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이순정(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fff> 이순정 Lee Soon-jung | |
<colbgcolor=#ef0010> 출생 | 1910년 8월 8일 |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백학리 | |
사망 | 2010년 5월 12일 (향년 99세) |
부모 | 아버지 이임근 |
형제자매 | 1남 4녀 중 둘째 |
배우자 | 박인천 |
자녀 | 장남 박성용 장녀 박경애 차남 박정구 차녀 박강자 삼남 박삼구 사남 박찬구 삼녀 박현주 오남 박종구 |
[clearfix]
1. 개요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박인천 초대 회장의 부인. 형제간의 화합과 동업자 집안간의 화합에 큰 역할을 맡아, 회사가 국내 유수의 대기업으로 커나가는데 공헌한 바가 크다고 한다.2. 생애
“너희 어머니가 정말 고생이 많다. 한 끼에 스무 명, 서른 명이 먹을 밥을 하는 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눈에 안 띄게 나를 뒷바라지하느라고 갖은 애를 다 썼다. 오늘날 회사가 이만큼 커진 것은 너희 어머니 공이 반이다. 너희들은 그걸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 박인천 회장이 자녀들에게 했던 말[1]
- 박인천 회장이 자녀들에게 했던 말[1]
1910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나 1929년 9세 연상의 금호 박인천 창업주와 결혼했다.
광주고속 초창기 시절부터 회사 직원들의 식사를 직접 챙기며 내조했으며, 1962년부터 현재까지 대한적십자사 광주ㆍ전남지부 활동을 통해 적십자 봉사회의 육성과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또한 1987년 선행화장학회, 1997년 장애인장학회, 2005년 어머니장학회 등을 설립해 해마다 1억여 원가량의 학비를 지원해 왔다.[2]
특히 불교계에서 찬사를 보내는 분이기도 한데, 대창운수[3], 광산제재소(목재기업) 일가와 더불어 60년대 ~ 80년대 광주 지역의 불사(佛事) 거의 대부분을 도맡다시피 했던 데서 연유.
1991년 대한적십자사 봉사장 은장, 1997년 무등여성대상, 2002년 대한적십자사 박애장 금장 등을 수상했으며 2006년에는 충효예 실천운동 광주시연합회로부터 '빛고을 인륜대상'을 수상하였다.
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금호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기타
- 본인 소생이 아닌 자식(장남, 5남)들에게도 정성을 들였다. 서울에 가면 무조건 큰 아들(박성용) 집에 가서 머무름으로써, 금호가 2세들이 집안 대소사를 논하려면 큰 형 댁으로 모일 수밖에 없게끔 했다는 후문. 이렇게 집안 단합에 힘 쓴 덕분에, 큰 며느리(미국인, IBRD 부총재 딸)가 시어머니에게, 칼텍스[4] 관련 일을 하게 된 친정 아버지를 돕고자, 사업 이야기[5]를 어렵지 않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집안 분위기가 부드러웠다고 한다.
- 이렇다 할 지원없이 어렵게 공부하던[6] 5남(박종구)이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자금 지원을 해주고, "네 아버지 자식인데, 당연히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박인천 회장 사후 다른 자녀들이 호적에 올리기를 거부한 5남이 호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이순정 여사였다는 후문이다.[7][8]
- 금호그룹의 모태회사였던 광주여객에 자금을 공동 출자한 큰 사위 배영환(裵英煥)이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배당금을 요구하자, 버스 50대와 종잣돈을 마련해 1973년 삼화교통(삼화고속)이 독립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 출처 : 중앙일보, <삶과 추억> "박인천 금호아시아나 창업회장 부인 이순정 여사 별세"[2] 출처 : 매일경제신문, "故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 부인 이순정 여사 별세"[3] 광주광역시의 유명 버스 회사. 지금도 성업 중이다.[4] 우리나라 GS칼텍스에 지분을 행사하고 있는 거대 석유회사 셰브런의 브랜드. 셰브런은 당시 Gulf Oil이라는 브랜드로 호남정유(GS칼텍스)와 협업중이었다.[5] 금호그룹에서 이 회사가 새로 시추, 정제한 석유를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건이었다고 한다. 새로 채굴하게 된 유전은 양이 풍부했지만, 유황 성분이 많아 정유과정을 필히 보강해야 쓸만한 기름이 나왔기 때문에 초반부터 안정된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던 것. 아무튼 운수업을 하는 금호에서 해당 제품을 구입하게 된 즈음에, 호남정유의 관련 시설 역시 보강이 이뤄졌다고.[6] 대단한 수재였다고 한다.[7] 5남은 광주 지역에서 미인으로 유명했던 찻집 주인에게서 낳은 아들인데, 창업주가 늦은 나이에 취한 여성이라 관계가 오래가지 못하고 서울로 이주해 살던 중 출산했다고 한다. 다만 이 여성은 창업주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키웠는데, 공부를 잘 하는 아들이 대학 진학하게 되자, 이순정 여사를 찾아와, "고등학교 때까지는 어떻게든 키웠는데, 대학 공부는 제 힘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서울에다 건물을 마련해주시면, 그곳에 세를 놓아 아이를 부양하겠습니다."라 말하며 도움을 요청했고, 이순정 여사가 흔쾌히 서울에 5층 건물을 마련해주었다고.[8] 5남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차남인 박정구와 함께 서울로 가서 아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걸음걸이와 용모가 남편인 박인천과 매우 흡사한 걸 보며 확신하게 됐다고