 신자 |
출생지 | 인천 장수동 출생[2] |
1784년 조선인 최초로[3] 영세를 받아와 천주교 전파에 나섰다. 세례명은 베드로.
아이러니 하지만 세례명인 베드로처럼 3번을 배교했다가 다시 믿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천주교도라는 걸 알고 아들이 믿느니 내가 죽겠다고 칼을 들자, 울며불며 아버님이 종교보다 소중하니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하여 성경과 십자가 등의 성물(聖物)을 불태웠으나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다시 천주교를 믿었다.
대조적으로 사촌이던 이벽 세례자 요한(1754~1786)도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이승훈과 달리 천주교를 못 버린다고 하자 분노한 아버지가 자살하겠다고 하자 그도 부랴부랴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하였으나[4] 오래 안 가 33살 나이로 요절했다.[5]
그러나 제사를 거부하자, "제사는 아버지를 신으로 믿는 게 아니라 조상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것뿐"이라고 또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나서면서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욕도 먹곤 했다.
정작 신유박해 때는 물러서지 않고 천주교인으로서 죽었다. 정약용 가문과도 친인척 관계였으며 천주교인이다가 신유박해 때 죽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6]와 마지막을 같이 보냈다. 다만, 마지막 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한 것인지 아니면 정쟁에 휘말려서 처형된 것인지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관계로 최근 추진중인 125위 시복시성 운동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1] 평창 이씨라고 한다.[2] 그의 무덤 역시 출생지인 장수동에 있다. 정확히는 장수배수지 뒤편 거머리산 기슭에 있다. '반주골'이라고 불리는 이 묘역에는 이승훈과 그의 아들 중 두 명(장남 이택규, 3남 이신규 마티아)의 묘가 있다. 이 중 3남 이신규 마티아는 병인박해 때 체포돼 순교했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이승훈 묘역 성역화 사업을 준비 중이다.[3]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노예로 잡혀간 이들도 당시 일본에 와 있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으며, 그 이름들도 일부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교회의 시작은, 조선에서 세례를 배푼 이승훈 베드로로 봐야 하므로, 흔히 최초의 한국인 신자로 여겨지는 것이다.[4] 버리는 방법은 "나는 천주쟁이였으나 이젠 아니다"라는 글을 써서 붙이고 일절 기도 모임에 나가지 않는 방법이었다고 한다.[5] 다만 이벽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페스트로 죽었다는 설에서, 아버지 이부만이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정말 자살해버려 불효자로서 집안과 일가 모두에게 절연당해 죄책감 끝에 술에 매달려 폐인이 되어 자살했다는 주장(90년대 소설 목민심서에선 이게 나왔다), 집안에서 몰래 죽였다는 주장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6]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 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